안시연은 얼굴을 붉혔다.‘변태 아니야?’이틀 동안 그녀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얼굴을 붉힌 이 순간, 연정훈은 매우 만족했다.그는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똑바로 말해.”만약 자신이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로 이 조명이 밝게 비추는 곳에서 자신의 옷을 벗길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그녀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후 그녀는 사실을 절반만 말하기로 결정했다.“엄마가 때렸어요.”연정훈은 이때까지 안시연의 부모님이 전부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 대답은 그의 예상밖에 있었다.“엄마라고?”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가족생활은 그녀를 항상 우울하고 열등하게 만들었다.“엄마는 항상 밖에 나가 있었는데 갑자기 돌아왔어요.”“왜 때렸는데?”안시연은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당신 때문이에요.”연정훈이 말이 없자 안시연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는 제가 당신 차에서 내리는 걸 봤어요. 당신을 알아봤고 제가 당신의 애인을 하고 있다는 것도 물론 알게 되었죠.”그녀는 처음으로 이렇게 공개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인정했다.연정훈은 미간을 찡그렸다.“때리고 나서는?”안시연이 대답했다.“저에게 당신과 관계를 끊으라고 했어요.”연정훈은 다시 침묵했다.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래서, 네 결정은?”안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제가 결정할 권리가 있나요?”그녀는 자신의 경지를 비웃는 듯 피식 웃었다.“저는 당신이 산 물건 아닌가요? 끊을지 계속할지, 당신이 정하는 거잖아요.”연정훈은 ‘사다’라는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말 뒤에 숨은 의미는 또 그를 조금 기쁘게 했다.‘그래, 안시연은 내 것이야. 어떻게 하든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결정하는 거야.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그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든 말든, 그녀는 나를 떠날 수 없어. 다른 생각들은 모두 쓸모없는 걱정뿐이야.’“이리 와.”그가
연정훈의 한 마디 도발에 안시연은 화가 나 몸을 꽉 조였다.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연정훈은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제압당할 뻔했다.항상 말 잘 듣던 집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내보냈다. 제대로 교육하지 않으면 정말로 그의 얼굴을 긁어버릴지도 모른다.연정훈은 그녀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눕혔다.안시연은 비명이 끊기지 않았고 테이블 전체가 그들의 움직임에 흔들릴 정도였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좀 조용히 해, 이웃들이 네 소리에 놀라겠어.”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고 가끔 숨 막히는 느낌도 들어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그의 팔을 세게 물었다.연정훈은 낮게 신음하며 힘을 약간 줄여 그녀에게 숨 돌릴 틈을 주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안시연은 조금 더 버텨보려 했으나 결국 굴복하고 말았고 그에게 빌었다.연정훈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에 입맞춤하고 또 그녀의 얼굴을 돌려 상체가 크게 비틀어진 자세로 그녀와 키스했다.안시연은 이대로 그의 손아귀에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세상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네 엄마 일은 내가 해결할게.”안시연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녀는 촉촉한 눈을 가까스로 뜨며 테이블 가장자리를 꽉 잡고 애써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찾지 마세요...”“그럼, 네 엄마 말 듣고 나랑 헤어지려고?”안시연은 그 말속 경고의 뜻을 알아듣고 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연 대표님께서 뭐든 가능하시다면, 다른 일을 도와주시면 좋겠어요.”연정훈은 가볍게 웃었다.‘역시 똑똑해졌어.’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다시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안시연은 몸이 굳어 있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견디기 어려웠다.“무슨 일을 도와줄까?”안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조기 승진하고 싶어요.”연정훈은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대답했다.“다
안시연은 일어난 후 한 번도 연정훈에게 좋은 태도로 대한 적이 없었다.어젯밤의 모든 일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나쁜 사람...’전에 그를 매너 있는 신사와 연결 지은 자신의 시력에 문제가 있었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는 정말 꼬리를 감추고 있는 늑대와 다름이 없었다.그녀가 토라져 연정훈과 말을 걸지 않자 그는 오히려 더 안심되었다.적어도 그녀가 애써 괜찮은 척, 화가 없는 척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게다가, 그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그는 한 번도 그녀의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탕! 탕!그녀는 면 두 그릇을 작지 않은 힘으로 테이블 위에 올렸다.연정훈은 신문을 내려놓고 한 번 쳐다보더니 그저 웃고 싶었다.‘화가 단단히 났네.’그녀는 다양한 아침 메뉴 대신 평범해 보이는 면 두 그릇만 만들었고, 자신의 그릇에만 계란후라이를 하나 올렸다.‘화는 내는 방식이 왜 이따위야...’그의 동작이 잠시 멈추자 안시연은 그가 싫어하는 줄 알고 머리도 들지 않고 말했다.“오늘 몸이 안 좋아서 아침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드시기 싫으면 회사에서 드세요.”연정훈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네 몸은 나 때문에 그런 거잖아, 내가 책임져야지. 네가 직접 만든 아침을 트집 잡을 정도로 양심이 없는 건 아니야.”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를 악물며 그가 머리를 숙여 면을 먹는 동안 그를 한 눈 노려보았다.그리고 연정훈이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깔고 계란후라이를 입에 쑤셔 넣었다.오늘의 계란후라이는 반숙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졌고, 노른자가 입에서 톡 터지며 담백한 맛이 입속을 꽉 채우자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연정훈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았다.그때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귀 뒤에서 떨어져 그릇 안에 닿을 것만 같았다.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그러자 안시연은 밥을 먹던 동작을 멈췄다.따스한 아침 햇살은 그녀의 오른쪽 얼굴을 뜨겁게 비
“제가 정식으로 채용되었다고요?” 안시연은 아직 숨이 가쁜 상태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김 주임은 이 팀에 새로 온 지 얼마 안 되었고 주름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너는 신입 중 기초가 제일 탄탄해. 마침, 우리 팀에 인력도 부족하고 너 같은 열심히 하는 애가 계속 보조로 있는 건 너무 아까워.” 안시연은 반신반의하고 있었고, 어젯밤 그런 일을 하고 있을 때 흐릿한 정신으로 연정훈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정말로 약속을 지킨 건가?’그녀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감이 안 잡혔다. 며칠 전이라면 그녀는 바보같이 웃으며 믿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그녀의 몸만 사랑할 뿐, 돈과 관심만 주면 되었지, 굳이 그녀를 위해 원칙을 깨뜨릴 이유는 없었다. “인사팀에는 이미 통보했으니, 이제 정식 직원용 물품을 받아 가면 돼.”김 주임이 말했다. 안시연은 영문을 몰랐으나 그렇다고 그와 따질 수는 없었다.‘정말로 내 실력 때문인 건지, 아니면 그의 한마디 때문인 건지 알 수가 없네.’ “감사합니다, 김 주임님.” 그녀는 어리둥절한 채로 나갔다. 재무팀의 사람들은 이전 기획팀과는 다르게 모두 안시연의 전문성에 대해 인정했기 때문에 그녀의 조기 승진에 모두 만족하는 태도였다. 장가희는 축하 파티를 열자고 계속 졸랐다. “오늘은 됐어요. 신입분들 모두 정식 채용되고 나서 함께 축하 파티를 열어요.” 모두 그녀의 배려를 높이 평가했고 장가희는 그녀에게 엄지척했다. 안시연은 자기 자리에서 오랫동안 머리가 텅 빈 채로 앉아 있었다. 주지혁은 해외에서 조씨 가문의 해외 사업을 관리하고 있어 단기간 내에 그녀를 귀찮게 할 일은 없었다. 본래 그녀는 1년이 지나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갑자기 나타난 엄마와 연정훈의 알 수 없는 태도까지 전부 불안정 요소였기에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김 주임이 다시 그녀를 호출했다. “이상하네, 김 주임님이 또
안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방을 나섰다.양혁수는 자리에 남아 김지철 주임에게 말했다.“그러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별말씀을요.”양혁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가족들 몰래 찾아온 데다 상사한테 보고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김지철은 바로 눈치를 챘다.“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입 아주 무겁습니다.”양혁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고 안시연을 찾으러 재무팀으로 이동했다.안시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장가희가 말을 걸어왔는데 안시연의 뒤를 확인하고 바로 두 눈을 반짝였다.안시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양혁수는 방금까지 얌전히 지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재무팀으로 돌아오자마자 또 잔머리를 굴렸다.갑자기 전체 부서 직원에게 고가의 커피세트를 쏘더니 또 각종 선물을 돌렸고, 결국 안시연의 옆자리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선배님.”안시연이 몰래 인상을 팍 쓰다가 다시 표정을 풀고 양혁수를 바라봤다.“네, 무슨 일이죠?”양혁수는 핸드폰을 안시연에게 넘겼다.슬쩍 훑어보니 양지원이 양혁수가 가업을 이어받는 걸 허락할 거라는 내용이었다.‘그래서 뭐 어쩌라고?’“난 이제 왕위를 상속받을 사람이야. 상속받기 전 직장인 생활을 한번 체험해 보는 거지.”“...”“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지만.”양혁수는 다리를 쭉 뻗어 바로 안시연의 옆으로 붙더니 작게 속삭였다.안시연은 이어질 말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데 양혁수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당신이 마음에 들거든.”안시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휙 돌렸다.양혁수는 계속해서 안시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연정훈은 내가 여기 있는 걸 몰라.”안시연은 입만 벙긋거리며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했다.“앞으로는 밤엔 연정훈이랑 놀고, 낮엔 나랑 같이 노는 거야. 어때?”“...”안시연은 한참이나 뇌가 정지된 것 같았다. 크게 믿기지는 않았지만, 왠지 또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이번에도 느낌표가 담긴 답장을, 연정훈은 한참이나 들여다봤다.연정훈이 인상을 팍 찌푸리자 업무 보고 중이던 비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내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연, 연 대표님?”연정훈이 고개를 들고 비서를 쳐다봤고 비서는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계속하세요.”“네.”연정훈의 시선은 다시 핸드폰으로 향했고, 따로 답장은 하지 않았다. 안시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릴 생각이었다.다른 한편, 데이터 일지를 받아온 안시연은 대화창을 굳이 확인해 보지 않고 업무를 이어갔다.옆자리 양혁수는 어느새 감자칩 한 봉지를 뜯었다.안시연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봤다.마음을 굳게 먹고 양혁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려는데 양혁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렇게 퇴근하고 싶어?”“퇴근하기 싫은 사람도 있나요?”양혁수가 혀를 쯧 찼다.“퇴근해서 좋은 게 뭐 있다고. 아마 연정훈이나 만나겠지. 연정훈도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차라리...”양혁수는 뒷말을 길게 늘이자, 안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내가 더 재밌을 텐데.’양혁수가 바로 뒷말을 이어 했다.“차라리 나랑 같이 놀아.”“괜찮습니다.”안시연이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수중의 업무나 완성하시죠.”양혁수가 헛웃음을 지었다.“모범 직원 납셨네.”마지막 감탄사를 남기고 양혁수는 감자칩을 내려놓았다. 옆자리 직원들이 모두 자리를 뜨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 양혁수는 안시연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어. 있다가 사람 시켜서 하면 되니까. 그냥 내 옆자리에서 저녁 먹고 면허증 필기시험 준비나 해.”‘필기시험 준비 중인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양혁수를 바라보는 안시연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양혁수 씨 할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지금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하는 거잖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 테고.”양혁수가 입을 삐죽였다.“연정훈에게 야근해야 한다고 가지 마.”“...”솔직히 안시연은 조금 솔깃하긴 했다
진수빈은 빠르게 과학기술사로 향했으나 재무팀은 텅 비어있었다.‘대체...’‘안시연 씨가 연정훈 대표에게 거짓말한 건 아니겠지?’그리고 진수빈은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전해 들은 연정훈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안시연이 감히 이상 행동을 벌이지는 않을거라 생각했다. 안시연의 성격상 화를 내도 몰래 수작을 피우거나 그러지는 않았다.연정훈은 진수빈에게 돌아오라고 지시했고, 다시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양혁수는 재무팀 건물에서 텅 빈 회의실을 찾아냈고 안시연은 바로 그 회의실에서 진수성찬을 먹고 있었다.사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수신자를 확인한 안시연은 조금 망설이다가 회의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양혁수는 이런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여보세요?”“어디야?”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은 입가를 쓸어내리며 대답했다.“회사요.”“...”연정훈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진수빈이 회사로 찾아갔는데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더라고.”안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양혁수는 촉이 참 좋았다....“연정훈이 사람을 시켜서 우리를 찾아오면 어떡해?”“선배, 우리 위층으로 움직일까?”...“지금 다른 사무실에 있어요. 이쪽이 더 넓거든요.”안시연은 바로 동영상을 찍어 연정훈에게 보냈다.연정훈은 동영상을 확인하고 조금 의심을 덜었다.“저녁은 먹었어?”“아니요.”안시연이 여전히 입가를 매만지며 대답했다.“진수빈을 시켜...”“배달시키면 돼요.”안시연이 빠르게 연정훈의 호의를 거절하자 연정훈은 또 할 말을 잃었다.“그래.”연정훈은 안시연과 다투지도 않고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통화는 안시연 쪽에서 먼저 끊었고, 연정훈은 끊어진 통화를 물끄러미 무표정으로 쳐다봤다.안시연이 적당한 자리로 물러나,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도 하지 않으니 연정훈의 소원대로 된 셈이었다.그런데 연정훈은 기쁘기는커녕 되려
검은색 벤틀리는 안시연과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고 상향등을 하향등으로 조절했다.이어 뒷좌석에서 내린 연정훈은 안시연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고, 안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몰래 뒤를 돌아보았고 다행히 출구에 양혁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듯한 생각에 긴 한숨이 나갔다.다시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은 어느새 눈앞까지 걸어왔고 안시연을 침을 꿀꺽 삼켰다.“왜 또 온 거에요?”연정훈의 얼굴은 너무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은 편도 아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차에 타.”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을 지나쳐 차로 향하는데, 어깨에 걸친 가방이 흘러내렸고 연정훈이 자연스레 잡아챘다.안시연이 다시 가방을 고쳐 매려는데 연정훈은 이미 가방을 가져가 버렸다.안시연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연정훈은 덤덤하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차에 타.”“네.”안시연은 계속 연정훈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연정훈에게 정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그래서 뒷좌석에 올라탄 뒤로 창문 쪽에 몸을 딱 붙여 연정훈과 거리를 유지했다.차 문이 닫히고 연정훈은 안시연의 가방을 내려놓았다. 둘 사이 침묵이 이어졌다.“운전해.”차는 천천히 빌딩을 벗어났다.안시연은 하루 종일 피곤했던 터라 잠이 솔솔 몰려왔다.연정훈은 차 미러로 그녀를 훔쳐보며 생각했다.‘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 피곤해하는 거야?’차는 침묵 속에서 달려 벚꽃동에 도착했다.안시연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안시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안시연은 눈을 비비더니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온몸이 나른한 상태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연정훈은 차에 앉아 옆에 놓인 케이크를 가만히 쳐다봤다.‘차 타고 가는 동안 발견하지 못한 건가?’안시연은 너무 졸려 빨리 씻고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곧장 욕실로 들어간 안시연은 혹시나 해서 문도 잠갔다.연정훈이 집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욕실에서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