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동물의 출산을 이렇게 가깝게 지켜보는 건 처음이었으며, 동물 병원에서도 생명의 탄생을 아주 진중하게 임했다.새끼 알파카가 태어나고 병원은 각종 정보를 체크했다.체중, 출생 연월일, 건강 상태 등등, 인간의 출산만큼이나 디테일했다.안시연은 긴장한 나머지 시간을 잊어버렸다.태어난 알파카는 검은색이었으며 수컷이었다.간호가 물었다.“이름은 정했나요?”안시연과 양혁수가 시선을 마주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말했다.“이 아이는 우리 둘 아이 맞지?”안시연은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랐다.“마음대로 생각하세요.”양혁수가 고개를 굴리다가 갑자기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이름은 양영준.”풉.안시연은 하마터면 물을 뿜을뻔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진심이에요?”양혁수는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테스크 직원에게 당당하게 말했다.“입력하세요!”안시연이 깜짝 놀라 다급하게 말리려는데 직원이 물었다.“다른 이름은 없을까요?”“...”생각나는 이름이 없었으므로 양영준으로 발탁되었다.어차피 동물병원의 정보는 사람 신분증도 아니고 그저 형식 차례일 뿐이었다.양나비를 이렇게 예쁘게 키운 걸 보아 진짜 주인은 반드시 찾으러 올 것이다.그때가 되면 누가 이 촌스러운 이름을 기억하겠는가?새끼 알파카는 병원에서 며칠 더 지켜봐야 했고 안시연과 양혁수가 동물병원을 나섰을 때는 다섯 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안시연은 주변 가게에서 콩국 세 그릇을 구매했는데 그중 한 그릇을 양혁수에게 넘겼다.빌어먹을 연정훈.“차에 타. 바래다줄게.”안시연은 서둘러 돌아가야 했으므로 그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양혁수가 안시연을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연정훈이 뭐 신이라도 되는 거야? 왜 그렇게 챙겨.”안시연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이 비굴하다고 비난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안시연은 콩국을 다시 고쳐 쥐면서 말했다.“그 사람 열이 나고 있어
안시연은 조금이라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양혁수더러 집 아래까지 바래다 달라고 했다.그러나 연정훈의 전화에 긴장한 나머지 콩국 한 그릇을 모두 엎질러버렸다.양혁수는 잔뜩 당황한 안시연을 보고 손을 휘휘 저으며 돌려보냈다.안시연은 빠르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으나 막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숫자는 점점 올라가다가 안시연이 머무는 그 층에 멈춰 섰다.안시연은 바로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매 층에는 두 집이 있었는데 옆집에는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았다.안시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달아 누르며 발을 굴렀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 방금 차에서 내릴 때 근처에 사람이 있었던지를 떠올렸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혼이 반쯤 나간 안시연이 내렸다.집 앞으로 걸어간 안시연이 걸음을 뚝 멈춰 섰다.문이 열려있었다.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안으로 들어갔고 등지고 있는 연정훈을 발견했다.“왜 일어나 있어요?”연정훈은 대답하지 않았다.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게 아닌 머리가 너무 아파 대답할 수가 없었다.대체 병에 걸린 탓인지, 아니면 방금 장면에 충격을 받은 탓인지 알 수 없었다.콩국을 사러 간 안시연이 양혁수의 차에서 내렸다.언제 연락을 한 건지, 무슨 연락을 했기에, 이 새벽에 만날 수가 있었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그제야 연정훈은 자신이 안시연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안시연이 흰 종이처럼 순진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연정훈 씨?”뒤에 선 안시연이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연정훈은 머리가 어지러운 걸 참으며 몸을 돌려 섰고 겨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손을 향했고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다.안시연은 이런 그의 시선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시선에서 깊은 실망이 보였다.안시연이 설명하려는데 다시 몸을 돌려세운 연정훈이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지금 몸은 좀 어때요? 혹시...”“해가 곧 뜰 거야.”연정훈이 안시연의 말을 잘랐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외할머니는 매 해마다 사주를 적은 부적을 부처 앞에 두고 기도를 했었다.하지만 올해는 외할머니의 몸이 안 좋아져 중단되고 말았다.친모가 거론되자 안시연은 마음이 착잡해졌으며 비아냥대는 말투로 물었다.“외할머니, 그 사람 내 생일은 기억한대요?”“어떻게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겠어?”외할머니는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너를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주지혁을 위한 기도도 했단다.”갑작스레 주지혁의 이름이 들려오자, 안시연은 멍해졌다.“관음사는 평안을 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 운, 사업 운도 빌 수 있단다. 네 엄마한테 이걸 전해줬더니 아들이 없으니, 사위를 위해 기도를 하고 왔다네.”안시연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으며 되려 의심스럽기까지 했다.외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넋이 나간 채로 통화를 종료했다.오후도 흐리멍덩하게 지났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 서재에서 회계사 문제지를 뒤적였다.그때, 전화가 울렸고 안시연은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안시연 씨 맞나요?”진수빈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린 안시연이 바로 긴장해하며 물었다.“무슨 일이시죠?”“혹시 지금 시간 되시나요?”“네.”“그럼 ‘홍천 식당’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대표님께서 술자리를 마치고 조금 불편해하세요.”안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술 마신 건가요?”“조금 마신 것 같아요.”마음이 급해진 안시연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열이 나서 새벽에 해열제까지 먹였는데 술을 먹게 냅둬요?”“...”진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나도 지어낸 거란 말이야.”진수빈은 조금 버벅대다가 이렇게 말했다.“조금만 드신 것 같으니 빨리 여기로 와주세요.”그리고 통화는 종료되었다.안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두고 옷을 챙겨입었다. 그리고 연정훈에게 무슨 약을 먹였던지 기억을 떠올렸다.다행히 항생제는 먹이지 않았었다.급하게 밖으로 달려 나간 안시연은 남산 저택으로 곧장 향했다.홍천 식당은 남산 저택의 소유로 근처 유
이승우는 이씨 가문의 사람으로서 홍천 식당에서 공짜로 먹고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다.연정훈이 술자리에서 취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가던 길에 마침 연정훈 대신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진수빈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돌아가는 길에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안시연이 양민아에게 뼈 때리는 말하는 것을 들었다.오호라. 대단하다.양처럼 순한 사람이 변했다.이승우는 갑자기 진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연 대표, 정말 술 때문에 쓰러진 건가요?”이승우는 약이라도 잘못 먹은 것 같았다.진수빈은 코끝을 만지작거렸다.앞쪽에서 양민아는 안시연의 질문에 얼굴이 굳어졌고 이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안시연, 혹시 술을 너무 많이 마여서 취한 거야?”안시연은 양민아의 태도를 무시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저 아주 멀쩡해요.”“오히려 민아 씨가 더 우스워요. 이 문 하나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양민아는 안시연이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갑자기 말이 매끄러워지자 의심이 들었다.안시연은 양민아와 더는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바로 진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연정훈을 한 번 확인해 보고 만약 그가 양민아의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그 이후로는 연정훈이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복도에서 벨소리가 울렸다.안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양민아와 함께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진수빈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발걸음은 가벼웠다가 갑자기 서둘러 뛰어오며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었다. “시연 씨,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안시연은 속으로 냉소했다.양민아는 얼굴을 굳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승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느긋하게 걸어왔다.“무슨 일이죠? 우리 연 대표님께서 술을 마시는데 두 명의 선녀가 옆에서 지켜주는 건가요?”안시연과 양민아는 어이없었다.“…”진수빈은 웃으며 다가가 문을 열었다.양민아는 진수빈의 행동을 보고 미
연정훈은 시야가 또렷해지는 순간에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혼미했지만, 곧바로 안시연을 알아볼 수 있었다.안시연…안시연은 콩국을 사주겠다고 나갔는데 양혁수의 차에서 내렸다.연정훈은 주변을 살피며 상황을 파악했다.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그렇게 질문하는 것을 보니 안시연은 자신감이 넘치는 듯했다. 안시연은 연정훈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연정훈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사실 안시연은 자신에게 그리 확신이 없었다. 그저 자신과의 내기일 뿐이었다.연정훈의 대답에 따라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결정될 것이다.만약 연정훈이 양민아를 선택한다면 안시연은 깨어난 연정훈에게 이별을 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련 없이 관계를 끝낼 것이다.그러나 안시연의 질문에 연정훈은 안시연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시연은 긴장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양민아는 이 상황을 보고 말했다.“연정훈, 여기서 좀 쉬고 있어. 의사가 곧 도착할 거야.”진수빈이 덧붙였다. “맞아요. 양민아 씨가 한 시간 전에 의사를 부르셨어요.”양민아는 침묵했다.“…”이승우가 웃었다.“한 시간 전에 불렀다고요?”안시연은 사람들을 등지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기에 온 지 겨우 30분밖에 안 됐어요.”그런 다음 진수빈을 바라보았다.“연 대표님의 외투를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진수빈이 옷을 가지러 간 사이에 안시연은 연정훈의 깊은 시선과 마주쳤다. 안시연은 억지로 다가가 연정훈을 부축했다.연정훈은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였다.안시연은 조용히 연정훈을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뒤에 앉혔다. 연정훈은 안시연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듯 보였지만, 안시연은 연정훈이 넘어지지 않도록 연정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이승우는 혀를 차며 상황을 지켜보았다.양민아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안시연의 이런 하찮은 행동이 못마땅해 얼굴을 돌렸다.방 안의 모든 사람은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안시연이 연정훈을 감싸 안는 것이 놀라웠다.침대 위에서 안시
연정훈의 키는 1미터90센티미터가 넘었고 안시연이 연정훈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게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연정훈을 방으로 옮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다행히도 진수빈이 아직 떠나지 않았다. 안시연이 비명을 지르자 진수빈은 급히 달려와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연정훈을 방으로 옮겼고 진수빈이 미리 연락해 놓은 의사도 마침 도착했다.안시연은 즉시 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의사가 작은 의료 장비를 들고 연정훈에게 혈액 검사를 하는 모습을 보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의사가 물었다.“오늘 연 대표님께서 식사하셨나요?”진수빈은 잘 모르겠다고 하며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안 드셨어요.”전화를 끊고 난 후 진수빈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식사는 거의 하지 않고 커피만 서너 잔 마셨습니다.”안시연은 이 말을 듣고 놀랐다.연정훈이 이렇게 아픈데도 커피로만 버텼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의사는 거실에서 진수빈과 소통하며 약 처방 준비를 마친 후, 연정훈에게 수액을 투여하기로 했다.안시연은 한쪽으로 물러서서 조용히 물었다.“심각한가요?”의사는 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먼저 수액을 투여하고 환자가 깨어난 후에 다시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안시연은 침묵했다.의사는 신속하게 연정훈에게 주사를 놓았다.연정훈은 식은땀을 흘리며 평소에 청결을 중요시하던 연정훈은 의식이 돌아오자 일어나려 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어깨를 눌러가며 말했다. “제가 닦아줄게요. 움직이지 마세요.”연정훈은 안시연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으나 안시연이 따뜻한 수건을 연정훈의 목에 대자 비로소 얼굴을 찡그리며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진수빈은 문틈으로 상황을 엿보다가 안시연이 연정훈의 셔츠 단추를 풀며 세심하게 몸을 닦아주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안시연은 겨우 연정훈의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혔다.그 후, 밖으로 나가 죽을 끓이고 다시 돌아와 연정훈의 상태를 지켜보았다.밤 11시가 되어서야 의사가 수액 바늘을 뽑았고 그제야 연정훈도
연정훈은 안시연이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연정훈의 얼굴은 표정 변화 없이 굳어 있었지만, 머리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문가에서 잠시 멈춰 서 있던 안시연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갔다.안시연은 침대에 이불을 펴 두고 눕기도 전에 진수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시연 씨, 연 대표님께 약을 챙겨 드리는 걸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부탁드려요.”안시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진수빈조차도 안시연과 연정훈의 관계가 위태로울 거라고 느끼고 있었다.진수빈이 정중하게 부탁하자 안시연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연정훈이 바로 옆방에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의사가 처방한 약을 준비한 후 안시연은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정훈은 침대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아직 죽은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안시연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답답함을 억누르며 약을 연정훈에게 건넸다. “약을 드세요.”연정훈은 천천히 눈을 뜨고 안시연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잠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안시연은 시선을 거두고 약을 침대 옆에 두려고 했다.안시연이 돌아서서 나가려 할 때 연정훈은 몸을 일으키며 안시연의 손을 정확히 잡았다.안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연정훈의 팔에서 전해지는 비정상적인 온기에 깜짝 놀랐다.안시연이 말하기도 전에 연정훈은 힘껏 안시연을 끌어당겼다.시연은 창가에 떨어져 앉았고 두 팔을 연정훈에게 잡힌 채로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연정훈의 거친 호흡이 안시연에게 선명히 느껴졌다.안시연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연정훈은 더욱 강하게 안시연을 붙잡았다. “나와 헤어지자고?”연정훈은 낮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연정훈의 목소리는 전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들렸다. 안시연이 그렇게 말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에 처하니 안시연의 마음도 바늘로 찔린 듯 아팠다. 안시연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연정훈은 입술을 비틀며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왜?”“내가 너와 결혼하지 않을
연정훈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고 마치 귓가에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연정훈은 지금껏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아본 적이 없었다.시간이든 돈이든 아낌없이 안시연에게 바쳤다.하지만 안시연은 그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어느 집에서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이 나올 수 있었을까.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격렬하게 뛰는 심장은 연정훈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여실히 드러냈다.안시연은 속에 있던 말을 모두 쏟아내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강남 사건 이후, 그들은 한 번도 속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안시연은 진심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그들이 이미 끝났음을 깨닫고 있었다.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안시연은 깊이 숨을 내쉬고 말했다.“약을 드세요. 제가 정훈 씨가 정말로 약을 먹는지 확인하겠다고 진수빈 씨에게 약속했어요.”연정훈의 표정이 굳어졌다.결국 연정훈에게 마음을 털어놓게 된 것도 진수빈 덕분이란 말인가? “벌써 새 남자를 찾으려고 하는데 전 남자의 생사가 아직 너와 상관있어?”연정훈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안시연은 이를 악물었다.약을 먹든 말든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안시연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연정훈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안방으로 돌아와서 자.”“괜찮아요.”“우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야.”안시연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시연이 침대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동안에 연정훈은 이미 자리를 잡고 누워 있었다.방 안은 깊은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잠시 숨을 고른 안시연은 이불을 챙겨오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자자.이 상황에서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겼다.이 상태의 연정훈이 무슨 해코지를 할 것도 아니었다.안시연은 이불을 무심하게 침대 위에 던졌다.연정훈은 그 거친 움직임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침대가 다시 한번 무겁게 들썩였다. 안시연이 그 옆에 누운 것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자 양시연이 콧방귀를 뀌었다.“내 말이 맞죠?”“...”양시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자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나랑 소현주는 가벼운 교제였지 그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었어.”양시연은 믿지 않았다.“결혼 얘기까지 오갔다면서 해본 적 없다고요?”“없어.”연정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훑었다.그러나 진실이 어찌 되었든 이젠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이불을 쭉 당겨 등을 돌려 누웠다.“...”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양시연을 품에 넣었고 양시연은 팔꿈치로 연정훈의 복부를 가격했다.“나 건드리지 마요!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면서!”“...”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뒤로 하고 다시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뽀뽀하고 달래도 효과가 없었다.그러자 연정훈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공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양시연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그게 무슨 소리예요?”“더 자세하게 알려줄게.”“...”양시연은 궁금했지만 겉으로는 질색하며 말했다.“누가 듣고 싶대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다.“말해줄 필요 없어요.”연정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은 드디어 얌전히 품에 안겨 있었고 연정훈은 조금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소현주는 대학에 다니기 전부터 공휘를 만났었다. 사실 이것도 순화해서 한 말이지, 소현주는 아주 많은 남자들과 돈으로 된 만남을 이어갔다.그러니 성폭행으로 몰아간 영상은 진짜와 거짓이 동시에 존재했다.소현주는 연정훈과 같이 지내며 과거가 들킬까 걱정이 많았고 과거의 흔적을 지우려 유학을 변명으로 해외에서 여러 번 회복 수술도 받았다.공휘 주변에는 널린 게 여자였고 소현주에게는 이미 질려버린 터였다. 그러나 연정훈의 여자가 된 소현주를 보며 다시 관심이 생겼다.이 얘기를
양시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양혁수랑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누가 너희 정원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양민아에게 동영상을 넘겼어. 그리고 양민아는 그 영상을 내 할머니에게 보여줬고.”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할머니가 또 정훈 씨한테 보여줬겠네요?”“그래.”양시연이 길게 심호흡했다.“나랑 혁수는...”연정훈이 말을 잘랐다.“영상 속에서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잠이 들었어. 길고양이 길 강아지들을 같이 목욕도 시키고 양혁수는 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널 껴안기도 했어.”연정훈은 머릿속에서 가장 크게 남아 있던 그 영상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멈췄다.“정원의 수도가 터진 날, 두 사람은 흠뻑 젖어버렸고 양혁수가 널 끌어안았어.”양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고 양시연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늘려놨다.“그건... 그건 끌어안은 게 아니라 그냥...”하지만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때는 생각이라는 걸 내려놓고 편히 지내다 보니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냥 물놀이하려는 본인을 막아서는 양혁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잡았다.“지금 나한테 연인 사이였냐고 물어보고 싶은 거잖아요. 혹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관계를 가지진 않았는지 궁금한 거고요.”이 말을 하는 양시연은 양민아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애매모호한 영상을 짜집기해서 보낸 양민아는 이런 사단을 만들고자 작정을 한 것 같았다.연정훈이 한숨을 내쉬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엔 그게 궁금했어.”“그럼 지금은요?”“내가 괜한 생각을 했다고 생각해. 너한테 나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아.”“...”양시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연정훈을 살짝 노려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그걸 아는 사람이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어디에서
포장을 뜯는 소리가 귓가에 스치듯 들렸고 양시연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몸을 살짝 들어 올려 연정훈의 귀에 대고 대답했다.“딱 조금만 더...”“...”“너 너무 우쭐대지 마.”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양시연의 귀 끝에 닿았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양시연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고 단단히 허리를 감싸 안았다.“안 우쭐대면 네가 더 좋아할 만한 거로 보답할게.”양시연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손끝에서부터 힘이 풀려 움직임이 서툴러졌다.연정훈이 양시연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주었고 결국 모든 게 마무리됐다. 잠시 이어진 적막 속 이불 아래에서 부드러운 움직임이 일렁였다.“음...”타국에서의 밤은 그렇게 은밀히 막을 올렸다....새벽 뜨겁고 아찔했던 방 안은 마침내 고요를 되찾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며 몽롱한 기운 속에서 허리 아래로 전해지는 묘한 무력감을 느꼈다.감각이 아스라이 흩어지던 그 순간 양시연은 자신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연정훈이 몸을 떼어내는 부드럽고 세심한 움직임은 양시연의 온몸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고 양시연의 얼굴은 불꽃처럼 붉게 물들었다.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을 열고 천천히 무언가를 정리했다.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 그의 품에서 안정을 찾았고 연정훈은 조심스레 양시연을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연정훈은 그녀를 가슴 위에 편안히 눕히고 단단한 팔로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의 물을 들어 양시연의 입가에 가져다 두어 모금 먼저 마시게 하고 남은 물을 천천히 마셨다.양시연은 서서히 기운을 되찾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순간 막혀있던 사고의 흐름이 갑자기 뚫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정훈 씨, 갑자기 오게 된 이유가 정말로 나 보고 싶어서예요?”연정훈은 그녀를 꼭 안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다른 이유가 또 있을까?”양시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길을 피하며 조심스레 물
남편이라는 단어는 사실 꽤 진지한 단어였지만 연정훈은 그 단어마저 가볍게 만들어버렸다.양시연은 부끄러운 듯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차라리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끝내 연정훈을 ‘남편’이라 부르지는 않았다.연정훈이 다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양시연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그녀의 눈빛은 애교와 질책이 섞여 있었다.“당신, 교수잖아요. 제대로 된 지식인이라면서 왜 맨날 이런 이상한 짓만 배워오는 거예요?”연정훈이 그녀의 손을 떼려 하자 양시연은 연정훈을 째려보며 손에 더 힘을 주었다.“멀리까지 와서 나 괴롭히려고 온 거예요?”연정훈은 목젖이 살짝 움직이며 양시연을 바라보았고 연정훈의 눈빛은 점점 깊어져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양시연은 마음속으로 흐뭇해하며 손을 내려놓고 연정훈의 입술에 상을 주듯 가볍게 입 맞췄다.“말 잘 들어요. 먼저 저녁 먹고 다 먹으면 샤워해요.”연정훈이 무언가 대꾸하려던 순간 양시연이 말을 끊었다.“비행기에서 씻었다고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연정훈은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살짝 웃으며 한 번 더 연정훈의 입술에 입맞춤하고 그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장난스레 속삭였다.“씻었으면 조금 있다가 저랑 같이 샤워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정훈의 숨소리가 깊어졌고 곧바로 강렬한 입맞춤이 이어졌다.“알겠어. 밥부터 먹자.”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의 반응에 흡족해했다.집에서 가져온 음식은 양지원 쪽에 있었지만 양시연은 굳이 가져오지 않고 새로 한 상을 주문했다. 그녀는 옆에 앉아 연정훈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가리키는 음식마다 그는 더 많이 먹었다.조용한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재회로 인한 설렘이 잦아들고 따스한 온기가 가득 차올랐고 3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연정훈의 아내로서 그의 곁에 앉아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연정훈은 그녀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고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포크로 감자를 찍어 그녀의 입에 가져다
“내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보고 싶었죠. 그런데...”양시연이 부드럽게 말을 하던 중 연정훈이 그녀의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려 키스했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자 양시연은 잠시 놀라 눈을 감고 앓는 소리를 냈다.곧 그녀는 부드럽게 입을 벌려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서두르지 않는 그들의 키스는 부드럽고 길게 이어졌고 키스가 끝나자 양시연은 살짝 헐떡이며 촉촉해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두 볼이 붉게 물든 양시연은 발끝을 들어 연정훈의 목에 팔을 감고 손끝으로는 연정훈의 귀를 장난스럽게 간지럽히며 속삭였다.“이렇게 빨리 온 거 보면 전화 끊자마자 바로 비행기 표 예매한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여 아주머니가 반찬 준비하시는 걸 기다렸어.”양시연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듯했지만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달려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걱정스레 물었다.“저녁은 먹었어요?”“비행기에서 먹었어.”“뭘 먹었는데요?”연정훈은 대답하려다 순간적으로 말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양시연이 그의 귀를 잡으며 말했다.“거짓말하지 마요.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진수빈 씨가 정훈 씨랑 같이 왔는데 방금 막 배달을 시키더라고요.”연정훈은 침묵했다.“...”그가 들킨 후 민망한 듯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하려 하자 양시연은 웃으며 그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낮게 말했다.“장난치지 말고요. 우선 뭘 좀 먹고 씻고 푹 쉬어야 해요.”“안 피곤한데.”“그러면 정훈 씨...아!”양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를 갑작스럽게 들어 올렸고 그는 몇 걸음 만에 침대로 다가가 양시연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몸을 기울였다.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편히 누웠지만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을 막았다.그녀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며 장난스럽게 입을 내밀었다.“나 보고 싶었다는 게 이런 거였어요?”‘뭐야. 온통 엉큼한 생각뿐이라니.’연정훈은 전화를 받은 뒤 감정이 북받쳐 단숨에 이곳으로 달려왔다.비행기에서도 그녀에 관한 생각
양시연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연정훈 옆에서 갑자기 손 하나가 뻗어와 일곱여덟 개의 포장 음식을 담은 봉투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양시연은 놀랐다.???연정훈은 반 발짝 물러서더니 진수빈에게서 봉투를 받아 들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여 아주머니께서 준비하신 거야. 아마 오리백숙도 있을 거야.”양시연의 눈이 반짝였고 늦은 밤 양지원은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작은 둥근 테이블에 앉아있었다.갑작스럽게 나타난 사위가 하나씩 음식을 꺼내 그녀 앞에 놓았고 양지원은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음. 익숙한 향이야.’마지막 음식 상자가 열리자 양시연이 고개를 쑥 내밀며 확인하더니 감탄했다.“오리백숙이다!”양시연은 얼른 오리백숙을 양지원 앞에 놓았고 양지원은 살짝 헛기침하며 어른으로서의 위엄을 세우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연정훈에게 물었다.“갑자기 여긴 왜 온 거야?”연정훈은 약과 한 조각을 양시연의 접시에 놓아주며 고개를 들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양시연이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보러 왔습니다.”양지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쳇.’양시연은 민망한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연정훈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만해.’하지만 연정훈은 태연한 표정으로 한쪽 손으로 양지원에게 차를 따라주면서 말했다.“원래는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 세운에서 공항으로 가던 길에 양창수 아저씨를 우연히 만나서 잠시 지체됐습니다.”양시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고 양지원은 오리백숙 다리를 잡던 손을 멈췄다.“양창수가 공항에 갔었다고?”양지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자 연정훈은 차분히 말했다.“양석진 씨께서 병환 중이시라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다시 병원에 들러 안부를 여쭙고 왔습니다.”그 말에 모녀는 동시에 긴장했다.“아직도 회복이 안 됐다는 거야?”양지원은 얼굴을 찌푸렸다.“가벼운 병이라며? 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데?”양시연은 연정훈의 태도를 잘 아는 터라 반신반의하며 음식을 씹으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거의 다 나아지신 상태입니다.”
양시연 자신도 하루하루가 정신없었기에 다른 사람을 설득할 여유는 없었다.결국 그녀는 양지원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아빠가 너무 바빠서 병날 정도로 일했는데 엄마는 훌쩍 떠나버렸잖아요. 그것도 해외로 갔으니 쫓아갈 수도 없고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아직도 회복 못 하고 여전히 아프셨다면요? 세운에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불쌍하시겠어요.”양지원은 이미 속으로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석진이 어떤 사람인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다만 이야기가 심혜설로 넘어가면서 질투심이 솟아오른 데다 최근 몇 년간 양석진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오냐오냐하며 버릇을 잘못 들인 탓에 젊었을 때처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일도 크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그렇게 생각하니 양지원은 콧방귀를 뀌며 쏘아붙였다.“내가 뭐가 아쉬워서? 난 너처럼 남자한테 마음 약해지지 않아.”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일부러 한숨을 쉬었다.“알겠어요. 엄마는 걱정 안 한다지만 저는 제 아빠니까 걱정돼요.”그러면서 그녀는 양지원 쪽으로 빠르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지금 아빠한테 전화해 볼까요? 엄마도 듣고 싶으세요?”양지원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나가서 통화해.”양시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레 물었다.“정말요? 진짜예요?”양지원은 침묵했다.“...”양지원이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자 양시연은 정말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지만 양시연이 전화를 걸기도 전에 양지원이 빠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휴대폰을 낚아챘다.“무슨 전화를 걸어. 시간이 몇 시인데 얼른 자.”양지원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양시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양지원을 와락 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안 걱정한다면서요? 근데 사실은 아빠가 바쁘니까 방해될까 봐 걱정되는 거죠? 거긴 이제 막 오전일 텐데요.”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잠든 척했다.양시연은
“쳇. 오글거리고 의지가 연약해.”양지원은 단 세 마디로 양시연을 평가했다.양시연은 양지원이 잠든 줄 알았지만 사실 그는 자는 척하며 양시연과 연정훈의 통화를 끝까지 몰래 엿듣고 있었다.“엄마.”양시연이 살짝 투정을 부리며 말했고 양지원은 슬며시 웃더니 이불 속으로 몸을 말았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연정훈 진짜 오는 거야?”양시연은 전화를 끊고 나서 대답했다.“오지 말라고 했어요. 엄마 상태 나아지면 저와 같이 돌아가요.”양지원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의아해하는 양시연을 보고 중얼거렸다.“혹시 정훈 씨가 오길 바라는 거예요?”양지원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오리백숙 먹고 싶어서 잠깐 사위 덕 좀 보려던 거야. 뭐야.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네.”양시연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양지원의 이마에 손을 얹고 말했다.“다행이에요. 열은 내렸어요. 빨리 나아야 같이 돌아가서 먹죠.”“너 자꾸 돌아가자고 하는데 진짜 내가 빨리 나아지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그냥 연정훈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장난스럽게 말했다.“며칠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그래?”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 양지원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갑자기 정훈 씨와... 음...”양시연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얼굴이 붉어졌고 입술을 꼭 다문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양지원은 여 아주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 두 사람의 관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상황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양지원은 양시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아이고 아주 못났어. 벌써 그 연정훈한테 완전히 잡혀버렸네.”“그런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오히려 내가 그 사람을 완전히 잡고 있거든요. 지금 정훈 씨는...내 말만 들어요!”양지원은 양시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대꾸했다.“그래. 다 네 말 듣는다. 아
“아 그럼 말 안 할게요. 오빠가 말하세요.”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반대편에서 양시연은 웃으며 양혁수의 건강 상태에 대해 자세히 물었지만 양혁수는 혀를 차며 아는 것이 없다는 듯 대답을 하지 않았다.양시연은 변여름을 바라보았고 변여름은 입술을 다물고 입에 지퍼를 채우는 제스처를 했다.양혁수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다가 어쩔 수 없이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한편 변백호는 휴대폰을 보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눈치 좀 챙겨. 우리 집 공주가 언제 사람을 이렇게 친절하게 대했어?”양혁수는 웃으며 변여름에게 과일 주스를 건넸고 변여름은 주스를 받아 들고 고개를 약간 들어 올리며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아직 어렸고 정말 어린 애였기에 모두가 그녀를 귀여워하며 특별히 많이 챙겨주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양혁수는 그저 변여름을 어린 동생처럼 여기며 말하면서도 여전히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신혼인데 기분 어때?”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럭저럭.”‘그럭저럭?’양혁수는 테이블 위의 분위기 조명을 통해 양시연의 얼굴에 기색이 좋은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양혁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양시연 역시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 몰랐다.양시연은 그저 그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러 왔을 뿐이었고 그가 괜찮다는 걸 보고 안심했다.마음속으로 시간을 계산하며 아마 연정훈이 아침 시간이 되었을 거로 생각했고 그녀가 사진을 찍어 보내려고 하던 찰나 마치 서로 통하는 듯 먼저 사진을 보냈다.잔치국수 한 그릇이었다.양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빠르게 타자를 했다.[왜 이렇게 간단하게 먹어요?][네가 없으니까 여 아주머니가 귀찮아서 안 해줘.]양시연은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사진의 오른쪽 위에 있는 접시 가장자리를 보고 즉시 그가 어린애처럼 장난치는 걸 알았다.[전체 테이블 사진을 찍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