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그 말에 손을 떼고 얼굴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다시 말해봐요.”“내가...”이승하는 다시 말하려다가 붉어진 그녀의 눈가를 보고 말을 멈추었다.남자는 조금 당황한 듯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아주었다.“그런 말 안 할게. 화내지 마, 응?”“싫어!”서유는 그를 밀어내고 긴장하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당신 머릿속에 있는 뇌종양도 재발할 수 있다고 했어요. 일부러 그런 말을 자꾸 하는 거죠?”그녀에게 감추려 했지만 다 들켜버린 남자는 멈칫하더니 손을 뻗어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만졌다.“미안해, 다신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응?”서유는 눈시울을 붉히며 몇 초 동안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그의 품에 안겼다.“말했어요. 당신을 남편이라고 부르면 평생 내 남편이 될 거라고. 내 남편은 아무 일 없어야 해요, 꼭.”남자는 그녀를 품에 꼭 안고 날카로운 턱을 어깨에 얹었다.“알았어, 약속할게.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거야.”결혼 서약서에 적힌 대로 생사를 함께하며 백년해로할 거다.그의 확답을 듣고 서유는 안심했다.그녀는 이승하를 밀어내고 손에 쥔 은행 카드를 바라보았다.“이건 원하지 않는다니까 나중에 내가 옷과 선물을 사줄게요.”그는 부족한 게 없는데 굳이 그녀가 돈을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하지만 서유의 성의가 있기에 이승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윤재와 이동하는 아내와 결혼한 뒤 옷 한 벌도 사주지 않았다고 들었다.서유가 사준 옷을 입고 JS그룹에 출근하면 그들이 부러워 미치겠지?이승하는 이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고,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서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돌아가면 옷 사줘.”서유도 달콤하게 대꾸했다.“그래요.”두 사람이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옆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다시 울렸고 또 심혜진의 전화였다.서유는 전화를 받지도 않고 바로 수신 거부 버튼을 누른 뒤 전화기를 꺼버렸다.이를 본 이승하는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서유는 이미 훌훌 털어버렸고 멀리 내다보았다. 아무리 본적도 없는 엄마와 관련 있는 일이라도 더 이상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김초희는 엄마가 누군지도 알고 그 속에 담긴 원한도 잘 알겠지만 한 번도 엄마 아빠의 집안에 돌아가지 않았다.그것만 봐도 이미 마음이 차갑게 식어 영국에서 지현우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지언정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잘 아는 김초희도 그런 선택을 했는데 30년 동안 혼자 살아온 그녀가 왜 과거를 돌아보겠나.이승하는 그 말을 듣고 안심이 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나랑 피로 얼룩진 원수 사이면 어떡해?” 잠시 생각에 잠긴 서유가 그에게 물었다.“당신이 우리 엄마를 죽였어요?”이승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 너보다 겨우 한 살 많아. 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내가 고작 몇 살이었다고 죽이겠어?”김초희에 대해 알아봤을 때 김초희의 어머니가 서유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서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우리 엄마를 죽인 것도 아닌데 무슨 원한이 있겠어요?”다른 사람들은 기껏해야 친척이었고 원수가 맞든 아니든 진실을 알기 전에 쉽게 판단할 일도 아니고 그녀와도 상관없는 것이었다.이승하는 한참 서유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알겠어, 고마워 여보.”“고마우면 밥 해줘요.”이승하는 다소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굳어있었다.“내가 한 음식 먹기 힘들다면서?”먹기 싫다고 작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주방에 못 들어가게 해놓고.“결혼 첫날에는 당연히 당신이 요리해야죠.”기선제압을 확실히 해서 음식을 만들어야 이제부터 집안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다.먹기 힘든 건 그다음이었다.이승하는 그녀의 속셈을 한눈에 꿰뚫어 보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코를 툭 건드렸다.“알았어, 다녀올게.”남자가 일어나 배에 있는 부엌으로 가자 택이는 휴대전화를 들고 바짝 뒤따랐다.“보스, 정보 보시겠어요?”“말해봐.”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차
“김율이요.”“김씨 가문 사람이네?”“태산이가 보낸 정보에는 이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던데 그냥 같은 성 씨가 아닐까요?”같은 성씨라, 이런 우연이 있을까?이승하는 마음속으로 조금 의아해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택이를 향해 턱을 까딱했다.“계속해.”“네.”택이는 전화기를 들고 서유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김영주 씨는 원래 육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 그러니까 육성재의 아버지인 육우성 씨와 약혼한 사이였어요. 그때 육우성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심혜진, 또 한 명은 김영주 씨 언니 김윤주 씨였어요. 두 사람은 김영주와 육우성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질투해서 몰래 김영주에게 심한 짓을 많이 했고... 그중 제일 심각했던 건 김영주 씨 얼굴을 망쳐버렸어요. 심혜진이 화학약품으로 아예 못 알아보게 만들었어요... 얼굴이 망가진 여자를 누가 사랑하겠어요. 육우성은 김영주를 버렸고 언니인 김윤주와 결혼했죠. 육씨 가문에서도 김영주를 원하지 않았고, 김씨 가문에서는 김영주가 쓸모가 없게 되자 집에서 내쫓은 거죠.”여기까지 들은 이승하는 식재료를 다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택아, 심씨 가문에서 세계 시장에 진출하려고 한댔지?”말이 끊긴 택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씨 가문에서 특별히 프로젝트까지 건넸죠.”“취소하고, 심씨 가문의 자격을 박탈해. 앞으로의 프로젝트는 심씨 가문에게 주지 마.”연이만 아니었다면 똑같게 되갚아주고 싶었다.고작 남자 때문에 서유 어머니의 얼굴을 망쳐놓고도 결국 육우성과의 결혼도 못 했는데 대체 뭘 위해서 그런 짓을 한 걸까.그러고 보니 심혜진이 김초희를 들여보내 주지 않은 건 분명 이 일 때문에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못 들여보낸 것 같았다.“지현우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지현우는 김초희가 김씨 가문 사람이라는 것만 알 뿐, 심혜진이 김영주의 얼굴을 망쳤다는 사실은 모릅니다.”하긴, 자신이 저질렀던 나쁜 짓을 아들에게 어떻게 말하겠나.“그 후 김영주 씨는
잔혹한 수단을 강구하던 택이도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빈털터리가 된 김영주는 아이를 안은 채 영국 길거리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발견 당시 시신은 얼어 있었고 김초희와 서유는 바로 곁에 안겨 있었어요. 자선단체에서 시신 화장을 도와주긴 했지만 아무도 묘지 비용을 지급하지 않아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습니다. 김초희가 직접 손에 유골함을 들고 뿌린 겁니다. 등에는… 아직 아기였던 서유 씨를 업고요.”말을 하던 택이는 멈칫하다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아무튼 김씨 가문 둘째 따님께서는 불우한 삶을 사시다가 마지막까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신 겁니다. 두 아이들도 사람들에게 쫓기게 됐고 김초희 씨는 어쩔 수 없이 동생을 안고 도망쳤지만 그러다가 결국 동생까지 잃어버리게 되었죠.”이승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가로챘다.“누가 뒤를 쫓았지?” “김영주 씨 부모님이요. 두 아이가 커서 재산을 나눠 가지러 돌아올까 봐 걱정됐는지 사람을 보내 처리하라고 한 겁니다.”이런 부모가 어디 있나, 자신의 딸도 모자라 손녀까지 자기 손으로 죽이려 하다니.택이는 말을 이어갔다.“김초희 씨는 영국에서 동생을 찾아 헤맸지만 우연히 인신매매범에 의해 동생이 국내로 들어온 사실을 몰랐고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고 평생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지현우가 김초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살기 힘들었을 겁니다. 국내에 들어온 서유 님은 보육원 문 앞에 버려졌어요…”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가 잘 알고 있었고 연적에 관련된 것이었기에 택이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이 말을 들은 이승하는 서유가 보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은 방해만 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어머니와 김씨 가문의 원한에 비하면 이씨 가문과 김씨 가문의 복수혈전이 대수일까.택이의 말을 들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진실을 모른 채 서유가 모든 걸 알고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그리고 김씨 가문에 의해 살해당한 이씨 가문 사람은 서유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나중에 이씨 가문이 이 사실을 알고
“그 머리는 태평양 한가운데 던져버려야 하는데.”이승하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육성재를 나무라더니 생각에 잠겼다.“김윤주가 김영주를 대신해 육우성과 결혼했다는 건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해. 죽기 전에 김영주의 아이를 보고 싶었다니 대체 무슨 생각일까...”그렇게 말하며 이승하는 다시 택이를 돌아보았다.“육성재가 서유에 대해 알게 되면 안 되니까 조심해.”“걱정 마세요. 태산이한테 다른 단서를 주라고 했어요. 육성재가 알아도 동남아 고기잡이배를 타진 않을 테니까요.”이승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레시피를 집어 들고 꼼꼼히 넘겨보았다.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만든 음식이 예전보다 못하면 안 되겠지?옆에 서 있던 택이는 드물게 웃는 그의 모습에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그럼 보스는 사모님을 위해 요리하세요. 전 다른 요리사에게 먼저 먹을 음식을 부탁할게요.”이승하는 손을 내저었다. 그 제스처와 표정은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셰프가 나만큼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택이는 워싱턴 측 가정부가 투덜거리던 말이 생각났다.“사장님께서 만든 음식은 먹기 힘들죠. 개도 안 먹을걸요.”이승하를 보고 웃으며 고개를 흔들더니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문으로 걸어가던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이승하에게 말했다.“보스, 한 가지 더 있습니다.”“말해봐.”“연중서가 루드웰 사람들에게 구출되었습니다.”연중서는 김씨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연지유를 잡아간 것도 그라는 걸 알고 있다. 대체 누가 정보를 흘린 거지?이승하는 S조직 안에 첩자가 있다고 생각하며 의심을 품었고 택이에게 연중서를 바로 처리하라고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그는 연중서를 지하실에 가두고 고문을 해서 첩자가 누구인지 자백받으려 했지만 루드웰의 부하들에게 구출될 줄은 몰랐다.다만... 루드웰에서 왜 연중서를 구한 걸까. 설마 정보를 넘긴 연중서 측 사람이 루드웰 소속인 걸까?그 생각에 이승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문 앞에 서 있는 택이에게 물었다.“루드웰에서 왜 그놈을 구해준 거지
생각에 잠긴 택이의 옆에 갑자기 엄청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칼과 포크를 든 두 손이 덜덜 떨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보... 보스...”빛을 등지고 선 이승하가 길고 가느다란 눈을 내리깔고 차갑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앉아 있어? 요즘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지? 감히 날 보고 소심하다고 하는 거야 지금?”엥? 보스, 이건 아니잖아요. 서유 씨가 먼저 말을 꺼낸 건데. 난 그저 맞장구를 쳐준 것뿐이라고요.그가 변명을 하려는 찰나 이승하가 들고 있던 그릇을 탁자 위에 내던졌다. “두 사람 내가 만든 음식 전부 다 먹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먹을게요. 지금 바로 먹겠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택이가 바로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이미 배가 부른 서유는 활짝 웃으며 이승하를 쳐다보았다.“여...”“여보라고 해도 소용없어.”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택이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각자 그릇에 음식을 담아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한 입 먹고 토가 나올 뻔했지만 차가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남자 때문에 이를 악물고 삼켰다. 꿀꺽 음식을 삼키는 순간 잘생긴 택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맛도 더럽게 없네. 누가 와서 날 좀 살려주면 좋겠다. 이승하는 허리를 약간 숙이고는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맛있어?”입에 든 새우를 간신히 삼키고 그가 입을 열었다.“맛있어요. 아주 맛있습니다.”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네.이승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 그럼 이제부터 저녁은 내가 만들어줄게.”요리 실력이 늘기 위해서는 마침 실험 대상이 필요했던 터였다. 이승하가 자신의 저녁을 책임지겠다는 말에 택이는 너무 놀라 칼과 포크를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쪽으로 달려가 걸터앉았다. “보스, 정말 이럴 겁니까? 여기서 뛰어내릴 수도 있습니다.”이승하는 곧게 서서 팔짱을 낀 채 턱을 쳐들고 피식 웃었다.“맛있
부산에 도착한 정가혜는 서유가 보낸 문자를 받았는데 확인해 보니 오로라 사진이었다.[가혜야, 이번에는 무사히 F국에 도착해서 진짜 오로라를 봤어. 소원 성취했다.]동영상도 몇 개 보냈는데 오로라 아래 스쳐 지나가는 이승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도 그의 눈에는 온통 서유뿐이었다. 정가혜는 빙그레 웃으며 음성 메시를 하나 보냈다. 신혼여행 잘 보내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라고 당부했다. 메시지를 보낸 뒤,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놓고는 선글라스를 끼고 공항을 빠져나왔다.콜택시를 불렀지만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무심하게 불을 붙였다.연한 베이지 컬러의 오프숄더 롱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금색 체인 가방을 어깨에 멘 채 흰색 기둥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피어오른 연기가 그녀의 주위를 감쌌다. 매끄러운 피부, 맑고 밝은 눈동자, 가는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썹, 장미 꽃잎과도 같은 붉은 입술, 그녀의 모습은 요염하기 그지없다. 가느다란 담배를 물고 있는 그녀는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났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서 허리를 굽혀 담배꽁초를 던지려는데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이 다시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한편, 그곳을 지나가던 롤스로이스에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이연석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더니 이내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 시간도 때울 겸 한 대 더 피우려고 네일을 한 손끝으로 담뱃갑을 헤집고 있는데 가느다란 손이 그녀의 담뱃갑을 눌렀다.선글라스 안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고 잘생기고 반듯한 이연석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그의 손을 밀어냈다. “왜 이래요? 가까이하지 말아요.”그녀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나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덤덤한 그녀의 모습은 방탕한 행동을 하는 낯선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했다. 안색이 어두워진 이연석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왠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아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실망스러웠고 당황스러웠다. 정가혜가 다시는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을 잃은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담배 냄새가 콧방울 사이로 스며들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냄새였다. 그리웠던 마음에 그녀의 머리카락에 머리를 파묻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가혜 씨, 또 담배 피웠네요. 피우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한 거 아니었어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남동생이 누나한테 꾸짖듯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녀를 어쩔 수가 없었다. “이연석 씨, 여자 친구도 있는 사람이 이렇게 날 안고 있으면 어떡해요?”여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흠칫하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여전히 제멋대로 그녀를 안고 있었다. “나랑 있을 때 같이 눈 보러 가자고 했었잖아요. 언제 갈 거예요.”“여자 친구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근데 그런 사람이 왜 날 이렇게 안고 있어요? 당장 풀어줘요.”“가혜 씨...”“이연석.”화가 난 그녀의 모습에 그는 입을 닫았다.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더니 이내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성을 되찾은 그가 차가운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요즘은 자꾸만 예전 연인이 그립다더라고요. 옛 여자 친구를 만나면 자꾸만 건드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요.”이씨 가문의 이연석 도련님은 여자에게 마음을 줘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그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인다는 건 그 여자와 자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던 정가혜는 그가 보여준 감정들에 대해 진심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녀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재벌 집 도련님의 상대가 아니었다. 오직 빨리 이 관계를 정리하는 것만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이연석보다 세 살 더 많았다. 서른이 넘은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