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혜는 옛 추억에서 벗어나 서유를 바라보았다.“서유야, 걱정하지 마. 난 이연석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 이 세상에 사월이 말고 좋은 남자는 아마 없을 거야.”“그러니까 나도 전처럼 누가 잘해주면 쉽게 마음을 내어주는 가치 없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송사월을 언급하자 서유의 눈동자가 다시 어두워졌다.이 세상에 그녀에게 잘해주는 남자는 이미 떠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서유는 눈을 늘어뜨리고 눈 밑의 슬픔을 감추며 감격해서 말했다.“가혜야, 고마워. 나 때문에 그렇게 많은 희생을 했는데 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만약 네가 이연석이랑 인연을 끊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정가혜는 웃더니 서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네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가장 큰 보답이야. 앞으로 어디도 가지 말고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알겠어?”정가혜는 서유의 삶에서 한 줄기 빛으로, 항상 그녀의 마음을 따듯하게 어루만졌다.서유가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더라도 정가혜는 늘 중요한 순간에 그녀에게 무한한 힘을 줄 것이다.바로 지금처럼 정가혜는 아무런 원망도 비난도 증오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서유에게 바치고 있었다.서유는 눈시울을 붉히며 정가혜를 껴안고 약속했다.“내가 돌아왔으니까 앞으로는 내가 너 돌봐줄게.”정가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지 않았다.“너 단단히 각오해. 내가 늙어서 못 움직이게 되면 네가 나 밥 먹여주고, 물 따라 주고 휠체어도 밀어주고 똥오줌도 가려줘야 해.”서유는 그녀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정가혜는 서유가 마침내 웃자 더 이상 농담하지 않고 일어나 자물쇠가 채워진 서랍을 열고 밀폐된 봉투를 꺼냈다.그녀는 안에서 물건을 꺼내며 서유에게 말했다.“원래 살던 아파트는 돌아가면 자꾸 옛날 생각날 것 같아서 다시 간 적 없지만 나오기 전에 네 귀중한 물건은 따로 챙겼어.”그녀는 서유가 사용했던 휴대폰을 꺼내 건넸다.“네 휴대폰
[보고 싶다.][돌아올 수 있어?][다시 돌아와 줘. 아직 말 못 한 비밀이 있어.][네 꿈을 꿨어. 나보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더군.][매달리고 싶지 않지만 나도 나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어.][보고 싶어 미치겠어. 대체 어떻게 하면 다시 너를 만날 수 있는지 제발 알려줘.][다시 돌아오면 안 돼? 제발... 돌아와 줘.][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다시 널 만날 수 있는 거야?][수면제 먹고 너를 만났어. 널 볼 수 있으니까 참 좋다.][환각 속의 넌 사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더군.][그래서 나도 널 품에 꼭 안고 나도 사랑한다고 말했어.][하지만 이건 환각일 뿐이잖아. 네가 어떻게 날 사랑할 수 있어.][네 마음에는 다른 사람이 있으니, 너를 포기하라고 놓으라고 나 자신에게 수도 없이 말했어.][하지만, 그게 안 돼. 마약처럼 중독돼서 절대 끊을 수도, 잊을 수도 없어.][서유야, 사랑해. 만약 다시 기회가 온다면 내 목숨을 다 바쳐 널 사랑할게.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 줘.]서유는 여기까지 보고 더 이상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이 세상에 그녀를 이렇게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범죄자가 있는 줄은 몰랐다.그는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숨긴 채 마음을 표현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녀를 추모하고 있었다.서유는 그의 목적을 알 수 없었지만 수천 개의 메시지에 충격받았다.정가혜는 그녀가 넋이 나간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말했다.“처음에는 미친 듯이 메시지를 보내니까 내가 너인 척하고 불러낸 적이 있었어. 너에게 못된 짓을 한 적이 있었으니 경찰서에 처넣으려고 말이야. 그런데 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오히려 누구를 만난 줄 알아?”정가혜는 잠시 멈칫했다. 그날 커피솝에 나타난 남자는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이승하처럼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서유를 그리워할 수 있겠는가?정가혜는 생각하다가 결국 서유에게 말하지 않았다.“아무튼 그 인간은 오지 않
정가혜가 일어나 창문 아래를 살펴보니 지현우가 서유를 만나지 않으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기세로 서 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서유에게 물었다.“저 사람 네 언니 남자친구 아니야? 왜 자꾸 너한테 집에 가자는 거야?”서유는 정가혜에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만 알려주고 자신과 지현우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었다.그녀는 이불을 젖히고 정가혜 옆으로 다가가 아래층의 지현우를 보며 말했다.“가혜야, 나 저 사람이랑 영국에서 결혼했어.”정가혜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뭐?”서유는 아주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난 당장 귀국해서 너랑 사월이를 만나고 싶었지만 귀국하면 언니 심장으로 다른 사람 곁에 있을까 봐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묶어 두었어. 내가 결혼에 동의하지 않았으면 절대 나 돌아오게 하지 않았을 거야.”정가혜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굳어졌다.“서유야, 그럼 평생 저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거야?”서유의 눈 밑에는 암울한 기색이 역력했다.“언니 마지막 유언대로 내 몸에 심장을 넣는 순간부터 난 저 사람이랑 평생 함께할 운명이었어.”즉 서유는 지금 살아 있지만 영원히 자유를 잃게 되었다.정가혜는 걱정이 앞섰다.“서유야, 어떻게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을까?”서유는 무력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이 심장이 있는 한 절대 나 놔주지 않을 거야.”정가혜는 미간을 찌푸렸다.“근데 저 사람 제정신 같지 않은데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서유는 지현우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우리 언니를 너무 사랑해서 저렇게 됐겠지.”정가혜는 이 상황이 풀 수 없는 매듭이란 생각이 들어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고 이 주제를 어떻게 계속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침묵하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정가혜는 서유가 곤란해질까 봐 동의했다.“너 해치지 않는다고 하니 오늘은 일단 돌아가. 내일 다시 너 보러 갈게.”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내려가
이승하는 뼈마디가 분명한 손끝으로 담배를 털었다.꺼진 불이 피부에 타올랐지만 그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귓가에는 진실을 알게 된 소수빈의 가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조사해보니 김초희 씨는 서유 씨가 아니에요. 영국계 한인으로 줄곧 영국에서 살았어요.”“영국 쪽에서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서유 씨가 아마 저분의 잃어버린 동생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그리고 김초희 씨와 지씨 가문의 넷째, 지현우 씨는 영국 교회에서 결혼을 올린 것이 확실하고...”이승하는 손을 들더니 손으로 자신의 얇은 입술을 매만졌다.저렇게 청순하면서도 이승하의 욕구를 자극하는 여자는 분명 서유이다.하지만 소수빈은 자료 뭉치를 들고 서유가 아니라고 말했다.이승하는 담배를 한 모금 가볍게 빨더니 눈 밑에는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지현우는 차를 세운 후, 그 훤칠한 그림자를 보고 짙은 눈썹을 찡그렸다.“또 저 사람이야?”서유가 그의 시선을 따라 가로등 아래의 남자를 바라보더니 흠칫 놀랐다.지현우는 한 손으로 차창에 기대어 서유를 흘겨보면서 말했다.“본인이 친 사고는 본인이 해결하시죠.”서유는 시선을 돌려 지현우를 보며 말했다.“집에 경비원 있잖아요. 쫓아내라고 하세요.”서유는 더 이상 이승하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서로 낯선 사람으로 지내며 영원히 마주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다.지현우는 그 코닉세그 차량의 뒤를 향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저쪽 사람이 많아서 제가 이길 수 없어요.”서유는 그제야 스포츠카 뒤쪽에 고급차량이 한 줄 세워진 것을 보고 안색이 굳어졌다.“그럼 어떡해요?”지현우는 짜증이 밀려온 듯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돌아가 서유를 끌어내렸다.그녀를 끌고 곧장 별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별장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이승하는 이번에는 강하게 나오지 않고 지현우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초희 씨에게 몇 가지 질문만 하고 다시 돌려 드리죠.”지현우는 그가 서유가 아닌 초희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이미 그
이승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지만 서유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서유는 멍하니 그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마치 트라우마가 생긴 듯 칠흑 같은 눈동자에 약간의 공포가 물들었다.이승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뭔가 깨달았는지 얼른 손을 거두고는 말했다.“겁먹지 마. 다시 너 때리는 일은 없어.”서유는 줄곧 침착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무너졌다.“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이승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서유야, 난 절대 그럴 수 없어.”서유는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했다.“제 이름은 서유가 아니라 김초희라고 분명 말씀드렸어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믿으실 건가요?”이승하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꼬리가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진짜... 서유가 아니야?”“아니에요!”서유는 손바닥만 한 얼굴을 치켜들며 한껏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이승하의 짙은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고 여전히 믿지 않는 기색이 가득했다.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벽으로 몰아넣은 후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서유는 그가 또 경우 없이 행동할까 봐 그를 밀치고 돌아서서 도망가려는데 이승하가 뒤에서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커다란 체구의 몸이 작고 여린 그녀를 꼭 감싸 안았고 딱딱한 가슴을 그녀의 등에 붙였다.서유는 화가 나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남자는 놓지 않았고 철옹성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서유는 갑자기 웃음이 났다.“이보세요, 유부녀에 집착하는 특별한 취미가 있나 보죠?”이승하는 그녀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를 가둔 뒤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뒤편 단발머리를 헤쳤다.정확히 그 작은 흉터를 만졌을 때, 이승하의 얇은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역시 서유가 맞았다.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그 흉터는 이승하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고 덤덤하고 차가운 눈에 무궁무진한 죄책감이 물들게 했다.이승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 흉터를 만지며 사과했다.“미안해. 내가 네 목숨을 앗아갔어.”서유는 고개를 약간
이승하는 멍해지더니 서유의 저항하는 얼굴을 바라보았다.‘서유가 죽을 때까지 내가 자기를 누군가의 대역으로 삼았다고 가혜 씨가 말한 적이 있는데, 설마 줄곧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고 생각한 거야?’이승하는 서둘러 말했다.“서유야, 난 늘 너를 불렀어.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불렀던 적은 없어.”3년 만에 돌아온 뒤늦은 해명은 그 어떤 파문도 일으키지 못하고 불신만 얻었다.서유의 담담한 눈빛에는 그 어떤 동요도 없었고 심지어 차갑기까지 했다.그녀의 냉랭한 모습에 이승하의 심장이 또다시 아파지기 시작했다.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힘껏 안지 않으면 서유가 금방이라도 사라지는 것처럼.이승하는 이미 한 번 사별을 겼었으니 다시는 생이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를 껴안았다.“서유야,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 안 돼?”이승하는 심지어 그동안의 오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녀를 향한 끝없는 그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서유의 눈초리가 가볍게 떨렸지만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난 서유가 아니에요.”이승하의 몸이 뻣뻣해지더니 곧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는 입을 맞추었다.서유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화가 나서 온몸을 떨며 그를 밀어내려고 몸부림쳤지만 그에게 갇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승하는 간단히 맛만 보고 싶었지만 입술이 그녀에게 닿는 순간 미쳐버렸다.그는 서유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지척에 있어도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없으니 그녀의 작은 얼굴을 부여잡고 거침없이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그녀의 작은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키스한 후에야 아쉬운 듯 놓아 주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가두어 두고 가지 못하게 했다.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말했다.“이것 봐. 내가 키스할 때마다 넌 늘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데, 이래도 아니라고?”서유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승하의 심장이 저리고 눈이 물안개로 젖었다.그가 내린 결정 중 가장 어리석은 결정이었고, 그래서 헤어진 후 수없이 후회했다.이승하는 아픔 마음을 꾹 참고 그녀에게 설명했다.“지유와 결혼하겠다고 형이랑 약속했었어.”서유의 눈동자는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그래서 연지유가 귀국하자마자 저를 포기한 거네요?”이승하는 애써 변명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해 계약이 끝났을 때, 확실히 그녀를 포기할 생각이었다.형의 유언을 들어줘야 했고, 그때 서유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니 이승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떤 이유에서든 서유의 입장에서 이승하가 고민 없이 자신을 포기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이승하는 이를 반박할 길이 없었다.그의 침묵에 서유는 덤덤한 미소를 지었다.“이승하 씨,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소유욕일 뿐이에요.”이승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사랑이랑 소유욕이 어떻게 다른지는 나도 구별할 수 있어. 그런 식으로 내 감정을 부정하지 마.”서유는 눈을 늘어뜨리고 자신을 감싸 안은 남자의 팔을 응시하며 잠시 정신을 놓을 뻔했다.한참 후에야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않았겠죠. 헤어지고 나서도 몇 번이고 나를 모욕하지 않았을 테고.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은 나를 연지유의 대역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대역은 아니더라도 당신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겠죠.”그녀는 고개를 돌려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나는 단지 당신의 생리적 수요를 채워주는 사람이라고 주 선생님께도 말했잖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할 거란 기대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 내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죠?”이승하는 설명하려 했지만 서유는 그에게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리고...”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시종일관 평온하던 눈에는 갑자기 한 가닥의 억울함이 물들었다.“당신 여동생과 약혼녀를 위해서 주저
서유는 그 편지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란 기색을 보였다.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이승하라는 사람한테 실망하고 있었던 걸까?그 남자가 자신을 끌어안고 친밀한 애정행각을 하면서, 입으로는 너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기대하지 말라고 했던 그때였을까?그 말에 그녀는 깨달았던 것 같다. 남자한테 본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단지 그냥 그의 분풀이 상대였음을.그런데 지금...서유는 고개를 들어 반쯤 눈이 돌아간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이승하는 늘 콧대 높은 자태로 옆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같은 그의 모습은 그녀도 처음 보는 거라 도통 무슨 감정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함께 있을 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가 전에 쓴 몇 마디 말을 가지고 그녀한테 따지는 행동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의미라 하면, 아무래도 마침표인 것 같다.그녀가 그런 글을 남겼던 건, 스스로 다짐하고 내려놓기 위해서였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 사람과의 안녕을 글로 썼고 펜을 내려놓았다. 그걸로 마음도 관계도 매듭을 지었고 정리했다. 이 헛된 꿈의 짝사랑은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완전히 끝났음을 알아차렸다.서유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그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서 들었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읽어보다가, 망설임 없이 편지를 찢어버렸다. 이승하가 손을 뻗었을 땐 이미 늦었다... 편지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붉어진 눈시울로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야...”서유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덤덤한 미소를 지었다.“승하 씨, 편지 내가 별 의미 없이 쓴 것에요. 당신한테 뭘 남기고 싶어서 쓴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았으면 해요.”이승하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눈가는 빨개져서 찢어진 편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지난 3년을, 천일 밤낮을 자신이 어떻게 보냈는데...그를 지탱해 왔던 건 수면제와 이 편지에 적힌 몇 자 안 되는 글이 다였다. 지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