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차갑고 거리감 느껴지는 눈과 마주치자 서유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꼬집고 있는 것이 보였다.방금 이승하는 그녀의 허리를 꼬집어 소파에서 그녀를 들어 올렸을 것이다.지금 그녀는 소파에 반쯤 누워 있고 남자는 그녀의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자세가 약간 이상야릇했다.서유는 부드러운 작은 손을 내밀어 남자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손이 그의 셔츠 소매에 닿자마자 남자는 크게 호통을 쳤다.“만지지 마!”서유는 놀라서 손이 굳어졌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그녀는 순순히 손을 움츠렸다. 또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허리에 손을 얹고 놓지 않는 남자의 손을 보았다.서유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면서, 그는 계속 그녀를 만지고 있었으니. 이 남자는 정말 억지를 부리고 있다!서유는 감히 그를 쳐다볼 수 없어서 고개를 떨구고 나지막이 물었다.“이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무서워서인지 몸이 허약해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이승하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의 몸을 덮고 있는 남자의 정장 코트를 보았다.너무 눈에 거슬려 그 코트를 집어 쓰레기통 쪽으로 던졌다.서유는 코트가 쓰레기통에 정확하게 버려지는 것을 보고 안색이 약간 변했다.“이 대표님, 김 대표님 코트를 버리려고 저를 찾아오셨나요?”비록 언제 김시후가 그녀에게 코트를 덮어줬는지 모르지만, 이승하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행동은 도를 넘었다!‘내가 싫으면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될 것을 왜 나를 괴롭히냐고?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화가 났던 서유는 갑자기 어디에서 나온 용기인지 남자를 세게 밀었다.그녀는 억지로 몸을 지탱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휴게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승하가 그녀를 확 잡아끌었다.서유는 그대로 남자의 품에 와락 안기게 되었다. 마치 벽에 부딪힌 것처럼 아파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품에 가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이 대표님, 대체 왜 이러세요?”
“말해!”이승하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얇은 입술이 그녀의 뺨에 닿기까지 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이승하는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설명할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야!”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뒤섞여 서유는 진퇴양난에 빠졌다.앞에는 이승하, 뒤에는 김시후, 그녀는 중간에 끼어 죽기보다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설명할 것도 없어요. 언제부터 알았든 이 대표님과 상관없잖아요.”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승하가 인내심을 잃어갈 무렵에야 비로소 이 한 마디를 꺼냈다.“나랑 상관이 없다...”이승하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 한 마디를 반복하더니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칼로 깎은 듯한 정교한 얼굴이 다가오자 서유는 순간 심장이 반 박자 빠지는 것 같았다.그의 입술은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그녀의 붉은 입술에 바짝 다가왔다.서유는 이승하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조금 두렵기도 하고 조금 찔리기도 했다.그녀가 손을 꽉 쥐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이승하가 갑자기 차갑게 말했다.“김시후가 바로 송사월이니까 날 속인 거지? 내가 두 사람의 과거를 아는 게 싫어 거짓말을 했지. 맞지?”그의 말은 마치 폭탄처럼 서유의 마음속에서 폭발했다.‘김시후가 송사월이라는 것을 벌써 알아챘다고? 역시 이 사람 앞에서 잔꾀를 부리면 안 되겠네.’그의 두뇌와 능력은 보통 사람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입을 꾹 다문 그녀의 모습은 이승하의 추측을 인정하는 셈이었다.이승하는 원래 떠본 말이었지만, 김시후가 진짜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송사월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승하가 알고 있는 김씨 가문과 관련된 명문가의 비화는 몇 년 전 잃어버린 둘째 도련님을 5년 전에 찾아낸 것뿐이었다.서유는 5년 전에 몸을 팔기 시작했고 김시후는 5년 전에 되찾았으니 시간이 딱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두 사람이 오래 알고 지냈다고 했다.이 모든 것은
서유는 마음이 너무 아프고 답답하고 억울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침묵에 이승하는 눈 밑의 분노가 점차 실망으로 바뀌었다.이 여자는 확실히 능력이 있었다. 매번 이승하가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고 찾아오게 만드니 말이다.근래에 자신이 했던 일을 생각하니 이승하는 황당무계하고 또 어리석다고 생각했다.그는 갑자기 정신이 든 듯 서유를 확 팽개쳤다. 그 실망한 눈동자는 금세 차가운 모습으로 변했다.“앞으로 다시 널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말을 남긴 그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서유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빠른 걸음으로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이 문이 열리면 이승하가 다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그녀는 갑자기 달려들어 이승하를 막았다.그녀는 어눌한 말투로 설명했다.“미, 미안해요. 전에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저랑 사월이, 아니, 김시후 씨는...”“나랑 상관없어!”이승하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가 너를 찾아온 이유는 그저 속은 게 불쾌해서야. 지금 그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 네 설명은 중요하지 않아.”이승하의 말은 마치 차가운 물처럼 서유의 몸에 끼얹었고, 그녀는 온몸이 차가워졌다.그에게 하고 싶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서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살펴 가세요.”그녀는 말을 마치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승하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고 남자는 1초도 더 머물지 않고 휴게실을 떠났다.서유는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을 보면서 마치 심장에 구멍이 뚫린 듯 텅 빈 느낌이었다.몸까지 나른해지자 서유는 버티지 못하고 벽을 짚고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인 채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물은 마치 줄 끊어진 구슬처럼 멈추지 않았다.‘이번에는 아마 진짜 끝이겠네...’휴게실을 나온 이승하는 문 앞을
“그리고 서유 씨는 어릴 때부터 송사월 씨와 함께 자란 죽마고우로 성인이 되면서 연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5년 전, 송사월 씨가 교통사고가 났고 당시 막 졸업해서 돈이 없었던 서유 씨는 몸을 팔아서 남자친구를 구해야 했죠. 목숨은 구했지만 송사월 씨는 기억을 잃었고 서유 씨를 까먹은 후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왕래하지 않았어요.”소수빈은 조사한 내용을 대략 설명했고 세부 사항은 언급하지 않았다.그는 두 사람이 계속 왕래하지 않은 이유를 잘 몰라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승하는 이 자료들을 보더니 정교하고 입체적인 얼굴이 점점 차가워졌다.그는 김시후가 송사월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서유가 송사월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고 추측했다.다만 직접 듣고 직접 보고 나니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그가 원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깨끗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몸조차도 깨끗하지 않았다.“그날 서유를 내 방으로 들여보내기 전에 몸을 검사했었나?”소수빈은 이승하가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당시 서유 씨를 사고 나서 맨션으로 바로 데려갔어요. 그저 깨끗하게 씻기라고만 분부하셔서 신체는...”이승하는 그날 클럽 앞을 지나가다가 어찌 된 일인지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비에 흠뻑 젖어 있는 서유를 마음에 들어 했다.급하게 그녀를 원했기에 몸을 검사하는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사람을 보내 서유를 깨끗하게 씻긴 후 바로 이승하의 방으로 보냈다.그런 서유에게 첫사랑이 있다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이승하는 소수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간파한 듯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스캔했다.눈에 가득 찬 한기가 소수빈의 몸에 스치자, 그는 놀라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대... 대표님, 혹시 서유 씨가 수술했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만약 처음이 아니라면 이승하는 절대 서유에게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오랫동안 스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지금 이승하가 몸을 검사했는지를 묻는
이런 이승하의 모습에 소수빈은 갑자기 걱정이 앞섰다.이승하는 항상 감정 조절에 능한 사람이었지만 서유 때문에 이미 여러 번 통제력을 잃은 적이 있었다.“대표님...”소수빈은 이승하가 이미 서유와 헤어졌으니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이런 말을 내뱉자니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고 이승하에게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서유는 이승하의 첫 번째 여자였다. 침대에서 오랫동안 괴롭혔으니 아마 어느 정도 정이 들었을 테고, 쉽게 내려놓을 수 없을 것이다.이승하는 말을 잇지 못하는 소수빈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다.그는 눈에 가득 찬 한기를 거두고 자료를 다시 소수빈에게 던졌다.“분쇄기로 갈아 버려.”차가운 목소리, 아무런 감정도 깃들지 않은 그의 모습은 마치 무정한 이승하로 돌아간 듯했다.소수빈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상 위의 자료를 들어 분쇄기에 넣었다.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고, 소수빈은 이승하의 동의를 받고서야 돌아서 문을 열었다.“대표님.”심사위원장 여진우가 들어왔다.“입찰 끝났습니다. 심사위원들 만장일치로 화진 그룹에게 투표했습니다.”여진우는 깍듯하게 인사한 후, 입찰 결과를 보고했다.“화진 그룹?”이승하는 차갑게 웃더니 안색이 좀 굳어졌다.여진우는 이승하가 화진 그룹에 대해 의견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서둘러 말했다.“투표 결과는 아직 공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표님께 개발권을 어느 그룹에 넘길 것인지 물어보려고 찾아왔습니다.”“다른 그룹의 입찰서는요?”“여기 있습니다.”여진우는 손에 든 입찰서를 재빨리 이승하에게 넘겨주었다.이승하는 오후에 현장에 없었으니 다른 그룹의 입찰 정황을 몰랐다.그가 업무를 보고하러 왔으니, 당연히 오후에 진행된 다른 그룹의 입찰 서류를 챙겨왔다.이승하는 파일을 대충 뒤적거리더니 견적서와 다양한 매개 변수를 확인했다.불과 몇 분 만에 이 회사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너...”연지유는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당장 안으로 뛰쳐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막 실험실에서 나온 이연석이 그녀가 경비원과 다투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다가갔다.“무슨 일이죠?”이연석을 본 연지유는 얼굴빛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녀는 성질을 거두고 경비원을 가리키며 고자질했다.“연석 오빠, 내가 승하 보러 들어가겠다는데 이 경비가 날 막잖아요!”경비원은 그녀가 이연석을 아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녀가 방금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다.‘이 여자, 진짜 대표님 약혼녀라고? 그럼 나 이씨 가문의 작은 사모님에게 밉보인 거야?’경비원이 이연석을 쳐다보니, 그는 자신을 유유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경비원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난 끝장이다. 고임금 일자리를 잃게 생겼어!’“천아, 아주 잘했어. 연말에 보너스 두둑이 챙겨줄게!”경비원은 어리둥절했다.갑자기 하늘에서 떡이 떨어질 줄이야!“연석 오빠, 대체 왜...”연지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연석이 차가운 목소리로 끊었다.“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 건 우리 형의 지시를 따랐기 때문이야.”“우리 직원을 배려하기는커녕 오히려 고함을 지르다니,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방금 연지유가 성질을 부리는 모습을 본 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이연석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태생적으로 거만한 그녀는 말단 직원을 무시하면서, 항상 온화하고 너그러운 척했다.이연석은 진작 그녀에게 불만이 있었다. 이승하가 아니었다면 그는 연지유와 말도 섞지 않았을 것이다.“연석 오빠, 왜 굳이 나랑 맞서려고 그래요?”이연석이 자신을 도우러 올 줄 알았는데 결과는 팔이 밖으로 굽었다.원래 화가 잔뜩 났던 연지유는 이승하에게 경비원 앞에서 무례했다는 소리까지 들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너랑 맞서려고 한 거 아니야. 그저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했을 뿐이야. 만약 이의가 있다면 승하 형 찾아가서 일러바쳐!”“이연석!”연지유는 고함을 지르며 손에 든 가방을 이연석을 향해 내리쳤다
입찰 결과에 대해 김시후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그는 계약서에 사인한 후, 바로 회의장을 떠나 휴게실로 돌아갔다.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직 깨어나지 않은 서유를 보고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김시후가 다가가 서유를 가볍게 밀었지만 그녀는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연속 몇 번이나 불렀지만 서유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전에는 자는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보니 뭔가 이상했다.이건 자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다.김시후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소준섭에게 전화를 걸었다.“준섭아, 심장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원래 잠이 많아?”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던 소준섭은 어리둥절하더니 한참 후에야 그가 묻고 있는 것이 누군지 생각났다.“심장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잠이 많기는 하지...”“한 번 자면 잘 못 깨어나고 그래?”보통 심장병은 그렇지 않지만 심부전이라면 가능했다.소준섭은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심장병을 앓고 있는 서유가 김시후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아마 피곤해서 깊이 잠든 걸 거야. 큰 문제는 아니니까 이따 깨어나면 괜찮아질 거야.”소준섭은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여전히 숨기는 것을 선택했다. 환자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의덕이었다.소준섭의 말을 들은 김시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최근 자신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랴, 또 입찰에 참여하랴 아마 피곤할 것이다.김시후는 전화를 끊고 소파에 누워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서유를 바라보았다.가기 전에 분명 그녀에게 외투를 벗어 준 것 같은데 왜 사라졌을까?김시후는 좌우를 둘러보고 나서야 그 양복 외투가 쓰레기통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금방 펴진 그의 미간이 다시 틀어졌다.‘내가 이렇게 싫을까? 내 외투를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싫은 걸까?’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상실감이 지금 이 순간 점점 커져 그를 매우 괴롭게 만들었다.“대표님.”문밖에서 소 이사가 들어왔다.“JS 그룹에서 빨리 떠나라고 재촉해서 지금 나가야 합니다.”연구개발을 하
“뭐라고요?”이연석은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야 그가 묻는 것이 김시후와 서유라는 것을 깨달았다.“설마요. 김씨 가문이 어떻게 서유 씨 같은 신분을 집안에 들이겠어요?”“그럴까?”이승하는 덤덤하게 되물었고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이자 연인이었다.기억 상실로 인해 서로 5년이라는 시간을 놓쳤지만, 지금 재회했으니 반드시 관계를 회복할 것이다.두 사람의 과거를 알기 전에는 김승하가 서유를 위해 집안과 맞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기억을 되찾은 김시후가 그녀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 아주 많이 사랑했으니까.“승하 형, 왜 그래요?”그의 상실감을 감지한 이연석이 걱정스레 물었다.‘승화 형 마음속에 서유 씨가 있는 걸까? 아니면 왜 이렇게 서유 씨 일에 관심이 많을까?’“별것 아니야.”그 롤스로이스가 단지를 빠져나가는 것을 본 이승하는 시선을 돌려 이연석을 보았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이승하가 다시 냉담한 모습을 되찾자 이연석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인공지능 7호가 이미 완성되었어요. 다음 달이면 출시할 수 있어요. 사람을 더 보내서 테스트해 볼래요?”“필요 없어.”이연석은 수년간 컴퓨터를 연구하여 인공지능 분야에서 수많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승하도 그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출시하고 나서 데이터나 즉각 보내.”이승하는 JS 그룹 전체를 통제하며 결코 과정은 중시하지 않고 오로지 결과만 원했다.이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회사 일을 보고하고 나서야 이연석은 연지유의 이야기를 꺼냈다.“형, 방금 지유가 아래층에서 경비원과 말다툼 하는 거 봤어요?”이승하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투덜댔다.“경비원과 싸웠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형 약혼녀라고 주장했어요. 약혼도 안 했으면서 어디...”“내일 연씨 집안에 가서 혼담을 꺼낼 거야.”이연석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승하의 말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