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야.”케이시가 국화꽃을 든 채 경호원을 대동하고 지현우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무덤 앞에 있는 남자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수중의 사진을 자신의 심장 가까이에 있는 주머니 안에 넣었다.케이시는 지현우가 자신을 업신여기고 있는 걸 알고 있기에 그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그는 지현우의 옆으로 가 수중에 있는 꽃을 내려놓다가 묘비 위에 있던 여자의 사진을 발견했다.“서유 씨?”케이시는 그제야 자신이 왜 김초희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죽은 사람’이 김초희가 아니라 서유라 애초에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지현우는 김초희를 독차지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 듯했다. 그래봤자 결국에는 그 김초희에게 배신당했지만...케이시는 입꼬리를 올리며 지현우에게 말했다.“이제 8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연이를 돌려줘야지?”줄곧 입을 꾹 닫고 있던 지현우가 케이시를 차갑게 쳐다보았다.“김초희의 유언, 뭐였어?”케이시는 몸을 일으키고는 지현우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무덤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초희의 유언이라 너한테는 무척이나 중요한가 보지?”지현우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놓고 답했다.“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야...”케이시는 곧 죽어도 진심을 말하지 않는 그를 보며 가죽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지현우의 어깨를 토닥였다.“하, 현우야, 너는 네 그 입 때문에 팔자가 꼬일 수밖에 없어.”케이시는 마치 세상만사를 다 경험한 사람처럼 말했다. 그런 점이 지현우는 끔찍하게도 싫었다.그는 케이시의 손을 먼지 털 듯 털어냈다.“함부로 내 이름 부르지 마.”싫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현우와는 달리 케이시는 아까부터 지나치게 여유로운 표정이었다.그는 지현우를 담담하게 웃었다.“초희의 유언은 꽤 긴 영상이야. 특별히 너를 위해 남긴 거지.”케이시는 그 말을 내뱉고는 서서히 웃음을 지워버렸다.“뭐라고 했는지 안 궁금해?”지현우는 어두운 표정을 여태 지우지 못했다.“줄 거면 빨리 주고 주기 싫으면
케이시는 허리춤에서 총 한 자루 꺼내 들며 손에서 이리저리 가지고 놀았다.“현우야, 연이한테 정 많이 들었지?”지현우는 까만 눈동자로 케이시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8개월 동안 내 옆에서 지내게 한 이유가 내가 아이한테 정이 드나 안 드나 보려던 거였어?”지현우는 케이시의 목적은 알아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아직 알지 못했다.딸 목숨으로 아무런 피도 섞이지 않는 그를 협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케이시는 승기를 잡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현우야, 내가 널 얼마나 죽이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지?”“너는 날 절대 못 죽여.”만약 케이시가 지현우를 죽이게 되면 지씨 가문에서는 아마 지현우의 무덤 옆에 케이시도 같이 묻어주려 할 게 분명했다.케이시는 피식 웃더니 총에 총알을 장전했다.“그래. 나는 널 못 죽여. 하지만 네 딸과 초희가 남긴 영상은 널 죽일 수 있을 거야.”“무슨 뜻이야?”케이시는 장전을 완료하고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긴 다음 지현우를 바라보았다.“나는 네가 초희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초희가 죽으면 너도 따라 죽을 줄 알았지. 하지만 너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내 계획은 어그러졌어. 하지만 괜찮아.”케이시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8개월 전에 우연히 연이가 자주 하고 다니는 목걸이 안에서 메모리칩을 하나 발견했어. 하늘은 역시 내 편이구나 싶었지. 그 메모리칩이 글쎄 초희가 너한테 남긴 유언이더라고? 그 안에는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이 모두 다 들어있어.”“그리고 기가 막히게도 그 타이밍에 네가 마침 연이를 뺏으러 왔어. 잘됐다 싶었지. 제정신이 아닌 네가 연이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다가 8개월 뒤에 내가 진실을 말하는 순간 네 멘탈이 완전히 무너지는 게 벌써 상상이 됐거든.”“하지만 내 예상과 달랐던 건 너는 연이에게 정을 주고 있었다는 거야. 눈앞의 아이가 자기 딸인지도 모르고 피가 당겨 감정이 생긴다는 건 나한테는 너무 재미없는 일이었거든.”“그런데 다시 생각해보
케이시는 묘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채 후회막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현우를 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아까 그랬지? 너는 네 그 입 때문에 팔자가 꼬일 수밖에 없다고. 어때? 이제야 내가 한 말이 뭔 뜻인지 알겠어?”지현우가 만약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더라면, 독선적이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연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도 진작 알았을 것이고 말이다.지현우는 지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 언제나 남 위에 있어야 직성이 풀렸고 온 세상이 자기 것인 것처럼 행동했다.그 당시 조그마한 우리 안에 갇혀있던 케이시는 지씨 가문의 장남은 자신일 텐데 대체 왜 자신은 그늘 속에 있어야 하고 지현우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활개를 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그를 낳은 어머니가 술집 여자라서?그는 그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러다 결국 이렇게 된 건 전부 지현우 때문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가 태어나는 바람에 자신이 누려야 할 것들이 전부 다 사라지게 된 것이라며 말이다.지현우만 없었더라면 지씨 가문에서 쫓겨나 떠돌이 생활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떠돌이 생활했을 때 그는 김초희를 위해 음식을 뺏다가 죽을 듯이 맞아댄 적도 있었다. 그 당시 지현우는 차 안에서 마치 천민에게 호의를 베풀듯 그저 ‘그만해.’라는 한마디만 던졌다.그리고 그날부터 김초희의 눈에는 오직 지현우밖에 없었다.지현우가 대체 뭐길래.만약 자신이 김초희가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돈을 지원해줬었다면, 만약 그날 차 안에서 오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지현우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달랐을까?그녀를 먼저 알게 된 것도 자신이었고 그녀 옆에서 어둡고 시린 밤을 함께 보내준 것도 자신이었다.그런데 그런 시간이 무색하게도 지현우는 그저 한 번의 등장만으로 그 시간을 산산조각내버렸다.왜 지현우는 항상 자신의 것을 앗아가는 걸까.왜 가족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유일하게 남은 그의 빛마저 탐을 낼
헬기는 어느 한 별장 앞에 세워졌다. 케이시는 경호원에게 지현우를 지하실에 가둬 놓으라고 명했다.지하실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무척이나 어두웠고 곰팡이가 필 듯한 습한 환경에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이곳으로 오기 전 도망칠 기회는 여러 번이나 있었지만 지현우는 마치 삶을 포기라도 한 듯 그저 입을 꾹 닫고 가만히 있었다.경호원들의 손에 거칠게 지하실로 들어간 조지는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지현우를 보고 눈가를 붉혔다.“현우 씨...”조지의 목소리에 이제껏 아무런 미동도 없던 지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왜 그랬어요?”왜 검사 결과를 조작했지?그렇게나 믿었는데 왜 속인 거지?정확한 검사 결과를 이제야 알게 된 조지는 실망한 눈빛의 지현우를 보며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나 아니에요. 나는 조작한 적 없고 속인 적도 없어요.”“채혈도 직접하고 검사도 직접 했으면서 속인 적이 없다고?!”김초희는 여러 번이나 연이는 그의 딸이라고 해명했다.그 말을 듣고 검사한 결과 친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지현우는 한 번도 그 검사 결과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조지가 준 결과였으니까. 그와 김초희가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이었으니까!그 조지가 결과를 조작해 그를 속였을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난 정말 아니에요!”조지는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당시 검사했을 때 어떤 의사가 나 찾아온 적이 있어요. 아마 그때 그 의사가 손을 쓴 걸 거예요.”조지는 볼품없는 모습의 남자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내 말 믿어줘요. 나는 단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어요.”“지금에 와서 믿는 건 아무런 소용도 없어요.”김초희는 이제 이 세상에 없으니까...“미안해요...”지현우의 빛이 바랜 검은 눈동자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조지는 삶의 의욕을 잃은 듯한 지현우의 얼굴을 보더니 몸을 움직여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당신한테는 아직 딸이 있어요. 그러니까 정신 차려요. 케이시한테서 연이를 찾
“연이는 저 삼촌이 좋아?”“네!”연이는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케이시는 손을 들어 연이의 코를 톡 하고 건드렸다.“연이가 좋아해서 참 다행이야.”그는 연이를 내려놓고 말했다.“연이야, 저기 저 경호원 아저씨랑 같이 가서 의사 선생님 모시고 와.”연이는 삼촌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밖으로 달려나갔다.지현우는 멀어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서 조금 안심했다.케이시는 그런 그의 앞으로 다가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혹시 내가 연이 생각해서 일부러 밖에 내보냈다고 생각해?”그는 구두로 지현우의 상처를 꾹 눌렀다.“너한테 영상을 보여준 뒤에 나는 너랑 연이랑 생존게임을 진행할 생각이야.”케이시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얼마나 지독한 수법을 쓰는지 지현우는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더더욱 둘 싸움에 연이가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6년이라는 시간 동안 케이시는 연이에게 아빠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곁을 지켜준 아빠였다.만약 케이시의 원한 때문에 연이가 아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 작은 아이의 마음은 견디지 못하고 부러질 것이다.연이의 마음이 다칠 바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게 더 나았다.지현우는 생각 정리를 마치더니 한 손으로 케이시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이에 케이시는 바닥에 쓰러졌고 지현우는 바닥에서 힘겹게 일어나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에서 온 악귀 같기도 했다.조지는 드디어 생기를 되찾은 지현우를 보면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본래 케이시는 지현우의 상대조차 되지 못한다. 지금 손에 총을 쥐고 있다고 해도 지현우가 뺏으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지현우는 현재 상처를 입은 몸이고 케이시를 제압하려던 지현우는 금세 다른 한쪽 다리에도 총을 맞아버렸다.“현우 씨!”조지가 서둘러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지만 케이시가 발로 등을 밟고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조지, 쓸데없는 저항은 그만 해요. 오늘은
그리고 영상 속에서 김초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테라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짧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고 따사로운 햇볕은 나뭇가지를 뚫고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영상 시작 부분에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카메라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마치 카메라 너머에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상상하기라도 한 듯 조금 긴장한 기색도 비쳤다.그녀는 카메라를 꽤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활짝 웃었다.“현우야.”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떨려있었다.지현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를 보며 꾹 참았던 눈물을 결국 떨어트리고야 말았다.지금 그의 눈앞에는 김초희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녀가 지금 그의 눈앞에 있다.김초희의 눈가는 단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빨갛게 변해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웃음은 잃지 않았다.“이 영상을 네가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떠나기 전에 그래도 한 번 더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남겨.”“현우야, 내가 케이시와 결혼하기로 한 건 절대 케이시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결혼하지 않고서는 너를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야...”“네가 차로 치어 죽인 사람은 케이시의 형이었어.”“상대가 왕실 사람이라 이대로 네가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면 영원히 나오지 못할 것 같았어.”“네가 케이시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케이시한테 도움을 구하는 방법 말고는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었어. 미안해...”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흔들의자에 얼굴을 파묻더니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진정된 듯 다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를 향한 미안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계속 면회 가고 싶었는데 왕실 사람들이 너 만나지 못하게 막았어. 나 참 쓸모없다, 그치?”흔들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무력함에 실망한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지현
그때도 그는 지금처럼 의자에 몸이 묶인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을 그저 바라만 보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지현우는 지금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면서 어떻게 해서든 의자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봐도 의자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그는 결국 절망스러운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자신처럼 똑같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현우야, 내가 너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지?”“14살이던 해에 널 좋아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지치지도 않고 너를 계속 따라다녔잖아. 지금 돌이켜보면 너도 꽤 곤란했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나 이제 병 때문에 살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 떠나고 나면 이제는 나처럼 진절머리가 날 만큼 널 쫓아다니는 사람은 없을 거야...”“현우야, 만약에 말이야. 가끔 내 생각이 나면 내 무덤에 와줄래?”김초희는 고개를 숙이고 루게릭병 때문에 근육이 딱딱해진 자신의 두 팔을 보며 초연하게 웃었다.“참, 우리가 처음으로 손잡았을 때도 내가 먼저 잡았던 거 기억해? 그때 나는 네가 손을 뿌리칠 줄 알았어. 그런데 너는 가만히 있었고 너의 그 행동 때문에 더 자신감이 붙었던 것 같아.”“외국 언니들이 좋아하는 남자한테 마음을 표현하는 모습이 그때는 너무 멋있어 보였어. 그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못 한 채 말이야...”그녀는 고개를 들고 다시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어릴 때는 너무 철이 없었던 것 같아. 네가 나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계속 따라다녔잖아.”“하지만 너를 좋아했던 그 순간들이 후회되지는 않아.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녀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진주알 같은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뭐가 제일 아쉬울까 생각해봤어. 그러다 보니까 나 여태 한 번도 너한테서 사랑한다는 말을 못 들어 봤더라?”“사실 이따금 생각은 했었어. 너
김초희가 남긴 동영상은 시종일관 그를 탓하는 말 한마디 없이 계속 사과만 하고 있었다.두 사람 관계는 늘 지현우가 우위를 점했고 김초희는 항상 그에게 자그마한 사랑이라도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다.지현우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지현우는 차 안에 앉아 창문을 반쯤 내리고 눈을 늘어뜨리고는 덤덤하게 한 무리의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인 김초희와 케이시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때 차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무료해하던 그는 그저 힐끗 쳐다보았을 뿐이지만 어지러운 사람들 속에서 머리를 끌어안고 땅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김초희가 한눈에 들어왔다.김초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볼 때, 눈에서는 맑고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청초한 눈빛은 이런 지저분한 환경에 속하지 않았다. 지현우는 저도 모르게 그만하라고 소리쳤다.그때 지현우는 김초희 곁을 지키고 있던 케이시가 바로 지씨 가문의 사생아이자, 그의 이복형이라는 것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케이시와 함께 있는 김초희를 절대 후원하지 않았을 것이다.김초희의 말에 의하면, 바로 그 후원을 받고 나서부터 그녀는 항상 방과 후에 묵묵히 지씨 저택 앞을 지키면서 지현우에게 감사 인사를 할 기회를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현우는 매일 차를 타고 드나들면서 한 번도 차창을 내리고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나중에 김초희가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 그와 같은 대학에 입학했고 동창이 되었다. 그렇게 천천히 다가갔지만 지현우는 여전히 김초희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의 지현우는 사랑을 알지 못했다.단지 한 여학생이 매일 아침 그의 책상에 아침 식사를 놓고, 매일 학교를 마치고 자전거를 타면서 그의 차를 따라 반쯤 쫓아가다가 따라잡을 수 없으면 멈춰 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현우가 화실에서 그림에 몰두할 때도 그녀는 창문 입구에 몰래 서서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유리창을 통해 화필을 들고 있는 그를 바라보곤 했다.나중에 지현우는 그녀도 화실에 앉아 몇 가지 물감을 반복해서 사용하여 기괴한 모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