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혜는 순간 표정이 변하더니 곧 혐오스러움이 가득했다.“그 인간 그때 나 고향 집으로 못 가게 한 이유가 뭔 줄 알아?”“혹시 강이설 때문에?”정가혜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의 일을 낱낱이 말했다.“두 사람 친남매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연인 사이였어. 양가 부모님도 동의했지만 강이설이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강은우 보고 시내의 고급 아파트를 사라고 했대. 그런데 강은우 그 인간이 무슨 수로 서울의 집을 사겠어? 집 때문에 나를 노렸던 거야.”“내가 고아이고 학벌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직업도 술이나 파는 여자였으니 나 같은 사람은 분명 사랑이 부족하고 쉽게 속아 넘어간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친절한 척 연기하면서 나한테 접근했어. 결국 내가 그 인간에게 넘어갔고 모든 걸 주었더니 그년과 그런 사이였던 거야.”“네가 심부전이라서 곧 세상을 뜨던 그 날 밤, 둘이 병원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네가 마지막 순간까지 나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았던 거야. 두 사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너한테 거짓말했어. 그 두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해서 날 상대하고 있었어...”서유는 여기까지 듣고 몸을 곧게 펴고는 정가혜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음만 찢어질 듯 아팠다.정가혜가 강은우를 만난 이후로 열심히 일해 돈을 번 것은 전부 강은우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다.그런데 정가혜가 평생을 의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남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속이고 있었다니!이런 참혹한 진실을 서유가 죽어가고 있을 때 알았으니 당시의 정가혜는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서유는 그녀를 꽉 안았다. 마치 포옹으로 정가혜의 상처를 달래 주려는 듯 웃으면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괜찮아. 그때 사실을 알고 한동안 힘들었지만 지금은 강해졌어.”“내가 신혼집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두 사람의 치욕스러운 장면을 녹화해 변호사에게 보냈거든.”“소송에서는 이겼지만 그 신혼집은 지켜내지 못했었어. 계약금은 강은우 부모님이 결혼 전에 냈기
서유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정가혜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나 전화 좀 받고 올게.”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가혜는 급히 침실을 나가더니 문을 닫았다.지난 3년 동안 분명 많은 일이 일어났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정가혜와 이연석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문밖에서 정가혜는 휴대폰을 쥐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나 오늘은 친구랑 있어야 해서 못 갈 것 같아요.”와인잔을 들고 있던 이연석은 순간 흠칫했다.“어떤 친구?”정가혜는 대충 얼버무렸다.“여자인 친구가 있어요.”이연석은 와인잔을 내려놓고 실망한 듯 말했다.“괜히 흥 깨졌네.”이어 전화가 끊겼고, 정가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실로 돌아갔다.침대에 앉아서 조용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서유를 보며 정가혜는 또 마음이 찔렸다.그녀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몇 번이고 망설이더니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미안해, 서유야. 이승하가 너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내가 이씨 가문 사람이랑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괜찮아.”서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가로챘다.“나 신경 쓸 필요 없어. 너만 행복하면 그만이야. 다만...”서유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이연석은 소문난 바람둥이야. 얼마나 많은 여자를 만났는지 모르는데, 그 사람 옆에 있다가 너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야...”이런 남자와 만나면서 사랑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일단 사랑하게 되면 상처투성이가 될 수 있었다. 마치... 옛날의 서유처럼.정가혜는 그녀의 말을 듣고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걱정하지 마. 복수 때문에 그 사람 곁에 있는 거야.”서유는 순간 어리둥절했다.“무슨 복수?”정가혜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박하선, 연지유, 이승하 그 세 사람이 널 때려서 빨리 죽게 했으니 당연히 내가 복수 해야지!”서유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는데 정가혜가 어떻게 그 세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까?서유는 몸을 곧게 펴고 정가혜를 끌어당겨 위아래로 몸을 살폈다.“가혜야, 너 어디 다치지 않
정가혜는 옛 추억에서 벗어나 서유를 바라보았다.“서유야, 걱정하지 마. 난 이연석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 이 세상에 사월이 말고 좋은 남자는 아마 없을 거야.”“그러니까 나도 전처럼 누가 잘해주면 쉽게 마음을 내어주는 가치 없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송사월을 언급하자 서유의 눈동자가 다시 어두워졌다.이 세상에 그녀에게 잘해주는 남자는 이미 떠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서유는 눈을 늘어뜨리고 눈 밑의 슬픔을 감추며 감격해서 말했다.“가혜야, 고마워. 나 때문에 그렇게 많은 희생을 했는데 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만약 네가 이연석이랑 인연을 끊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정가혜는 웃더니 서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네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가장 큰 보답이야. 앞으로 어디도 가지 말고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알겠어?”정가혜는 서유의 삶에서 한 줄기 빛으로, 항상 그녀의 마음을 따듯하게 어루만졌다.서유가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더라도 정가혜는 늘 중요한 순간에 그녀에게 무한한 힘을 줄 것이다.바로 지금처럼 정가혜는 아무런 원망도 비난도 증오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서유에게 바치고 있었다.서유는 눈시울을 붉히며 정가혜를 껴안고 약속했다.“내가 돌아왔으니까 앞으로는 내가 너 돌봐줄게.”정가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지 않았다.“너 단단히 각오해. 내가 늙어서 못 움직이게 되면 네가 나 밥 먹여주고, 물 따라 주고 휠체어도 밀어주고 똥오줌도 가려줘야 해.”서유는 그녀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정가혜는 서유가 마침내 웃자 더 이상 농담하지 않고 일어나 자물쇠가 채워진 서랍을 열고 밀폐된 봉투를 꺼냈다.그녀는 안에서 물건을 꺼내며 서유에게 말했다.“원래 살던 아파트는 돌아가면 자꾸 옛날 생각날 것 같아서 다시 간 적 없지만 나오기 전에 네 귀중한 물건은 따로 챙겼어.”그녀는 서유가 사용했던 휴대폰을 꺼내 건넸다.“네 휴대폰
[보고 싶다.][돌아올 수 있어?][다시 돌아와 줘. 아직 말 못 한 비밀이 있어.][네 꿈을 꿨어. 나보고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더군.][매달리고 싶지 않지만 나도 나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어.][보고 싶어 미치겠어. 대체 어떻게 하면 다시 너를 만날 수 있는지 제발 알려줘.][다시 돌아오면 안 돼? 제발... 돌아와 줘.][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다시 널 만날 수 있는 거야?][수면제 먹고 너를 만났어. 널 볼 수 있으니까 참 좋다.][환각 속의 넌 사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더군.][그래서 나도 널 품에 꼭 안고 나도 사랑한다고 말했어.][하지만 이건 환각일 뿐이잖아. 네가 어떻게 날 사랑할 수 있어.][네 마음에는 다른 사람이 있으니, 너를 포기하라고 놓으라고 나 자신에게 수도 없이 말했어.][하지만, 그게 안 돼. 마약처럼 중독돼서 절대 끊을 수도, 잊을 수도 없어.][서유야, 사랑해. 만약 다시 기회가 온다면 내 목숨을 다 바쳐 널 사랑할게.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 줘.]서유는 여기까지 보고 더 이상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이 세상에 그녀를 이렇게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범죄자가 있는 줄은 몰랐다.그는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숨긴 채 마음을 표현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그녀를 추모하고 있었다.서유는 그의 목적을 알 수 없었지만 수천 개의 메시지에 충격받았다.정가혜는 그녀가 넋이 나간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말했다.“처음에는 미친 듯이 메시지를 보내니까 내가 너인 척하고 불러낸 적이 있었어. 너에게 못된 짓을 한 적이 있었으니 경찰서에 처넣으려고 말이야. 그런데 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오히려 누구를 만난 줄 알아?”정가혜는 잠시 멈칫했다. 그날 커피솝에 나타난 남자는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이승하처럼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서유를 그리워할 수 있겠는가?정가혜는 생각하다가 결국 서유에게 말하지 않았다.“아무튼 그 인간은 오지 않
정가혜가 일어나 창문 아래를 살펴보니 지현우가 서유를 만나지 않으면 절대 돌아가지 않을 기세로 서 있는 것 같았다.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서유에게 물었다.“저 사람 네 언니 남자친구 아니야? 왜 자꾸 너한테 집에 가자는 거야?”서유는 정가혜에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만 알려주고 자신과 지현우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었다.그녀는 이불을 젖히고 정가혜 옆으로 다가가 아래층의 지현우를 보며 말했다.“가혜야, 나 저 사람이랑 영국에서 결혼했어.”정가혜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뭐?”서유는 아주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난 당장 귀국해서 너랑 사월이를 만나고 싶었지만 귀국하면 언니 심장으로 다른 사람 곁에 있을까 봐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묶어 두었어. 내가 결혼에 동의하지 않았으면 절대 나 돌아오게 하지 않았을 거야.”정가혜는 그 말을 듣고 안색이 굳어졌다.“서유야, 그럼 평생 저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거야?”서유의 눈 밑에는 암울한 기색이 역력했다.“언니 마지막 유언대로 내 몸에 심장을 넣는 순간부터 난 저 사람이랑 평생 함께할 운명이었어.”즉 서유는 지금 살아 있지만 영원히 자유를 잃게 되었다.정가혜는 걱정이 앞섰다.“서유야, 어떻게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을까?”서유는 무력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이 심장이 있는 한 절대 나 놔주지 않을 거야.”정가혜는 미간을 찌푸렸다.“근데 저 사람 제정신 같지 않은데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서유는 지현우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우리 언니를 너무 사랑해서 저렇게 됐겠지.”정가혜는 이 상황이 풀 수 없는 매듭이란 생각이 들어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고 이 주제를 어떻게 계속 얘기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침묵하고 있을 때, 아래층에서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정가혜는 서유가 곤란해질까 봐 동의했다.“너 해치지 않는다고 하니 오늘은 일단 돌아가. 내일 다시 너 보러 갈게.”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내려가
이승하는 뼈마디가 분명한 손끝으로 담배를 털었다.꺼진 불이 피부에 타올랐지만 그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귓가에는 진실을 알게 된 소수빈의 가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조사해보니 김초희 씨는 서유 씨가 아니에요. 영국계 한인으로 줄곧 영국에서 살았어요.”“영국 쪽에서 보내온 소식에 따르면 서유 씨가 아마 저분의 잃어버린 동생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그리고 김초희 씨와 지씨 가문의 넷째, 지현우 씨는 영국 교회에서 결혼을 올린 것이 확실하고...”이승하는 손을 들더니 손으로 자신의 얇은 입술을 매만졌다.저렇게 청순하면서도 이승하의 욕구를 자극하는 여자는 분명 서유이다.하지만 소수빈은 자료 뭉치를 들고 서유가 아니라고 말했다.이승하는 담배를 한 모금 가볍게 빨더니 눈 밑에는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지현우는 차를 세운 후, 그 훤칠한 그림자를 보고 짙은 눈썹을 찡그렸다.“또 저 사람이야?”서유가 그의 시선을 따라 가로등 아래의 남자를 바라보더니 흠칫 놀랐다.지현우는 한 손으로 차창에 기대어 서유를 흘겨보면서 말했다.“본인이 친 사고는 본인이 해결하시죠.”서유는 시선을 돌려 지현우를 보며 말했다.“집에 경비원 있잖아요. 쫓아내라고 하세요.”서유는 더 이상 이승하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서로 낯선 사람으로 지내며 영원히 마주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다.지현우는 그 코닉세그 차량의 뒤를 향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저쪽 사람이 많아서 제가 이길 수 없어요.”서유는 그제야 스포츠카 뒤쪽에 고급차량이 한 줄 세워진 것을 보고 안색이 굳어졌다.“그럼 어떡해요?”지현우는 짜증이 밀려온 듯 차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돌아가 서유를 끌어내렸다.그녀를 끌고 곧장 별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별장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이승하는 이번에는 강하게 나오지 않고 지현우를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초희 씨에게 몇 가지 질문만 하고 다시 돌려 드리죠.”지현우는 그가 서유가 아닌 초희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이미 그
이승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지만 서유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서유는 멍하니 그의 오른손을 바라보며 마치 트라우마가 생긴 듯 칠흑 같은 눈동자에 약간의 공포가 물들었다.이승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뭔가 깨달았는지 얼른 손을 거두고는 말했다.“겁먹지 마. 다시 너 때리는 일은 없어.”서유는 줄곧 침착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무너졌다.“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요.”이승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서유야, 난 절대 그럴 수 없어.”서유는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했다.“제 이름은 서유가 아니라 김초희라고 분명 말씀드렸어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믿으실 건가요?”이승하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꼬리가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진짜... 서유가 아니야?”“아니에요!”서유는 손바닥만 한 얼굴을 치켜들며 한껏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이승하의 짙은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고 여전히 믿지 않는 기색이 가득했다.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벽으로 몰아넣은 후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서유는 그가 또 경우 없이 행동할까 봐 그를 밀치고 돌아서서 도망가려는데 이승하가 뒤에서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커다란 체구의 몸이 작고 여린 그녀를 꼭 감싸 안았고 딱딱한 가슴을 그녀의 등에 붙였다.서유는 화가 나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남자는 놓지 않았고 철옹성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서유는 갑자기 웃음이 났다.“이보세요, 유부녀에 집착하는 특별한 취미가 있나 보죠?”이승하는 그녀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를 가둔 뒤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뒤편 단발머리를 헤쳤다.정확히 그 작은 흉터를 만졌을 때, 이승하의 얇은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역시 서유가 맞았다.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그 흉터는 이승하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고 덤덤하고 차가운 눈에 무궁무진한 죄책감이 물들게 했다.이승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 흉터를 만지며 사과했다.“미안해. 내가 네 목숨을 앗아갔어.”서유는 고개를 약간
이승하는 멍해지더니 서유의 저항하는 얼굴을 바라보았다.‘서유가 죽을 때까지 내가 자기를 누군가의 대역으로 삼았다고 가혜 씨가 말한 적이 있는데, 설마 줄곧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고 생각한 거야?’이승하는 서둘러 말했다.“서유야, 난 늘 너를 불렀어.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불렀던 적은 없어.”3년 만에 돌아온 뒤늦은 해명은 그 어떤 파문도 일으키지 못하고 불신만 얻었다.서유의 담담한 눈빛에는 그 어떤 동요도 없었고 심지어 차갑기까지 했다.그녀의 냉랭한 모습에 이승하의 심장이 또다시 아파지기 시작했다.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힘껏 안지 않으면 서유가 금방이라도 사라지는 것처럼.이승하는 이미 한 번 사별을 겼었으니 다시는 생이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를 껴안았다.“서유야,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 안 돼?”이승하는 심지어 그동안의 오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녀를 향한 끝없는 그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서유의 눈초리가 가볍게 떨렸지만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난 서유가 아니에요.”이승하의 몸이 뻣뻣해지더니 곧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는 입을 맞추었다.서유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화가 나서 온몸을 떨며 그를 밀어내려고 몸부림쳤지만 그에게 갇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승하는 간단히 맛만 보고 싶었지만 입술이 그녀에게 닿는 순간 미쳐버렸다.그는 서유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지척에 있어도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없으니 그녀의 작은 얼굴을 부여잡고 거침없이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그녀의 작은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키스한 후에야 아쉬운 듯 놓아 주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가두어 두고 가지 못하게 했다.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말했다.“이것 봐. 내가 키스할 때마다 넌 늘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데, 이래도 아니라고?”서유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