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요?”이연석은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야 그가 묻는 것이 김시후와 서유라는 것을 깨달았다.“설마요. 김씨 가문이 어떻게 서유 씨 같은 신분을 집안에 들이겠어요?”“그럴까?”이승하는 덤덤하게 되물었고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이자 연인이었다.기억 상실로 인해 서로 5년이라는 시간을 놓쳤지만, 지금 재회했으니 반드시 관계를 회복할 것이다.두 사람의 과거를 알기 전에는 김승하가 서유를 위해 집안과 맞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기억을 되찾은 김시후가 그녀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 아주 많이 사랑했으니까.“승하 형, 왜 그래요?”그의 상실감을 감지한 이연석이 걱정스레 물었다.‘승화 형 마음속에 서유 씨가 있는 걸까? 아니면 왜 이렇게 서유 씨 일에 관심이 많을까?’“별것 아니야.”그 롤스로이스가 단지를 빠져나가는 것을 본 이승하는 시선을 돌려 이연석을 보았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이승하가 다시 냉담한 모습을 되찾자 이연석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인공지능 7호가 이미 완성되었어요. 다음 달이면 출시할 수 있어요. 사람을 더 보내서 테스트해 볼래요?”“필요 없어.”이연석은 수년간 컴퓨터를 연구하여 인공지능 분야에서 수많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승하도 그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출시하고 나서 데이터나 즉각 보내.”이승하는 JS 그룹 전체를 통제하며 결코 과정은 중시하지 않고 오로지 결과만 원했다.이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회사 일을 보고하고 나서야 이연석은 연지유의 이야기를 꺼냈다.“형, 방금 지유가 아래층에서 경비원과 말다툼 하는 거 봤어요?”이승하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투덜댔다.“경비원과 싸웠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형 약혼녀라고 주장했어요. 약혼도 안 했으면서 어디...”“내일 연씨 집안에 가서 혼담을 꺼낼 거야.”이연석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승하의 말
롤스로이스 한대가 행운 빌라 입구에 멈춰 섰다. 뒷좌석에서 잠들었던 서유가 아직도 자고 있었다.운전기사가 김시후에게 물었다.“김 대표님, 아가씨를 깨울까요?”그는 고개를 돌려 달콤하게 자고 있는 서유를 보았다. 차마 그녀를 깨울 수 없었다.“차는 제게 맡기고 먼저 돌아가세요.”운전기사는 김지후에게 열쇠를 맡기고 차에서 내렸다.김지후는 서유가 몇 번지, 몇 호실에 살고 있는지 몰랐고 그녀가 언제 깨어날지는 더욱 몰랐다. 몇 분 동안 망설이다가 그는 시동을 걸고 서유를 자신의 개인 별장으로 데려갔다. 이 별장은 김지후의 소유였다. 그가 서울로 왔을 때 원래는 이곳에서 살려고 했었다. 하지만 연지유가 굳이 서유에게 호텔을 마련해 주겠다고 해서 별장에 온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김지후는 차를 세운 후 서유를 안고 별장으로 들어갔다.“도련님, 오셨습니까?”별장을 지키던 이혜선이 급히 마중 나왔다.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깨끗한 잠옷을 준비해주세요.”이혜선은 김지후의 품에 안긴 여자를 보았지만 더 묻지 못했다. 그녀는 “네”라고 대답하고 잠옷을 준비하러 갔다.서유를 침대에 눕히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의 날카롭던 표정이 사그라들었다.손을 들어 서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던 김지후의 눈에는 그조차도 모르는 자상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앉아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나서야 이혜선을 불러서 잠옷을 갈아입히라고 했다.김지후는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한 뒤 서유가 곤히 잠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러 갔다. 몸을 뒤척였지만 깨지 않고 잘 자는 것을 보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김지후는 잠결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돼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서유가 무사한 것을 보고 그는 가볍게 문을 닫고 안방으로 돌아갔다.서유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하루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녀는 낯선 방을 보고 멍해졌다.'어제 소파에 쓰러져 펑펑 울다가 숨이 차서 그대로 졸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서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감사해요."김시후는 그녀가 자신을 남처럼 대하는 것이 좀 불편했다.하지만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유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었다."김 대표님, 입찰 결과는 어때요?"그녀는 어제 오후에 현장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최종 결과를 몰랐다."화진 그룹이 입찰에 성공했어요."서유는 이 결과를 듣고 조금 놀랐다.'이 대표님이 동아 그룹에게 개발권을 주지 않았다고? 연지유 씨가 첫사랑인 게 아니었어?'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고는 담담한 말투로 김시후에게 말했다."축하드립니다."그는 서유가 자기를 이렇게 공손하게 대하고 자신과의 선을 지키는 모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윽고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말하지 않았다.김시후는 마음속의 이질감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배고프지 않으세요?"서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옷이 바뀐 것을 발견하고 의심스럽고 충격적인 눈빛으로 김시후를 쳐다보았다."도우미 아주머니가 바꿔 입힌 겁니다."서유의 이상한 시선을 느낀 그는 얼른 입을 열어 설명했다.도우미가 바꿔 입혔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서유는 다소 어색한 듯 김시후를 바라보며 사과했다."죄송합니다."그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오해할 수도 있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이 말을 들은 그녀는 어떻게 말을 이어나갈지 몰랐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리 때문에 갈 수 없었다. 서유에게 데려다 달라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중, 김시후가 이혜선을 불렀다."아주머니."40~50대쯤 되는 중년 부인이 식판을 들고 들어왔다. 통통한 몸매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는 상냥한 분이셨다.이혜선은 식탁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웃으면서 말했다. "아가씨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도련님의 입맛에 맞게 아침을 준비했는데 먼저 배를 채워 두세요. 점심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드
차가운 표정을 하고있는 서유를 바라보던 김시후는 문득 그녀가 고슴도치 같다고 생각했다.조금만 다가가도 온몸으로 찔러서 다시는 한 발짝도 못 다가가게 하는 고슴도치 말이다.“비위를 맞출 필요 없어요. 몸만 괜찮으면 됩니다.”서유는 이미 김시후와 크게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가 멍하니 김시후를 쳐다보자 그는 오히려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담담하고 깨끗한 웃음이었다.방금은 정말 그녀의 몸 상태가 걱정되어서 몇 마디 물어본 것 같았다.김시후는 몸을 돌려 테이블 위의 접시를 서유에게 건네면서 말했다.“먼저 뭐 좀 드세요.”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서유 씨?”김시후가 그녀를 부르자 서유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은 눈물을 머금고 있었는데 비치는 표정은 오히려 매우 담담했다. 그런 눈빛을 본 김시후는 갑자기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녀에게 미안한 일을 한 사람처럼 극도로 긴장했다.김시후가 말을 하려고 할 때 서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몸만 괜찮으면 된다면서 왜 5년 전에 저를 그렇게 대했어요?”그녀는 과거의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방금 김시후가 한 말이 그녀의 마음을 울려버렸다. 서유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그때는 내 목숨을 원했으면서 지금은 왜 몸만 괜찮으면 된다고 하는 거지? 이렇게 모순된 사람은 도대체 어떤 마음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김시후는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5년 전, 그는 기억을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과 일이 매우 낯설었다. 마침 그때, 서유가 매일 찾아와 해명해댔기에 김시후는 매우 짜증이 났다. 게다가 그녀에 관해서 찾아낸 정보들을 본 그는 서유에게 꿍꿍이가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경비원에게 명령하여 당시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그녀를 내쫓았다.이것은 김시후가 서유에게 한 가장 잔인한 짓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아직도
아침을 먹은 후, 서유는 조금 힘겹게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그녀는 어제 입찰에 참여했기 때문에 정장 윗옷과 헐렁한 바지를 입었다. 정장이 마침 그녀의 부은 다리를 가려주었다.그녀가 옷을 다 갈아입자 김시후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서유는 내려가는 것을 부축해달라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김시후는 그 생각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다가와서 이불을 들추고 그녀를 가로 안았다.서유는 어리둥절했지만 김시후는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혼자서 걸을 수 있다면 저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겠죠.”이 한마디가 서유의 정곡을 찔러 마음이 불편해진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품에 안긴 여인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얼굴에 아픈 기색이 역력하여 매우 허약해 보였다.바람이 한 줄기 불기만 하면 그녀의 가냘픈 몸을 쓰러뜨릴 것만 같았다.이런 서유를 보고 김시후는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서유야.”별장을 나온 후, 그는 그녀를 가볍게 불렀다.서유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기다렸다.김시후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숙였다.“미안해, 널 잊어버렸어. 날 너무 원망하지 마.”이 말을 할 때 그의 눈동자는 흠 잡을 데 없이 깨끗하고 맑았다.서유는 의심스러워서 김시후가 연기하고 있는지 보려고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모든 표정과 행동이 진심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진짜 기억상실증이야?”“기억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는데 생각을 하기만 하면 머리가 아파.”특히 서유를 생각하면 머리가 더 아파졌는데 그가 그녀와 관련된 일을 기억시키는 것을 뇌가 막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를 볼 때마다 왜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괴로워지는지 몰랐다. 막 기억을 잃었을 때는 이런 감정이 없었는데 말이다.하지만 이번 만남에서 이런 애매모호한 정서는 더욱 짙어졌다.서유는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가짜 같지 않았다.그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지 못할 때,
김시후의 품에 안겨 있던 서유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며 몸까지 떨렸다.서유는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고개를 들면 차 안의 남자와 마주칠 것 같았다.그녀는 그저 겁쟁이가 되어 이연석의 비난과 경멸을 받으며 가만히 있었다. 서유의 두려움을 눈치챈 김시후는 그녀의 손을 끌어안고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겁먹지 마.”김시후는 서유의 귓가에 대고 한마디 하고는, 차갑게 이연석을 바라보았다. “이연석 씨, 서유 씨가 갈지 말지는 당신과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이 말이 나오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김시후를 한 대 때리려고 했다.코닉세그 차 안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석아, 중요한 일이 있잖니.”남자의 목소리는 차 밖의 일들이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담담했다.이윽고 남자의 말을 들은 이연석은 그제야 성질을 가다듬었다.그러고는 길 한복판에 주차된 람보르기니를 가리키며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 좀 빼주시죠. 혼담 꺼내러 가는 길을 막지 말고요.”'혼담?''누구에게 혼담을 꺼내는데?'서유는 몸이 굳어서 끝까지 그 차를 보지 못했다.김시후는 이연석을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연석이 자기를 여러 번 도발하여 그를 매우 불쾌하게 했다. 김시후는 이연석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이연석과 겨룰 태세였다.이를 본 이연석의 표정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김 대표님, 우리 둘째 형이 지유 아가씨에게 혼담을 꺼내려고 하는데, 그의 길을 막다니요?”알고 보니 이승하가 연지유에게 혼담을 꺼내려고 했다.'결국 결혼하는 건가?'서유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온몸이 찢어지는 듯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아팠다.서유는 자기가 송사월을 내려놓은 것처럼 이승하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이승하가 연지유에게 혼담을 꺼내려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 괴로울 줄은 몰랐다. 이런 고통은 서유로 하여금 이승하 앞으로 달려가 그를 안고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
서유는 피식 웃으면서 자기가 바보 같다고 느꼈다. 그들의 결혼식인데 자기랑 무슨 상관이야?서유의 씁쓸한 웃음을 보고 김시후는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왜 그래?"서유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지 않았지만,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김시후는 서유가 이연석이 한 말에 상처받을까 봐 위로해 줬다."이연석이 한 말은 마음에 두지 마. 그냥 내가 이연석 여동생과의 혼인을 취소해서 이연석의 체면을 깎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견주하는 거야. 너랑 아무 상관 없어."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둘 것도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그녀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시후는 서유의 눈에 절망감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렸다."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왜 이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그렇게 티가 나나?'서유는 자기 얼굴을 만졌더니 무지 차가웠다.'이런 내 모습, 엄청 무섭겠지?'서유는 애써 입꼬리를 잡아당겨 겨우 웃음을 지었다."아무 일도 없어. 그냥 몸이 좀 불편해서."김시후는 이 핑계를 믿었다. "다리가 불편해서 그래?"서유가 걷지도 못하는 걸 보니 다리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방금 서유를 안았을 때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가 부은 게 정맥류 때문인 것 같아."서유는 김시후에게 여전히 방비심을 가지고 있다. 서유는 김시후가 말한 기억상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숨길 수밖에 없다. 김시후는 정맥류의 증상을 잘 알고 있다. 다리가 부을 수 있지만, 보통 어느 정도 기다리면 좋아질 건데 못 거는 정도는 아니다.하지만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방금 별장에서 서유의 병세와 관련된 일을 몇 마디 더 물었는데, 서유는 잔뜩 화가 나서 더 이상 서유를 화나게 하지 말아야 했다. 김시후는 더 이상 깊이 파묻지 않았지만, 여전히 서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소준섭 보고 치료해 달라고 할게. 준섭이는 의술 방면의 천재야. 반드시 네 몸의
회사로 돌아온 김시후는 급히 노트북을 켜고 5년 전의 기록들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자료에는 역시나 아무 문제가 없었다. 기록된 시간도, 보육원 사람들의 진술도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김시후는 서유가 전에 했었던 말이 사실이고 이 기록들은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김시후는 한껏 찌푸려진 미간을 하고서는 소준섭에게 전화했다. 마침 회의를 준비 중이던 소준섭은 발신자에 떡하니 적힌 김시후를 보고 급히 전화를 받았다."왜 무슨 일이야?""야, 내가 그때 서울에서 기억을 잃은 거야 아니면 집에 돌아와서 기억을 잃은 거야?"소준섭은 김시후의 친구이자 주치의로서 당연히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소준섭은 난데없이 이런 질문을 해오는 김시후에 잠시 벙쪄있다가 말했다."혹시 뭐가 기억나기라도 한 거야?""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이상해서."그 말에 소준섭은 수화기 너머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기억은 서울에서 잃은 거야.""교통사고 난 다음에 바로 기억 잃은 거 맞아?"김시후가 곧바로 물어올 거라는 예상 못 했던 소준섭은 또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그래."긍정의 대답을 들은 김시후의 안색은 아까보다 많이 어두웠다.김시후는 서유가 자신을 찾아왔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 서유는 분명 자기가 몸을 대주고 돈을 받은 일에 대해 화가 난 김시후가 일부러 기억을 잃은 척 하는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무릎까지 꿇으면서 몸을 대준 건 저를 살리기 위해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구구절절 해명했었다.만약 교통사고가 있은 직후 바로 기억을 잃었다면 서유가 굳이 제게까지 찾아와 이 일을 언급할 리가 없었다. 그말인즉슨 교통사고 후에 바로 기억을 잃은 건 아니고 이 일로 서유와 다툰 적이 있었기에 서유가 그리 다급하게 저에게 해명을했던 것이다.분명 다른 무슨 이유때문에 기억을 잃은 것일텐데 그게 무엇인지는 형과 그 측근들만 알 것이다.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에 김시후의 표정은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