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정가혜의 옆에 앉자마자 그녀의 귓가에 다가와 입을 가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혜 이모, 저쪽에 아주 잘생긴 삼촌이 있어요.”“한참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모는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면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그 말에 정가혜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만지더니 연이가 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소파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의사가 앉아 있었는데 길지도 짧지도 않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쓴 남자는 말끔하고 점잖아 보였다. 생김새로는 그녀의 마음에 확실히 들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는 약간 수줍은 듯 연이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갔다 와. 가서 여기로 데리고 와.”“알았어요.”연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신이 나서 잘생긴 남자에게로 달려갔다. 연이가 그 남자 의사의 손을 툭툭 치자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이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건넨 과자를 받아쥔 연이는 통통한 작은 몸을 옆으로 젖히고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저기 저 이모예요. 삼촌이 마음에 든다고 저한테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어요.”마침 파티장의 음악이 바뀌면서 몇 초 동안 음악이 멈추자 연이의 큰 목소리가 파티장을 가득 메웠다.민망해진 정가혜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고 하필이면 연이의 손가락이 그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얼굴 가리고 있는 저 이모예요. 똑똑히 봤어요?”심형진은 연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한사코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정가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한참 동안 쳐다보던 그가 눈앞에 서 있는 소녀를 쳐다보며 웃었다. “당연히 똑똑히 봤지. 삼촌한테 소개해 줄래?”“그럼요.”연이는 재빨리 심형진의 손을 잡고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이때, 주서희가 와인을 들고 와서 한 모금 마신 뒤 정가혜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저분은 얼마 전에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선생님이에요. 집안도 좋고요. 연이가 꽤 눈썰미가 좋네요.”너무 민망했던 정가혜는 몸을
해성 고등학교, 그녀가 다녔었던 학교였다. 그리고 심형진은... 3학년 학생회 회장이었다. 예전에 매번 지각할 때마다 심형진이라는 사람이 그녀를 붙잡아 학점을 많이 깎았었다. 기억 속의 심형진은 두꺼운 안경을 쓰고 까만 피부에 말도 잘 안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심형진은 깨끗한 피부에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옛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진짜... 심형진 선배예요?”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예전이랑 전혀 다른 데요?”심형진은 피식 웃었다.“학교 다닐 때는 공부에만 집중하느라고 외모에 신경 써본 적이 없어.”조금 전까지 많이 민망했던 그녀는 고등학교 선배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는 심형진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진짜 많이 변했네요. 못 알아볼 뻔했어요.”예전에는 그가 못생긴 줄 알았는데 이리 꾸미니 꽤 잘생겨 보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그녀는 돈 버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그를 자세히 본 적이 없다. 근데 그가 이렇게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니? 참 희한한 일이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 두 사람을 보고 주서희는 왠지 모르게 잘될 것 같다는 생각에 윤주원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이내 뜻을 알아차린 윤주원은 심형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니까 얘기들 나눠요.”온유하고 우아한 남자는 연이를 번쩍 안아 들고는 주서희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그들이 떠나자 이 작은 소파 구역에는 정가혜와 심형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물론 한쪽에 앉아 여의사들에게 자신의 자산이 얼마인지에 대해 반복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소수빈도 있었다. 긴장을 풀린 그녀는 심형진이 건네준 음료를 한 모금 마신 후 그를 향해 물었다.“선배, 고등학교 졸업하고 해외로 이민 간 거 아니었어요? 왜 다시 돌아온 거예요?”“외국에서 의학을 공부했는데 그런대로 잘 배웠어. 국내에도 좋은 의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온 거야. 어찌 됐든 여기가 내 집이니까.”
그 얘기를 듣고 그녀는 열등감에 고개를 숙였다. “학교 다닐 때는 쫓아다니던 얘들 많았었죠. 근데 그건 다 지난 일이에요.”“그리고 나 결혼한 적 있어요. 의사들의 소개팅 자리에 이리 올 수 있었던 건 다 서희 씨 덕분이에요.”그녀는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그저 듣기만 했다. “이혼한 게 뭐 어때서?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끼리 평생 같이 사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어.”“결혼은 결국 사람의 인생을 묶는 무덤이 아니라 따뜻한 가정이 생기는 거잖아.”결혼은 무덤이 아니라 집이라고...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들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심형진을 쳐다보았다. 이 자리에 참석한 건 그냥 한번 와보자는 생각이었다. 근데 이런 좋은 남자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선배, 혹시 서울에서 유명한 유흥업소 알아요?”의학에만 몰두하다 보니 그런 곳에 자주 가지 않았던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잘 모르지만 들어본 적은 있어.”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첫 번째로 잘 나가는 곳은 나이트 레일이라는 곳이고 두 번째는 투 해븐이라는 곳이에요. 투 헤븐은 내가 운영하는 업소예요.”그녀가 유흥업소를 차릴 줄은 생각지도 못한 그는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대단하네.”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자신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의 반응은 의외였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어갔다.“마침 내일 우리 과에서 회식 있는데. 거기로 가면 되겠다. 네 가게 매출도 좀 올려주고.”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마음속에 그녀와 조금 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그녀는 망설이게 되었다. 그 순간 그를 거절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빨대를 들고 컵에 담긴 얼음을 휘젓고 있을 때 파티장의 음악이 바뀌고 불빛이 몽롱해졌다. 무대 위의 사회자는 춤을 추자고 사람들을 불렀고 심형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편, 이연석은 글로리아 호텔의 VIP룸에 앉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룹의 대표이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표이사 대행을 맡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승하가 휴가를 가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연히 그가 대신 회사 일을 처리해야 했다. 회사를 관리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접대에서는 이승하보다 훨씬 뛰어났다.술을 마시고 오락하면서 사업 얘기를 하는 데는 가장 자신 있었다. 물론,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모두 그가 이씨 가문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를 초대하는 이유도 그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그걸 잘 알고 있는 이연석은 몇 잔 마시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근데 상대 쪽에서 그가 바람둥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인지 새로운 아가씨들을 불러왔다. “이 대표님, 이 여자들은 제가 해외에서 데려온 애들입니다. 한번 봐보세요.”말하는 사람은 한화그룹의 대표였다. 화끈한 외국 여자를 몇 명 데려오면 이연석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노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여자나 데리고 노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연석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는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술잔을 톡톡 두드리는데 무언가를 참는 듯하면서도 체면을 세워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국 여자들은 그가 거절하지 않자 이내 대담하게 그에게 다가가 술을 따라주고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주무르려고 했다. 근데 손이 어깨에 닿기도 전에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만지지 마.”온화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고 눈도 초승달처럼 구부러졌지만 왠지 모르게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은 타고난 것으로 보통 사람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것이었다. 웃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차가운 얼굴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이런 공포는 뼛속까지 스며들어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의 눈빛 하나에 외국 여자들은 그를 쉽게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씨 가문의 이
한편, 확실히 오랫동안 춤을 추지 않은 탓인지 정가혜는 자꾸만 심형진의 발을 밟았다. 마지막은 좀 심하게 밟은 건지 고통을 느낀 심형진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미안해요. 이제 그만 해요. 저쪽으로 가서 쉬어요.”심형진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춤을 추기 싫었다. 하이힐로 몇 번만 더 밟으면 선배의 발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아서 말이다. 그녀는 심형진을 부축해 댄스 플로어를 떠났고 소파에 앉기도 전에 늘씬하고 훤칠한 그림자에 의해 길이 막혀버렸다.맞춤 양복을 입고 있는 이연석은 잘생긴 외모에 고귀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림 같은 두 눈이 싸늘하게 변하면서 심형진을 부축하고 있는 정가혜의 손을 쳐다보았다. “맞선 보고 있었어요?”대꾸조차 하기 귀찮았던 그녀는 심형진을 부축한 채로 그를 지나쳐 소파 쪽으로 향했고 남자는 또다시 손을 뻗어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심형진 씨, 가혜 씨가 나랑 3년 동안 만났다는 사실 모르고 있습니까?”두 사람보다 키가 큰 이연석은 눈을 내리깔고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쓴 점잖은 심형진을 쳐다보았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심형진은 당연히 이런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눈앞에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남자에 대해 그는 알고 있었다. 병원 대주주인 이승하의 사촌 동생이자 이씨 가문에서 일곱 번째로 태어난 부자 도련님. 유명한 바람둥이 도련님이다. 이연석 같은 재벌 앞에서 그도 내세울 게 없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겠으나 천박하고 우월감에 빠져있는 이연석을 보니 한 번쯤은 맞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가혜의 손을 잡고 똑바로 서서 턱을 치켜들고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키큰 이연석을 올려다보았다. “3년 동안 만난 적이 있다는 건 지금은 헤어진 상태라는 말이죠. 이미 헤어진 사이에 제 앞에서 이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그래요?”한 발 앞으로 다가온 이연석은 심형진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그를 압박했다. “내가 가지고 놀던 여자를 받아들이겠다는
생각해 보니 그와 헤어진 후, 이연석은 다른 여자들을 만났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근데 맞선을 본 걸 가지고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왜 이러는 건지?정말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설마 다른 남자는 만나지 말라는 뜻인가?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는 기필코 다른 남자를 만날 것이다. 그녀는 심형진과 깍지를 끼고는 이연석을 올려다보았다.“그래요. 이제부터 나와 심형진 씨는 사귀는 사이예요.”이연석은 화가 나서 헛웃음이 낫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사귀는 사이라고? 가혜 씨 참 쉬운 여자네요.”“처음 만나는 사이라고 누가 그래요?”그녀는 이연석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곁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심형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등학교 선배예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고요. 다시 만나보니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한번 만나보려고요.”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말에 이연석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가혜 씨.”깍지를 끼고 있던 그녀의 손을 낚아채고는 그녀를 끌고 파티장을 나가려고 했지만 그녀가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이거 놔요. 연석 씨는 그저 내가 심심할 때 놀던 남자일 뿐이에요. 이제는 질려서 그만하려고요. 그러니까 더 이상 나 귀찮게 하지 말아요.”그 말을 들은 이연석은 가슴이 답답하고 쓰렸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엄청난 고통이 아니라 조금씩 침식되어 손가락 끝에서부터 퍼져나가면서 서서히 심장까지 스며들었다.“그 말 한 번만 더 해봐요.”다시 입을 열려는 순산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남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처음으로 눈이 통제 불능이 되어버렸고 빨갛게 물들어졌다. 이런 통제 불능의 감정이 싫었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다시 잡고는 자신의 품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뒤따라오던 심형진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그의 매서운 눈빛에 걸음을 멈추었다. “오기만 해봐. 당신 집안을 박살 내고 말테니까.”진짜로 화가 난 이연석을 지켜보고 있던 소수빈이 급
그래서 마음을 접었다고?참 무심하게 내뱉은 한마디 말이었다.그녀의 무심한 말에 그의 가슴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아팠다. 친구들한테 놀림당할까 봐 걱정되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단 한 번도 이혼한 정가혜를 경멸한 적이 없다. 그녀한테 자신이 첫 번째 남자가 아니어도 좋았다. 그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근데 어찌 그런 이유만으로 이리 쉽게 마음을 접는단 말인가? 그는 받아들이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잡았다. “가혜 씨,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당신이 이혼했다는 사실을 싫어해 본 적 없어요.”“그게 싫었다면 천벌 받을게요.” 진지하게 맹세하는 그 모습에 정가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그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인 것 같다.주변에 여자가 많은 그가 뭐가 아쉬워서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하는 건지?하지만 그가 이러는 게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조금은 좋아할 수도 있겠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어린 남자의 자존심에 불과했다. 3년 동안 자신이 가지고 놀던 여자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연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달래서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싫증이 나서 그녀를 버릴 것이다. 예전에 만났던 안희연처럼 말이다. 다시 만나다가 또 며칠도 안 돼서 버리게 되겠지. 사랑에 상처를 입은 그녀는 또다시 상처받는 게 두려웠다. 이번에 또 무너지면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강은우와 이연석은 다른 사람이니까. 이연석은 강은우보다 훨씬 더 멋진 남자이니까. 그를 사랑하게 된다면 끝이 날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연석 씨, 당신의 첫사랑. 배하린 씨가 나보다 당신을 더 많이 좋아하고 있을 거예요. 잘 지내요.”또다시 자신을 거절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이연석은 분노가 가득한 채로 자리를 떴다. 사납고 오만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수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관계를 먼저 정리하는 쪽은 이연석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그한테 먼저 헤어지자고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승하보다 이연석이 더 차갑고 매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단 한 번도 여자한테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옷 갈아입듯이 여자가 바뀌었고 한 번도 여자를 진심으로 사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소수빈은 그가 아직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 이리 방황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돈도 있고 여유도 있고 잘생긴 외모에 능력도 있고 잘못을 저지르면 이씨 가문에서 해결해 주고 얌전히 있으면 가문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그런 그가 좋아하는 여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더니 이제는 그도 여자한테 좀 당해봐야 할 것 같다. 소수빈은 마음속으로 그 생각을 하면서 담배 한 대를 꺼냈다.그때, 옆을 지나가던 여의사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저기요. 담배를 피우려면 흡연구역으로 가세요. 여기서 피우지 마시고요.”고개를 돌아보니 우아한 분위기의 여의사가 보였고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한참 동안 생각해 봐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여의사가 먼저 그를 알아보았다.“소수빈 씨, 왜 여기 있어요?”여의사는 잠시 의아해하더니 원장이 사촌 오빠에게 소개팅을 시켜주려고 이 파티를 열었다는 걸 떠올리게 되었다. 지난번에 그녀는 소수빈과 소개팅을 한 적이 있었다. 말도 밥만 먹더니 중간에 나가서 전화를 받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허윤서는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파티에서 좋은 상대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리 이 파티의 주인공을 만나게 될 줄이야.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지난번에 당신과 소개팅했던 허윤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