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잠긴 택이의 옆에 갑자기 엄청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칼과 포크를 든 두 손이 덜덜 떨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보... 보스...”빛을 등지고 선 이승하가 길고 가느다란 눈을 내리깔고 차갑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앉아 있어? 요즘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지? 감히 날 보고 소심하다고 하는 거야 지금?”엥? 보스, 이건 아니잖아요. 서유 씨가 먼저 말을 꺼낸 건데. 난 그저 맞장구를 쳐준 것뿐이라고요.그가 변명을 하려는 찰나 이승하가 들고 있던 그릇을 탁자 위에 내던졌다. “두 사람 내가 만든 음식 전부 다 먹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먹을게요. 지금 바로 먹겠습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택이가 바로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이미 배가 부른 서유는 활짝 웃으며 이승하를 쳐다보았다.“여...”“여보라고 해도 소용없어.”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택이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각자 그릇에 음식을 담아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한 입 먹고 토가 나올 뻔했지만 차가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는 남자 때문에 이를 악물고 삼켰다. 꿀꺽 음식을 삼키는 순간 잘생긴 택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맛도 더럽게 없네. 누가 와서 날 좀 살려주면 좋겠다. 이승하는 허리를 약간 숙이고는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맛있어?”입에 든 새우를 간신히 삼키고 그가 입을 열었다.“맛있어요. 아주 맛있습니다.”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네.이승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래? 그럼 이제부터 저녁은 내가 만들어줄게.”요리 실력이 늘기 위해서는 마침 실험 대상이 필요했던 터였다. 이승하가 자신의 저녁을 책임지겠다는 말에 택이는 너무 놀라 칼과 포크를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쪽으로 달려가 걸터앉았다. “보스, 정말 이럴 겁니까? 여기서 뛰어내릴 수도 있습니다.”이승하는 곧게 서서 팔짱을 낀 채 턱을 쳐들고 피식 웃었다.“맛있
부산에 도착한 정가혜는 서유가 보낸 문자를 받았는데 확인해 보니 오로라 사진이었다.[가혜야, 이번에는 무사히 F국에 도착해서 진짜 오로라를 봤어. 소원 성취했다.]동영상도 몇 개 보냈는데 오로라 아래 스쳐 지나가는 이승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도 그의 눈에는 온통 서유뿐이었다. 정가혜는 빙그레 웃으며 음성 메시를 하나 보냈다. 신혼여행 잘 보내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라고 당부했다. 메시지를 보낸 뒤,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놓고는 선글라스를 끼고 공항을 빠져나왔다.콜택시를 불렀지만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무심하게 불을 붙였다.연한 베이지 컬러의 오프숄더 롱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금색 체인 가방을 어깨에 멘 채 흰색 기둥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피어오른 연기가 그녀의 주위를 감쌌다. 매끄러운 피부, 맑고 밝은 눈동자, 가는 곡선을 그리고 있는 눈썹, 장미 꽃잎과도 같은 붉은 입술, 그녀의 모습은 요염하기 그지없다. 가느다란 담배를 물고 있는 그녀는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났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서 허리를 굽혀 담배꽁초를 던지려는데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이 다시 산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한편, 그곳을 지나가던 롤스로이스에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이연석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흠칫하더니 이내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했다. 시간도 때울 겸 한 대 더 피우려고 네일을 한 손끝으로 담뱃갑을 헤집고 있는데 가느다란 손이 그녀의 담뱃갑을 눌렀다.선글라스 안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고 잘생기고 반듯한 이연석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떨리더니 이내 그의 손을 밀어냈다. “왜 이래요? 가까이하지 말아요.”그녀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나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덤덤한 그녀의 모습은 방탕한 행동을 하는 낯선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했다. 안색이 어두워진 이연석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왠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아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실망스러웠고 당황스러웠다. 정가혜가 다시는 그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을 잃은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담배 냄새가 콧방울 사이로 스며들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냄새였다. 그리웠던 마음에 그녀의 머리카락에 머리를 파묻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가혜 씨, 또 담배 피웠네요. 피우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한 거 아니었어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남동생이 누나한테 꾸짖듯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녀를 어쩔 수가 없었다. “이연석 씨, 여자 친구도 있는 사람이 이렇게 날 안고 있으면 어떡해요?”여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흠칫하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여전히 제멋대로 그녀를 안고 있었다. “나랑 있을 때 같이 눈 보러 가자고 했었잖아요. 언제 갈 거예요.”“여자 친구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근데 그런 사람이 왜 날 이렇게 안고 있어요? 당장 풀어줘요.”“가혜 씨...”“이연석.”화가 난 그녀의 모습에 그는 입을 닫았다.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더니 이내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성을 되찾은 그가 차가운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요즘은 자꾸만 예전 연인이 그립다더라고요. 옛 여자 친구를 만나면 자꾸만 건드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요.”이씨 가문의 이연석 도련님은 여자에게 마음을 줘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그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인다는 건 그 여자와 자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던 정가혜는 그가 보여준 감정들에 대해 진심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녀와 같은 평범한 사람은 재벌 집 도련님의 상대가 아니었다. 오직 빨리 이 관계를 정리하는 것만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이연석보다 세 살 더 많았다. 서른이 넘은 여자
책을 뒤적이던 송사월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휠체어를 돌렸다. “가혜 누나, 여긴 어쩐 일이에요?”“너 보러 왔지.”그녀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처럼 눈시울이 붉어졌다.“1년 동안 부산에서 어떻게 지냈어?”정가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누나가 동생을 걱정하는 말투로 그를 관심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요.”그는 책을 덮어 옆 테이블에 놓고는 차를 내오라고 손짓했다. “이곳 사람들은 차를 마시는 게 습관이 되어있어요. 차 한 잔 마셔요.”“그래, 난 다 좋아.”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마시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송사월을 다시 볼 수 있었다는 게 그녀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예전에는 서유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그러나 지금은 서유에 관한 이야기가 적절하지 않다. 세 사람 사이는 이렇게 멀어져 가는 걸까?“누나는 이연석 씨랑 어떻게 됐어요?”가방 속의 서류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축의금을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어졌어.”짧게 대답한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넌? 넌 언제 손예진 씨랑 약혼해?”이때, 김민정이 우려낸 차를 들고 다가왔고 송사월은 찻잔에 차를 부어서 정가혜에게 건네주었다.“약혼 안 하기로 했어요.”짧게 말 한마디를 내뱉더니 더 이상의 해명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뜻을 알아차린 그녀는 찻잔을 받아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 혹시 서유가 너한테 미안해할까 봐 일부러 속였던 거야?”송사월은 차 한 잔을 따라 가볍게 한 모금 마신 후, 정가혜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마셔요.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그는 이 일을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걸 눈치를 챈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고개를 숙여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는 에스프레소를 좋아했었던 것
사실 그는 서유가 더 이상 자신의 물건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고 정가혜에게 돌려달라고 부탁할 것이라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어차피 지금은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게 적합하지 않으니까. 매번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그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만날 자격조차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여전히 친구로서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서유의 이름도 맘껏 부를 수 있었을 테니까. “축의금 돌려주려고 온 거 맞아.”정가혜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쑥스러운 듯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서유가 너한테 빚진 게 너무 많다고 했어. 이번 생에는 다 갚을 수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 돈은 받을 수 없대.”그는 서류봉투를 받아쥐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정가혜를 향해 웃었다. “이것들은 이미 모두 서유의 명의로 넘어갔어요. 누나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서류에 불과할 뿐이고요.”흠칫하던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사월아, 너의 신분으로 지금 서유한테 이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네가 이러는 건 서유를 난처하게만 할 거야.”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서유가 첫사랑한테서 이리 귀한 걸 받는다면 이씨 가문의 사람들이 서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유산으로 남겨준 거니까. 내가 죽게 되면 변호사님께서 발표할 거예요.”그는 이미 서유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 그녀를 절대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유산?”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정가혜는 심장이 계속 쿵쾅쿵쾅 뛰었다.“송사월, 너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송사월은 고개를 흔들더니 그녀를 담담히 쳐다보았다.“누나, 나 우울증이 심하대요. 지금 치료받고 있긴 한데 약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우울증?송사월이 우울증에 걸렸다고?그럼...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사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갑자기
죽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나?우울증이 없는 정가혜는 그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고통이 얼마나 클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1년 동안 이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지낸 건지?멀쩡하던 사람이 왜 이리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건지?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며 정가혜는 받아들이기 힘든 표정을 한 채 눈물을 흘렸다.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다리도 잃고 심한 우울증까지 겪고 있는 송사월이다. 그의 삶이 왜 이렇게 기구한지 모르겠다. “누구나 인생에서 힘든 일을 겪기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이 또한 다 지나가게 될 거니까.”송사월은 테이블에서 휴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젠틀하고 다정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서유를 위해서라도 죽지 않겠다고 했으니 잘 살아야 해. 절대 딴마음 먹어서는 안 돼.”말을 마친 그녀는 가방에서 부적을 꺼내 송사월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서유가 Y국에 돌아온 후, 절에 가서 받아온 거야. 네가 가지고 있어. 부처님께서 널 지켜줄 거야.”이어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서유가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소원을 빌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그에게 보여주었다.“봐봐. 이건 서유가 널 위해 기도했을 때 찍은 사진이야. 서유는 늘 네가 건강하기를 바랐어.”“비록 지금은 너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서유한테 넌 여전히 소중한 가족이야.”“그러니까 송사월, 약 잘 챙겨 먹고 이겨내야 해. 서유가 부처님 앞에서 빈 소원을 저버리지 마.”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는 서유의 모습에 우울함이 가득했던 그의 얼굴이 조금은 환해졌다. 그는 정가혜의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한참 쳐다보고는 고개를 들고 웃으며 물었다. “이 사진 나한테 보내줄 수 있어요?”합성된 결혼사진을 제외하고 어린 시절 서유와 찍었던 모든 사진이 다 망가진 상태였다. 그한테는 서유의 사진도 없었고 두 사람이 함께
송사월이 걱정되었던 그녀는 파티에 갈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주서희가 오랜 시간 공들인 일이기 때문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집에 돌아온 그녀는 샤워를 마친 뒤, 샴페인 컬러의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과하지 않고 깔끔한 라인의 드레스였지만 꽤 격식이 있어 보였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차를 몰고 집을 나서 글로리아 호텔로 향했다. 파티장 안, 어두운 조명 아래 정장 차림을 한 남자들과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와인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잔잔히 들려오는 팝송에 정가혜의 우울한 기분도 한결 나아진 듯했다. 그녀는 파티장의 사진을 찍어 송사월한테 보냈다.[나 지금부터 맞선 보려고. 결혼에 실패한 나도 이렇게 다시 일어나는데 너도 힘내.]격려의 말 한마디는 그한테 큰 힘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를 웃게 만들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는 따뜻한 그 말에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알았어요.”그의 답장을 받고서야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갔다.이번 파티는 소수빈과 그녀를 위해 주서희가 특별히 마련한 소개팅 파티였다. 소수빈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옅은 회색 정장을 입은 채 소파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면접이라도 보러 온 것처럼 꼿꼿이 앉아 두 손을 무릎에 괴고는 맞은편에 있는 여의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성동 중심 별장 단지에 100억이 넘는 별장을 하나 소유하고 있고요. 크고 작은 아파트도 10여 채는 가지고 있습니다.”“좋은 차도 꽤 가지고 있고요. 자산은 몇백억쯤 될 겁니다.”“저에 대해 더 궁금한 거 있습니까?”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여의사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역시 JS 그룹 대표이사의 비서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엄청 부자네.이런 조건을 가진 남자한테 뭘 더 물어볼 필요가 있겠는가?여의사는 웃으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아니요. 궁금한 게 없어요.”“그럼 다음 분.”여의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내가
소녀는 정가혜의 옆에 앉자마자 그녀의 귓가에 다가와 입을 가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혜 이모, 저쪽에 아주 잘생긴 삼촌이 있어요.”“한참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모는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면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그 말에 정가혜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만지더니 연이가 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소파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의사가 앉아 있었는데 길지도 짧지도 않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쓴 남자는 말끔하고 점잖아 보였다. 생김새로는 그녀의 마음에 확실히 들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는 약간 수줍은 듯 연이를 향해 턱을 치켜들었다.“갔다 와. 가서 여기로 데리고 와.”“알았어요.”연이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신이 나서 잘생긴 남자에게로 달려갔다. 연이가 그 남자 의사의 손을 툭툭 치자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이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건넨 과자를 받아쥔 연이는 통통한 작은 몸을 옆으로 젖히고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저기 저 이모예요. 삼촌이 마음에 든다고 저한테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어요.”마침 파티장의 음악이 바뀌면서 몇 초 동안 음악이 멈추자 연이의 큰 목소리가 파티장을 가득 메웠다.민망해진 정가혜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고 하필이면 연이의 손가락이 그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얼굴 가리고 있는 저 이모예요. 똑똑히 봤어요?”심형진은 연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한사코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정가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한참 동안 쳐다보던 그가 눈앞에 서 있는 소녀를 쳐다보며 웃었다. “당연히 똑똑히 봤지. 삼촌한테 소개해 줄래?”“그럼요.”연이는 재빨리 심형진의 손을 잡고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이때, 주서희가 와인을 들고 와서 한 모금 마신 뒤 정가혜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저분은 얼마 전에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선생님이에요. 집안도 좋고요. 연이가 꽤 눈썰미가 좋네요.”너무 민망했던 정가혜는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