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간밤에 잠을 조금 설쳤다. 그 탓인지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서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그녀는 스트레칭하며 정신을 차리더니 침대에서 내려온 후 씻고 빠르게 나갈 준비를 마쳤다. 이승하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고 문을 나서보니 이승하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그는 핏이 딱 떨어지는 양복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장미꽃을 들고 차 문 옆에 서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승하의 얼굴에는 단번에 예쁜 미소가 걸렸다.“서유야.”서유 역시 그를 보고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서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승하는 그녀에게 손에 든 꽃다발을 건넸다.“너 주려고 제일 예쁜 거로 골랐어.”서유는 꽃을 받아 들고 남자를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그의 선글라스를 벗겼다.예쁘다고 할 정도로 반짝이던 그의 눈이 지금은 잔뜩 충혈된 채 빛이 바랜 것처럼 보였다.“눈이...”이승하는 손으로 서유의 두 눈을 살포시 가리더니 답했다.“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래.”그러고는 그녀의 손에 들린 선글라스를 도로 쓰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서유는 맞잡아 오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이승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차에 태웠다. 그리고 늘 그랬듯 안전벨트를 해주고 간단한 조식도 먹인 뒤에야 시동을 걸었다.주서희는 해외 세미나로 자리를 비운 상태라 진찰은 부원장이 진행했다.부원장은 가장 먼저 눈을 검사하더니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것이니 수면만 잘 취하게 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그다음으로 머리 MRI를 찍게 하고는 약 반 시간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다.서유는 부원장이 나오는 걸 보더니 다급하게 물었다.“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죠?”부원장은 이승하의 눈치를 한번 살피더니 대답했다.“편두통일 뿐이네요. 큰 문제는 없습니다.”서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물었다.“보고서는요?”“
이승하가 전화를 끊은 뒤 멀끔하게 차려입은 택이가 차에 올랐다.“대표님, 이시원 씨의 사인이 뭐였는지 조사해왔습니다.”이승하는 휴대폰을 집어넣더니 조금 피곤한 얼굴로 택이에게 계속 얘기하라는 눈빛을 보냈다.“확실히 과로가 맞더라고요. 이시원 씨를 보살피던 의사와 간병인, 접촉했던 모든 사람 그리고 사용된 약까지 전부 조사한 결과 의심되는 정황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이승하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를 향해 물었다.“연지유가 거짓말 한 거다?”“네, 지금으로 봐서는 아마 목숨을 부지하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이승하는 과거 이야기를 잠깐 떠올리다가 머리가 아픈지 택이에게 이만 내리라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택이는 분부대로 차에서 내리려다가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대표님, 당시 이시원 씨의 부검은 진행하지 않으신 거죠?”이승하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시원의 시체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이씨 집안은 물론이고 박씨 집안도 부검은 반대했었다.택이는 차 문을 잡던 손에 힘을 더했다.‘부검을 안 했으니 역시 비슷한 사례로 사인을 확정 지을 수밖에 없겠네.’솔직히 택이는 이시원의 죽음에 말 못 할 비밀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하지만 이승하가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고 아무 근거도 없는 소리를 하게 되면 괜히 신경 쓰이게 할 것 같아 입을 닫았다.제대로 조사를 마치고 실질적인 증거라도 가져오고 나서 얘기해도 늦지 않다.택이가 내리고 나니 옆에서 대기하던 소수빈이 빠르게 올라탔다.“대표님, 병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이승하는 방금 병원에서 받은 보고서를 소수빈에게 던졌다.“직접 봐.”소수빈은 보고서를 하나부터 열까지 몇 번이나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입니다.”이승하가 힐끗 앞을 바라보니 평소 잘 웃지 않던 소수빈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걸려있었다.“육성재 쪽은 어떻게 됐어?”“잘 처리했습니다. 아마 지금쯤 막막해할 겁니다.”워싱턴.육성재는 현재 창문 가
그 말에 육성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취향 한번 역겹네. 아니지, 이승하에게는 딱 어울리는 여자잖아.”그는 코웃음을 치더니 소파에 앉아 이겼다는 얼굴로 하하하 웃었다.비서는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역시 이승하 씨는 대표님 상대도 되지 않네요.”“당연하지. 나는 그딴 몸이나 팔던 여자한테는 눈길도 안 주니까.”육성재는 이승하의 옆에 여자가 없어 결국에는 그런 이상한 여자나 데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기분이 좋아진 그는 부하를 향해 물었다.“그래서 김초희는 지금 워싱턴 어디 있는데?”“김초희 씨는 현재 워싱턴을 떠난 상태로 지금은 태평양에 있습니다.”“태평양??”육성재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태평양을 왜 가?”부하는 알아 온 정보를 늘어놓았다.“듣기로는 김초희 씨가 낚시를 즐긴다고 합니다...”육성재는 그 말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화를 냈다.“여자가 낚시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 돼?”부하는 조금 억울한 얼굴로 대꾸했다.“조사한 바에 따르면 확실합니다.”육성재는 소파에 신경질적으로 기대며 짜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구체적으로 태평양 어딘데?”부하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더니 말을 버벅거렸다.“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구체적인 주소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그러자 육성재는 미친 듯이 소파를 쥐어뜯더니 얼마 안 가 소파 가죽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쓸모없는 것들!”그가 일어나서 부하를 발로 차려고 하자 비서가 다급하게 막아섰다.“대표님, 일단 진정하세요. 김초희 씨가 태평양 어딘가에 있다는 거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잖습니까. 몇 개월 전처럼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보다는 낫죠.”육성재는 주먹을 꽉 쥐더니 비서를 향해 말했다.“전용기 준비해. 지금 당장 태평양으로 가야겠어!”비서는 일단 구체적인 위치를 확인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얘기하려다가 괜히 화를 돋우게 될까 봐 입을 닫았다.그러다 왠지 모르게 지금 상황이 마치 몇 년 전 이승하가 육성재를 전 세계를 돌게 개고생시킨
정가혜는 거실로 내려와 요가 매트에 앉아 땀을 닦으며 물었다.“저 사람 누구야?”정가혜는 소준섭과 만난 적이 없었기에 궁금한 얼굴이었다.“서희 씨 오빠야...”주서희에게 듣기로 소준섭이 친오빠는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사이가 꽤 복잡하다고도 덧붙였었다.정가혜는 서유를 한번 보더니 꽤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혹시 너 좋아하기라도 한 대?”늦은 저녁에 서유를 찾아온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정가혜는 만약 이 사실을 이승하가 알게 되면 소준섭의 팔 한쪽이 불구라도 될까 봐 조금 걱정스러웠다.서유는 도우미가 건네준 우유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소준섭 씨는 서희 씨 남자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우유를 건네받고 한 모금 마시던 정가혜가 사레에 걸린 듯 우유를 다 흘려버렸다.“켁켁, 이건 또 무슨 소리야?!”방금까지 남매라고 했으면서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서유는 정가혜를 보며 피식 웃더니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소 선생님,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죠?”한창 담배를 피우던 소준섭은 그녀가 나오자 황급히 담배를 끄고 쓰레기통에 버렸다.“서희 여기 있습니까?”주서희는 친구가 없었고 그나마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서유와 정가혜였다.소준섭은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 주서희를 찾아 헤매다가 도저히 못 찾겠던지 결국 서유를 찾아왔다.“없어요.”그 대답에 소준섭의 얼굴이 한층 더 초조해졌다.“그럼 어디 갔는지는 알고 있어요?”서유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서희 씨 지금 세미나 때문에 지금 해외에 있잖아요. 모르셨어요?”소준섭은 한숨을 한번 내쉬며 말했다.“세미나는 진작에 끝났고요. 지금 주서희와 윤주원만 돌아오지 않은 상태입니다.”그 말에 서유는 말문이 막혔다.소준섭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한참이나 그녀 앞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서유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소 선생님...”소준섭은 차 문을 열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주서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대, 대표님?!”서유는 황급히 휴대폰을 쥐더니 이승하를 향해 말했다.“이만 끊을게요. 이따 저녁에 다시 통화해요.”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이승하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내가 돌아가고 나서 시도하든 뭘 하든 해.”그 말에 주서희가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말했다.“서유 씨, 아무래도 먼저 대표님이랑 시도해 보고 다시 약을 처방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요.”서유는 빨개진 얼굴로 전화를 끊고 이제 막 주서희에게 한소리 하려는데 테라스 쪽에서 정가혜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뭘 시도하는데요? 나도 같이해요!”주서희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활짝 벌리고 웃었다. 입꼬리가 한껏 위로 올라간 그녀의 얼굴은 정말 너무 예뻤다.그 모습을 근처에서 보고 있던 소준섭은 자기도 모르게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서유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마침 소준섭을 발견하고는 주서희의 손을 잡아당겼다.“왜 그래요?”서유의 시선을 따라 별장 밖을 바라보던 주서희는 소준섭을 발견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걸린 웃음을 지워버렸다.그러고는 몇 초간 고민한 후 서유에게 말했다.“잠깐 얘기 나누고 올게요.”주서희는 소준섭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서서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소준섭은 그 미소를 보고는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한 고통을 느꼈다.“내 앞에서는 계속 웃는 척을 했다는 걸 이제야 알았네.”그 앞에서는 아까처럼 눈이 부실 정도의 미소를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 그녀는 이제까지 계속 가짜 웃음이었던 것이다.소준섭은 주서희를 벽까지 밀어붙이며 물었다.“나한테 접근한 거, 나 꼬신 거 혹시 복수 때문이야?”주서희는 주먹을 꽉 쥐더니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당신한테 접근한 건 사랑해서예요. 복수 때문이라뇨.”이에 소준섭을 코웃음을 쳤다.“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세미나가 끝나고 윤주원이랑 단둘이 여행을 가?”주서희는 양손을 그의 목에 두르며 물었다.“질투해요?”평소처럼 그럴 일
“내가 왜 당신 여자예요?”주서희는 고개를 들고 자기보다 한참은 큰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내가 왜 당신 여자예요? 서로 몸만 섞는 사이 아니었어요? 말해봐요. 당신한테는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인데요?”소준섭은 초조한 마음에 그녀를 자신의 품에 꽉 끌어안았다.“조금만 더 기다려줘. 무슨 수를 써서든 너와 결혼할 거니까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줘.”주서희는 소준섭이 그녀가 떠날까 봐 불안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목적지가 코앞이다. 이제 소준섭을 지옥으로 보내는 일만 남았다.주서희는 그의 품에서 퉁명스럽게 물었다.“어떤 방법을 쓸 건데요?”소준섭은 몇 초간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소씨 집안과 연을 끊을 거야.”그는 주서희의 턱을 잡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러니까 윤주원 받아주지 마.”주서희는 소준섭을 천천히 밀치고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거짓 애정도 없었다. 오로지 원망과 분노만 남아있었다.주서희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싱긋 웃었다.“그런데 어쩌죠.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아니, 애초부터 결혼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어요.”소준섭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쯤 되니 주서희의 목적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 그녀를 껴안으려고 했다. 물론 그것마저 주서희가 거칠게 밀쳐낸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그는 곧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간신히 가라앉히며 주서희의 어깨를 꽉 잡더니 있는 힘껏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주서희, 방금 한 말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 그러면 없던 일로 해줄게.”소준섭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덜덜 떨었다.그때 주서희가 피식하고 차갑게 웃었다.“이미 눈치챘잖아요.”그녀를 안던 팔이 잠깐 굳더니 곧 다시 힘껏 끌어안았다.“윤주원이 마음에 들어서 그래? 그래서 나한테 이렇게 매정하게 구는 거야?”주서희는 이에 그를 자극하기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소준섭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주서희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그때 별장 안에서 뛰쳐나온 서유와 정가혜에 의해 앞길을 가로막혔다.정가혜는 주서희를 꼭 끌어안으며 얼굴에 난 상처를 확인했고 서유는 주서희의 앞에 서서 미간을 찌푸린 채로 소준섭을 노려보았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죠?”서유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구보다 주서희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대체 왜 손을 올리는 거지?소준섭은 서유 따위 보이지 않는지 오직 주서희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서희 역시 뺨을 감싼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실망밖에 남지 않았다.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다 주서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당신을 사랑한다고 했던 거,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다 했던 거 모두 거짓말이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도 결혼하고 싶지도 않아요.”소준섭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버렸다.“뭐라고...”주서희는 뺨을 감싸던 손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당신도 나한테 한번 상처를 줬으니 이제 드디어 공평해졌네요. 우리는 이제 서로 빚진 게 없는 거예요.”그러고는 서유와 정가혜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소준섭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심장이 아려오는 느낌이 들었다.“서희야, 나 좋아했던 적 한 번도 없었어?”이 모든 게 오직 복수 때문이라는 건가?주서희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반평생을 함께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피식 웃었다.“좋아했어요. 정말, 정말 많이요.”서주희가 열네 살이었던 그해, 소준섭이 그녀를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 순간부터 주서희는 그에게 마음을 뺏겨버렸다.한번 자각한 마음은 멈출 줄을 몰랐고 소준섭이 아무리 때리고 괴롭히고 욕해도 마냥 그가 좋았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기만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주서희의 눈에서 서서히 눈물이 흘러나왔다.“내가 의학을 배운 게 다 당신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 훌륭한 의사가 되면 나와 결혼해준다고 해서, 당신의 그 의미 없는 한마디 때문에
소준섭의 얼굴은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했고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그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주서희, 난... 네가 날 좋아했다는 걸 몰랐어. 그날 밤, 난 네가 다른 남자를 따라가는 줄 알았고.”횡설수설하며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가 주서희를 끌어안으며 지난날의 일들에 관해 설명하려 하였다. 그녀의 자궁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녀는 죽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었고 그가 사람을 보내 그녀를 황량한 들판에 버린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소준섭 씨, 외국에 있는 10년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요? 당신을 미워하면서 억지로 버텼어요. 당신이 날 사랑하게 만들고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고 매일 수없이 다짐했었죠.”10년을 계획한 일이었고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소준섭은 눈앞에 있는 여인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눈에서 그에 대한 사랑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녀는 위장조차 하지 않았다. ‘서희가 정말 나한테 복수하고 싶었던 거구나...’그동안 다정했던 그녀의 태도, 사랑한다는 그녀의 말은 전부 가짜였다.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그의 사지를 옥죄었고 숨이 멎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는 창백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성공했네...”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앞으로 주서희라는 여자를 다시는 떼어낼 수 없을 것 같다.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뒤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손을 들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그녀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는 자신을 부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정가혜와 서유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못 볼 꼴 보여줘서.”정가혜와 서유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어 주서희를 안았다.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녀들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