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신부는 친척들과 인사를 나눈 뒤 예약해둔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려 했다.나는 원래 대충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그런데 윤세아가 몰래 나를 잡고 구석으로 끌어당겼다.온화한 미소는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원수 보듯 보고 있었다.“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난 그냥 친구 부탁으로 예비 신부인 척하는 거야. 부모님을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고 효도하고 싶다기에 내가 부탁을 들어준 거라고. 난 지금 좋은 일을 하는 거니까 끼어들어서 일 망치는 순간 우린 헤어지는 거야.”분명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녀였다.그런데 윤세아는 손쉽게 이별로 나에게 협박하고 있었다. 마치 나와 윤세아의 감정은 호떡 뒤집기 하는 것처럼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다소 믿기지 않았다.“이 집은 우리 신혼집이야. 넌 내 여자친구라고.”윤세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말했잖아. 난 지금 친구를 도와주고 있는 거라고. 부모님께 결혼 재촉을 엄청 받아서 숨 막힐 지경이라잖아. 그리고 나도 괜찮다는 데 넌 왜 그래? 그렇게 싫으면 나중에 신혼집 매물로 내놓고 다시 새로 계약하면 되잖아. 어차피 지금 인테리어도 마음에 안 들었어.”그녀는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처음 그녀에게 집을 공개할 때 여기저기 자랑했었다.윤세아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이 과연 집인 것일까. 아니면 나와의 관계인 것일까.씁쓸한 감정이 쓰디쓴 커피를 마신 것처럼 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요즘 자꾸만 속이 울렁거렸다.그녀는 이런 나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문자를 확인하며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더니 갑자기 확 고개를 들며 짜증스럽게 한마디 한 후 가버렸다.“난 먼저 갈게. 차라리 오지 마. 아니면 와도 가만히 있어 줘.”나는 멍하니 서서 자조적으로 웃었다.내가 거길 어떻게 갈 수 있을까.그곳에 가면 아주 행복한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 아닌가.내가 호텔로
사실 오늘은 나와 신수아의 행복한 날이었어야 했다. 신수아는 나의 부모님을 만나 뵙기로 약속했었다.사귄 지 어느덧 3년이 되었는데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것을 계속 미루고 미뤘다.신수아는 매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뤘다. 긴장해서 안 된다든지, 일이 바쁘다든지, 몸이 안 좋다든지,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니라던지 하면서 말이다.3개월 전에 우리는 결국 부모님을 만나기로 했었다.나의 부모님은 아껴두었던 옷까지 꺼내 입고 예약해둔 식당에 와서 앉아 있었다.그런데 신수아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나는 연거푸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음만 들려올 뿐이었다. 한참 지나서야 신수아는 내게 문자를 보냈다.[친구가 교통사고 났대.]갑작스럽고 어처구니없는 핑계에 나는 신수아가 또 피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신수아는 예전에 나에게 부모님이 이혼해서 결혼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 적 있었다. 그때의 나는 마음이 아파 얼른 품에 끌어안으며 신수아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 하겠다고 했었다.그래서 나는 또 여자친구가 나타나지 않은 잘못을 나에게로 돌렸다.“죄송해요. 제가 시간을 잘못 알려줬나 봐요. 마침 다른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하니까 다음에, 다음에 다시 데리고 올게요.”그렇게 부모님은 더는 나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내가 결혼 압박을 받기 싫어 일부러 없는 여자친구를 있는 것처럼 지어냈다고 생각했다.“대기업 회사 대표도 밥 먹을 시간 20분은 낼 수 있단다. 그런데 네 여자친구는 뭐라고 나타나지 않는 거지?”나는 할 말이 없었다.3개월의 노력 끝에 며칠 전 신수아는 다시 우리 부모님을 만나 뵙겠다고 승낙했다.나는 미루면 미룰수록 문제가 생길까 걱정되었기 때문에 바로 이번 주 주말로 약속을 잡았다.그런데 어제 신수아는 또 나에게 통보식 문자를 보냈다. 절친한 친구가 중요한 일로 도움을 바라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도와줘야 한다고 말이다.상견례는 그렇게 또 취소되었다.그때 나의 어머니는 야유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내가 그럴 줄
나는 미소를 지었다.“똑똑히 들었잖아. 아니야? 우린 헤어졌어.”“억지 부리지 마.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순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 거야.”윤세아는 아주 엄숙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알고 보니 그녀도 알고 있었다. 헤어지자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님을.다만 절대 헤어질 리가 없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렇듯 함부로 나한테 말하며 협박한 것이다.“난 내가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 없었어. 우리 진짜 헤어지자.”나는 이내 문을 닫으며 내 의사를 정확히 전달했다.나와 윤세아는 끝났다....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다음 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3년이나 살았던 이 집에서 나왔다.부모님은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크고 작은 나의 짐을 본 두 사람은 바로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아들,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우리한테 말해 줘. 그래야 우리도 널 도와줄 수 있을 거잖아. 함께 하면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을 거야.”부모님 앞에서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순간 어제 일이 떠오르며 울컥 감정이 올라오더니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두 사람은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안아주었다.진정한 뒤 나는 나의 여자친구에 관해 전부 말해주었다.아버지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고리타분한 사람이었던지라 내가 해준 말을 듣자마자 충격받게 되었다.“그러니까 그 여자애가 네 여자친구였다고? 그 신혼집도 네 집이고?”어머니는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나는 우리 아들이 아주 훌륭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니까! 너무 훌륭해서 누군가 질투하고 있는 거잖아. 그래서 네 걸 빌려서라도 자랑하고 싶은 거지! 그리고 그 여자애는 엄마가 어제 보긴 했는데 별로 복스러운 아이가 아니었어. 보는 앞에서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까 예의상 말한 거야. 거봐. 내 안목은 정확하다니까. 그 아이와 헤어진 건 잘한 일이야. 앞으로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잖니!”“그래, 네 엄마 말이 맞는단다.”어머니와 아버지는 한마디씩 하면서 나를
사실 이 게임은 예전에 윤세아와 함께하던 게임이었다.만약 둘 중 누군가 화가 났는데 상대가 그 이유를 모른다면 화가 난 사람이 이 게임으로 먼저 상대에게 화해할 기회를 주기로.하지만 그건 나와 윤세아의 감정이 여전할 때에야 소용이 있는 것이다.게다가 대부분 나만 돈을 냈다.윤세아는 단 한 번도 돈을 낸 적 없었고 매번 누가 더 화가 났는지를 나와 경쟁을 벌였다.다른 건 몰라도 지금 문자로 전송된 이 금액은 확실히 이상했다.의문을 품고 있던 때 헤어진 걸 모르는 친구가 나에게 윤세아 SNS를 캡처해서 나에게 보내주었다.[뭐야? 왜 이렇게 한가해? 여행도 가냐.]윤세아가 SNS에 올린 건 패키지여행 전단지였다.400만 원은 2인 일반 패키지였고 600만 원은 업그레이드된 2인 VIP 패키지였다.윤세아는 정말이지 계획적이었다.이런 방법으로 나에게 먼저 사과하라고 압박할 뿐 아니라 내가 준 돈으로 전 남자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나는 헛웃음만 나왔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나는 바로 SNS에 로그인한 뒤 게시글을 올렸다.[슬기로운 솔로 생활. 역시 자유가 최고지!]그러자 다들 내가 커플 지옥에서 탈출한 것을 축하해주는 댓글을 달았다.나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윤세아가 나에게 전화하기 전까지 말이다.절로 미간이 찌푸려져 받지 않았다.벨 소리가 끊어버릴 때까지 나는 받지 않았지만 끈질기게 또 울렸다.티브이를 시청하던 나의 어머니가 고개를 돌리며 나에게 물었다.“전화는 왜 안 받니?”“아, 회사 전화에요. 퇴근했는데도 자꾸 짜증 나게 연락하네요.”나는 어머니가 의심하기 전에 얼른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윤세아의 잔뜩 볼멘소리가 들려왔다.“전화는 왜 이렇게 안 받아? 대체 뭐 하고 있었던 거야?”“무슨 일인데.”윤세아는 차가움이 뚝뚝 떨어지는 나의 목소리에 내가 화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성현 씨, 어떻게! ...왜 아직도 짐 싸라는 말을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의 차가운 표정이 그 대답을 대신했으리라 생각했다.그녀와 함께 보냈던 시간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그리고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닌 영화 밖 관객이었다.윤세아를 다시 만나게 되어도 나는 더 이상 가슴이 설레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만 치솟았다.그녀는 손을 뻗으며 나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공기만 잡혔다.윤세아는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아무것도 잡지 못한 자기 손을 보았다.“왜? 대체 왜? 고작 내가 신혼집을 빌려 준우 씨한테 신부 연기를 해줬다고 이러는 거야? 하지만 준우 씨는 성현 씨 먼 친척이라면서! 난 그냥 순수하게 도와주려고 했을 뿐이라고.”“나도 알아. 구준우가 네 대학교 시절 사귄 남자친구였다는 거. 윤세아, 우리 가식적으로 굴지 말자. 네가 그날 어떤 기분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네가 더 잘 알잖아.”윤세아는 여전히 내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소리를 질렀다.“내가 돈 낼게. 이번에는 내가 돈 낼게. 그러면 되지? 내가 게임 도구를 살 테니까 화내지 말아줘. 내가 지금 당장 게임 올라서 살게.”그녀는 다소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눈에선 이미 눈물이 흘러나왔다.미처 차단하지 못한 SNS 계정으로 윤세아가 200만 원 입금했다는 알림이 떴다.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나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진정한 사랑은 게임으로 하는 게 아니야. 우린 이미 끝났어. 난 더 이상 너랑 놀아줄 시간 없어.”핸드폰이 울렸다. 집으로 돌아와 얼른 저녁을 먹으라는 부모님의 문자였다.나는 더는 윤세아를 상대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단호하게 자리를 떠났다.윤세아는 제자리에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편안한 나날을 보냈다. 나의 어머니는 또다시 내 결혼에 관해 걱정하면서 매일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잔소리를 해댔다.처음 집으로 돌아왔을 때와 부모님의 태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출근하기 전, 어머니가 나에게 당부했다.“저녁에 손님이 있을 거야. 함께 식사해야 하니까 늦
윤세아는 온몸이 젖어 있었다. 손에 분명 우산이 있으면서도 왜 쫄딱 젖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나는 하마터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 할 뻔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도 나는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구준우를 찾아가 위로를 받을 테니 말이다.윤세아의 일은 더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물론 내 일도 윤세아가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얼른 집에나 가.”나는 오윤서와 다시 만나게 되어 아주 기분이 좋았지만 그 기분을 윤세아가 망쳐버렸다.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 소금을 뿌리면서 윤세아를 쫓아내고 싶었다.윤세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난 그냥 밖에 비가 내리기에 성현 씨가 우산 없이 출근했을까 봐 우산 가져다주려고 온 거였어.”그러자 옆에 있던 오윤서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니까 우산을 가져다주려고 회사 앞이 아닌 집 앞에서 기다렸다고요? 은행 찾아가서 돈 내놓으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달라요.”오윤서의 이상한 비유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그래, 맞아. 윤세아는 비가 아무리 세게 내려도 그간 우산 한 번 가져다준 적 없었잖아.'만약 우산이 하나뿐이었다면 윤세아는 항상 자기가 절반 이상 끌어당겨 썼다. 행여나 빗물에 젖을까 봐 말이다. 우산 밖으로 몸이 나온 나를 신경 쓴 적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가식적인 모습으로 우산을 든 채 내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에 쫄딱 젖으면 내 마음이 약해질 것으로 생각한 지 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윤세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를 빠득 갈며 나를 보았다.“성현 씨, 나 들어가서 빗물이라도 좀 닦으면 안 될까?”드디어 목적을 드러냈다.불쌍한 척 연기를 하며 우리 집으로 들어간 후 나의 부모님의 동정을 사는 것이 목적이었다.인간과 인간 사이엔 진심이라는 것이 존재했다.윤세아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영원히 어떻게든 나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이
다음 날이 되자마자 나는 빠르게 신혼집으로 달려갔다.그런데 열쇠를 바꾸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다행히 어제 일깨워 준 오윤서 덕에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대책까지 세웠다.나는 서두르지 않고 태연하게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리면서 구준우에게 선물을 준다는 핑계를 대며 신혼집으로 불렀다.친척들이 내 신혼집 앞에 모이자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구준우는 한참 지나서야 현관문을 열어주며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구세요? 음식 배달이에요?”그는 상의도 입지 않았다. 달랑 반바지 하나만 입은 채 나왔다.그러자 친척들이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안에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준우 씨, 누구야?”목소리의 주인공은 윤세아가 아님을 눈치챘다.친척들의 기억력은 아주 좋았다. 전과 다른 여자의 목소리에 바로 구준우를 밀친 후 안으로 들어갔다.“결혼을 앞둔 새신랑이 지금 이게 다 뭐 하는 짓이니? 집안 망신을 네가 다 시키는구나!”“꺄악!”집 안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소파에선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알몸 상태였던지라 얼른 방으로 숨어버렸다.인과응보이다.“구준우! 어떻게 이런 상스러운 짓을 할 수가 있는 거니?!”“살면서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구나! 결혼을 코앞에 두고 감히 다른 여자랑 뒹굴어?!”친척들은 구준우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하기 시작했다.분위기가 험악해져 가고 있을 때 언제 도착한 건지 모를 윤세아가 문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녀는 이내 눈을 반짝이더니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 뒤로 숨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성현 씨, 나 보러 온 거야? 드디어 나 용서해주기로 한 거야?”나는 질색하며 윤세아가 뻗은 손을 피해버렸다.윤세아는 서운한 듯 입술을 짓이기며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나는 픽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내 신혼집에서 구준우랑은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윤세아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목소리도 덜덜 떨렸다.“난 그냥, 그냥 지낼 곳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