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뒤적이던 송사월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휠체어를 돌렸다. “가혜 누나, 여긴 어쩐 일이에요?”“너 보러 왔지.”그녀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처럼 눈시울이 붉어졌다.“1년 동안 부산에서 어떻게 지냈어?”정가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누나가 동생을 걱정하는 말투로 그를 관심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요.”그는 책을 덮어 옆 테이블에 놓고는 차를 내오라고 손짓했다. “이곳 사람들은 차를 마시는 게 습관이 되어있어요. 차 한 잔 마셔요.”“그래, 난 다 좋아.”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마시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송사월을 다시 볼 수 있었다는 게 그녀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예전에는 서유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그러나 지금은 서유에 관한 이야기가 적절하지 않다. 세 사람 사이는 이렇게 멀어져 가는 걸까?“누나는 이연석 씨랑 어떻게 됐어요?”가방 속의 서류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축의금을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어졌어.”짧게 대답한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넌? 넌 언제 손예진 씨랑 약혼해?”이때, 김민정이 우려낸 차를 들고 다가왔고 송사월은 찻잔에 차를 부어서 정가혜에게 건네주었다.“약혼 안 하기로 했어요.”짧게 말 한마디를 내뱉더니 더 이상의 해명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뜻을 알아차린 그녀는 찻잔을 받아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혹시 서유가 너한테 미안해할까 봐 일부러 속였던 거야?”송사월은 차 한 잔을 따라 가볍게 한 모금 마신 후, 정가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마셔요.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그는 이 일을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걸 눈치를 챈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고개를 숙여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는 에스프레소를 좋아했었던 것
사실 그는 서유가 더 이상 자신의 물건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고 정가혜에게 돌려달라고 부탁할 것이라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어차피 지금은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게 적합하지 않으니까. 매번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그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만날 자격조차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여전히 친구로서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서유의 이름도 맘껏 부를 수 있었을 테니까. “축의금 돌려주려고 온 거 맞아.”정가혜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쑥스러운 듯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서유가 너한테 빚진 게 너무 많다고 했어. 이번 생에는 다 갚을 수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 돈은 받을 수 없대.”그는 서류봉투를 받아쥐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정가혜를 향해 웃었다. “이것들은 이미 모두 서유의 명의로 넘어갔어요. 누나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서류에 불과할 뿐이고요.”흠칫하던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사월아, 너의 신분으로 지금 서유한테 이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네가 이러는 건 서유를 난처하게만 할 거야.”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서유가 첫사랑한테서 이리 귀한 걸 받는다면 이씨 가문의 사람들이 서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유산으로 남겨준 거니까. 내가 죽게 되면 변호사님께서 발표할 거예요.”그는 이미 서유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 그녀를 절대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유산?”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정가혜는 심장이 계속 쿵쾅쿵쾅 뛰었다.“송사월, 너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송사월은 고개를 흔들더니 그녀를 담담히 쳐다보았다.“누나, 나 우울증이 심하대요. 지금 치료받고 있긴 한데 약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우울증?송사월이 우울증에 걸렸다고?그럼...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사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죽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나?우울증이 없는 정가혜는 그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고통이 얼마나 클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1년 동안 이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지낸 건지?멀쩡하던 사람이 왜 이리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건지?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정가혜는 받아들이기 힘든 표정을 한 채 눈물을 흘렸다.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다리도 잃고 심한 우울증까지 겪고 있는 송사월이다. 그의 삶이 왜 이렇게 기구한지 모르겠다. “누구나 인생에서 힘든 일을 겪기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이 또한 다 지나가게 될 거니까.”송사월은 테이블에서 휴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젠틀하고 다정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서유를 위해서라도 죽지 않겠다고 했으니 잘 살아야 해. 절대 딴마음 먹어서는 안 돼.”말을 마친 그녀는 가방에서 부적을 꺼내 송사월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서유가 Y국에 돌아온 후, 절에 가서 받아온 거야. 네가 가지고 있어. 부처님께서 널 지켜줄 거야.”이어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서유가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소원을 빌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그에게 보여주었다.“봐봐. 이건 서유가 널 위해 기도했을 때 찍은 사진이야. 서유는 늘 네가 건강하기를 바랐어.”“비록 지금은 너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서유한테 넌 여전히 소중한 가족이야.”“그러니까 송사월, 약 잘 챙겨 먹고 이겨내야 해. 서유가 부처님 앞에서 빈 소원을 저버리지 마.”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는 서유의 모습에 우울함이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조금은 환해졌다. 그는 정가혜의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한참 쳐다보고는 고개를 들고 웃으며 물었다. “이 사진 나한테 보내줄 수 있어요?”합성된 결혼사진을 제외하고 어린 시절 서유와 찍었던 모든 사진이 다 망가진 상태였다. 그한테는 서유의 사진도 없었고 두 사람이 함께
송사월이 걱정되었던 그녀는 파티에 갈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주서희가 오랜 시간 공들인 일이기 때문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집에 돌아온 그녀는 샤워를 마친 뒤, 샴페인 컬러의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과하지 않고 깔끔한 라인의 드레스였지만 꽤 격식이 있어 보였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차를 몰고 집을 나서 글로리아 호텔로 향했다. 파티장 안, 어두운 조명 아래 정장 차림을 한 남자들과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와인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잔잔히 들려오는 팝송에 정가혜의 우울한 기분도 한결 나아진 듯했다. 그녀는 파티장의 사진을 찍어 송사월한테 보냈다.[나 지금부터 맞선 보려고. 결혼에 실패한 나도 이렇게 다시 일어나는데 너도 힘내.]격려의 말 한마디는 그한테 큰 힘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를 웃게 만들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는 따뜻한 그 말에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알았어요.”그의 답장을 받고서야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이번 파티는 소수빈과 그녀를 위해 주서희가 특별히 마련한 소개팅 파티였다. 소수빈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옅은 회색 정장을 입은 채 소파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면접이라도 보러 온 것처럼 꼿꼿이 앉아 두 손을 무릎에 괴고는 맞은편에 있는 여의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성동 중심 별장 단지에 100억이 넘는 별장을 하나 소유하고 있고요. 크고 작은 아파트도 10여 채는 가지고 있습니다.”“좋은 차도 꽤 가지고 있고요. 자산은 몇백억쯤 될 겁니다.”“저에 대해 더 궁금한 거 있습니까?”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여의사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역시 JS 그룹 대표이사의 비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엄청 부자네.이런 조건을 가진 남자한테 뭘 더 물어볼 필요가 있겠는가?여의사는 웃으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아니요. 궁금한 게 없어요.”“그럼 다음 분.”여의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내가
소녀는 정가혜의 옆에 앉자마자 그녀의 귓가에 다가와 입을 가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혜 이모, 저쪽에 아주 잘생긴 삼촌이 있어요.”“한참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모는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면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그 말에 정가혜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만지더니 연이가 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소파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의사가 앉아 있었는데 길지도 짧지도 않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쓴 남자는 말끔하고 점잖아 보였다. 생김새로는 그녀의 마음에 확실히 들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는 약간 수줍은 듯 연이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갔다 와. 가서 여기로 데리고 와.”“알았어요.”연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신이 나서 잘생긴 남자에게로 달려갔다. 연이가 그 남자 의사의 손을 툭툭 치자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이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건넨 과자를 받아쥔 연이는 통통한 작은 몸을 옆으로 젖히고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저기 저 이모예요. 삼촌이 마음에 든다고 저한테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어요.”마침 파티장의 음악이 바뀌면서 몇 초 동안 음악이 멈추자 연이의 큰 목소리가 파티장을 가득 메웠다.민망해진 정가혜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고 하필이면 연이의 손가락이 그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얼굴 가리고 있는 저 이모예요. 똑똑히 봤어요?”심형진은 연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한사코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정가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한참 동안 쳐다보던 그가 눈앞에 서 있는 소녀를 쳐다보며 웃었다. “당연히 똑똑히 봤지. 삼촌한테 소개해 줄래?”“그럼요.”연이는 재빨리 심형진의 손을 잡고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이때, 주서희가 와인을 들고 와서 한 모금 마신 뒤 정가혜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저분은 얼마 전에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선생님이에요. 집안도 좋고요. 연이가 꽤 눈썰미가 좋네요.”너무 민망했던 정가혜는 몸을
해성 고등학교, 그녀가 다녔었던 학교였다. 그리고 심형진은... 3학년 학생회 회장이었다. 예전에 매번 지각할 때마다 심형진이라는 사람이 그녀를 붙잡아 학점을 많이 깎았었다. 기억 속의 심형진은 두꺼운 안경을 쓰고 까만 피부에 말도 잘 안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심형진은 깨끗한 피부에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옛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진짜... 심형진 선배예요?”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예전이랑 전혀 다른 데요?”심형진은 피식 웃었다.“학교 다닐 때는 공부에만 집중하느라고 외모에 신경 써본 적이 없어.”조금 전까지 많이 민망했던 그녀는 고등학교 선배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는 심형진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진짜 많이 변했네요. 못 알아볼 뻔했어요.”예전에는 그가 못생긴 줄 알았는데 이리 꾸미니 꽤 잘생겨 보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그녀는 돈 버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그를 자세히 본 적이 없다. 근데 그가 이렇게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니? 참 희한한 일이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두 사람을 보고 주서희는 왠지 모르게 잘될 것 같다는 생각에 윤주원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이내 뜻을 알아차린 윤주원은 심형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니까 얘기들 나눠요.”온유하고 우아한 남자는 연이를 번쩍 안아 들고는 주서희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그들이 떠나자 이 작은 소파 구역에는 정가혜와 심형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물론 한쪽에 앉아 여의사들에게 자신의 자산이 얼마인지에 대해 반복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소수빈도 있었다. 긴장을 풀린 그녀는 심형진이 건네준 음료를 한 모금 마신 후 그를 향해 물었다.“선배, 고등학교 졸업하고 해외로 이민 간 거 아니었어요?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외국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그런대로 잘 배웠어. 국내에도 좋은 의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온 거야. 어찌 됐든 여기가 내 집이니까.”
그 얘기를 듣고 그녀는 열등감에 고개를 숙였다. “학교 다닐 때는 쫓아다니던 얘들 많았었죠. 근데 그건 다 지난 일이에요.”“그리고 나 결혼한 적 있어요. 의사들의 소개팅 자리에 이리 올 수 있었던 건 다 서희 씨 덕분이에요.”그녀는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그저 듣기만 했다. “이혼한 게 뭐 어때서?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끼리 평생 같이 사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어.”“결혼은 결국 사람의 인생을 묶는 무덤이 아니라 따뜻한 가정이 생기는 거잖아.”결혼은 무덤이 아니라 집이라고...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들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심형진을 쳐다보았다. 이 자리에 참석한 건 그냥 한번 와보자는 생각이었다. 근데 이런 좋은 남자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선배, 혹시 서울에서 유명한 유흥업소 알아요?”의학에만 몰두하다 보니 그런 곳에 자주 가지 않았던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잘 모르지만 들어본 적은 있어.”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첫 번째로 잘 나가는 곳은 나이트 레일이라는 곳이고 두 번째는 투 해븐이라는 곳이에요. 투 헤븐은 내가 운영하는 업소예요.”그녀가 유흥업소를 차릴 줄은 생각지도 못한 그는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네.”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자신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의 반응은 의외였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어갔다.“마침 내일 우리 과에서 회식 있는데. 거기로 가면 되겠다. 네 가게 매출도 좀 올려주고.”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마음속에 그녀와 조금 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그녀는 망설이게 되었다. 그 순간 그를 거절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빨대를 들고 컵에 담긴 얼음을 휘젓고 있을 때 파티장의 음악이 바뀌고 불빛이 몽롱해졌다. 무대 위의 사회자는 춤을 추자고 사람들을 불렀고 심형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편, 이연석은 글로리아 호텔의 VIP룸에 앉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룹의 대표이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표이사 대행을 맡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승하가 휴가를 가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연히 그가 대신 회사 일을 처리해야 했다. 회사를 관리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접대에서는 이승하보다 훨씬 뛰어났다.술을 마시고 오락하면서 사업 얘기를 하는 데는 가장 자신 있었다. 물론,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모두 그가 이씨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를 초대하는 이유도 그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그걸 잘 알고 있는 이연석은 몇 잔 마시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근데 상대 쪽에서 그가 바람둥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인지 새로운 아가씨들을 불러왔다. “이 대표님, 이 여자들은 제가 해외에서 데려온 애들입니다. 한번 봐보세요.”말하는 사람은 한화그룹의 대표였다. 화끈한 외국 여자를 몇 명 데려오면 이연석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노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여자나 데리고 노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연석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는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술잔을 톡톡 두드리는데 무언가를 참는 듯하면서도 체면을 세워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국 여자들은 그가 거절하지 않자 이내 대담하게 그에게 다가가 술을 따라주고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주무르려고 했다. 근데 손이 어깨에 닿기도 전에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만지지 마.”온화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고 눈도 초승달처럼 구부러졌지만 왠지 모르게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은 타고난 것으로 보통 사람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것이었다. 웃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차가운 얼굴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이런 공포는 뼛속까지 스며들어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의 눈빛 하나에 외국 여자들은 그를 쉽게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씨 가문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