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소 이사가 입찰 발표를 할 예정이었지만 이승하가 온 이상 김시후가 직접 나서야만 했다.이승하는 항상 엄격한 사람이었다. 설명 과정에서 한 마디라도 잘못 말하면 입찰권을 잃을 수 있었다.김시후는 절대 이런 실수를 용납할 수 없었고 임시로 소 이사의 직책을 맡았다.그는 한 시간 안에 모든 생각을 정리해야 했고,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셔야 했다. 그래서 서유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늦지 않겠죠?”김시후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우리 순서는 열 번째이니까 늦지 않을 거예요.”서유는 시간이 충분하다는 걸 알고 더 이상 묻지 않고 허리를 굽혀 일어나 회의장 후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녀는 JS 그룹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전부 첨단 기술 제품이었고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이 빌딩을 위아래로 여러 군데 찾아다녔지만 커피를 내릴 수 있는 탕비실을 찾지 못했다.그녀는 건물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은 곳곳마다 카드를 긁어야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했다.카드가 없었던 그녀는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가 JS 그룹의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막 돌아서려는데 이연석이 문밖에서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가 입구에서 얼굴을 스캔하자 문이 열렸다.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틈을 비집고 나갈 뻔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이연석은 그녀가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고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상대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연석, 연석 씨, 잠시만요...”서유는 용기를 내어 그를 불러세웠다.그녀가 감히 자신을 막을 줄 몰랐던 이연석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서유 씨, 뭐죠?”그녀가 이곳에 있는 건 놀랍지 않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막을 줄은 몰랐다. 대체 무슨 목적인지도 알지 못했다.“혹시 어디 커피가 있는지 아세요?”서유는 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안색이 좋지 않자 급히 말을 바꿨다. 커피가
그녀의 눈은 티 한 점 없이 맑았다. 마치 호수 안의 물처럼 차마 해를 끼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이연석은 안색이 약간 굳어져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더니 ‘문 닫고 가라’는 한마디를 던지고 나갔다.서유는 그가 떠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커피를 들고 회의장으로 걸어갔다.입찰은 이미 시작되었고, 대형 스크린만 켜진 상태로 회의장 불은 꺼져 있었다.회의장은 작은 스튜디오처럼 후문 쪽에서 앞으로 가려면 백여 개의 계단을 거쳐야 했다.지금 불이 꺼진 상태로 캄캄해서 더듬거리며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서유는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은 의자를 잡으며 천천히 내려갔다.오랫동안 대표 비서를 해온 그녀에게 이정도 작은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그녀는 곧 김시후의 옆에 도착했고 허리를 굽혀 커피를 건네며 나지막이 말했다.“대표님, 여기 커피요. 뜨거우니 조심하세요.”김시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건넨 커피를 받고 웃으며 말했다.“수고했어요.”서유는 고개를 젓고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앞에 앉아 있던 이승하가 갑자기 고개를 젖혔다.서유가 그의 좌석을 잡으면서 부주의로 그 숱이 많은 검은 머리를 건드렸던 것이다.그녀는 화들짝 놀라 손을 움츠렸지만, 남자는 오히려 고개를 돌려 차갑게 힐끗 쳐다보았다.어두운 빛 아래에서 깊고 진한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마치 맹수와 눈이 마주친 듯 두렵기 그지없었다.그런 이승하를 바라보며 그녀는 송구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죄, 죄송합니다.”이승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더니 시선을 스크린에 옮겼다.서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나른해진 몸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녀의 가슴이 여전히 쿵쾅쿵쾅 뛰고 있을 때 김시후가 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유유, 겁먹지 마.”서유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김시후를 바라보았다.“방금... 뭐라고요?”말을 마친 김시후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방금 서유가 이승하와 눈이 마주치고 놀라서 온몸을 떠는 모습을 보고 무의식적으
김시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단맛이 입안에 퍼지자 미간까지 저절로 올라갔다.그는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마시더니 사회자가 화진 그룹을 부를 때에야 아쉬워하며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김시후가 자신에게 커피를 건네고 바로 무대에 오르려 하자 서유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자료 다 보셨어요?”그녀는 조금 의아했다. 김시후는 자료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이대로 무대에 올라간단 말인가?김시후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자신만만해서 말했다.“한 번 보고 여기에 기억해 두었으니 걱정 마세요.”그렇다. 한 번 본 것을 절대 잊지 않는 그가 어떻게 기억을 잃을 수 있는가?그의 한마디에 서유는 김시후에 대한 얼마 남지 않은 호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김시후는 그저 연기하는 것뿐이다.방금 하마터면 그를 송사월로 여길 뻔했다.서유의 굳어진 얼굴에 김시후는 약간 걱정되어 물었다.“왜 그래요?”서유는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무대 올라가세요.”입찰이 끝나면 앞으로 더 이상 김시후와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김시후는 그런 서유가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사회자가 두 번째로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올랐다.그가 떠나자 서유는 의자에 푹 쓰러져 무표정한 얼굴로 무대 앞에서 반짝이는 그를 바라보았다.역시나 수재는 남달랐다. 한 번 보고 모든 사로를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소 이사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도 보충했다.‘그래, 이런 남자니까 날 버린 거야. 학력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나잖아.’그는 일류 대학에 합격했지만, 그녀는 그저 평범한 대학이었으니 타고난 지력적으로도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오늘 받은 충격은 이승하의 탄탄한 배경뿐만 아니라, 자신과 송사월의 차이도 똑똑히 알게 되었다.서유는 만약 살 수 있다면,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열심히 공부하여 그들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안타깝게도 세상에 만약이란 없었다. 그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은 그녀가 죽은 후에 한 줌의 재로 될 것이다.그녀는
서유는 휴게실을 나가면 이승하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저었다.김시후는 어이 없어하며 그녀를 보았다.“가서 먹을 것 좀 갖다 줄게요.”말을 마친 김시후는 서유의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일어났다.김시후는 높은 신분이었으니 이씨 가문에서는 그를 수준급으로 대접했다.그가 향한 다이닝룸은 바로 이승하가 있는 곳이었다.각양각색의 음식을 보면서 김시후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몰랐다.아예 휴대폰을 꺼내 서유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떤 음식 좋아해요?”서유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김시후가 고집했다.“안 돼요. 조금이라도 먹어야 오후에 저를 돌봐주죠.”이에 서유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소화가 잘되는 음식이면 돼요.”김시후는 부드럽게 물었다.“그럼 생선이랑, 야채, 요구르트 조금씩 갖다 줄게요. 주식은 뭐로 가져갈까요?”“필요 없어요. 이미 충분해요.”“그래요, 기다리세요.”김시후는 그녀가 고분고분 말을 듣자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음식을 가지러 가려는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김 대표님 아주 바쁘네요. 입찰에 참여하랴, 여자친구도 챙기랴.”김시후가 고개를 돌려보니 이승하가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자신과 비슷한 큰 키를 가졌지만 늘 사람에게 압박감을 주는 이승하였다.분명 막상막하인데 자신보다 더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어 김시후는 마음이 불편했다.김시후는 그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이 대표님 농담도 잘하시네요. 제가 어떻게 여자친구를 데리고 입찰에 나오겠어요?”이승하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더니 물었다.“서유 씨가 김 대표님 여자친구 아닌가요?”김시후는 그의 거만한 말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내성 있게 말했다.“저희는 아무 사이 아닙니다. 다만...”“다만 뭐요?”이승하가 다급하게 묻자 김시후는 조금 의아했다.“이 대표님 저희 사이 일에 관심이 많은 신 것 같네요.”이승하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리더니 말했다.“임태진이 놀던 여자를 김
이승하의 눈에서 갑자기 독기가 차오르더니, 음산하고 차가운 기운은 마치 사람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처럼 온몸을 오싹하게 했다.그는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또 무엇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연지유가 밖에서 걸어들어왔다.“승하야, 역시 여기 있었네!”김시후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더니 또 이승하를 보고 말했다.“이 대표님, 저는 물러갈 테니 여자친구와 식사 맛있게 하세요.”그의 말은 조롱하는 뜻이 다분했다. 방금 이승하가 그에게 여자친구를 데리고 입찰에 참여했다고 비아냥거렸으니 갚아줘야 했다.비록 이 프로젝트의 갑은 이씨 가문이지만, 김시후는 개발권을 따낼 능력이 충분했으니 당연히 이승하에게 미움을 사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김시후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음식을 담으러 갔다.연지유는 막 이승하에게 다가와 식사를 요청할 생각이었지만 차갑디차가운 그의 얼굴을 보고는 다이닝룸을 나갔다.그녀도 상황을 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승하 대체 왜 저러지? 나 귀국하고 나서 왜 점점 날 싫어하는 것 같지?’김시후가 점심을 들고 돌아왔을 때 서유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자고 있었다.그녀는 손에 쿠션을 끌어안고 손바닥만 한 얼굴은 베개 위에 기대었다. 긴 속눈썹으로 깨끗하고 맑은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김시후는 그녀가 깊이 잠든 것을 보고 차마 방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앉아 자는 것이 불편할까 봐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올렸다.그녀를 안은 순간, 김시후의 머릿속에는 예전에 그녀를 이렇게 안았던 여러 개의 화면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유가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졌다.다만 서유를 기억하지 못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깊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마치 무수한 벌레들이 그의 머릿속을 미친 듯이 갉아먹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그는 산산조각이 난 퍼즐들을 맞추려 했지만, 벌레들에게 조금씩 먹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그는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상기 되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품에
그 차갑고 거리감 느껴지는 눈과 마주치자 서유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꼬집고 있는 것이 보였다.방금 이승하는 그녀의 허리를 꼬집어 소파에서 그녀를 들어 올렸을 것이다.지금 그녀는 소파에 반쯤 누워 있고 남자는 그녀의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자세가 약간 이상야릇했다.서유는 부드러운 작은 손을 내밀어 남자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손이 그의 셔츠 소매에 닿자마자 남자는 크게 호통을 쳤다.“만지지 마!”서유는 놀라서 손이 굳어졌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그녀는 순순히 손을 움츠렸다. 또 약간 이해가 되지 않는 눈으로 자신의 허리에 손을 얹고 놓지 않는 남자의 손을 보았다.서유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면서, 그는 계속 그녀를 만지고 있었으니. 이 남자는 정말 억지를 부리고 있다!서유는 감히 그를 쳐다볼 수 없어서 고개를 떨구고 나지막이 물었다.“이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무서워서인지 몸이 허약해서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이승하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의 몸을 덮고 있는 남자의 정장 코트를 보았다.너무 눈에 거슬려 그 코트를 집어 쓰레기통 쪽으로 던졌다.서유는 코트가 쓰레기통에 정확하게 버려지는 것을 보고 안색이 약간 변했다.“이 대표님, 김 대표님 코트를 버리려고 저를 찾아오셨나요?”비록 언제 김시후가 그녀에게 코트를 덮어줬는지 모르지만, 이승하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행동은 도를 넘었다!‘내가 싫으면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될 것을 왜 나를 괴롭히냐고?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화가 났던 서유는 갑자기 어디에서 나온 용기인지 남자를 세게 밀었다.그녀는 억지로 몸을 지탱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휴게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이승하가 그녀를 확 잡아끌었다.서유는 그대로 남자의 품에 와락 안기게 되었다. 마치 벽에 부딪힌 것처럼 아파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품에 가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이 대표님, 대체 왜 이러세요?”
“말해!”이승하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얇은 입술이 그녀의 뺨에 닿기까지 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이승하는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설명할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야!”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뒤섞여 서유는 진퇴양난에 빠졌다.앞에는 이승하, 뒤에는 김시후, 그녀는 중간에 끼어 죽기보다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설명할 것도 없어요. 언제부터 알았든 이 대표님과 상관없잖아요.”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승하가 인내심을 잃어갈 무렵에야 비로소 이 한 마디를 꺼냈다.“나랑 상관이 없다...”이승하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 한 마디를 반복하더니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칼로 깎은 듯한 정교한 얼굴이 다가오자 서유는 순간 심장이 반 박자 빠지는 것 같았다.그의 입술은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그녀의 붉은 입술에 바짝 다가왔다.서유는 이승하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조금 두렵기도 하고 조금 찔리기도 했다.그녀가 손을 꽉 쥐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이승하가 갑자기 차갑게 말했다.“김시후가 바로 송사월이니까 날 속인 거지? 내가 두 사람의 과거를 아는 게 싫어 거짓말을 했지. 맞지?”그의 말은 마치 폭탄처럼 서유의 마음속에서 폭발했다.‘김시후가 송사월이라는 것을 벌써 알아챘다고? 역시 이 사람 앞에서 잔꾀를 부리면 안 되겠네.’그의 두뇌와 능력은 보통 사람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입을 꾹 다문 그녀의 모습은 이승하의 추측을 인정하는 셈이었다.이승하는 원래 떠본 말이었지만, 김시후가 진짜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송사월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이승하가 알고 있는 김씨 가문과 관련된 명문가의 비화는 몇 년 전 잃어버린 둘째 도련님을 5년 전에 찾아낸 것뿐이었다.서유는 5년 전에 몸을 팔기 시작했고 김시후는 5년 전에 되찾았으니 시간이 딱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두 사람이 오래 알고 지냈다고 했다.이 모든 것은
서유는 마음이 너무 아프고 답답하고 억울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의 침묵에 이승하는 눈 밑의 분노가 점차 실망으로 바뀌었다.이 여자는 확실히 능력이 있었다. 매번 이승하가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고 찾아오게 만드니 말이다.근래에 자신이 했던 일을 생각하니 이승하는 황당무계하고 또 어리석다고 생각했다.그는 갑자기 정신이 든 듯 서유를 확 팽개쳤다. 그 실망한 눈동자는 금세 차가운 모습으로 변했다.“앞으로 다시 널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야.”말을 남긴 그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서유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빠른 걸음으로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다.이 문이 열리면 이승하가 다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그녀는 갑자기 달려들어 이승하를 막았다.그녀는 어눌한 말투로 설명했다.“미, 미안해요. 전에 일부러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저랑 사월이, 아니, 김시후 씨는...”“나랑 상관없어!”이승하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가 너를 찾아온 이유는 그저 속은 게 불쾌해서야. 지금 그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 네 설명은 중요하지 않아.”이승하의 말은 마치 차가운 물처럼 서유의 몸에 끼얹었고, 그녀는 온몸이 차가워졌다.그에게 하고 싶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서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살펴 가세요.”그녀는 말을 마치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승하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고 남자는 1초도 더 머물지 않고 휴게실을 떠났다.서유는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문을 보면서 마치 심장에 구멍이 뚫린 듯 텅 빈 느낌이었다.몸까지 나른해지자 서유는 버티지 못하고 벽을 짚고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그녀는 눈물을 글썽인 채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물은 마치 줄 끊어진 구슬처럼 멈추지 않았다.‘이번에는 아마 진짜 끝이겠네...’휴게실을 나온 이승하는 문 앞을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