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커다란 사무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언니의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는지 서유는 저도 모르게 심이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래층에서 차량 행렬이 도로를 달리는 소리가 났다. 코닉세그를 필두로 10여 대의 고급차량이 모두 문 앞에 멈추었다.검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경호원들이 잇달아 차에서 내려 두 줄로 서서 회사의 좌우 양 끝에 서 있었다.코닉세그의 차에서 소수빈이 재빨리 차에서 내리더니 조수석 앞으로 다가와 문을 당겨 존귀한 신분의 남자를 모셨다.햇빛이 남자의 늘씬 몸매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비추어 더욱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 보였다.그림 같은 눈썹 아래의 맑은 눈동자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평소 블랙 정장과 화이트 셔츠 차림의 그는 오늘 코발트블루 정장으로 바꾸어 입었다.맞춤 제작의 비싼 코발트블루 색은 남자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더 고귀하고 우아하게 만들었다.그는 완벽한 턱을 살짝 치켜든 채 2층 쪽을 바라보다가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안경을 살짝 밀었다.창문 앞의 서유는 남자의 이 동작을 보고 갑자기 ‘불량한 선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옆에 있던 심이준은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이를 갈며 한마디 보탰다.“겉만 번지르르한 짐승!”서유는 고개를 돌려 의아해하며 심이준을 보았다.“저 사람이 왜 여기...”심이준은 탈구된 팔을 들어 아래층 남자를 가리켰다.“왜 왔겠어요? 당연히 여자 꼬시러 왔죠!”말을 마치고는 눈을 늘어뜨린 서유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피하지 말아요. 그 여자가 바로 서유 씨니까!”서유는 붉은 입술을 벌리고 반박하려다가 할 말이 없어 시선을 거두고 창문 옆을 떠났다.심이준은 고객 제일의 이념에 따라 ‘이승하는 계약 체결하러 왔다’고 간단히 설명한 후 아래층으로 내려가 맞이했다.방금까지 이를 갈며 말하던 심이준은 8명의 디자이너를 이끌고 대칭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승하에게 다가갔다.“대표님, 이 누
이승하가 서유에게 다가가자 꼿꼿한 몸에서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흘렀다.서유는 그가 매우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긴장한 나머지 약간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거리를 벌렸다.남자의 안경 밑 시선은 두 사람의 거리를 재며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서유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자 남자는 또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그렇게 조금씩 뒤로 물러서다 보니 서유의 허리가 어느새 책상에 닿아 책상에 앉을 뻔했다.서유는 약간 위축된 듯 부드러운 턱선을 들어 이승하를 바라보았다.“당신...”이승하는 몸을 숙이고 그녀를 책상에 누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서유야, 나 계약하러 왔어.”서유는 다시 몸을 뒤로 젖히고 그를 내려다보았다.“그럼 계약을 체결해야죠. 이렇게 가까이 오면 어떡해요.”이승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더니 그녀의 몸을 약간 더 눌러 서유의 귓가에 밀착했다.“더 가까운 자세도 우리는 시도해봤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노골적인 말과 매혹적인 호흡이 어우러져 서유는 귀가 따가워졌다.서유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 후, 그를 힘껏 밀어내고 책상에서 내려 응접실로 돌아갔다.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김초희의 대표 신분으로 이승하에게 초대하는 자세를 취했다.“이 대표님, 앉으시죠.”그녀는 옅은 흰색 오피스룩에 깔끔한 단발머리를 했고, 밝고 흰 얼굴에는 지적이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이승하의 애틋한 눈빛이 그녀의 몸에 떨어져 당장 품에 안고 싶었지만 너무 성급해서 그녀를 놀라게 할까 봐 두려웠다.그는 서유를 품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이승하가 자리에 앉자마자 서유가 바로 낯선 사람 대하듯 말했다.“심 선생님, 여기 커피 부탁드려요.”심이준이 들어오면 그녀도 그렇게 난처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소수빈에 의해 벽에 눌리고 입이 틀어막힌 심이준은 그의 잘생긴 얼굴만 쳐다보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소수빈도 마찬가지로 불쾌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만약 이 물건이 이승하를 방해할까 봐 두렵지 않다면, 그는 절대
이승하는 미안하다고 말한 뒤 서유를 놓아 주고 옷깃을 여미고는 단정하게 앉아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소 비서.”안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수빈은 곧바로 심이준을 놓아주고 서류 가방을 들고는 안으로 들어갔다.심이준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이 서러움은 반드시 갚겠다고!그는 이를 악물고 맹세하고 따라 들어갔는데, 마침 서유가 헝클어진 옷을 정리하는 것을 보았다.심이준은 무의식적으로 벽의 벽시계를 쳐다보고는 서유의 귓가에 대고 주의를 주었다.“너무 빠른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그래도 잠자리에 관련된 일인데.”서유는 하마터면 사레들 뻔했다.“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심이준은 계속 서유에게 주의를 주려했지만 왠지 차갑고 뜨거운 시선이 자신의 왼손을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심이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마침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자신의 왼손을 노려보고 있었다.이승하가 자신의 손을 보는 눈빛이 어쩐지 낯익어 보였지만 어디서 봤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이때 소수빈은 이미 서류 가방에서 계약서 세 부를 꺼내 유리 탁자 위에 하나씩 놓았다.심이준은 기회를 빌려 왼손을 등 뒤에 숨긴 채 이승하를 향해 대칭적인 웃음을 지었다.“대표님, 계약부터 체결하시죠.”그리고 또 서유를 방패막이로 삼았다.“대표님, 어서 사인하세요.”서유는 심이준을 흘겨보더니 이승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계약서를 들고 위에 적힌 금액을 보고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들어 이승하를 보며 말했다.“2천억 원이요?”겨우 설계도일 뿐인데 2천억 원은 너무 과장된 것 같았다.그 액수를 들은 심이준도 덩달아 소리쳤다.“얼마라고요? 2천억?”그는 달려들어 서유가 들고 있던 계약서를 빼앗아 떨리는 손가락으로 ‘0’을 하나하나 세었다.금액을 확인한 심이준은 서유에게 건네주며 말했다.“빨리. 어서 서명해요!”서유는 심이준을 상대하지 않고 이승하를 노려보았다.그와 신분이 대등하지 않다고 말해서
서유는 그들이 작품을 빌려 대회에 참석해 이득을 봤다는 사실에 조금은 걱정이 덜 되었다. 하지만...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시 이승하를 쳐다보았다.“아직 프로젝트가 많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 빨리 디자인 원고를 넘기지 못할 것 같아요.”그는 손을 들어 안경을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얼마든 상관없어. 난 기다릴 수 있으니까.”그윽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서유는 이내 시선을 피하고 펜을 들었다. 그녀가 사인하려는 찰나, 이승하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서유의 이름으로 사인해.”펜을 들고 있던 그녀의 손이 잠시 멈추었고 그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이승하를 바라보았다.“세계적인 디자이너는 김초희예요. 난 아직 신인이고요.”“내 이름이 적힌 작품을 가지고 대회에 나간다면 상을 받을 수 없을 거예요.”게다가 서유는 이미 3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이승하는 겹쳐있던 늘씬한 다리를 내리고는 몸을 곧게 펴고 앉아 서유의 단발머리를 어루만졌다.“착하지. 내 말 들어.”그는 여자 친구를 달래듯 서유를 달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심이준은 서유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이 불편하기만 했던 서유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그의 시선을 피하고는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잠시 후, 사인을 마친 그녀는 손도장을 찍고 회사 날인까지 마친 뒤 계약서를 소수빈에게 건네주었다. 눈치가 빠른 소수빈은 계약이 성사된 걸 축하하는 의미에서 그녀와 이승하에게 서로 악수를 나누라고 제안했다. 그런데 이때, 심이준이 먼저 왼손을 내밀었다.“이 대표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소파 위에 앉아 있던 남자는 짙은 속눈썹을 내리드리우며 싸늘한 눈빛으로 심이준의 왼손을 쳐다보았다.그의 눈빛에 심이준은 몸을 살짝 떨었고 내민 손을 거두지 않는다면 왼손도 오른손 신세가 되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계약서를 다 쓴 후, 더 이상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이승하는 조용히 서유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대표
심이준은 빠른 걸음으로 위층으로 올라와 흥분된 표정을 지으며 서유를 향해 달려갔다.“자그마치 2000억이에요. 이렇게 큰 계약을 성사시켰으니 축하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 말에 서유는 고개를 돌려 심이준을 쳐다보았다.“어떻게 축하하고 싶은데요?”그는 팔짱을 낀 채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정고졸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아가씨가 나이트 레일의 아가씨보다 더 예쁘다고 하던데요. 우리 그쪽 클럽으로 가서 신나게 놀아요.”그런 그의 모습에 서유는 피식 웃으며 장난쳤다.“심이준 씨, 선생님이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심이준은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반박했다. “틀렸어요. 난 선생님이 아니에요. 난 뭐 사람도 아니죠. 난 그저 고급 동물일 뿐이에요.”그 말에 서유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어 고급 룸을 예약했다. 마침 NASA에서 자금이 입금된 후, 심이준이 회사 재무팀을 통해 그녀의 계좌로 돈을 입금하였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돈 걱정 없이 신나게 놀 수 있게 되었다. 갑자기 뭔가 생각이 떠오른 그녀는 심이준을 향해 물었다. “회사 사람들은 우리 언니 본 적 있을 거잖아요. 혹시 문제 되는 거 아니에요?”그녀의 말에 심이준은 손을 저었다. “초희 씨는 Y국에 오래 머물고 있었고 거의 귀국한 적이 없었어요. 게다가 회사 사람들은 전부 내가 나중에 모집한 사람들이고요.”서유는 그제야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모레 저녁으로 약속 잡아요.”어젯밤에 밤새 설계도를 그리느라 잠을 자지 못해서 많이 피곤했다. 게다가 정가혜의 클럽을 이연석이 3일 동안 통째로 빌렸기 때문에 그 기한이 끝나야만 룸을 예약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심이준이 별다른 의견이 없자 책상 위의 원통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두 번째 프로젝트 설계도에요. 스케치만 한 상태이고 나머지는 이준 씨한테 맡길게요. 언니가 맡은 다른 프로젝트들도 최대한 빨리 답사 부탁드려요. 빨리 마무리했으면 좋겠
그녀는 이승하가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고 의심하며 이를 악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당신은 손 없어요?”귀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당신이 나 좀 도와줘.”서유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작은 손을 뻗어 그의 안경을 벗겨주려 했다. 안경을 벗기자마자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맞춤을 두 번 하더니 이내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하기 시작했다. 키스를 하면서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몸을 자신에게 밀착시켰고 간드러진 호흡이 전해졌다. 그녀는 두 손을 그의 가슴에 대고 힘껏 그를 밀어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숨이 막힐 때까지 키스를 하고나서야 그가 아쉬워하며 품에서 그녀를 놓아주었다. 수없이 그녀의 입술을 맛보았지만 늘 탐하고 싶었고 충족되지가 않았다. 이 여자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서유를 쳐다보며 그는 이번 생에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강한 집착의 눈빛을 드러냈다. “핸드폰 이리 줘봐.”화가 잔뜩 치밀어오른 그녀는 핸드폰을 달라는 말에 신경도 안 쓰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그가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내가 잘못했어. 그만 화 풀어. 응?”말로 여자를 달래는 것이 서툰 사람인지라 목소리를 낮추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녀는 분노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내 핸드폰은 왜요?”이승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단발머리를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이리 줘봐. 곧 알게 될 테니까.”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핸드폰을 건네받은 그는 잠겨있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비밀번호는?”서유는 비밀번호를 그에게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핸드폰을 빼앗아 그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고개를 숙이
남자는 대화창을 내려보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가 걱정돼?”나른하고 매혹적인 그의 목소리는 일부러 그녀를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서유는 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기만 했다. 그윽한 눈동자에 붉은 핏줄기가 다 사라졌지만 여전히 옅은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얇은 입술에 그녀의 립스틱이 더해져 본연의 색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잘생긴 얼굴은 여전히 창백해 보였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서유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찰나 그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그 사람만의 특유한 향기가 몰려오자 서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등이 차창에 부딪히자 깔끔하게 다듬어진 손끝이 그녀의 뺨을 살짝 스쳐 지나가더니 창문에 내려앉았다. 남자는 그녀를 감싸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대답해.”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그녀는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그의 눈빛과 마주쳤다. 반짝이는 별빛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므리고 있던 그의 얇은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나 괜찮아. 걱정하지 마.”청량하고 힘찬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지자 마치 마력을 지닌 것처럼 복잡했던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후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그녀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서유는 손을 뻗어 워싱턴에 있을 때처럼 그의 뺨을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그에게 다가가던 찰나 갑자기 용기가 나지 않았다.이때, 손을 거두려는 그녀를 보고 그가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의 볼에 살며시 가져다 댔다. “서유, 두려워하지 마.”그를 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그를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그와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그녀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을 줄 자신이 있었다.
의미심장한 그녀의 대답에 서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설명하기도 전에 주서희의 입에서 그녀를 더 난감하게 만드는 말이 튀어나왔다. “서유 씨, 걱정하지 말아요. 대표님은 아주 건강하세요. 두 분이 아이를 갖는 데는 전혀 문제없어요.”아이 때문에 지금 이러는 게 아니잖아. 그녀가 신경 쓰이는 건...서유는 고개를 들고 자신을 감싸고 있는 이승하를 쳐다보다가 안색이 굳어진 그의 모습에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는 전화를 끊고 그녀에게 핸드폰을 돌려준 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더니 그녀를 놓아주고는 똑바로 앉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어 정가혜의 별장 쪽으로 향했다. 달아올랐던 차 안의 분위기는 사라져 버렸고 남자의 쓸쓸한 모습만이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그를 슬쩍 훔쳐보았고 그 순간 그가 갑자기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떼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길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손바닥을 가로질러 다시 깍지를 꼈다. 꽉 잡은 두 손을 보며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한 손으로 운전하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승하 씨...”“당신은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야. 꼭 그럴 거라고.”이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좀 전에 그녀에게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오는 모습과는 달리 그녀를 마주할 용기조차 없어 보였다. 서유는 힘줄이 불끈 솟을 정도로 손을 꽉 잡고 있는 그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그래요. 그럴 거예요.”그 말에 굳어졌던 그의 잘생긴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내 아이 말이야.”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강렬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서유는 그의 여자이고 그녀의 아이는 그의 아이일 수밖에 없다.그녀는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고 쏜살같이 뒷걸음치는 창밖의 경치를 쳐다보았다.대답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를 잡고 있는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잠시 후, 차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한테 남자는 당신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