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는 이씨 가문의 사람으로서 홍천 식당에서 공짜로 먹고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다.연정훈이 술자리에서 취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가던 길에 마침 연정훈 대신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진수빈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돌아가는 길에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안시연이 양민아에게 뼈 때리는 말하는 것을 들었다.오호라. 대단하다.양처럼 순한 사람이 변했다.이승우는 갑자기 진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연 대표, 정말 술 때문에 쓰러진 건가요?”이승우는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 같았다.진수빈은 코끝을 만지작거렸다.앞쪽에서 양민아는 안시연의 질문에 얼굴이 굳어졌고 이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안시연, 혹시 술을 너무 많이 마여서 취한 거야?”안시연은 양민아의 태도를 무시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저 아주 멀쩡해요.”“오히려 민아 씨가 더 우스워요. 이 문 하나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양민아는 안시연이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갑자기 말이 매끄러워지자 의심이 들었다.안시연은 양민아와 더는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바로 진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연정훈을 한 번 확인해 보고 만약 그가 양민아의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그 이후로는 연정훈이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복도에서 벨소리가 울렸다.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양민아와 함께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진수빈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발걸음은 가벼웠다가 갑자기 서둘러 뛰어오며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었다. “시연 씨,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안시연은 속으로 냉소했다.양민아는 얼굴을 굳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승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걸어왔다.“무슨 일이죠? 우리 연 대표님께서 술을 마시는데 두 명의 선녀가 옆에서 지켜주는 건가요?”안시연과 양민아는 어이없었다.“…”진수빈은 웃으며 다가가 문을 열었다.양민아는 진수빈의 행동을 보고 미
연정훈은 시야가 또렷해지는 순간에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혼미했지만, 곧바로 안시연을 알아볼 수 있었다.안시연…안시연은 콩국을 사주겠다고 나갔는데 양혁수의 차에서 내렸다.연정훈은 주변을 살피며 상황을 파악했다.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그렇게 질문하는 것을 보니 안시연은 자신감이 넘치는 듯했다. 안시연은 연정훈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연정훈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사실 안시연은 자신에게 그리 확신이 없었다. 그저 자신과의 내기일 뿐이었다.연정훈의 대답에 따라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결정될 것이다.만약 연정훈이 양민아를 선택한다면 안시연은 깨어난 연정훈에게 이별을 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련 없이 관계를 끝낼 것이다.그러나 안시연의 질문에 연정훈은 안시연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긴장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양민아는 이 상황을 보고 말했다.“연정훈, 여기서 좀 쉬고 있어. 의사가 곧 도착할 거야.”진수빈이 덧붙였다. “맞아요. 양민아 씨가 한 시간 전에 의사를 부르셨어요.”양민아는 침묵했다.“…”이승우가 웃었다.“한 시간 전에 불렀다고요?”안시연은 사람들을 등지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기에 온 지 겨우 30분밖에 안 됐어요.”그런 다음 진수빈을 바라보았다.“연 대표님의 외투를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진수빈이 옷을 가지러 간 사이에 안시연은 연정훈의 깊은 시선과 마주쳤다. 안시연은 억지로 다가가 연정훈을 부축했다.연정훈은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였다.안시연은 조용히 연정훈을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뒤에 앉혔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듯 보였지만, 안시연은 연정훈이 넘어지지 않도록 연정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이승우는 혀를 차며 상황을 지켜보았다.양민아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안시연의 이런 하찮은 행동이 못마땅해 얼굴을 돌렸다.방 안의 모든 사람은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안시연이 연정훈을 감싸 안는 것이 놀라웠다.침대 위에서 안시
연정훈의 키는 1미터90센티미터가 넘었고 안시연이 연정훈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게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연정훈을 방으로 옮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다행히도 진수빈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 안시연이 비명을 지르자 진수빈은 급히 달려와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연정훈을 방으로 옮겼고 진수빈이 미리 연락해 놓은 의사도 마침 도착했다.안시연은 즉시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의사가 작은 의료 장비를 들고 연정훈에게 혈액 검사를 하는 모습을 보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의사가 물었다.“오늘 연 대표님께서 식사하셨나요?”진수빈은 잘 모르겠다고 하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안 드셨어요.”전화를 끊고 난 후 진수빈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식사는 거의 하지 않고 커피만 서너 잔 마셨습니다.”안시연은 이 말을 듣고 놀랐다.연정훈이 이렇게 아픈데도 커피로만 버텼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의사는 거실에서 진수빈과 소통하며 약 처방 준비를 마친 후, 연정훈에게 수액을 투여하기로 했다.안시연은 한쪽으로 물러서서 조용히 물었다.“심각한가요?”의사는 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먼저 수액을 투여하고 환자가 깨어난 후에 다시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안시연은 침묵했다.의사는 신속하게 연정훈에게 주사를 놓았다.연정훈은 식은땀을 흘리며 평소에 청결을 중요시하던 연정훈은 의식이 돌아오자 일어나려 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를 눌러가며 말했다. “제가 닦아줄게요. 움직이지 마세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으나 안시연이 따뜻한 수건을 연정훈의 목에 대자 비로소 얼굴을 찡그리며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진수빈은 문틈으로 상황을 엿보다가 안시연이 연정훈의 셔츠 단추를 풀며 세심하게 몸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안시연은 겨우 연정훈의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혔다.그 후, 밖으로 나가 죽을 끓이고 다시 돌아와 연정훈의 상태를 지켜보았다.밤 11시가 되어서야 의사가 수액 바늘을 뽑았고 그제야 연정훈도
연정훈은 안시연이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연정훈의 얼굴은 표정 변화 없이 굳어 있었지만, 머리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문가에서 잠시 멈춰 서 있던 안시연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갔다.안시연은 침대에 이불을 펴 두고 눕기도 전에 진수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시연 씨, 연 대표님께 약을 챙겨 드리는 걸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부탁드려요.”안시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진수빈조차도 안시연과 연정훈의 관계가 위태로울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진수빈이 정중하게 부탁하자 안시연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연정훈이 바로 옆방에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의사가 처방한 약을 준비한 후 안시연은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정훈은 침대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아직 죽은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안시연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억누르며 약을 연정훈에게 건넸다. “약을 드세요.”연정훈은 천천히 눈을 뜨고 안시연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잠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안시연은 시선을 거두고 약을 침대 옆에 두려고 했다.안시연이 돌아서서 나가려 할 때 연정훈은 몸을 일으키며 안시연의 손을 정확히 잡았다.안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연정훈의 팔에서 전해지는 비정상적인 온기에 깜짝 놀랐다.안시연이 말하기도 전에 연정훈은 힘껏 안시연을 끌어당겼다.시연은 창가에 떨어져 앉았고 두 팔을 연정훈에게 잡힌 채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연정훈의 거친 호흡이 안시연에게 선명히 느껴졌다.안시연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연정훈은 더욱 강하게 안시연을 붙잡았다. “나와 헤어지자고?”연정훈은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연정훈의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들렸다. 안시연이 그렇게 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에 처하니 안시연의 마음도 바늘로 찔린 듯 아팠다. 안시연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연정훈은 입술을 비틀며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왜?”“내가 너와 결혼하지 않을
연정훈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고 마치 귓가에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연정훈은 지금껏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아본 적이 없었다.시간이든 돈이든 아낌없이 안시연에게 바쳤다.하지만 안시연은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어느 집에서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이 나올 수 있었을까.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격렬하게 뛰는 심장은 연정훈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안시연은 속에 있던 말을 모두 쏟아내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강남 사건 이후, 그들은 한 번도 속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안시연은 진심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그들이 이미 끝났음을 깨닫고 있었다.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안시연은 깊이 숨을 내쉬고 말했다.“약을 드세요. 제가 정훈 씨가 정말로 약을 먹는지 확인하겠다고 진수빈 씨에게 약속했어요.”연정훈의 표정이 굳어졌다.결국 연정훈에게 마음을 털어놓게 된 것도 진수빈 덕분이란 말인가? “벌써 새 남자를 찾으려고 하는데 전 남자의 생사가 아직 너와 상관있어?”연정훈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안시연은 이를 악물었다.약을 먹든 말든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안시연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연정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안방으로 돌아와서 자.”“괜찮아요.”“우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야.”안시연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시연이 침대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동안에 연정훈은 이미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다.방 안은 깊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잠시 숨을 고른 안시연은 이불을 챙겨오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자자.이 상황에서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겼다.이 상태의 연정훈이 무슨 해코지를 할 것도 아니었다.안시연은 이불을 무심하게 침대 위에 던졌다.연정훈은 그 거친 움직임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침대가 다시 한번 무겁게 들썩였다. 안시연이 그 옆에 누운 것
남자들은 소유욕과 정복욕이라는 본능이 있다. 그 모든 것이 뼛속 깊이 숨겨져 있다가 때가 되면 겉으로 드러나며 날뛴다.연정훈은 병약한 상태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양혁수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제압한 후에 안시연 베개 옆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보았다. 메시지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그 보낸 사람은 바로 양혁수였다. 아무리 너그럽고 품위 있는 사람이라도 이 상황을 참아낼 수는 없었다.연정훈은 손바닥으로 안시연의 얼굴을 가리며 안시연이 휴대폰 화면을 보지 못하게 했다. 강하게 밀어붙여 안시연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더니 갑자기 키스했다.입술과 이가 부딪쳤다.안시연은 놀란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떴다. 안시연은 몸부림치려 했지만, 손은 이미 눌려 있었고 몸을 비틀자 오히려 연정훈의 욕망을 더욱 자극했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저항을 억누르며 강제로 안시연의 입술을 벌려 키스를 했다.결국 달콤한 맛을 느꼈다.작은 사탕 한 조각이 전신의 세포를 깨우듯 강한 자극을 주었다.연정훈은 점점 더 강하게 안시연의 부드러운 입술과 혀를 거칠게 다루며 키스했다.안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돌려 피하려 했지만, 연정훈은 안시연의 입술에서 목으로 옮겨갔다.귀와 머리카락이 스치는 순간, 안시연의 얼굴은 터질 듯 붉어졌고 동시에 안시연은 연정훈의 얼굴과 가슴에서 빠르게 배어 나오는 땀을 느낄 수 있었다.연정훈은 미친 것 같았다. “정훈 씨! 그만 해요!”안시연은 소리쳤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연정훈의 손에 강하게 붙잡혔다. 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냈다.연정훈은 이미 오래전 이성을 잃었고 안시연의 소리를 들을수록 연정훈의 온몸에 피가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 안시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연정훈은 안시연의 옷을 모두 벗겨버렸다.안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동시에 연정훈의 급박한 심장박동이 더욱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연정훈이 안시연의 곁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연정훈은 처음으로 안시연이 자신을 이를 악물고 욕하는 모습을 보았다.안시연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연정훈은 더욱 격렬한 감정에 휩싸였고 안시연의 허리를 꽉 움켜쥐며 멈추지 않았다.안시연은 입을 벌리고 헐떡이면서 문득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연정훈이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첫 번째를 제외하고 그들은 매번 안전 조치를 취했었다.안시연은 반복해서 머리를 흔들며 연정훈에게 그만두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만 해요…”하지만 이미 늦었다.몇 초 동안 안시연의 시야가 흐려졌고 연정훈의 거친 숨소리가 안시연의 귀에 선명하게 들리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안시연은 참아왔던 눈물이 자극 때문에 흘러내렸다.침대 머리맡의 불빛이 약간 밝아지고 안시연은 시각을 되찾았지만,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멈추고 두 사람의 체온을 느끼며 안시연의 볼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짠맛이 났다. 연정훈은 짠맛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선을 넘었다는 걸 느꼈다.몸을 지탱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눈앞이 어두워졌다. 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질책했다.이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다니 나이를 헛먹은 셈이다.안시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의 이마에 머리를 대어 잠시 진정시킨 후,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수건을 적셔와 안시연의 몸을 부드럽게 닦아주려고 했다.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자, 안시연은 사지에 다시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안시연은 가장 먼저 휴대폰을 확인했고 통화 시간이 몇 초에 불과한 것을 보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그와 동시에 안시연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연정훈을 심하게 질책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짐승남.안시연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꽉 잡았다. 몸이 진정되자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들이 안시연을 짜증 나게 했다. 남긴 흔적은 안시연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정훈은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서 안시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마에 핏줄이 뛰는 것을 느꼈다.그러나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 문이 열렸다. 안시연은 끈이 달린 잠옷 위에 실크 가디건을 걸치고 나타났다. 안시연은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의사를 불렀어요.” 소문이 나길 바랐다.연정훈은 얼굴이 굳어지며 눈을 감고 말했다. “나를 일으켜 줘.”안시연은 연정훈으로부터 받은 고통 때문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연 대표님, 그냥 앉아 계세요. 이런 상황에서 움직이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대요.”그 말이 끝나자 안시연은 문을 덜컥 닫았다.연정훈은 바닥에 앉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안시연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밖에서 안시연은 자신이 한 행동에 뿌듯해하며 그 순간을 되새기며 기분이 좋았다. 연정훈이 찬 바닥에 앉아 떨면서 정신을 차리기를 바랐다. 방을 나가려던 안시연은 갑자기 하체에서 무언가 흐르는 감각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안시연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다. 연정훈을 다시 한번 속으로 저주했다. 옆방에서 서둘러 정리한 후 방을 나서자마자 벨이 울렸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시연 씨!”부승희의 목소리가 들렸다.안시연은 깜짝 놀라며 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 때 약간 긴장했다. 비록 연정훈의 수치스러운 상황이 안시연에게도 좋은 일은 아니다.그러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안시연은 깜짝 놀랐다. 문 밖에는 부승희가 손을 주머니에 넣고 멋지게 서 있었다. 그 뒤에는 이승우, 부승원, 한우빈이 일렬로 서 있었다. 연정훈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그 옆에는 안경을 낀 젊은 남자가 하얀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이승우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안시연은 놀랐다. 이 늦은 밤에 어떻게 그들이 이렇게 모두
양혁수가 어제 에든베타에 가고 싶었던 건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린 탓이었고 실은 아직 그곳으로 향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리자 지금 그냥 떠나는 것은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쨌든 변여름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그는 어른이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순간적인 충동에 휘말렸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변여름은 아침 일찍 나간 뒤 몇 시간째 돌아오지 않았다.떠나겠다고 해놓고도 한낮이 되도록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이 양혁수는 조금 어색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였다. 집을 비운 둘째 부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했다.한 상 가득 차려진 식사 자리였지만 변여름만 보이지 않았다.마크가 갑자기 양혁수의 왼쪽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함은화가 곧바로 타일렀다.“삼촌이라고 불러야지.”“삼촌, 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었어요?”마크는 즉시 호칭을 바꾸었다.양혁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잠시 후 그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추워서.”“집은 안 추운데요.”하니가 반대쪽에서 다가와 그를 유심히 살폈다.“땀까지 나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하니를 살짝 옆으로 밀어냈다.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모두에게 ‘천천히 드세요.’라고 한 마디 남기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거실 창가로 향했다.두 꼬맹이는 끈질기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다 마크가 마침내 그의 목에 난 자국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다쳤어요.”하니도 눈을 반짝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보라색이에요. 엄청 커요.”양혁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멀리서 변백호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며 엄격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불렀다.식탁에서 함은화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행히 너희들 아버지께서 안 계셔서 속상해하지 않으시겠네.”변여름의 셋째 형수는 외
새벽 두 시를 넘긴 침실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양혁수의 셔츠는 변여름의 겉옷과 뒤엉킨 채 침대 옆 바닥에 나른히 놓여 있었다.거실의 시곗바늘이 똑똑 소리를 내며 양혁수의 심장과 신경을 조여 왔다.양혁수는 자신이 형편없는 놈이라며 N 번째로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변여름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순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키스하려 다가왔다.양혁수는 약간 불편해서 변여름의 양 볼을 잡았다.“뭐 하려고 그래?”그는 깊은 만족 뒤에 밀려오는 나른함 속에서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변여름은 살짝 눈을 굴리더니 능숙하게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마치 뜨거운 물건을 만진 듯 무의식적으로 손을 뗐다.변여름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도 자극으로는 그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기며 조용히 속삭였다.“오빠, 나 졸려요.”양혁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돌려 이불을 끌어당겨 둘을 덮었다.“자.”지금 변여름을 돌려보낸다 한들 헛수고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변여름은 그의 속내를 알아챈 듯 만족스럽게 미소 짓고는 양혁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달콤하게 눈을 감았다.양혁수는 그녀의 조용한 숨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섬세한 얼굴 위로 연분홍빛이 감돌았고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그는 머리가 아파졌다.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변여름을 방 안으로 들인 자신을 주저 없이 없애버리고 싶었다.지금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양혁수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아무리 되짚어 봐도 도대체 어느 순간 문제가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확실한 건 이 모든 일이 결국 변여름의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사실이었다.‘아니면 정말 변여름이 말한 대로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이렇게 쉽게 넘어간 걸까?’양혁수는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한강시에서만 몇 년을 지내며 수많은
변여름이 두 번째로 양혁수에게 키스하자 그는 여전히 피하려 했지만 마치 작은 마녀의 마법에 걸린 듯 저항은 미약했다.그녀는 투피스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언제 풀었는지 겉옷 단추가 풀려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끈 나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는 잠시 눈길을 돌렸을 뿐인데 그녀의 가슴 라인이 스쳐 지나갔다. 오른쪽에 분홍색 만화 꽃이 그려져 있었고 그 모습이 그녀의 행동과 대조되어 양혁수는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입술이 닫히자 변여름은 그의 목을 감싸며 손끝으로 뒷머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돌려 무심한 듯 두 번 당겼다. 그 작은 통증이 오히려 자극되어 그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이번에는 더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양혁수의 입술을 따라갔다. 중간에 멈추어 그의 표정을 살펴보며 그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는’모습을 보고는 살짝 미소 지으며 다시 그의 턱에 입맞춤을 했다. 그 후 더 애정을 담아 양혁수의 목젖에 부드럽게 입술을 옮겼다.양혁수는 자신이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대로 가만히 있으며 그녀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게 두었다.심장 박동과 호흡이 서로 경쟁하는 듯했다. 그는 계속해서 아래로 눌러 내려가며 누가 먼저 참지 못할지 시험하려는 듯했다.그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했지만 등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녀가 그를 껴안고 무심하게 척추를 쓸어내리자 날카로운 전류가 온몸을 타고 내려가 배까지 흘러갔다.변여름이 양혁수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며 그의 옆얼굴에 가만히 입맞췄다.“오빠, 이런 거 좋아해요? 좋아하면 저한테도 이렇게 해도 돼요…아니면 오빠가 다른 걸 원해도 뭐든 저한테 해도 괜찮아요.”변여름의 태도는 바닥까지 내려앉아 마치 겸손해 보였지만 양혁수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 같은 사람들이 가장 자주 쓰는 약탈 방식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만이 전부였다.그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녀의 덫에 걸려들어 단단히 붙잡힐 테고 다시는 벗
“바디워시에요.”“변여름.”변여름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로 우유 향이 나는 바디워시에요.”양혁수는 방금 그 순간 특히 그녀의 눈과 마주쳤을 때 그리고 그녀가 그의 손을 핥던 단 몇 초 동안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말도 안 돼.’그는 분명 그녀의 향기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변여름이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의 은은한 향이 퍼지더니 이상하게도 양혁수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변여름이 키스하려 하자 그는 마치 폭발할 것 같았다.변여름은 그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마주하며 미동도 없이 침착했다.“오빠, 어디 불편해요?”“네가 그 이유를 더 잘 알잖아.”“...?”변여름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의 가빠진 호흡과 붉어진 귀 끝을 보고는 눈을 깜빡였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 흥분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다.“오빠, 제가 오빠한테 약이라도 먹였다고 생각해요?”양혁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가슴이 요동쳤고 침묵이 곧 대답이 되었다.변여름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진짜 아니에요.”“오빠는 경험이 부족해서 딥 키스 한 번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거예요.”양혁수는 순간 멍해졌다.???방금 키스 때조차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리려는 본능을 꾹 참으며 조용히 손을 빼려 했다.그러나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또 멋대로 움직이면?”변여름은 가늘게 신음하며 눈에 희미한 물기를 맺었다.“오빠, 아파요.”양혁수는 변여름이 꾀병을 부린다고 90% 확신했지만 그녀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변여름은 손을 빼냈다.양혁수는 얼굴에 서리가 낀 듯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경계했고 변여름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잠시 팽팽한 정적이 흐른 후 변여름은 애원하는 듯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