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당신 여자예요?”주서희는 고개를 들고 자기보다 한참은 큰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내가 왜 당신 여자예요? 서로 몸만 섞는 사이 아니었어요? 말해봐요. 당신한테는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인데요?”소준섭은 초조한 마음에 그녀를 자신의 품에 꽉 끌어안았다.“조금만 더 기다려줘. 무슨 수를 써서든 너와 결혼할 거니까 제발 조금만 더 기다려줘.”주서희는 소준섭이 그녀가 떠날까 봐 불안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목적지가 코앞이다. 이제 소준섭을 지옥으로 보내는 일만 남았다.주서희는 그의 품에서 퉁명스럽게 물었다.“어떤 방법을 쓸 건데요?”소준섭은 몇 초간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소씨 집안과 연을 끊을 거야.”그는 주서희의 턱을 잡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러니까 윤주원 받아주지 마.”주서희는 소준섭을 천천히 밀치고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거짓 애정도 없었다. 오로지 원망과 분노만 남아있었다.주서희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싱긋 웃었다.“그런데 어쩌죠.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아니, 애초부터 결혼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어요.”소준섭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쯤 되니 주서희의 목적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 그녀를 껴안으려고 했다. 물론 그것마저 주서희가 거칠게 밀쳐낸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그는 곧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간신히 가라앉히며 주서희의 어깨를 꽉 잡더니 있는 힘껏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주서희, 방금 한 말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 그러면 없던 일로 해줄게.”소준섭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덜덜 떨었다.그때 주서희가 피식하고 차갑게 웃었다.“이미 눈치챘잖아요.”그녀를 안던 팔이 잠깐 굳더니 곧 다시 힘껏 끌어안았다.“윤주원이 마음에 들어서 그래? 그래서 나한테 이렇게 매정하게 구는 거야?”주서희는 이에 그를 자극하기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눈물은 소준섭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주서희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그때 별장 안에서 뛰쳐나온 서유와 정가혜에 의해 앞길을 가로막혔다.정가혜는 주서희를 꼭 끌어안으며 얼굴에 난 상처를 확인했고 서유는 주서희의 앞에 서서 미간을 찌푸린 채로 소준섭을 노려보았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죠?”서유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구보다 주서희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대체 왜 손을 올리는 거지?소준섭은 서유 따위 보이지 않는지 오직 주서희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서희 역시 뺨을 감싼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실망밖에 남지 않았다.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다 주서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당신을 사랑한다고 했던 거,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다 했던 거 모두 거짓말이었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도 결혼하고 싶지도 않아요.”소준섭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버렸다.“뭐라고...”주서희는 뺨을 감싸던 손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당신도 나한테 한번 상처를 줬으니 이제 드디어 공평해졌네요. 우리는 이제 서로 빚진 게 없는 거예요.”그러고는 서유와 정가혜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소준섭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심장이 아려오는 느낌이 들었다.“서희야, 나 좋아했던 적 한 번도 없었어?”이 모든 게 오직 복수 때문이라는 건가?주서희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반평생을 함께한 남자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피식 웃었다.“좋아했어요. 정말, 정말 많이요.”서주희가 열네 살이었던 그해, 소준섭이 그녀를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 순간부터 주서희는 그에게 마음을 뺏겨버렸다.한번 자각한 마음은 멈출 줄을 몰랐고 소준섭이 아무리 때리고 괴롭히고 욕해도 마냥 그가 좋았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기만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주서희의 눈에서 서서히 눈물이 흘러나왔다.“내가 의학을 배운 게 다 당신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 훌륭한 의사가 되면 나와 결혼해준다고 해서, 당신의 그 의미 없는 한마디 때문에
소준섭의 얼굴은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했고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그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주서희, 난... 네가 날 좋아했다는 걸 몰랐어. 그날 밤, 난 네가 다른 남자를 따라가는 줄 알았고.”횡설수설하며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가 주서희를 끌어안으며 지난날의 일들에 관해 설명하려 하였다. 그녀의 자궁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녀는 죽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었고 그가 사람을 보내 그녀를 황량한 들판에 버린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소준섭 씨, 외국에 있는 10년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요? 당신을 미워하면서 억지로 버텼어요. 당신이 날 사랑하게 만들고 당신에게 복수할 거라고 매일 수없이 다짐했었죠.”10년을 계획한 일이었고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소준섭은 눈앞에 있는 여인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눈에서 그에 대한 사랑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녀는 위장조차 하지 않았다. ‘서희가 정말 나한테 복수하고 싶었던 거구나...’그동안 다정했던 그녀의 태도, 사랑한다는 그녀의 말은 전부 가짜였다.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그의 사지를 옥죄었고 숨이 멎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는 창백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성공했네...”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앞으로 주서희라는 여자를 다시는 떼어낼 수 없을 것 같다.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뒤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손을 들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그녀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는 자신을 부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정가혜와 서유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못 볼 꼴 보여줘서.”정가혜와 서유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어 주서희를 안았다.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그녀들을 보며
주서희와 소준섭 사이의 원한은 소수빈의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부산에서 가정이 있는 남자들만 꼬시는 여인으로 유명했었다.그녀는 소수빈을 임신한 뒤 안방을 차지했고 소준섭의 어머니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불과 다섯 살이었던 소준섭은 어머니가 뛰어내리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그날 그의 눈앞에서 어머니가 떨어졌고 그의 얼굴에 피가 튕겼었다. 그 이후로 순하고 착했던 소준섭은 성격이 많이 변하였고 어린 나이에 이불에 쌓여있는 소수빈의 목을 조를 생각까지도 했었다. 소준섭이 아이를 죽일까 봐 걱정되었던 그녀는 소수빈을 이씨 가문으로 보냈고 절친한 친구였던 집사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나쁜 여자인 것 같긴 해도 그녀는 부모를 여인 조카를 데려와 직접 돌보고 가르쳤었다.그렇다고 해서 좋은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소준섭에게 자신의 아들이 되라고 강요했고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강요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소준섭은 아버지에게 호되게 맞았었다. 나이가 어렸던 소준섭은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고 풀리지 않는 마음속의 원한을 전부 주서희에게 쏟아냈다. 주서희와는 상관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죽이려고 하면서도 그녀를 구하려 했다. 이렇게 반복되는 원한 속에서 그와 주서희는 지금까지 얽히고설키는 관계로 지내왔다. 한편, 모든 것이 어머니의 잘못임을 알고 있던 소수빈은 부산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주서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승하를 따라 작전을 펼치고 있던 그때, 반쯤 죽어있는 주서희를 만나고 나서야 그는 사촌 여동생이 소씨 집안에서 온갖 고초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는 이승하에게 주서희를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였고 그 후 주서희를 해외로 보냈다. 그대로 끝이 날 줄 알았는데 소준섭이 아직도 주서희한테 매달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소준섭은 오랜 세월 이렇게 지내오면서 주서희를 놓지 못하고 있는
주서희의 과거를 알게 된 서유는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하였고 아침에 일어나니 개운하지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한 그녀는 평소 이 시간대에 늘 영상통화를 했던 이승하가 오늘은 소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음이 불안했던 그녀는 용기를 내어 통화버튼 눌렀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옆으로 다가갔고 창밖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잠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날, 그녀는 정가혜와 함께 주서희를 보러 병원에 갔었고 학원에 가서 수업도 듣고 서재에서 설계도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이승하는 하루 종일 전화 한 통이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들고 대화창을 응시하며 밤새도록 기다렸지만 그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새벽쯤, 결국 잠이 들어버린 그녀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속의 장면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이승하가 차가운 얼굴로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간 모습은 똑똑히 기억났다. 그녀는 쫓아가서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눈을 붉히며 그에게 사과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녀의 손을 밀쳤다.“난 정말 노력했었어. 내 목숨까지 당신한테 다 바쳤다고. 더 이상 당신을 쫓아갈 힘이 없어. 우리 이제 그만해.”그 자리에 서서 차를 타고 떠나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답답한 가슴을 누르며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한참 동안 마음을 가라앉혔다. 워싱턴, 이제 막 정신이 든 이승하는 벽시계의 시간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켰고 서유한테서 영상통화가 온 걸 발견하고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차에 탄 후,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는 그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한편,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던 그녀는 걸려 온 그의 전화를 보고 당황했던 마음이 차츰 평
그가 붉게 물든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이번 생에는 더 이상 당신 아프게 안 해.”그가 그녀의 턱을 치켜들고는 그녀의 붉은 입술, 눈, 뺨, 턱에 입을 맞추었다.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듯이 부드럽고 섬세하게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를 껴안고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붓던 그가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속삭였다.“사랑해.”설레는 마음에서 깊은 사랑까지,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모든 용기를 다 해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쫓아다녔다. 마음을 다시 열고 이 남자를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한 남자의 지극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그 사람만의 특별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느낌을 경험하게 되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함이었다. 힘에 부쳐 잠이 들려고 하는 그녀를 보며 남자는 계속 그녀를 달랬다.“한 번만 더 해, 응?”그녀는 싫다는 말 한마디만 내뱉고는 그를 밀치고 돌아서서 그의 베개를 껴안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그녀를 더 원했지만 그는 차마 그녀를 깨우지 못하였고 간신히 욕망을 참으며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잠든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몸을 돌려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눈가에는 애틋한 미소가 번졌다. ‘서유, 당신과 평생을 약속했으니 당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당신이 내 목숨을 원하지 않은 한, 그 누구도 날 당신의 곁에서 데려갈 수는 없어. 지옥의 저승사자라고 해도 날 끌고 갈 수 없을 거야.’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다음 날 오전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품에 꼭 안겨있었고 고개를 숙이자 남자의 탄탄한 복근이 시선에 들왔다. 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리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녀가 잠든 후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 뜻밖에도...그녀는 몸을 살짝 비틀며 그를 떼어냈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던 찰나 그의 넓은 손바닥에 허리가 눌렸다.“조금만 더 자.”
그의 꼬임에 넘어간 그녀는 그가 자신을 데리고 뭔가를 보여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뜨거워진 그곳으로 향하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때? 재미있지?”방금까지 얼굴을 붉히던 사람은 그였지만 지금은 그녀가 원래의 얼굴색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랐다.“아니요. 별로예요.”그는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럼... 쓸 만은 해?”서유는 붉은 뺨을 가린 채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고 수많은 별이 총총히 모여 있는 그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 안에는 온통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따뜻한 눈빛은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불어와 사람을 쉽게 빠져들게 만들었다.잘생긴 얼굴에 옅은 미소가 서서히 피어올랐고 긴 눈매가 살짝 휘어졌다.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치는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그녀의 귓가에서 야한 소리를 늘어놓는 남자와는 도저히 연상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가 시선을 거두며 손을 놓으려 하자 그가 그녀를 힘껏 눌렀다.“이번에는 당신이 나 좀 도와줘야지?”이런 일에서 항상 밀렸던 그녀는 용기를 내어 발끝을 세우고 그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싫어요.”달콤한 향기와 짜릿함이 그의 귓가에서 전해졌다. 전율이 귓가를 스쳐 온몸으로 퍼졌고 그가 몸을 살짝 떨었다. 짙은 눈을 내리깔고 도발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그럼 내가 도와줄게.”남자는 허리를 굽혀 그녀를 번쩍 안아 부드러운 소파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이승하 씨.”“응?”“그만 해요.”알았다는 소리는 하면서도 그는 결국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채 그녀의 붉은 입술에 바짝 다가섰다.“내 이름 불러줘.”온몸을 떨고 있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이승하 씨...”그는 그녀의 허리를 톡톡 치며 눈빛이 흐릿한 여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옛날처럼 날 불러줘.
소문난 바람둥이인 이연석이 조만간 안희연과 헤어질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헤어질 줄은 몰랐다.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내가 실연당하게 한 것도 아닌데 왜 날 찾아온 거야? 어이가 없네.’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짙은 술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꼬집었다.“가까이 오지 말아요. 어우 술 냄새.”그러나 그는 기어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 받치고는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그는 아이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칭얼댔다.“당신 때문에 안희연과 헤어지게 된 거예요.”그 말에 정가혜는 눈을 흘겼다.“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예요? 토할 데가 없으니까 일부러 나한테 온 거죠?”그녀는 뾰족한 손톱을 들어 그의 관자놀이에 대고 세게 찔렀고 이내 그의 머리가 그녀의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그 기회를 틈타 그녀는 그를 밀어냈고 인사불성이 된 이연석은 그녀의 손길에 몸을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뒤통수가 별장 입구의 화분 가장자리에 부딪혔다.곧이어 도자기 조각이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 광경에 정가혜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였고 맑고 깨끗한 두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나 좀 일으켜줘요. 더러워...”아무 일도 없는 듯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혼자 일어나요. 그리고 빨리 돌아가요. 나한테서 이러지 말고.”늦게 전해진 고통에 그는 한참 동안 머뭇거렸고 그 고통이 점차 뇌신경으로 전달되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만졌다. 미지근한 액체가 손에 닿자 그는 손바닥을 펴고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피가 나는지 좀 봐줘요.”손에 가득 찬 피를 보고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서둘러 그를 부축하면서도 그에게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