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방을 나섰다.양혁수는 자리에 남아 김지철 주임에게 말했다.“그러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별말씀을요.”양혁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이었다.“가족들 몰래 찾아온 데다 상사한테 보고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김지철은 바로 눈치를 챘다.“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입 아주 무겁습니다.”양혁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고 안시연을 찾으러 재무팀으로 이동했다.안시연이 자리에 앉자마자 장가희가 말을 걸어왔는데 안시연의 뒤를 확인하고 바로 두 눈을 반짝였다.안시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무슨 상황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양혁수는 방금까지 얌전히 지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재무팀으로 돌아오자마자 또 잔머리를 굴렸다.갑자기 전체 부서 직원에게 고가의 커피세트를 쏘더니 또 각종 선물을 돌렸고, 결국 안시연의 옆자리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선배님.”안시연이 몰래 인상을 팍 쓰다가 다시 표정을 풀고 양혁수를 바라봤다.“네, 무슨 일이죠?”양혁수는 핸드폰을 안시연에게 넘겼다.슬쩍 훑어보니 양지원이 양혁수가 가업을 이어받는 걸 허락할 거라는 내용이었다.‘그래서 뭐 어쩌라고?’“난 이제 왕위를 상속받을 사람이야. 상속받기 전 직장인 생활을 한번 체험해 보는 거지.”“...”“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지만.”양혁수는 다리를 쭉 뻗어 바로 안시연의 옆으로 붙더니 작게 속삭였다.안시연은 이어질 말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데 양혁수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당신이 마음에 들거든.”안시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휙 돌렸다.양혁수는 계속해서 안시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연정훈은 내가 여기 있는 걸 몰라.”안시연은 입만 벙긋거리며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했다.“앞으로는 밤엔 연정훈이랑 놀고, 낮엔 나랑 같이 노는 거야. 어때?”“...”안시연은 한참이나 뇌가 정지된 것 같았다. 크게 믿기지는 않았지만, 왠지 또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이번에도 느낌표가 담긴 답장을, 연정훈은 한참이나 들여다봤다.연정훈이 인상을 팍 찌푸리자 업무 보고 중이던 비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내가 말실수라도 한 건가?’“연, 연 대표님?”연정훈이 고개를 들고 비서를 쳐다봤고 비서는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계속하세요.”“네.”연정훈의 시선은 다시 핸드폰으로 향했고, 따로 답장은 하지 않았다. 안시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릴 생각이었다.다른 한편, 데이터 일지를 받아온 안시연은 대화창을 굳이 확인해 보지 않고 업무를 이어갔다.옆자리 양혁수는 어느새 감자칩 한 봉지를 뜯었다.안시연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봤다.마음을 굳게 먹고 양혁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려는데 양혁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렇게 퇴근하고 싶어?”“퇴근하기 싫은 사람도 있나요?”양혁수가 혀를 쯧 찼다.“퇴근해서 좋은 게 뭐 있다고. 아마 연정훈이나 만나겠지. 연정훈도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차라리...”양혁수는 뒷말을 길게 늘이자, 안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내가 더 재밌을 텐데.’양혁수가 바로 뒷말을 이어 했다.“차라리 나랑 같이 놀아.”“괜찮습니다.”안시연이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수중의 업무나 완성하시죠.”양혁수가 헛웃음을 지었다.“모범 직원 납셨네.”마지막 감탄사를 남기고 양혁수는 감자칩을 내려놓았다. 옆자리 직원들이 모두 자리를 뜨고 나서야 몸을 일으킨 양혁수는 안시연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어. 있다가 사람 시켜서 하면 되니까. 그냥 내 옆자리에서 저녁 먹고 면허증 필기시험 준비나 해.”‘필기시험 준비 중인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양혁수를 바라보는 안시연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양혁수 씨 할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지금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하는 거잖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닐 테고.”양혁수가 입을 삐죽였다.“연정훈에게 야근해야 한다고 가지 마.”“...”솔직히 안시연은 조금 솔깃하긴 했다
진수빈은 빠르게 과학기술사로 향했으나 재무팀은 텅 비어있었다.‘대체...’‘안시연 씨가 연정훈 대표에게 거짓말한 건 아니겠지?’그리고 진수빈은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설명했다.전해 들은 연정훈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안시연이 감히 이상 행동을 벌이지는 않을거라 생각했다. 안시연의 성격상 화를 내도 몰래 수작을 피우거나 그러지는 않았다.연정훈은 진수빈에게 돌아오라고 지시했고, 다시 안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양혁수는 재무팀 건물에서 텅 빈 회의실을 찾아냈고 안시연은 바로 그 회의실에서 진수성찬을 먹고 있었다.사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수신자를 확인한 안시연은 조금 망설이다가 회의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양혁수는 이런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여보세요?”“어디야?”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은 입가를 쓸어내리며 대답했다.“회사요.”“...”연정훈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진수빈이 회사로 찾아갔는데 사무실에 사람이 없다더라고.”안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양혁수는 촉이 참 좋았다....“연정훈이 사람을 시켜서 우리를 찾아오면 어떡해?”“선배, 우리 위층으로 움직일까?”...“지금 다른 사무실에 있어요. 이쪽이 더 넓거든요.”안시연은 바로 동영상을 찍어 연정훈에게 보냈다.연정훈은 동영상을 확인하고 조금 의심을 덜었다.“저녁은 먹었어?”“아니요.”안시연이 여전히 입가를 매만지며 대답했다.“진수빈을 시켜...”“배달시키면 돼요.”안시연이 빠르게 연정훈의 호의를 거절하자 연정훈은 또 할 말을 잃었다.“그래.”연정훈은 안시연과 다투지도 않고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통화는 안시연 쪽에서 먼저 끊었고, 연정훈은 끊어진 통화를 물끄러미 무표정으로 쳐다봤다.안시연이 적당한 자리로 물러나,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도 하지 않으니 연정훈의 소원대로 된 셈이었다.그런데 연정훈은 기쁘기는커녕 되려
검은색 벤틀리는 안시연과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고 상향등을 하향등으로 조절했다.이어 뒷좌석에서 내린 연정훈은 안시연을 향해 뚜벅뚜벅 걸었고, 안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몰래 뒤를 돌아보았고 다행히 출구에 양혁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듯한 생각에 긴 한숨이 나갔다.다시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은 어느새 눈앞까지 걸어왔고 안시연을 침을 꿀꺽 삼켰다.“왜 또 온 거에요?”연정훈의 얼굴은 너무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은 편도 아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차에 타.”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을 지나쳐 차로 향하는데, 어깨에 걸친 가방이 흘러내렸고 연정훈이 자연스레 잡아챘다.안시연이 다시 가방을 고쳐 매려는데 연정훈은 이미 가방을 가져가 버렸다.안시연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연정훈은 덤덤하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차에 타.”“네.”안시연은 계속 연정훈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연정훈에게 정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그래서 뒷좌석에 올라탄 뒤로 창문 쪽에 몸을 딱 붙여 연정훈과 거리를 유지했다.차 문이 닫히고 연정훈은 안시연의 가방을 내려놓았다. 둘 사이 침묵이 이어졌다.“운전해.”차는 천천히 빌딩을 벗어났다.안시연은 하루 종일 피곤했던 터라 잠이 솔솔 몰려왔다.연정훈은 차 미러로 그녀를 훔쳐보며 생각했다.‘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 피곤해하는 거야?’차는 침묵 속에서 달려 벚꽃동에 도착했다.안시연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안시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안시연은 눈을 비비더니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온몸이 나른한 상태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연정훈은 차에 앉아 옆에 놓인 케이크를 가만히 쳐다봤다.‘차 타고 가는 동안 발견하지 못한 건가?’안시연은 너무 졸려 빨리 씻고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곧장 욕실로 들어간 안시연은 혹시나 해서 문도 잠갔다.연정훈이 집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욕실에서
연정훈의 버릇은 모두 안시연에 길들여진게 맞았다.안시연은 마음이 약했고 연정훈을 좋아했다.그래서 침대 위 연정훈의 모든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그러니 연속으로 두 번씩이나 거절당한 연정훈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아침이 되고 두 사람은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아침은 진수빈이 가져다줬는데 안시연은 입맛에 아주 맞았다. 며칠 동안 천문 전시회 일로 너무 바빠 입맛이 없었는데, 이제 바쁜 고비를 모두 넘겼고 또 운전 연습하러 가야 하니 밥을 더 든든히 먹어야 했다.그녀는 밥 한 그릇에 구운 고등어를 깨끗이 발라 먹었다.집을 떠난 안시연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연정훈은 차에 앉아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안시연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지하철에 오른 안시연은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몸이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연정훈과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그 전날 밤 아플 정도로 무리시킨 연정훈이 미웠다.연정훈은 이제 안시연과 시선을 마주하지도 않았으며, 안시연은 자신이 침대 위의 장난감처럼 느껴졌다.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떨쳐낼 수 없었으며 연정훈에게서 반항하고 싶은 싹이 자라났다.연정훈은 아직 안시연이 질리지 않아 당분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안시연은 진작 “헤어짐”을 고했을 것이다.그러니 좀 더 버텨볼 생각이었다.안시연은 회사에 도착했지만 양혁수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오후 두 시가 넘어서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양혁수가 보였는데 알콜 향을 물씬 풍기는 모습이 출근이 아니라 휴가온 것 같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안시연은 양혁수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찌근거렸다.“선배.”양혁수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안시연은 자신이 마법이라도 부려 단숨에 양혁수를 제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양혁수에게 한 소리하려는데 양혁수가 무언가를 척 내밀었다.다이아몬드 목걸이.연정훈이 선물했던 목걸이였다.알아본 안시연이 잠시 멈칫했다.“선배 목걸이 돌려줄 테니 내 것도
안시연의 말이 끝나고 연정훈은 침묵으로 답했다.안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으나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잠시 눈이 마주치고, 연정훈이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그래, 자.”짧은 말을 남겨두고 연정훈은 몸을 돌려 다시 안시연을 쳐다보지 않았다.힘이 풀린 안시연은 화장대에서 내려와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그리고 얼마 뒤, 등 뒤의 이불이 들리고 연정훈이 옆자리에 누웠다.동상이몽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시가니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등 뒤로는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눈을 꼭 감았다.‘그래 빨리 자자!’안시연은 마음이 약한 사람인지라, 연정훈을 거절했다는 죄책감에 날밤을 새웠다.이튿날, 안시연이 아침을 차렸고 계란 프라이는 여전히 하나였다.연정훈은 안시연 앞접시에 놓인 계란 프라이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어제 계란이 마지막 하나였어요.”“오늘 이건?”“이건 구석에서 찾아낸 거예요.”“...”‘그래.’‘아주 좋아.’안시연은 연정훈이 어떤 마음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배불리 먹은 뒤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연속 세 번의 거절과 혼자여도 잘산다는 뉘앙스의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외출하는 길에 연정훈은 어제 사 온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콱 처박았다.진수빈이 놀라 움찔거렸다.오전 10시.안시연은 시험장에 도착했다.성실하게 준비했으니, 필기시험은 꽤 높은 점수로 통과할 수 있었다. 이어 기능 시험 준비를 했다.건물 밖으로 향하니 강사가 기능 시험 연습장으로 데려갔다. 연정훈이 찾아준 학원은 뭐든지 최고급이었고 뭐든지 술술 잘 풀렸다.연습장을 한번 빙 둘러보고 있는데 양혁수가 전화를 걸어왔다.“시험은 잘 봤어?”“네. 도착한 거예요? 목걸이 돌려줄게요.”“난 옆 서킷 관중석에 있어.”상대는 그 말만 남기고 쿨하게 통화를 종료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직접 그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목걸이에는 양씨 가문을 대표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절대
안시연은 멍하니 자리에 굳었다.“뭐라고요?”양혁수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거들먹거리며 말했다.“내 목걸이가 탐난다고 다른 거랑 바꾼 거 아니야?”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안시연이 다급하게 해명하려고 하자 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렇게 순진해?”?양혁수는 “순진한” 얼굴의 안시연을 보며 목걸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장난이야.”안시연은 어이가 없었으나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물건을 돌려줬으니 이만 가볼게요.”양혁수는 당연히 안시연을 순순히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안시연을 잡으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혁수야, 이 알파카 당장 출산할 것 같은데 데려가 키우려고?”양혁수가 고개를 돌리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키우고 싶은 사람 아무나 줘버려.”‘말이 되는 소리를 해.’‘알파카 엄마 아빠가 헤어졌다고 아이를 내가 키운다는 게 말이나 돼?’주변의 여러 도련님 모두 알파카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몇 번 만지다가 바로 가버렸다.알파카는 배가 볼록했고 이 더운 날 두꺼운 털을 뒤집어쓴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안시연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주인이 버린 거예요?”“못 봤어? 두 사람이 헤어지고 알파카만 남기고 떠났어.”양혁수의 대답에 안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너무 무책임했다.“출산이 임박한 것 같은데 동물 병원으로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누가...”양혁수가 찬물을 끼얹으려는데 슬퍼 보이는 안시연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선배가 키울래?”안시연이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난 키울 데가 없어요.”연정훈도 알파카를 받아줄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그럼, 그쪽이 키울래요?”안시연이 양혁수를 힐긋 바라봤다.양혁수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싫어. 귀찮아.”“다들 버리면 저 아이는 어떡해요?”“알아서 어떻게든 되겠지.”안시연이 한참 침묵했다.양혁수가 안시연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선배가 갖고 싶다면 동물 병원으로 대신 데려다줄 수는 있어.”“아이를 낳
연정훈의 질문에 부승원과 한우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이승우도 눈을 반짝였다.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건지, 연정훈이 여자에 관한 질문을 했다.이승우가 연정훈에게 바짝 붙으며 물었다.“안시연?”연정훈은 입을 꾹 다물고 반박하지 않았다.마른기침을 몇 번 하던 이승우는 두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네 말을 들어보면 대충 두 가지 답이 있다고 볼 수 있어.”연정훈은 간만에 이승우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그러자 이승우는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첫 번째, 큰 다툼을 벌이고 여자가 일방적으로 삐진 거야.”연정훈은 침묵했다.최근 안시연과 크게 다퉜다고 할만한 일은 없었다.강남 시티 그 일이 지나고 두 사람은 말다툼 한번 하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이 자신을 이해한 거로 생각했다. 강남 시티에서 한 말이 두 사람의 사이에 문제가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만약 안시연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결혼이라는 비현실적인 일은 다시 꺼내지 않을 것이다.“두 번째는?”이승우가 눈썹을 치켜세웠다.“두 번째 경우라면 상황이 좀 더 심각한 거야.”연정훈이 이승우를 힐긋 노렸다.이승우는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향해 물었다.“네 생각은 어때?”부승원은 늘 얼굴을 굳히고 말을 아꼈는데 입을 한번 열면 날카롭게 허를 찔렀다.“어릴 때 부승희가 밥때가 돼도 배고프지 않다고 하면, 엄마는 승희가 간식을 훔쳐먹은 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었어.”한우빈이 웃음을 터뜨렸다.“안시연이 그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던데?”“왜 아니라고 생각해?”이승우가 반박했다.“그렇게 예쁘고 젊은 여자가 다른 마음 품을 수도 있지.”“다른 마음을 먹지 않았다고 해도,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시를 했겠어.”“그래!”이승우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잘생기고 어린 남자가 주변에 쫙 널렸는데, 집에 돌아오면 서른이 되는 남자가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별로겠어?”“...”연정훈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도움을 구한 자신이 우스워졌다.정말 돈 주고 고생을 사서
연정훈이 말했다.“왜 나한테 그래? 저 사람한테 물어봐.”이승우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다시 양시연에게 물었다.“안 그래요?”‘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양시연은 이승우를 노려보았다.변백호는 자연스럽게 연정훈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제가 시연이를 대신해서 연 대표님께 사과드릴게요.”연정훈은 아주 쌀쌀맞게 말했다.“그쪽이 대신 사과를 한다고요?”“네.”이승우가 말했다.“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정훈이는 아내를 잃어버렸는데 그건 어떻게 갚으려고요?”변백호가 대답했다.“아내를 갚아줄 수는 없어도 아이는 노력할 수 있죠. 저랑 시연이가 3년 안으로 아이 둘을 낳으면 연 대표님을 친 아빠처럼 모시라고 할게요. 그러면 어떨까요?”이승우가 웃음을 터뜨렸다.‘오. 꽤 치는데?’이승우가 다시 반격하려는데 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변백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난 어떻게든 내 사람 다시 데리고 올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는 못 살아서.”“와우.”이승우는 몰래 부승원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우리 연 대표님 절대 지지 않아.’그러나 부승원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연정훈은 말만 할 뿐이지. 어떻게 다시 양시연을 찾아오겠어?’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고 몰래 연정훈을 살폈다.‘그건 댁 마음이고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야?’변백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소문으로만 듣던 연 대표님답네요.”“하지만...”변백호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람은 하나뿐인데 먼저 옆을 채간 사람이 임자 아니겠어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그건 저도 동의를 합니다.”그러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그때!문이 활짝 열리더니 반우희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시연 언니, 왜 아직도 안 내려와요?”그리고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이승우는 반우희를 발견하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우희
“결혼식?”연정훈은 그 단어를 곱씹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양시연을 바라보았다.“만난 지 1년 됐는데 벌써 결혼하려고요?”양시연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변백호가 먼저 한발 빨랐다.“1년이요?”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척하면서 양시연에게 물었다.“우리가 만난 지 1년 되었던가요?”“6개월이요!”“그러니까요.”변백호는 미소를 지은 채로 연정훈과의 대화를 이어갔다.“연 대표님은 나이가 저희보다 많아 보이는데 이미 결혼하신 건가요?”“...”양시연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상황을 몰래 지켜보던 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져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연정훈의 상대로 변백호는 아주 제격이었다.연정훈은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미혼입니다.”“조급하지는 않으세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려 감히 그쪽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변백호는 양시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저는 마음이 너무 급해지더라고요. 하루빨리 우리 시연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못 참겠어요.”양지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김세연은 죽상이 되었다.두 사람 사이 튀는 불꽃에 사람들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주시했다.이승우는 구경하러 들렀다가 마침 들리는 대화에 쯧쯧 혀를 찼다.‘우리 정훈이 불쌍하게 됐네.’그러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지 이승우는 웨이터를 불러 몰래 말을 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는 양지원에게 걸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래 연회장 세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 회장님을 비롯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양지원은 그제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발견하고 사람들과 아래층으로 향했다.그러다가 양지원은 연정훈을 따로 부르며 말했다.“정훈아, 어린 녀석들이 연애하게 내버려둬. 마침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겼다는데 넌 나랑 손 회장님 만나러 가자.”마치 연정훈이 양시연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처럼 들렸다.김세연이 참다못해 한마디 거들었다.“오늘
어머니?양시연은 속으로 변백호의 연기에 박수를 쳤다.변백호는 자신보다도 더 쉽게 엄마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얼굴을 살폈다.‘누가 더 뻔뻔한지 보자는 거지?’‘흐흐.’‘자, 여기 너보다 더 뻔뻔한 사람 등장이야.’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하지만 김세연은 제 아들을 잘 알았다. 연정훈은 ‘강강약약’인 사람으로 사건이 복잡해질수록 더 이성적으로 변했다.변백호는 아예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양지원은 양시연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시연이는 잠시 저기로 가서 앉아. 우리 백호 여기 앉혀야지.”누군가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역시 사위 아끼는 건 장모라고 벌써 딸은 찬밥 신세네요.”양지원이 더 활짝 미소를 지었다.변백호는 정장 차림이 아닌 편한 캐주얼 복장이었다. 검은색 선글라스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며 밝고 서글서글한 모습을 보였다.변백호의 등장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김세연도 몰래 손에 땀을 쥐며 연정훈에게 눈짓했다.‘아들, 큰일이야. 네 경쟁 상대가 많이 잘생긴걸?’“...”외모로 보았을 때 연정훈은 변백호에 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으면 연정훈은 더 진중하고 짙은 남자의 매력이 흘렀다. 마치 방금 원목 상자처럼 우아한 기풍을 풍겼다.그러나 사모님들은 연정훈을 자주 봐왔고, 하필 변백호는 뉴페이스이자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이다 보니 관심이 그쪽으로 더 쏠렸다.변백호는 가볍게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어머니가 저 앉으라는 데 빨리 일어나요.”양시연이 힐끗 노려보았다.젊은 커플의 풋풋한 사랑놀이에 사람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자 연정훈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김세연은 찻잔을 또 비웠다.그렇게 변백호가 자리를 차지했다.양시연이 다른 자리를 찾아가려는데 변백호가 양시연의 손을 휙 잡아 허리를 감싸더니 의자 손잡이에 앉혔다.“어디 가려고요? 여기 앉으면 되잖아요.”“...”커플 연기이고 뭐고 떠나서 양시연은 얼굴이 붉어졌다.‘지금 뭐 하
양지원의 행동은 연정훈의 선물을 무시하는 의미였다.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의아해했다.‘두 가문 사이가 좋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딸이 생기더니 두 가문 사이에 금이 간 거야?’김세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정말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었다.살면서 이렇게 창피한 적은 없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여전히 덤덤하게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다시 침착하게 제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오늘 지원 이모는 넘치는 선물을 받으셨을 텐데 제 선물은 시간이 되실 때 확인해 보셔도 괜찮아요.”“역시 우리 정훈이가 날 이렇게 생각해 준다니까.”양지원은 양시연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정훈이 네가 있으면 앞으로 시연이 부부가 경인에서 지내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아.”“...”연정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당연하죠.”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시연에게 물었다.“사귄 지는 얼마됐어요?”마치 친척이 아래 사람에게 물어보는 말투였다.양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6개월 좀 넘었어요.”“오늘 이 자리에 오면 한 번 만나봐야겠네요.”“그 친구 곧 도착한대.”양지원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아까 연락이 왔는데 연회장 앞까지 왔다고 하더라고.”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빤히 바라봤다.‘엄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그러나 양지원은 양시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엄마만 믿어.’“...”분위기는 살짝 어색하게 흘렀고 참석한 사람들은 꾸역꾸역 대화 주제를 돌려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방금까지 양지원은 연회장으로 가야 한다며 연정훈의 선물을 확인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또 미래 사위를 기다린다며 자리에 편히 앉아 있었다.그때 양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확인해 보니 연정훈이 보내온 메시지였다.[남자 친구가 좀 늦는 모양인데 재촉하지 그래요?]양시연은 그 내용을 읽고 헛웃음을 터뜨렸다.[그쪽이 무슨 상관이시죠?][나한테 세컨드가 되어달라면서요. 세컨드가 되기 전에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야죠.]양시연은 제 눈을 의
“엄마, ‘오빠’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양시연이 몰래 양지원에게 귀띔했다.그러자 양시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온 김에 모자를 한번 제대로 혼내주자고.”“...”김세연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 양시연이 연정훈을 오빠라고 부른다면 연정훈이 얼마나 미쳐 날뛸지가 눈에 선했다.‘그건 안되지!’잠시 고민하던 김세연은 체면이고 뭐고 상관없이 양지원을 향해 솔직하게 말했다.“오빠 동생 사이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 그러다가 내가 콱 물고 늘어져 사돈 하자고 매달리는 수가 있어. 네 딸을 내 며느리로 삼을 거라고!”“...”양지원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김세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아들을 생각해서 기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다른 사모님들도 김세연의 의도를 눈치채고 말을 거들었다.“그래요. 두 가문이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시연이랑 정훈이랑 맺어주면 되겠어요.”양시연은 덤덤한 얼굴이었다.그러자 양지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쉽게도 그러기엔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김세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날 겁주지 마!’‘내 아들이 당장 여기로 오고 있는데 무슨 꿍꿍이야!’“연 대표님, 이쪽입니다.”그때 문밖에서 웨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어 양지원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우리 시연이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거든요. 곧 날 잡을 것 같아요.”김세연은 김이 빠져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양지원의 말을 들은 제 아들이 굳은 얼굴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다 필요 없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다른 사모님들이 연정훈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무슨 일로 우리 대표님이 다 걸음하셨을까?”연정훈은 옷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클래식한 턱시도였지만 연정훈에게 알맞게 제작되어 우아하고 타고난 귀족 분위기를 풍겼다.연정훈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지원 이모 생일인데 제가 와야죠.”그리고 슬쩍 양시연을
김세연은 양지원의 딸이라면 양민아밖에 몰랐다. 최근 몇 해 동안 양민아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지만 과거 양민아에 대한 인상은 좋게 남아 있었다.그런데 양지원이 또 ‘새로운 딸’을 소개한다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양시연이 아래층에 있는 동안 사모님들은 이러쿵저러쿵 가십을 입에 올렸다. 누구 아들이 몰래 여자에게 스폰을 해주고, 누구 딸은 가난한 남자를 사랑해 가문에 난리가 났다고 했다.김세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다.“젊은 사람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우리 같은 가문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한다니. 그게 가당키나 해요?”다른 사모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양지원은 미소를 지은 채로 묵묵히 상황을 주시했다.“양 대표님, 아가씨가 도착했습니다.”직원이 다가와 양지원에게 속삭였다.양지원은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여기로 오라고 해요.”“네. 알겠습니다.”직원은 양시연을 위해 문을 열었다.큰 홀이다 보니 정문부터 사모님들이 모여 있는 자리까지 거리가 있었다.김세연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차를 마시다가 양지원에게 몰래 안시연이라는 불여우가 돌아왔다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두 눈을 의심했다.창가 자리라 햇빛에 눈이 부셨던 김세연은 손으로 해를 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시연은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그리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양지원을 향해 엄마라 불렀고 다른 사모님들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김세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다들 양지원에게 양녀가 하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생긴 또 다른 딸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러나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겉치레로 예쁘다는 칭찬만 늘려놨다.“자, 여기로 와서 앉아.”양지원은 양시연을 옆자리로 이끌었다.그러자 김세연은 입을 딱 벌렸고 어느새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그러나 김세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양지원은 양시연의 손을 만지며 김세연에
양씨 가문에서.양시연이 퇴근하자마자 양지원이 웃으며 오후의 해프닝을 이야기했다.양지원은 김세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연정훈이 겨우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또다시 너에게 빠질까 봐 걱정이라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지원은 소파에 기대 턱을 괴고 물었다.“연정훈을 때렸다고 들었어.”양시연은 야식을 먹으며 대답했다.“정훈 씨가 자초한 일이에요.”양시연의 이런 모습에 양지원은 매우 만족스러웠다.양지원은 이제야 자신의 딸답다는 생각에 오후에 김세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김세연은 또 양시연이 어떤 남자에게 의지하는 거로 의심하다니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밤 푹 자고 내일은 기운 차려야 해.”양지원은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알았다는 신호를 보이며 웃었다.며칠 동안 연정훈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아마 다친 걸 치료하느라 바쁜 듯했다.‘흥. 그래도 자존심은 있나 보네.’양시연은 방으로 돌아와 반우희에게 전화해서 아이 셋을 데리고 생일 파티에 오라고 부탁했다.반우희가 말했다.“내일 승주도 생일이에요!”양시연은 답했다.“잘됐네요. 애들 데리고 와서 함께 놀고 나중에 우리끼리 승주 생일 파티도 해요.”“좋아요!”통화를 끝낸 후 양시연은 꿀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손님이 오기 전에 반우희가 먼저 도착했다.아이들이 키가 조금씩 자랐지만, 여전히 양시연을 ‘누나’라고 부르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양씨 가문은 인원이 적다 보니 집안이 이렇게 맑고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 차니 공기마저 상쾌해지는 듯했다.양지원은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양혁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 녀석, 자기 엄마 생일인데도 돌아오지 않는다니.’양시연은 아이들과 어울리다 문득 양지원의 쓸쓸한 표정을 눈치챘다. 그녀는 조용히 양혁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양혁수는 드물게 즉시 답장을 보냈다.[왜 나 보고 싶어?]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엄마가 널 보고 싶어 해!]잠시 정적이 흐
혹시 몰라서 양시연은 사장에게 자신의 신상을 밝히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계단에서 김세연과 마주쳤을 때도 양시연은 여전히 태연했다.하지만 김세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했다.‘이게...’정오에는 연정훈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줄 알았는데 오후에 양시연을 만났다.양시연이 귀국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려는 찰나 혹시 연정훈의 새로운 여자도 양시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뭔가 이상했다.만약 정말 양시연이라면 연정훈이 자신에게 숨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예전엔 분명 같은 편이었다.김세연은 계단 위에서 발끝을 들고 몇 번이나 아래를 내려다봤다.“이모, 왜 그래요?”같이 온 조카딸 연희가 물었다.김세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 위층에 올라가 보자.”“좋아요.”아래층의 방에서 양시연은 유리창 너머로 위층을 잠깐 쳐다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물건이 많아 사장이 먼저 도감으로 보여주고 실물을 가져오기로 했다.“이걸로 할게요.”양시연은 핑크 다이아몬드로 된 플라밍고 모양 브로치를 골랐다.“네. 가져다드리겠습니다.”“네.”잠시 후 사장이 몇 가지 고급품을 가지고 내려왔지만, 양시연이 고른 브로치는 없었다.양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진 사장님, 제가 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니면 제가 볼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사장은 40대 중반의 여자였고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양시연이 양씨 가문의 집사로부터 소개받은 손님이었기에 사장은 양시연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런데도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저와 같은 제품을 고른 사람이 있네요.”사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2층을 지나왔는데 김세연 씨와 함께 온 아가씨가 한눈에 반해 잠깐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곧 다시 가져다드릴 겁니다.”하하.집안에서 귀염받다 보니 상대방이 당연히 양보해 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양시연은
“세상에!”“너 누구랑 싸운 거야?”연정훈은 식탁 옆에 앉아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을 준비를 했다.집에는 그와 김세연 단둘뿐이었고 김세연은 다급히 손을 뻗어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이건 긁힌 거지? 아니, 아니야. 이건 날카로운 걸로 베인 거 같은데!”김세연은 믿을 수 없었다. 감히 누가 연정훈의 얼굴에 이런 상처를 남겼는지 의문스러웠다.김세연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연정훈은 그녀를 식탁 쪽으로 살짝 밀었다.“엄마, 밥이나 드세요.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요.”김세연은 어이가 없었다.“뭐라는 거야. 엄마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이 멀쩡하던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 됐네!”그러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어떻게 된 거야. 어릴 때 말썽 피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네가 네 얼굴 얼마나 아끼는지 엄마가 알지 않니?”연정훈은 무심하게 국물을 떠주며 다시 말했다.“밥이나 드세요.”김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네 아버지 승진한 후로 명절 때나 겨우 집에 돌아오고 나 혼자 남겨졌잖니. 너도 집에 안 오고.”연정훈은 김세연을 한 번 보며 말했다.“그러면 엄마도 아버지 따라 세운으로 가시면 되잖아요.”“싫어. 그곳은 너무 황량해서 경인처럼 살기 좋은 데가 아니야.”“그러면 뭔가 방법을 생각해서 아버지를 신고해요. 그러면 강등돼서 다시 경인으로 오겠죠.”김세연은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찌르며 웃음을 터뜨렸다.“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예전 그대로 철없기야.”김세연은 진지하게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이 얼굴에 난 상처 혹시 여자한테 긁힌 거 아니야?”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반찬을 집어 들었다.“네.”김세연은 눈을 감고 가슴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속으로 외쳤다.‘세상에.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드디어 아들이 여자와 엮이기 시작한 것이다.몇 년 전 양시연이라는 아이가 떠나고 소현주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면서 김세연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