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야, 너 괜찮아?!”정가혜는 아까 이연석과 얘기를 나눈 후 바로 사무실로 가 느긋하게 샤워했다. 그러다 이제 막 상 하의를 다 입은 찰나에 하 매니저가 들어와 서유가 트러블에 휘말렸다는 소리를 해 다급하게 이곳으로 뛰어왔다.정가혜는 많이 놀랐는지 하이힐이 아닌 슬리퍼를 신고 젖은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왔다.서유는 정가혜의 목소리에 서둘러 이승하를 밀어내고는 그녀에게 외쳤다.“나 괜찮으니까 넘어지지 않게 천천히 와.”정가혜는 서유 앞에 멈춰서 잠시 호흡을 고른 후 이곳저곳 훑어보며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서유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켜 주었다.“괜찮아. 승하 씨도 있는데 뭐.”정가혜는 그제야 시선을 이승하에게로 돌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이승하는 지금 상당히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이승하는 지금 정가혜를 죽이고 싶으면서도 서유의 제일 친한 친구라 어쩔 수 없이 꾹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정가혜는 그의 표정을 읽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서유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내가 널 위해 VIP룸으로 준비해 뒀어. 분명히 마음에 들 거야.”이승하는 아까 클럽 앞을 지나가다 마침 서유가 앞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차에서 내려 홀로 따라온 것이다.당연히 정가혜를 만나러 온 줄 알았는데 VIP룸이라는 말에 그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이승하는 서유의 다른 한쪽 팔을 잡아당겨 정가혜 옆에서 그녀를 떨어트려 놓았다.“여기 놀러 온 거야?”서유가 막 회사 사람들을 축하 파티 때문에 왔다고 하려던 찰나 정가혜가 그녀를 그에게서 다시 잡아당겼다.“서유야, 남자 모델은 몇 명 불러줄까?”‘흥, 감히 나한테서 서유를 뺏으려고 들어?!’그 말에 이승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허리를 숙이더니 자신의 얼굴을 서유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남자 모델들과 놀 거야?”서유는 따뜻하다 못해 조금 뜨겁기까지 한 그의 숨결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셔츠 풀어줘.”이승하의 뜻은 그저 셔츠 제일 윗단추를 풀어달라는 뜻이었다.하지만 서유는 그와 닿으면 큰일 날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며 거절했다.“알아서 해요.”그때 이승하의 하반신이 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그 작은 움직임에 서유는 귀까지 빨개졌다.“휴, 풀어주면 나 바로 내려줘야 해요.”이승하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서유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손을 들어 그의 셔츠를 매만졌다. 그렇게 세 개 단추까지 풀어주고 나니 풀어헤쳐 진 셔츠 사이로 그의 가슴이 조금 드러났다. 흰 피부에 쇄골까지 드러난 그의 모습은 지독하게 섹시했다.그리고 시선을 위로 올리면 숨 막힐 정도로 잘생긴 이승하의 얼굴이 보였다.서유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지금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보고 싶었어, 서유야.”이승하는 자신의 다리 위에 앉은 여자를 보며 이대로 그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서유 역시 그의 말과 눈빛에서 그 의미를 알아채고는 애써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렸다.“이제 내려줘요.”이승하는 놓아주지 않았을뿐더러 그녀의 허리를 감싸던 손을 천천히 위로 가져가더니 그녀가 방심한 틈을 타 자기 쪽으로 확 끌어안았다.그 탓에 서유는 그를 덮치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이대로 이승하가 가까워진 그녀의 입술을 탐하려는데 갑자기 관자놀이가 아파 왔다.고통은 계속 이어졌고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져 입술까지 하얗게 되어버렸다.이승하는 서유를 풀어주고 그녀를 서둘러 소파 옆에 내려놓더니 이곳에서 나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한걸음 떼려는 찰나 머리가 더 격하게 아파져 자신도 모르게 소파 쪽으로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승하 씨!”이승하는 마침 서유의 쪽으로 쓰러졌다.서유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꼭 끌어안더니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지난번 나이트 레일에서도 그는 이렇게 갑자기 쓰러졌었다.이승하는 사랑하는 그녀가 괜히 걱정이라도 할까 봐 창백한 얼굴로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난 괜찮
심이준은 원래 금은방 사장님이 보내온 물건을 들고 서유에게 고마움도 전할 겸 한껏 자랑하려고 했었다.그런데 갑자기 이승하가 이곳에 나타날 줄이야. 이렇게 되면 이따 제대로 축하 파티를 즐길 수 없게 된다.심이준 뒤에 있던 디자이너들도 안으로 들어와 이승하의 얼굴을 보더니 얼굴에 걸렸던 웃음을 다 지워버렸다.그러고는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서로서로 눈치를 봤다.“선배님, 먼저 들어가시죠.”선배라는 사람은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거절했다.“아니 아니, 후배님들 먼저 들어가시죠.”서유는 잔뜩 겁먹어 들어오지 못하는 디자이너들을 한번 보다가 다시 무서운 얼굴을 한 이승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나가 있을래요? 인사만 하고 바로 나올게요. 그리고 같이 병원 가요.”이승하는 고통을 참으려고 꽉 쥐던 손을 풀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져주며 답했다.“병원은 내일 가도 돼. 오늘은 네 옆에 있을 거야.”그는 말을 마치더니 냉랭한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들어오시죠.”고작 다섯 글자일 뿐인데 디자이너들은 육식 동물을 마주한 초식 동물처럼 움찔거리며 이승하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반면 심이준은 무슨 배짱인지 바로 이승하의 맞은편에 앉아 먼저 인사를 건넸다.“이 대표님께서 저희 축하 파티에 얼굴을 다 비추시고, 이거 너무 영광인데요?”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애써 괜찮은 척했다. 물론 속으로는 지금 당장 이곳에서 떠나라고 외치고 있었다.이승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 듯 갑자기 손을 들어 자기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심이준 디자이너, 이쪽으로 와서 얘기 좀 하시죠?”심이준은 자신을 한입에 삼켜버릴 듯한 그의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제가 어떻게 감히... 얘기는 저희 사장님과 계속 얘기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참, 매니저한테 맡긴 물건이 있는데 지금 가서 가지고 오라고 해야겠네요. 그럼 이만!”심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문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마침 이곳
취향에 맞는 거라니?심이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유를 바라보자 서유 역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두 사람이 눈만 껌뻑이고 있을 때 소수빈은 화장을 예쁘게 한 남성 한 명을 안으로 들여보냈다.남자의 등장에 심이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고 할 때 소수빈이 손을 들어 정확히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남자분 옆으로 가.”그러자 남자는 엉덩이를 요염하게 흔들며 심이준에게로 다가갔다.심이준은 털이 쭈뼛 서는 느낌에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소파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남자의 괴력에 의해 다시 소파에 앉혀지고 말았다.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순간적으로 역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심이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꾹 누르고 있는 남자의 손을 보며 경고했다.“손 안 치워?”하지만 남자는 손을 치우기는커녕 다른 한 손으로 심이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기 시작했다.“오빠, 난 오늘 오빠 거야. 우리 한번 재밌게 놀아볼까?”“재밌게 놀기는 무슨...!”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이번에는 심이준의 볼에 뽀뽀를 해버렸다.이에 심이준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천천히 눈을 크게 뜨더니 소리를 질렀다.“X발! 지금 어디에다가 입술을 들이밀어?!”한편 먼 곳에 앉아있던 디자이너들은 그 모습을 목격하더니 속닥거리며 웃어 댔다.“심이준 디자이너에게 이런 취향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심이준은 그 속닥거림을 들었는지 더욱더 거세게 소리를 지르며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이딴 게 어딜 봐서 내 취향이라는 거야! 차라리 여자를 데려오라고!’서유는 이런 광경을 처음 목격했던 터라 눈을 반짝이며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사람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한창 재밌게 구경하는데 갑자기 커다란 남자의 손이 그녀의 눈을 가리고 낮게 속삭여왔다.“이제 가자.”서유는 잠깐 움찔하더니 이내 이승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저었다.“축하 파티 시작도 안 했는데 이렇게 가
이승하가 서유를 안고 엘리베이터에서 나가려는데 정가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잠깐만!”정가혜는 아까 트러블에 휘말린 서유를 걱정하느라 육성재가 이곳으로 온 목적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깜빡해버렸다.“서유야. 육성재는 김초희 행방에 대해 알려고 온 거야.”서유는 서둘러 이승하에게 내려달라고 한 다음 정가혜에게 물었다.“육성재가 왜 언니 행방을 알려고 하는 건데?”‘혹시 육성재와 언니가 아는 사이였나?’“말투가 험악한 걸 봐서 좋은 목적은 아닌 것 같아.”“언니한테 원한이 있다는 거야?”정가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건 모르겠어. 네가 영국에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나여서 이곳으로 찾아온 것 같아. 그런데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김초희가 죽은 건 모르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김초희는 워싱턴으로 갔다고 했어. 속을지는 모르겠지만.”지현우는 김초희가 죽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기에 김초희와 친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그런데 육성재가 그 소식을 몰랐다는 건 친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정말 복수하려고 찾는 것일 수 있겠네...’정가혜는 이승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서유는 지금 김초희 신분으로 살고 있어서 위험해요.”이승하는 그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일 없게 하죠.”“그래요. 그럼 저도 안심하고 있을게요.”정가혜는 다시 시선을 돌려 서유의 어깨를 토닥였다.“난 그럼 일 봐야 해서 이만 가볼게. 조심히 들어가.”서유는 멀어져가는 정가혜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다음 이승하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이승하는 뒤에 따라온 소수빈을 향해 말했다.“육성재가 알아내지 못하게 깔끔하게 처리해.”소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이승하는 지시를 내린 후 다시 서유를 바라보았다.“서유야, 네 신분은 내가 복구해뒀으니까 앞으로 김초희 말고 네 이름을 써도 돼.”이에 서유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말했다.“하지만 언니 프
소수빈은 운전석에 앉은 후 가장 먼저 차량 내부 가림막을 내리더니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뒷좌석에 앉은 서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얼굴이 창백한 이승하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괜찮아.”“하지만...”이승하는 서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번에 제 쪽으로 끌어당겨 무릎에 앉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서유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입맞춤을 가만히 받아주고만 있었다.이승하는 이대로는 부족한지 그녀의 입술을 두드리며 그다음 단계로 가려고 했지만 서유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저 입을 맞대기만 했다.이에 그는 그녀의 등을 오가던 손을 허리 쪽으로 내리더니 자기 쪽으로 힘껏 끌어안았다.“키스할래 아니면 더 한 거 할래?”서유의 입술을 간지럽히던 그의 입술은 어느새 그녀의 귓불 쪽으로 와 잘근잘근 깨물었다.서유는 이에 몸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승하는 그녀의 얼굴을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고 난 뒤 낮게 속삭였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거지?”서유가 다급하게 둘 다 싫다 하려고 입을 벌리려는데 그의 뜨거운 입술이 또다시 귓불을 간지럽혔다.마치 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듯한 짜릿한 느낌이 귓불을 타고 몸 전체에 흘렀다.서유는 이승하의 움직임에 정신을 못 차리며 고개를 돌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번에는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더니 천천히 쇄골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그는 마치 자기 것에 표식이라도 하듯 천천히 쇄골을 깨물기 시작했다. 서유의 가녀린 몸은 그의 움직임에 서서히 녹아내렸고 몸도 점점 달뜨기 시작했다.이승하도 그런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고 단번에 그녀를 시트 위에 눕혀버렸다.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집어삼키면서 그녀와 몸을 더 밀착시켰다.서유가 반쯤 풀린 눈으로 키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벨트 위로 가져갔다.그리고 조금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그
차량은 어느새 정가혜의 별장 앞에 도착했고 서유는 그의 관자놀이를 마사지해주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내일 나랑 같이 병원으로 가요.”이승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몇 번이나 더 입을 맞춘 뒤에야 천천히 놓아주었다.“잘 자.”“조심해서 가요.”서유는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반쯤 내려온 차창 안으로 완벽에 가깝다 해도 될 만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서유는 그 얼굴에 한 번 웃어주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차 안에 있는 남자는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고서야 시트에 털썩 누웠다.“진통제.”소수빈은 가림막을 올리고 이승하에게 진통제를 건네주었다. 이승하는 약을 건네받고는 바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이승하는 이제 창백한 것을 떠나 툭 건드리면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대표님, 대체 언제부터 두통에 시달렸던 겁니까?”이승하의 형도 죽기 전 두통으로 고생했던 것이 떠오른 소수빈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이승하는 한 손으로 머리를 마사지하더니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내가 두통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한테도 알리지 마.”소수빈은 전처럼 고분고분 알겠다 하지 않고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혹시 3년 전에 수면제를 너무 많이 복용하고 또 요즘은 제대로 주무시지 못해서 이런 거 아닙니까?”18세라는 나이에 이씨 가문의 실권자 자리에 올랐던 이승하의 형은 과로로 죽기 전 지금의 이승하와 마찬가지로 두통 증상을 보였다.이승하는 어릴 때부터 심한 매질을 당해 그때부터 몸에 상처를 달고 살았다. 그런 몸으로 서유가 죽었다고 들었을 때는 자해시도를 했으며 송사월을 구하겠다고 대신 총상도 입어 하마터면 병상에서 생을 마감할 뻔했다.어찌어찌 목숨을 부지하고 나서는 술과 담배에 의지했고 수면제 없이는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잠을 자지 않고 일만 하는 날도 많았다.그리고 서유가 돌아온 뒤에는 이제 모든 게 끝나버렸다고 생각해 몇 번이나 위에 출혈이 있기도 했었다.또한, 워싱턴에
서유는 간밤에 잠을 조금 설쳤다. 그 탓인지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서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그녀는 스트레칭하며 정신을 차리더니 침대에서 내려온 후 씻고 빠르게 나갈 준비를 마쳤다. 이승하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고 문을 나서보니 이승하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그는 핏이 딱 떨어지는 양복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장미꽃을 들고 차 문 옆에 서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승하의 얼굴에는 단번에 예쁜 미소가 걸렸다.“서유야.”서유 역시 그를 보고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서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승하는 그녀에게 손에 든 꽃다발을 건넸다.“너 주려고 제일 예쁜 거로 골랐어.”서유는 꽃을 받아 들고 남자를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의 선글라스를 벗겼다.예쁘다고 할 정도로 반짝이던 그의 눈이 지금은 잔뜩 충혈된 채 빛이 바랜 것처럼 보였다.“눈이...”이승하는 손으로 서유의 두 눈을 살포시 가리더니 답했다.“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래.”그러고는 그녀의 손에 들린 선글라스를 도로 쓰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서유는 맞잡아 오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이승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차에 태웠다. 그리고 늘 그랬듯 안전벨트를 해주고 간단한 조식도 먹인 뒤에야 시동을 걸었다.주서희는 해외 세미나로 자리를 비운 상태라 진찰은 부원장이 진행했다.부원장은 가장 먼저 눈을 검사하더니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것이니 수면만 잘 취하게 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그다음으로 머리 MRI를 찍게 하고는 약 반 시간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다.서유는 부원장이 나오는 걸 보더니 다급하게 물었다.“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죠?”부원장은 이승하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대답했다.“편두통일 뿐이네요. 큰 문제는 없습니다.”서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물었다.“보고서는요?”“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