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석은 분노가 가득한 채로 자리를 떴다. 사납고 오만한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수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관계를 먼저 정리하는 쪽은 이연석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그한테 먼저 헤어지자고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승하보다 이연석이 더 차갑고 매정한 사람이라고 했다. 단 한 번도 여자한테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옷 갈아입듯이 여자가 바뀌었고 한 번도 여자를 진심으로 사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소수빈은 그가 아직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지 못해서 이리 방황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돈도 있고 여유도 있고 잘생긴 외모에 능력도 있고 잘못을 저지르면 이씨 가문에서 해결해 주고 얌전히 있으면 가문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바람둥이 기질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그런 그가 좋아하는 여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더니 이제는 그도 여자한테 좀 당해봐야 할 것 같다. 소수빈은 마음속으로 그 생각을 하면서 담배 한 대를 꺼냈다.그때, 옆을 지나가던 여의사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저기요. 담배를 피우려면 흡연구역으로 가세요. 여기서 피우지 마시고요.”고개를 돌아보니 우아한 분위기의 여의사가 보였고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한참 동안 생각해 봐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여의사가 먼저 그를 알아보았다.“소수빈 씨, 왜 여기 있어요?”여의사는 잠시 의아해하더니 원장이 사촌 오빠에게 소개팅을 시켜주려고 이 파티를 열었다는 걸 떠올리게 되었다. 지난번에 그녀는 소수빈과 소개팅을 한 적이 있었다. 말도 밥만 먹더니 중간에 나가서 전화를 받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허윤서는 그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파티에서 좋은 상대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리 이 파티의 주인공을 만나게 될 줄이야.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지난번에 당신과 소개팅했던 허윤서예요.
어리둥절해진 소수빈은 한참 동안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 옆에 있던 허윤서가 입을 열었다.“소수빈 씨한테 애인이 있었군요.”그녀의 말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니요.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제 애인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허윤서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괜찮아요. 원장님께는 비밀로 할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에게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뒤돌아섰다. 소수빈은 화가 나서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는데 정작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은 옆에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하하하.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법이죠. 드디어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됐어요.”“좋기는 개뿔.”소리를 지르던 그가 튼튼한 허벅지를 들어 올려 심이준을 걷어차 넘어뜨렸다.주먹을 불끈 쥐고 심이준을 호되게 때리고 싶었는데 양손에 수갑이 채워져 거동이 불편했다.“열쇠는요?”“변기에 버렸어요.”이런 젠장!소수빈은 화가 나서 또다시 심이준을 걷어차고 싶었다.근데 그가 다리를 들어올리는 찰나 심이준이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바닥에 꼿꼿이 일어섰다.아무런 구속도 없는 심이준은 복도 밖으로 뛰어가면서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소수빈을 향해 도발했다.“어디 한번 쫓아와 봐요.”“따라잡지 못하겠죠? 하하하.”“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이번 생에 할 욕을 전부 심이준한테 한 것 같다. 가능하다면 그 집안 대대손손한테까지 욕을 퍼붓고 싶었다. 심이준 때문에 좋은 인연을 놓쳤고 양손에 채워진 수갑은 자물쇠 가게에 가서 한참 고생 끝에 겨우 풀 수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심이준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다. 근데 조지는 그가 Y국으로 도망쳤다고 말했다. 들고 갔던 칼을 표창 던지듯 던지니 단칼에 심이준의 방문에 꽂혔다. 소수빈이 돌아간 후에 조지는 앞으로 가서 칼을 뽑았는데 칼이 문짝에 박혀 뽑아지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어 심이준한테 보냈다.[이번 생에는 돌아오지 말아요. 아주 위험하니까.]모래사장에 누워 일광욕
한편,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이연석은 그 문자를 받고 안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정가혜 앞에 가서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초조하게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바에 있던 위스키를 들고 원샷했다.“한 잔 더.”훤칠한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자 바텐더는 곧바로 술을 만들어 그 앞으로 내밀었다.잔을 들고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시는데 옆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소수빈이 클럽으로 오라고 보낸 문자인 줄 알았는데 확인해 보니 가족 단톡방에서 온 문자였다.[새로 산 옷.]‘빌어먹을 둘째 형’이 글과 함께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이연석은 사진을 클릭하고는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190cm가 넘은 둘째 형이 분홍색 셔츠를 입은 채 야자수 아래 서 있었고 등 뒤에는 푸른 바다가 보였다. 라스베이거스의 경치도 괜찮았고 사람도 잘생겼지만 이 분홍색 셔츠는...[헐. 형, 형이 이런 옷을 입을 줄은 몰랐어요.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이연석이 답을 보내기 전에 다섯 째 형 이연준이 듣기 좋은 말을 보내왔다. 이어서 셋째 이윤재, 넷째 이동하가 그 뒤를 이어 각각 문자를 보내왔다. [형, 혹시 옷 파는 놈한테 납치된 거면 윙크하는 이모티콘 보내줘요. 당장 형 구하러 갈 테니까.][형, 핑크색은 너무 한 거 아니에요? 진짜 깜짝 놀랐네요. 그냥 블랙이랑 화이트 그레이 색상 입어요. 우리 형인지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으니까.]잔뜩 화가 나 있던 이연석은 둘째 형을 놀리는 문자를 보고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그가 이내 겁도 없이 문자를 보냈다. [형, 이걸 입은 것보다 차라리 벌거벗고 다니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이런 옷은 어디서 구한 거예요? 진짜 촌스러워.][결혼하고 나니까 보는 눈이 점점 없어지네요? 진짜 눈 뜨고 못 봐주겠어요.]미친 듯이 문자를 보내던 이연석은 그의 첫 번째 문자가 전송되기 전에 단톡방에 새로운 멤버가 추가되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였다. 이승하도 그가 문자를 보내기 전에 먼저 문자를 하나 보냈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 있던 패션 잡지를 집어 들고 이승하의 눈앞으로 다가와 잡지 속 남자 연예인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여보, 헤어스타일 이렇게 바꿔보는 건 어때요?”차가운 얼굴로 타이핑을 하던 남자는 잡지 속 남자 연예인의 은빛 회색 머리카락을 보고 놀라서 흠칫 손가락을 떨었다.흠... 거절해도 될까?“여보, 왜 그래요, 마음에 안 들어요?”고개를 든 이승하는 별을 박은 듯한 눈에 거부감이 역력했지만 섬세하고 잘생긴 얼굴에는 조금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아니, 좋아.”“그럼 바로 머리하러 가요.”이승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재빠르게 변명거리를 찾았다.“여보, 이따 카지노 갈 건데 그런 스타일로는 돈을 벌 수가 없어.”몇몇 재벌가 도련님들도 라베가스에서 여행 중이었다.그가 SNS에 올린 것을 보고는 아내를 데리고 함께 카지노에 가자고 했다.이승하는 평소 도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런 유흥업소는 다니지 않았다.하지만 아내가 사준 옷을 자랑할 생각에 덜컥 대답해 버렸다.정작 그런 모습으로 카지노에 갈 생각을 하니 이승하는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섰다.서유는 그가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짧게 대꾸하며 잡지를 내려놓은 뒤 더 다그치지 않았다.하지만 이승하는 아내가 기분이 좋지 않은 줄 알고 재빨리 휴대폰을 들고 스타일리스트들을 호텔로 불렀다.몇 시간 후,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옅은 별빛을 머금은 채 서유 앞에 나타났다.빼곡한 은빛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빗어 넘기자 하얗고 반질반질한 피부가 더욱 섬세하고 윤기 났다.차갑고 날카로운 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눈앞의 남자는 천사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서유가 1인용 소파에 앉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남자는 몸을 살짝 숙여 소파 양옆에 한 손을 지탱한 채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여보, 내가 입은 옷도 당신이 사준 건데 어때, 잘 어울려?”옆에 있던 거울에 비친 남자는 부드러운 실크 재질의 흰색 셔츠와 캐주얼한 바지를
이곳 불야성에서 가장 화려한 카지노 입구에 최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경호원들은 재빨리 차에서 내려 선두에 있는 검은색 카이엔의 문을 열었다.금테 안경을 쓴 남자가 긴 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함께 차에서 내려왔다.카지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어맨은 비범한 외모와 화려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보자 눈이 번쩍 빛났다.이곳에서 오랫동안 일했지만 이렇게 눈길을 끄는 사람들은 처음 봤다. 두 사람의 몸에 걸친 것만 해도 억 소리가 났다.게다가 반듯하게 생긴 남자가 데려온 경호원들과 고급 차량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도어맨이 허리를 숙여 맞이하면서 팁을 얻기 위해 아부하려던 찰나 카지노 보스가 걸어 나왔다.“이 대표, 오랜만이네!”로버트는 부하들을 데리고 이승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다가 그의 머리에 시선이 갔다.“머리가 왜 그래, 변이라도 됐나?”변이?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서유는 이승하의 머리카락을 바라봤다. 멋있기만 한데, 왜 남자들이 보는 거랑 자신이 보는 게 그렇게나 다른 걸까.훤칠한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다소 거만하게 선이 뚜렷한 턱을 치켜들었다.“아내가 좋아해서.”이승하의 차가운 시선이 로버트에게 쏠렸다.“왜, 불만 있어?”“내가 어떻게 감히.”혼혈인 로버트는 오랫동안 외국에서 자랐지만 우리 말이 유창했다.“무지개 색으로 바뀌어도 내 알 바 아니지.”말을 마친 로버트는 서유를 돌아보았다.“서유 씨, 저 기억하세요?”워싱턴 승마장에서 만난 이승하의 친구였던 게 기억이 나 고개를 끄덕였다.“기억해요.”서유가 자신을 기억하자 로버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에게 매너 있게 손을 내밀었다.“지난번 제 이름을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는데 제 소개를 하죠. 로버트라고 합니다.”서유가 손을 뻗어 정중하게 악수를 하려던 찰나 자신을 감싸고 있던 남자에 의해 끌어당겨졌다.“말이 많네.”이승하의 차갑고 칼날 같은 시선을 받은 로버트는 차갑게 몸을 떨며 그의 행동에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었다.“
서유는 이승하의 손에 이끌려 소파에 앉더니 그의 귀에 다가와 속삭였다.“여보, 내일 다시 염색하는 게 좋겠어.”비록 그녀는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아무리 악의가 없더라도 이승하가 친구들의 놀림을 받는 걸 참을 수 없었다.웨이터에게 레드 와인을 건네받은 이승하가 그녀를 흘깃 쳐다봤다.“그럼 우리 거래는 아직 유효한 거야?”머리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만 매일 밤 두 번의 쾌락을 이대로 ‘취소’할 수는 없었다.서유는 한 손을 무릎에 대고 턱을 괸 채 잠시 생각하더니 도박판을 가리키며 물었다.“놀 줄 알아요?”남자는 두 눈에 뭐든 다 한다는 눈빛이 가득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몰라.”모른다는 그의 말에 서유는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그럼 원래 약속대로 오늘 밤 100억 이기면 그렇게 해요.”사실 불야성에서 100억을 따는 것 정도는 흔한 일이었지만, 도박은 게임 방법을 아는 것 말고도 운에 달렸다...하지만 옆에 있는 이 남자는 놀아본 적도 없었고 설사 즉흥적으로 배운다고 해도 금방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단지 운에 의존해야 했다.하지만 이승하의 운을 어쩌면 새로 염색한 머리가 방해할 수도 있었기에 그와 함께 내기를 해도 나쁠 게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며 서유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는 이승하를 바라보았다.“언제 시작해요?”이승하는 그녀가 서두르자 피식 웃더니 고개를 들고 건너편에서 친구들과 잔을 부딪치고 있는 로버트를 향해 턱을 까딱했다.“시작하지.”보스가 이렇게 말하는데 로버트가 어찌 감히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그는 곧바로 술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도박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도박판의 초록색 형광 카펫 위에는 여러 종류의 칩 카드가 놓여 있었다.로버트는 테이블 위에 손을 얹고 혼혈 특유의 금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친구들, 오늘 내가 딜러 역할로 직접 카드를 나눠줄게.”로버트의 말에 이승하를 제외한 몇몇 도련님들이 놀리기 시작
“무모하네!”로버트는 콧방귀를 뀌더니 테이블을 두드려 딜러가 카드를 나눠주도록 했다.딜러가 카드를 올리고 그의 긴 손가락이 덱을 쓸어내리더니 카드들이 바스락거리며 녹색 형광 카펫 위에 펼쳐졌다.로버트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바에서 카드를 뽑아 테이블에 앉은 플레이어들에게 두 장씩 차례로 나눠주었다.마찬가지로 딜러인 자신은 카드 하나를 엎고 하나를 오픈한 뒤 네 명의 플레이어는 바로 카드를 오픈했다.서유는 룰북을 들고 한 번 꼼꼼히 살펴본 후 블랙잭이 어떻게 플레이되는지 알 것 같았다.게임의 규칙은 사실 아주 간단한 포커 게임으로, 에이스는 1점 또는 11점, J, Q, K는 10점, 나머지 2부터 10은 덱 자체의 숫자로 처리할 수 있다.각 플레이어는 먼저 2장의 카드를 받게 되며, 이때 플레이어의 카드가 21에 근접하지 않으면 계속 카드를 요청할 수 있고, 플레이어의 포인트가 21점이 되거나 21점에 가까워지면 카드 요청을 중단할 수 있다.카드를 받은 플레이어가 딜러보다 더 많은 점수를 얻으면 승리, 그 반대의 경우 패배, 상대 플레이어나 딜러가 카드 점수를 21점보다 더 많이 얻으면 폭발, 즉 패배로 계산한다.서유는 명확하게 이해한 후 이승하 앞에 놓인 두 장의 카드를 바라보았다.에이스와 잭이다. 퀸, 킹 또는 에이스, 10이 오면 곧바로 블랙잭을 만들 수 있다.9가 나와도 블랙잭에 가까워져 딜러의 포인트가 그보다 크지 않다면 이길 수 있었다.서유는 이승하를 힐끔 쳐다보았다. ‘왜 첫판부터 운이 이렇게 좋은 거야?’그녀는 자신이 불운의 신이 아니라 재물신을 불러온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내조를 한 셈인데!이승하는 옆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을 의식한 듯 고개를 돌려 얇은 입술로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여보, 규칙 좀 알려줘.”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감히 4천억을 걸다니, 무모하긴 해도 그녀의 거래에는 도움이 됐다.서유는 곧바로 룰북을 덮어 뒤쪽 소파 틈새에 숨기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승하에게 말도 안 되는 이
비열하고 간사하고 교활하다!분명히 규칙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그녀를 속이다니!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님 부디 네 번째 카드에 10을 주셔서 폭발시켜 버리길!다른 세 명의 플레이어에게 카드가 필요한지 물어봐야 했던 로버트는 이승하를 노려보았다.“서두르지 말고 다음 라운드 기다려.”로버트는 그들에게 한 명씩 물어본 다음, 그들과 자신에게 세 번째 카드를 더했고 이승하에겐 네 번째 카드가 주어졌다.남자는 한 팔로 서유의 허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인 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여보, 당신이 카드 오픈해.”솔로였던 로버트는 이 모습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손에 들고 있던 갈고리를 던졌다.“가 가 가, 얼마를 원해, 그냥 줄게. 빨리 아내 데리고 집으로 가.”다른 세 플레이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두드리며 항의했다.“그래그래, 우리가 테이블에 있는 칩 다 줄 테니까 빨리 돌아가. 여기서 사람 괴롭히지 말고!”이승하는 얼굴이 빨개진 아내를 감싸안으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못 견디겠어도 참아야지. 부러우면 너희들도 아내를 찾던가.”“...”이제 알겠다. 그는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아내를 자랑하러 온 것이다!로버트는 빠득 소리가 나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얘들아, 나 저놈 패고 싶은데.”“우린 진작부터 참고 있었어!”이승하는 피식 웃었다.“그래서 너희가 솔로인 거야. 너무 거칠잖아.”흰색 정장을 입고 옆에 앉아 있던 케네디가 정중하게 일어났다.“이제 한 대 때려도 될까?”로버트도 손을 뻗어 진정하라는 듯 케네디를 꾹 눌렀다.“테이블 위에서 마음껏 패자고.”그들의 ‘부드러운' 대화에도 이승하는 시종일관 눈치를 보지 않았다.그의 눈엔 그저 아내가 없는 놈들의 시시껄렁한 대화에 지나지 않았다.반면 한껏 과시 당하고 있던 서유는 작은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고 있는데 옆에 있던 이승하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여보, 카드 오픈해.”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