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다섯 시가 되고, 연정훈은 자동차 구매 매장에서 나와 시내로 운전했다.뒷좌석에는 자동차 구매 계약서가 놓여있었다.충동적으로 구매한 거라 아직도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불과 두 달 안으로 안시연은 연정훈 삶에서 꽤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안시연이 아무리 얼굴을 찡그리고 가시돋힌 말을 해도 그녀를 달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해가 지고 건조한 열기가 점점 가시고 있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이따금 두통이 찾아왔다. 최근 며칠 동안 업무량이 많았던데다 쉬는 날 수영하고 매장까지 다니며 찬 바람을 쐬었으니, 몸에 무리가 온 것 같았다.연정훈은 차를 나무 그늘에 대고 창문을 연 뒤 담배에 불을 붙였다.니코틴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예민했던 신경이 가라앉았다.그렇게 차에 앉아 조용한 산책길을 바라보고 있었다.안시연을 향한 관용은 자연스레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소현주는 임신 진단서를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씨, 우리 헤어져요.”“에릭이 프러포즈했거든요.”“당신은 내가 바라는 결혼 생활을 줄 수 없지만 그 사람은 해줄 수 있다고요!”그때의 연정훈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이상적인 일상을 보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연정훈에게는 자신의 인륜대사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할아버지는 이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연정훈에게 이렇게 말했다.“그 아이와 결혼하고 싶거늘 그렇게 하거라.”“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란다. 20년이 지나고 나한테 당차게 말할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때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이 상황에서 소현주는 연정훈에게 이렇게 말했다.“연정훈 씨, 난 당신을 기다려야 할 의무가 없어요.”기다려야 할 의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정훈이 그녀의 유일한 선택이지도 않았다.그렇다면 안시연은...소현주는 기다리지 못했지만, 안시연은 과연 기다릴 수 있을까?자신의 멍청한 생각에 연정훈은 헛웃음이 나왔다.고작 두 달을 같이 보내놓고 기다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는가?소현주와 함께했을 때에는 너무 어려 막연하게 결혼하고 싶었
알파카의 출산에 주인이 곁을 지켜야 한다니.안시연은 당황한 얼굴이었다.“난 새벽에 절대 일어나지 못해.”양혁수는 입구에서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상태로 말했다.“날 찾지 마.”안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연정훈이 옆에서 자고 있는데 어떻게 한밤중에 나올 수가 있겠는가?의사는 고민하는 두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두 분 다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정말 새벽 출산을 한다면 저희가 알아서 연락드리겠습니다.”안시연은 알파카가 새벽에 출산하지 않길 기도했다.수속을 마치고 알파카는 병원에 입원했으며 안시연은 알파카를 측은한 눈길로 살폈다.“안심해. 난 널 버리지 않을 테니까.”알파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그 얌전한 모습이 더 마음이 아팠다.안시연이 손을 뻗어 복슬복슬한 머리를 매만졌다.양혁수가 가까이 다가가 옆에 놓인 이름표를 읽었다.“조나비?”안시연이 그 소리에 코를 찡그렸다.“알파카 목에 걸려있던 이름표예요.”양혁수가 코웃음을 쳤다.“정말 구린 이름이네.”양혁수는 데스크로 돌아가 이름을 바꿨다.“내가 병원비를 부담하니까 당분간은 내 소유야. 그러니까 내 성을 따라야지.”안시연은 양혁수가 어떤 이름을 지을지 궁금했다.양혁수는 흰 종이에 펜을 갈기며 이렇게 말했다.“양나비!”“...”안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왜? 이름이 별로야?”안시연은 양혁수가 처음으로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이름이 아주 훌륭해요.”양혁수가 턱을 치켜세웠다.“가자, 집으로 데려다줄게.”안시연이 그 말에 미소를 빠르게 지웠다.벌써 저녁이 되고 또 연정훈을 마주해야 했다.돌아가는 길, 안시연은 양혁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정말 고마우면 오늘 저녁 연정훈이랑 같이 잘 때 좀 편한 옷차림으로 자.”???양혁수는 한숨을 내쉬었다.“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선배는 또 연정훈이랑 지내야 되잖아. 그러면 이것저것 할 수도 있고, 내 속이 정말 말이 아니야.”안시연은 얼굴이 뜨거워졌다.양
연정훈이 먼저 화해 요청을 건넨 게 맞았다.자신의 앞접시에 올려진 반찬을 보며 안시연은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반찬은 주문한 거예요?”안시연이 애써 대화 주제를 찾았고,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입맛엔 맞아?”“네, 맛있어요...”안시연이 낮은 소리로 대답하자, 연정훈이 예쁘게 바른 고등어를 밥 위로 얹어줬다.“그러면 많이 먹어.”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식탁은 또 침묵이 찾아왔다.드디어 식사를 마치고, 안시연이 그릇을 치웠다.설거지를 마치고 안시연은 방으로 돌아가 샤워 준비를 했다. 오늘도 욕실 문을 잠갔으나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연정훈은 안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안시연이 침대에 앉기까지 서재에서 기다렸다가 방으로 돌아왔다.두 사람은 말없이 침대 끝자락에 앉았고 분위기는 애매하게 어색했다.안시연이 두 다리를 오므려 템플릿을 무릎 위로 올리고 문제를 읽었다. 보기에는 집중한 듯 보여도 사실 마음은 딴 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연정훈이 템플릿을 흘깃 살피다가 물었다.“회계사 시험 준비하는 거야?”안시연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네, 맞아요!”“이번 기에 시험 볼 생각이야?”“다음이요.”물어본 질문에 대답만 이어지는 딱딱한 대화가 오갔다.안시연은 좌불안석이 되어 몰래 심호흡했다.안시연은 매일 입는 슬립에 얇은 숄더를 걸쳤는데 그동안 대부분 모든 날이 이러한 옷차림이었다.그때, 안시연의 움직임에 숄더가 흘러내려 어깨 반쪽이 드러났다.연정훈이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샤워를 마치고 계속 몸이 찌뿌둥했는데, 안시연이 이러한 옷차림으로 옆에 있자 더 참을 수가 없었다.안시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나 조용히 자리에 누운 연정훈을 의아하다는 눈길로 바라봤다.몰래 연정훈을 살펴보자, 얼굴에 평소와는 다른 홍조가 보였다.이불 안으로 안시연이 다리를 가볍게 움직이자 조금 열기가 느껴졌다.이틀 동안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으니, 연정훈이 욕망을 억제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몸이 불편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동물 병원에서는 안시연에게 연속 세 통의 메시지를 보냈는데, 양혁수가 도착하지 않았고 양나비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알렸다.안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알파카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목 언저리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더 놀랐다.연정훈은 처음으로 안시연에게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안시연을 꼭 끌어안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안시연은 자신의 등 뒤로 닿은 연정훈의 가슴이 뜨겁고 축축한 게 느껴졌다.잠시 고민하던 안시연이 힘겹게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연정훈이 눈을 떴다.딸깍.전등을 켜는 소리가 들려오자, 연정훈은 무의식중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찌르는 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안시연은 손으로 그의 눈을 가리다가 한참 뒤에 손을 치웠다.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한 안시연이 옅게 한숨을 뱉었다.연정훈의 눈동자에는 실핏줄이 가득 서 있고 눈시울조차 붉었다.“아까 따뜻한 물로 샤워한 게 맞아요?”연정훈이 눈을 감은 채로 눈썹을 찡그렸다.안시연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두말없이 약상자를 찾으러 거실로 향했다.연정훈은 희미한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고, 이어 귓가에 뭔가 들어와 딸깍 소리를 내는 게 느껴졌다.안시연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39도 가깝게 열이 나고 있잖아...”“병원으로 갈래요?”안시연이 연정훈의 의견을 물었다.그러나 너무 예의 바른 그 말투에 연정훈은 듣기가 조금 거북했다.연정훈은 눈도 뜨지 않고 입만 움직였다.“그럴 필요 없어.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안시연은 그 말투에서 불만을 느꼈다.그래서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해열제와 뜨거운 물수건을 챙겨 돌아왔다.연정훈은 열이 펄펄 끓어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안시연은 그의 옆으로 돌아와 빨대를 입가에 건넸고 연정훈은 그제야 눈을 제대로 떴다.“해열제에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조금 웃음이 새어 나왔다.‘다른 약이라도 먹일까 내가 의심할까 봐 그래? 왜 뒤에 해석을 덧붙이는 거야.”며칠 사이 두 사람은 다시 서먹서먹해졌는데 첫 만남 그때
안시연은 동물의 출산을 이렇게 가깝게 지켜보는 건 처음이었으며, 동물 병원에서도 생명의 탄생을 아주 진중하게 임했다.새끼 알파카가 태어나고 병원은 각종 정보를 체크했다.체중, 출생 연월일, 건강 상태 등등, 인간의 출산만큼이나 디테일했다.안시연은 긴장한 나머지 시간을 잊어버렸다.태어난 알파카는 검은색이었으며 수컷이었다.간호가 물었다.“이름은 정했나요?”안시연과 양혁수가 시선을 마주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말했다.“이 아이는 우리 둘 아이 맞지?”안시연은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랐다.“마음대로 생각하세요.”양혁수가 고개를 굴리다가 갑자기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이름은 양영준.”풉.안시연은 하마터면 물을 뿜을뻔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진심이에요?”양혁수는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테스크 직원에게 당당하게 말했다.“입력하세요!”안시연이 깜짝 놀라 다급하게 말리려는데 직원이 물었다.“다른 이름은 없을까요?”“...”생각나는 이름이 없었으므로 양영준으로 발탁되었다.어차피 동물병원의 정보는 사람 신분증도 아니고 그저 형식 차례일 뿐이었다.양나비를 이렇게 예쁘게 키운 걸 보아 진짜 주인은 반드시 찾으러 올 것이다.그때가 되면 누가 이 촌스러운 이름을 기억하겠는가?새끼 알파카는 병원에서 며칠 더 지켜봐야 했고 안시연과 양혁수가 동물병원을 나섰을 때는 다섯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안시연은 주변 가게에서 콩국 세 그릇을 구매했는데 그중 한 그릇을 양혁수에게 넘겼다.빌어먹을 연정훈.“차에 타. 바래다줄게.”안시연은 서둘러 돌아가야 했으므로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양혁수가 안시연을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연정훈이 뭐 신이라도 되는 거야? 왜 그렇게 챙겨.”안시연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이 비굴하다고 비난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안시연은 콩국을 다시 고쳐 쥐면서 말했다.“그 사람 열이 나고 있어
안시연은 조금이라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양혁수더러 집 아래까지 바래다 달라고 했다.그러나 연정훈의 전화에 긴장한 나머지 콩국 한 그릇을 모두 엎질러버렸다.양혁수는 잔뜩 당황한 안시연을 보고 손을 휘휘 저으며 돌려보냈다.안시연은 빠르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으나 막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숫자는 점점 올라가다가 안시연이 머무는 그 층에 멈춰 섰다.안시연은 바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매 층에는 두 집이 있었는데 옆집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다.안시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달아 누르며 발을 굴렀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 방금 차에서 내릴 때 근처에 사람이 있었던지를 떠올렸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혼이 반쯤 나간 안시연이 내렸다.집 앞으로 걸어간 안시연이 걸음을 뚝 멈춰 섰다.문이 열려있었다.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안으로 들어갔고 등지고 있는 연정훈을 발견했다.“왜 일어나 있어요?”연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게 아닌 머리가 너무 아파 대답할 수가 없었다.대체 병에 걸린 탓인지, 아니면 방금 장면에 충격을 받은 탓인지 알 수 없었다.콩국을 사러 간 안시연이 양혁수의 차에서 내렸다.언제 연락을 한 건지, 무슨 연락을 했기에, 이 새벽에 만날 수가 있었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그제야 연정훈은 자신이 안시연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안시연이 흰 종이처럼 순진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연정훈 씨?”뒤에 선 안시연이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연정훈은 머리가 어지러운 걸 참으며 몸을 돌려 섰고 겨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향했고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다.안시연은 이런 그의 시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시선에서 깊은 실망이 보였다.안시연이 설명하려는데 다시 몸을 돌려세운 연정훈이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지금 몸은 좀 어때요? 혹시...”“해가 곧 뜰 거야.”연정훈이 안시연의 말을 잘랐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외할머니는 매 해마다 사주를 적은 부적을 부처 앞에 두고 기도를 했었다.하지만 올해는 외할머니의 몸이 안 좋아져 중단되고 말았다.친모가 거론되자 안시연은 마음이 착잡해졌으며 비아냥대는 말투로 물었다.“외할머니, 그 사람 내 생일은 기억한대요?”“어떻게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겠어?”외할머니는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너를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주지혁을 위한 기도도 했단다.”갑작스레 주지혁의 이름이 들려오자, 안시연은 멍해졌다.“관음사는 평안을 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 운, 사업 운도 빌 수 있단다. 네 엄마한테 이걸 전해줬더니 아들이 없으니, 사위를 위해 기도를 하고 왔다네.”안시연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으며 되려 의심스럽기까지 했다.외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넋이 나간 채로 통화를 종료했다.오후도 흐리멍덩하게 지났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 서재에서 회계사 문제지를 뒤적였다.그때, 전화가 울렸고 안시연은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안시연 씨 맞나요?”진수빈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린 안시연이 바로 긴장해하며 물었다.“무슨 일이시죠?”“혹시 지금 시간 되시나요?”“네.”“그럼 ‘홍천 식당’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대표님께서 술자리를 마치고 조금 불편해하세요.”안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술 마신 건가요?”“조금 마신 것 같아요.”마음이 급해진 안시연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열이 나서 새벽에 해열제까지 먹였는데 술을 먹게 냅둬요?”“...”진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나도 지어낸 거란 말이야.”진수빈은 조금 버벅대다가 이렇게 말했다.“조금만 드신 것 같으니 빨리 여기로 와주세요.”그리고 통화는 종료되었다.안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두고 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 연정훈에게 무슨 약을 먹였던지 기억을 떠올렸다.다행히 항생제는 먹이지 않았었다.급하게 밖으로 달려 나간 안시연은 남산 저택으로 곧장 향했다.홍천 식당은 남산 저택의 소유로 근처 유
이승우는 이씨 가문의 사람으로서 홍천 식당에서 공짜로 먹고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다.연정훈이 술자리에서 취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가던 길에 마침 연정훈 대신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진수빈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돌아가는 길에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안시연이 양민아에게 뼈 때리는 말하는 것을 들었다.오호라. 대단하다.양처럼 순한 사람이 변했다.이승우는 갑자기 진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연 대표, 정말 술 때문에 쓰러진 건가요?”이승우는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 같았다.진수빈은 코끝을 만지작거렸다.앞쪽에서 양민아는 안시연의 질문에 얼굴이 굳어졌고 이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안시연, 혹시 술을 너무 많이 마여서 취한 거야?”안시연은 양민아의 태도를 무시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저 아주 멀쩡해요.”“오히려 민아 씨가 더 우스워요. 이 문 하나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양민아는 안시연이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갑자기 말이 매끄러워지자 의심이 들었다.안시연은 양민아와 더는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바로 진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연정훈을 한 번 확인해 보고 만약 그가 양민아의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그 이후로는 연정훈이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복도에서 벨소리가 울렸다.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양민아와 함께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진수빈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발걸음은 가벼웠다가 갑자기 서둘러 뛰어오며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었다. “시연 씨,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안시연은 속으로 냉소했다.양민아는 얼굴을 굳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승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걸어왔다.“무슨 일이죠? 우리 연 대표님께서 술을 마시는데 두 명의 선녀가 옆에서 지켜주는 건가요?”안시연과 양민아는 어이없었다.“…”진수빈은 웃으며 다가가 문을 열었다.양민아는 진수빈의 행동을 보고 미
연정훈이 말했다.“왜 나한테 그래? 저 사람한테 물어봐.”이승우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다시 양시연에게 물었다.“안 그래요?”‘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양시연은 이승우를 노려보았다.변백호는 자연스럽게 연정훈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제가 시연이를 대신해서 연 대표님께 사과드릴게요.”연정훈은 아주 쌀쌀맞게 말했다.“그쪽이 대신 사과를 한다고요?”“네.”이승우가 말했다.“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정훈이는 아내를 잃어버렸는데 그건 어떻게 갚으려고요?”변백호가 대답했다.“아내를 갚아줄 수는 없어도 아이는 노력할 수 있죠. 저랑 시연이가 3년 안으로 아이 둘을 낳으면 연 대표님을 친 아빠처럼 모시라고 할게요. 그러면 어떨까요?”이승우가 웃음을 터뜨렸다.‘오. 꽤 치는데?’이승우가 다시 반격하려는데 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변백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난 어떻게든 내 사람 다시 데리고 올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는 못 살아서.”“와우.”이승우는 몰래 부승원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우리 연 대표님 절대 지지 않아.’그러나 부승원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연정훈은 말만 할 뿐이지. 어떻게 다시 양시연을 찾아오겠어?’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고 몰래 연정훈을 살폈다.‘그건 댁 마음이고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야?’변백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소문으로만 듣던 연 대표님답네요.”“하지만...”변백호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람은 하나뿐인데 먼저 옆을 채간 사람이 임자 아니겠어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그건 저도 동의를 합니다.”그러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그때!문이 활짝 열리더니 반우희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시연 언니, 왜 아직도 안 내려와요?”그리고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이승우는 반우희를 발견하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우희
“결혼식?”연정훈은 그 단어를 곱씹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양시연을 바라보았다.“만난 지 1년 됐는데 벌써 결혼하려고요?”양시연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변백호가 먼저 한발 빨랐다.“1년이요?”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척하면서 양시연에게 물었다.“우리가 만난 지 1년 되었던가요?”“6개월이요!”“그러니까요.”변백호는 미소를 지은 채로 연정훈과의 대화를 이어갔다.“연 대표님은 나이가 저희보다 많아 보이는데 이미 결혼하신 건가요?”“...”양시연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상황을 몰래 지켜보던 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져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연정훈의 상대로 변백호는 아주 제격이었다.연정훈은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미혼입니다.”“조급하지는 않으세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려 감히 그쪽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변백호는 양시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저는 마음이 너무 급해지더라고요. 하루빨리 우리 시연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못 참겠어요.”양지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김세연은 죽상이 되었다.두 사람 사이 튀는 불꽃에 사람들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주시했다.이승우는 구경하러 들렀다가 마침 들리는 대화에 쯧쯧 혀를 찼다.‘우리 정훈이 불쌍하게 됐네.’그러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지 이승우는 웨이터를 불러 몰래 말을 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는 양지원에게 걸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래 연회장 세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 회장님을 비롯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양지원은 그제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발견하고 사람들과 아래층으로 향했다.그러다가 양지원은 연정훈을 따로 부르며 말했다.“정훈아, 어린 녀석들이 연애하게 내버려둬. 마침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겼다는데 넌 나랑 손 회장님 만나러 가자.”마치 연정훈이 양시연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처럼 들렸다.김세연이 참다못해 한마디 거들었다.“오늘
어머니?양시연은 속으로 변백호의 연기에 박수를 쳤다.변백호는 자신보다도 더 쉽게 엄마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얼굴을 살폈다.‘누가 더 뻔뻔한지 보자는 거지?’‘흐흐.’‘자, 여기 너보다 더 뻔뻔한 사람 등장이야.’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하지만 김세연은 제 아들을 잘 알았다. 연정훈은 ‘강강약약’인 사람으로 사건이 복잡해질수록 더 이성적으로 변했다.변백호는 아예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양지원은 양시연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시연이는 잠시 저기로 가서 앉아. 우리 백호 여기 앉혀야지.”누군가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역시 사위 아끼는 건 장모라고 벌써 딸은 찬밥 신세네요.”양지원이 더 활짝 미소를 지었다.변백호는 정장 차림이 아닌 편한 캐주얼 복장이었다. 검은색 선글라스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며 밝고 서글서글한 모습을 보였다.변백호의 등장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김세연도 몰래 손에 땀을 쥐며 연정훈에게 눈짓했다.‘아들, 큰일이야. 네 경쟁 상대가 많이 잘생긴걸?’“...”외모로 보았을 때 연정훈은 변백호에 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으면 연정훈은 더 진중하고 짙은 남자의 매력이 흘렀다. 마치 방금 원목 상자처럼 우아한 기풍을 풍겼다.그러나 사모님들은 연정훈을 자주 봐왔고, 하필 변백호는 뉴페이스이자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이다 보니 관심이 그쪽으로 더 쏠렸다.변백호는 가볍게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어머니가 저 앉으라는 데 빨리 일어나요.”양시연이 힐끗 노려보았다.젊은 커플의 풋풋한 사랑놀이에 사람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자 연정훈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김세연은 찻잔을 또 비웠다.그렇게 변백호가 자리를 차지했다.양시연이 다른 자리를 찾아가려는데 변백호가 양시연의 손을 휙 잡아 허리를 감싸더니 의자 손잡이에 앉혔다.“어디 가려고요? 여기 앉으면 되잖아요.”“...”커플 연기이고 뭐고 떠나서 양시연은 얼굴이 붉어졌다.‘지금 뭐 하
양지원의 행동은 연정훈의 선물을 무시하는 의미였다.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의아해했다.‘두 가문 사이가 좋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딸이 생기더니 두 가문 사이에 금이 간 거야?’김세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정말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었다.살면서 이렇게 창피한 적은 없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여전히 덤덤하게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다시 침착하게 제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오늘 지원 이모는 넘치는 선물을 받으셨을 텐데 제 선물은 시간이 되실 때 확인해 보셔도 괜찮아요.”“역시 우리 정훈이가 날 이렇게 생각해 준다니까.”양지원은 양시연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정훈이 네가 있으면 앞으로 시연이 부부가 경인에서 지내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아.”“...”연정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당연하죠.”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시연에게 물었다.“사귄 지는 얼마됐어요?”마치 친척이 아래 사람에게 물어보는 말투였다.양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6개월 좀 넘었어요.”“오늘 이 자리에 오면 한 번 만나봐야겠네요.”“그 친구 곧 도착한대.”양지원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아까 연락이 왔는데 연회장 앞까지 왔다고 하더라고.”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빤히 바라봤다.‘엄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그러나 양지원은 양시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엄마만 믿어.’“...”분위기는 살짝 어색하게 흘렀고 참석한 사람들은 꾸역꾸역 대화 주제를 돌려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방금까지 양지원은 연회장으로 가야 한다며 연정훈의 선물을 확인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또 미래 사위를 기다린다며 자리에 편히 앉아 있었다.그때 양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확인해 보니 연정훈이 보내온 메시지였다.[남자 친구가 좀 늦는 모양인데 재촉하지 그래요?]양시연은 그 내용을 읽고 헛웃음을 터뜨렸다.[그쪽이 무슨 상관이시죠?][나한테 세컨드가 되어달라면서요. 세컨드가 되기 전에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야죠.]양시연은 제 눈을 의
“엄마, ‘오빠’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양시연이 몰래 양지원에게 귀띔했다.그러자 양시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온 김에 모자를 한번 제대로 혼내주자고.”“...”김세연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 양시연이 연정훈을 오빠라고 부른다면 연정훈이 얼마나 미쳐 날뛸지가 눈에 선했다.‘그건 안되지!’잠시 고민하던 김세연은 체면이고 뭐고 상관없이 양지원을 향해 솔직하게 말했다.“오빠 동생 사이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 그러다가 내가 콱 물고 늘어져 사돈 하자고 매달리는 수가 있어. 네 딸을 내 며느리로 삼을 거라고!”“...”양지원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김세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아들을 생각해서 기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다른 사모님들도 김세연의 의도를 눈치채고 말을 거들었다.“그래요. 두 가문이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시연이랑 정훈이랑 맺어주면 되겠어요.”양시연은 덤덤한 얼굴이었다.그러자 양지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쉽게도 그러기엔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김세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날 겁주지 마!’‘내 아들이 당장 여기로 오고 있는데 무슨 꿍꿍이야!’“연 대표님, 이쪽입니다.”그때 문밖에서 웨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어 양지원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우리 시연이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거든요. 곧 날 잡을 것 같아요.”김세연은 김이 빠져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양지원의 말을 들은 제 아들이 굳은 얼굴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다 필요 없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다른 사모님들이 연정훈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무슨 일로 우리 대표님이 다 걸음하셨을까?”연정훈은 옷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클래식한 턱시도였지만 연정훈에게 알맞게 제작되어 우아하고 타고난 귀족 분위기를 풍겼다.연정훈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지원 이모 생일인데 제가 와야죠.”그리고 슬쩍 양시연을
김세연은 양지원의 딸이라면 양민아밖에 몰랐다. 최근 몇 해 동안 양민아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지만 과거 양민아에 대한 인상은 좋게 남아 있었다.그런데 양지원이 또 ‘새로운 딸’을 소개한다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양시연이 아래층에 있는 동안 사모님들은 이러쿵저러쿵 가십을 입에 올렸다. 누구 아들이 몰래 여자에게 스폰을 해주고, 누구 딸은 가난한 남자를 사랑해 가문에 난리가 났다고 했다.김세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다.“젊은 사람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우리 같은 가문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한다니. 그게 가당키나 해요?”다른 사모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양지원은 미소를 지은 채로 묵묵히 상황을 주시했다.“양 대표님, 아가씨가 도착했습니다.”직원이 다가와 양지원에게 속삭였다.양지원은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여기로 오라고 해요.”“네. 알겠습니다.”직원은 양시연을 위해 문을 열었다.큰 홀이다 보니 정문부터 사모님들이 모여 있는 자리까지 거리가 있었다.김세연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차를 마시다가 양지원에게 몰래 안시연이라는 불여우가 돌아왔다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두 눈을 의심했다.창가 자리라 햇빛에 눈이 부셨던 김세연은 손으로 해를 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시연은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그리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양지원을 향해 엄마라 불렀고 다른 사모님들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김세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다들 양지원에게 양녀가 하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생긴 또 다른 딸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러나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겉치레로 예쁘다는 칭찬만 늘려놨다.“자, 여기로 와서 앉아.”양지원은 양시연을 옆자리로 이끌었다.그러자 김세연은 입을 딱 벌렸고 어느새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그러나 김세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양지원은 양시연의 손을 만지며 김세연에
양씨 가문에서.양시연이 퇴근하자마자 양지원이 웃으며 오후의 해프닝을 이야기했다.양지원은 김세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연정훈이 겨우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또다시 너에게 빠질까 봐 걱정이라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지원은 소파에 기대 턱을 괴고 물었다.“연정훈을 때렸다고 들었어.”양시연은 야식을 먹으며 대답했다.“정훈 씨가 자초한 일이에요.”양시연의 이런 모습에 양지원은 매우 만족스러웠다.양지원은 이제야 자신의 딸답다는 생각에 오후에 김세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김세연은 또 양시연이 어떤 남자에게 의지하는 거로 의심하다니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밤 푹 자고 내일은 기운 차려야 해.”양지원은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알았다는 신호를 보이며 웃었다.며칠 동안 연정훈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아마 다친 걸 치료하느라 바쁜 듯했다.‘흥. 그래도 자존심은 있나 보네.’양시연은 방으로 돌아와 반우희에게 전화해서 아이 셋을 데리고 생일 파티에 오라고 부탁했다.반우희가 말했다.“내일 승주도 생일이에요!”양시연은 답했다.“잘됐네요. 애들 데리고 와서 함께 놀고 나중에 우리끼리 승주 생일 파티도 해요.”“좋아요!”통화를 끝낸 후 양시연은 꿀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손님이 오기 전에 반우희가 먼저 도착했다.아이들이 키가 조금씩 자랐지만, 여전히 양시연을 ‘누나’라고 부르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양씨 가문은 인원이 적다 보니 집안이 이렇게 맑고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 차니 공기마저 상쾌해지는 듯했다.양지원은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양혁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 녀석, 자기 엄마 생일인데도 돌아오지 않는다니.’양시연은 아이들과 어울리다 문득 양지원의 쓸쓸한 표정을 눈치챘다. 그녀는 조용히 양혁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양혁수는 드물게 즉시 답장을 보냈다.[왜 나 보고 싶어?]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엄마가 널 보고 싶어 해!]잠시 정적이 흐
혹시 몰라서 양시연은 사장에게 자신의 신상을 밝히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계단에서 김세연과 마주쳤을 때도 양시연은 여전히 태연했다.하지만 김세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했다.‘이게...’정오에는 연정훈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줄 알았는데 오후에 양시연을 만났다.양시연이 귀국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려는 찰나 혹시 연정훈의 새로운 여자도 양시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뭔가 이상했다.만약 정말 양시연이라면 연정훈이 자신에게 숨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예전엔 분명 같은 편이었다.김세연은 계단 위에서 발끝을 들고 몇 번이나 아래를 내려다봤다.“이모, 왜 그래요?”같이 온 조카딸 연희가 물었다.김세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 위층에 올라가 보자.”“좋아요.”아래층의 방에서 양시연은 유리창 너머로 위층을 잠깐 쳐다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물건이 많아 사장이 먼저 도감으로 보여주고 실물을 가져오기로 했다.“이걸로 할게요.”양시연은 핑크 다이아몬드로 된 플라밍고 모양 브로치를 골랐다.“네. 가져다드리겠습니다.”“네.”잠시 후 사장이 몇 가지 고급품을 가지고 내려왔지만, 양시연이 고른 브로치는 없었다.양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진 사장님, 제가 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니면 제가 볼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사장은 40대 중반의 여자였고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양시연이 양씨 가문의 집사로부터 소개받은 손님이었기에 사장은 양시연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런데도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저와 같은 제품을 고른 사람이 있네요.”사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2층을 지나왔는데 김세연 씨와 함께 온 아가씨가 한눈에 반해 잠깐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곧 다시 가져다드릴 겁니다.”하하.집안에서 귀염받다 보니 상대방이 당연히 양보해 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양시연은
“세상에!”“너 누구랑 싸운 거야?”연정훈은 식탁 옆에 앉아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을 준비를 했다.집에는 그와 김세연 단둘뿐이었고 김세연은 다급히 손을 뻗어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이건 긁힌 거지? 아니, 아니야. 이건 날카로운 걸로 베인 거 같은데!”김세연은 믿을 수 없었다. 감히 누가 연정훈의 얼굴에 이런 상처를 남겼는지 의문스러웠다.김세연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연정훈은 그녀를 식탁 쪽으로 살짝 밀었다.“엄마, 밥이나 드세요.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요.”김세연은 어이가 없었다.“뭐라는 거야. 엄마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이 멀쩡하던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 됐네!”그러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어떻게 된 거야. 어릴 때 말썽 피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네가 네 얼굴 얼마나 아끼는지 엄마가 알지 않니?”연정훈은 무심하게 국물을 떠주며 다시 말했다.“밥이나 드세요.”김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네 아버지 승진한 후로 명절 때나 겨우 집에 돌아오고 나 혼자 남겨졌잖니. 너도 집에 안 오고.”연정훈은 김세연을 한 번 보며 말했다.“그러면 엄마도 아버지 따라 세운으로 가시면 되잖아요.”“싫어. 그곳은 너무 황량해서 경인처럼 살기 좋은 데가 아니야.”“그러면 뭔가 방법을 생각해서 아버지를 신고해요. 그러면 강등돼서 다시 경인으로 오겠죠.”김세연은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찌르며 웃음을 터뜨렸다.“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예전 그대로 철없기야.”김세연은 진지하게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이 얼굴에 난 상처 혹시 여자한테 긁힌 거 아니야?”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반찬을 집어 들었다.“네.”김세연은 눈을 감고 가슴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속으로 외쳤다.‘세상에.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드디어 아들이 여자와 엮이기 시작한 것이다.몇 년 전 양시연이라는 아이가 떠나고 소현주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면서 김세연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