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손을 들어 서유의 눈을 가리며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억지로 키스를 이어갔다.지현우는 이런 어이없는 광경에 눈을 부라리더니 언짢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앞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향했다.그는 허리를 숙이고는 차 문을 두드렸다.“초희 씨, 내려요.”서유는 지현우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더니 그녀를 꽉 누른 채 키스해 대는 이승하를 밀쳐냈다.그녀는 숨이 가빠왔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이승하에게 말했다.“문 열어요. 남편이에요.”이승하는 표정이 굳더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고개를 들어 밖에 서 있는 남자를 스캔했다.깔끔한 회색 슈트를 입은 지현우는 매우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차갑고 도도하지만 귀티가 좔좔 흐르는 게 딱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이승하는 지현우의 생김새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지현우가 서유를 김초희라고 불렀다는 것에 신경이 곤두섰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안전벨트를 당겨 서유에게 매주고는 자세를 고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서유를 태운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지현우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부가티를 보며 표정이 일그러졌다.이래서 귀국하기 싫었던 건데 역시나 오자마자 귀찮은 일이 생겨버렸다.그는 다시 자기 차로 돌아와 올라타더니 빠른 속도로 뒤를 따랐다.이승하는 180까지 속도를 올리고 분노의 질주를 선보였다.지현우도 또라이라 상대가 얼만큼 올리면 그도 얼만큼 내달렸다.서유는 안전벨트를 꼭 붙들고 차가운 표정으로 운전하는 이승하를 힐끔 쳐다보다가 다시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지현우를 돌아봤다.그녀는 둘이 이렇게 쫓고 쫓기다가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두려워 입을 열었다.“내 남편한테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당신 고소할 거예요.”그녀는 여전히 자기가 서유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을 남편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에 이승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차를 세울 생각이 없었고 바로 JS그룹 소유의 별장으로 향했다.차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는 바람에 서유는 멀미가 났고
그 방망이는 마치 서유의 몸에 내리치는 것처럼 서유를 두렵게 했고 이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다가 돌부리를 잘못 밟고 몸이 휘청거렸다.그렇게 넘어지려는데 뒤에서 커다란 손 하나가 정확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고개를 돌려보니 이승하가 서늘한 눈빛으로 지현우를 노려보고 있었고 이 광경을 본 서유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이승하의 신분은 지현우라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 그녀는 얼른 이승하를 뿌리치고 용기 내어 지현우의 손을 잡았다.“여보... 그만하고 이제 가요.”‘여보?’지현우는 방망이질을 멈추더니 불만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마치 왜 함부로 그렇게 부르냐고 원망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서유는 지금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지현우의 팔을 끌어안으며 까치발을 하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협조 좀 해줘요.”그러나 지현우는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콧방귀를 끼더니 말했다.“자초한 일이니 직접 해결해요.”서유는 낮은 목소리로 다소 조급하게 말했다.“만약 저 사람이 나를 데려간다면 우리 언니 심장도 같이 가져가는 거예요.”“...”지현우는 할말을 잃었다.그러더니 손에 든 방망이를 내려놓고 협조했다.“가요.”서유는 수그러든 그의 태도에 그의 팔을 단단히 부여잡고 몸을 돌렸다.“거기 서!”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지현우는 걸음을 멈췄다.서유는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요.”하지만 지현우는 오히려 몸을 돌리더니 손에 든 방망이를 돌리며 턱을 살짝 든 채 이승하를 쳐다봤다.“제 아내를 괴롭힌 것도 뭐라 안 했는데 오히려 다시 시비를 거네요?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요?”이승하는 지현우를 아예 대놓고 무시하고는 뚜벅뚜벅 서유 앞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나랑 가자.”서유가 거절하기도 전에 지현우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감싸더니 품에 꼭 끌어안으며 이승하를 도발했다.“왜 그래야 되는데요?”이승하는 서유를
어두운 가로등 불빛 아래 커다란 몸집 하나가 길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그냥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까만 세단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그 차는 꼬박 3년을 그리워한 여자를 싣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쫓아가려는 충동을 애써 참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주서희는 소준섭의 품속에서 핸드폰 진동을 들었다. 핸드폰은 소준섭 쪽 머릿장에 놓여 있었다.그녀가 몸을 일으켜 전화를 가져오려 했지만 소준섭은 그런 그녀가 내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주서희의 핸드폰을 그녀에게 던져주었다.그러더니 주서희를 등지고 누웠다. 진동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깬 게 많이 언짢아 보였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아예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는 않았다.주서희는 그런 소준섭의 뒷모습을 보며 잠자리를 가진 뒤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애써 만들어낸 만족스러운 표정을 싹 거두고 싸늘해졌다.그녀는 전화를 받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대표님...”이승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서희야, 심부전 말기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어?”주서희가 잠시 멈칫했다.심부전 말기, 이 다섯 글자는 이승하에게 금기어였다. 3년 동안 그 누구도 이 단어를 꺼내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지금 와서 심부전 말기를 갑자기 꺼냈다는 건 아직도 서유의 죽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주서희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저는 심장병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이승하가 전화를 끊으려는데 주서희가 덧붙였다.“대표님, 조지라는 분이 있는데 국제적으로 유명한 심장병 전문가입니다. 대표님께서도 알고 계실 거예요.”이승하의 눈동자에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얼른 전화를 끊더니 조지에게 연락했다.Y국.바닷가에서 산책하던 조지는 이승하가 걸어온 전화를 보고는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받을 때까지 걸어오는 이승하를 못 이겨 끝내는 이를 악물고 전화를 받았다.이승하는 간단하게 인사하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까만 세단 내부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서유는 몰래 지현우를 힐끔 쳐다봤다.그는 한 손으로 차를 운전하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가끔 핸들을 톡톡 건드렸다.잘생긴 얼굴에는 특별한 표정이 없었고 조금 전 그 남자가 누구인지도 묻지 않았다.그는 마치 그녀에게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냥 그녀의 몸속에서 뛰고 있는 이 심장이 그의 옆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서유가 그의 속내를 이렇게 추측하고 있는데 지현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방금 본 그 남자가 이승하예요?”서유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남자가 왜 그렇게 많아요?”“...”서유는 말문이 막혔다.남자가 많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서유는 살짝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내 과거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지현우는 잠깐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싸늘하게 대답했다.“전혀요...”관심이 없다면서 묻긴 왜 묻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서유는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차는 이내 별장에 도착했고 서유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방으로 향했다.문이 닫히기 전 지현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문 잠그지 마요.”서유는 밤에 불쑥불쑥 나타나지 말라고 너무 무섭다고 얘기하려는데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탈칵 문을 잠갔다.“...”서유는 다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정가혜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3년간 서유가 죽고 믿었던 강은우에게 배신당하며 정가혜가 얼마나 마음고생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고 얼마나 고생해야 클럽 사장까지 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밤새워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새벽이 되어서야 서유는 조금 졸려와 잠깐 잠에 들었다. 다시 깨었을 땐 이미 점심이었다.그녀가 비몽사몽해서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메이드 차림의 도우미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사모님, 깨셨나요?”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거북해 서유는 미
불빛이 너무 어두운 데다가 여러 번 바뀌기까지 하니 서유를 알아보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단발에 빨간 옷을 입고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어도 정가혜는 가슴에 새긴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정가혜가 죽을 때까지 기억할 그 사람, 그 사람이 지금 저기에 서 있다.그녀는 놀란 나머지 손에 끼고 있던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가혜야!”서유가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불렀다.정가혜는 그제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유를 향해 걸어오더니 물었다.“서유야, 정말 너야...?”서유가 애써 참아왔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언니...”정가혜는 서유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떨리는 손을 들어 서유의 얼굴을 만지려 했지만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서유는 정가혜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갖다 대고는 울먹이며 말했다.“언니, 나 다시 돌아왔어...”정가혜는 서유의 체온이 느껴졌다. 이토록 따듯하고 진짜 같을 수는 없었다. 정가혜도 더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서유야...”정가혜는 두 손을 내밀어 서유를 품속에 꼭 끌어안았다.“우리 서유 맞지? 안 죽고 살아있는 거 맞지?”서유도 똑같이 그녀를 감싸안으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서유 맞아. 나 안 죽고 아직 살아있어.”정가혜는 그렇게 서유를 한고 한참을 울다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더니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과 몸을 더듬거렸다.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정가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유를 바라봤다.“어떻게...”그녀는 분명히 서유가 숨을 거두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고 송사월이 직접 화장장으로 데려가 화장했다. 하지만 3년 뒤인 지금 서유는 도대체 어떻게 돌아온 것일까.서유는 어떻게 살아남게 됐는지 모든 경과를 정가혜에게 다 알려주었다.“미안해. 혼수상태로 2년을 있다가 깨어나서는 바로 1년간 재활했거든. 그래서 바로 찾으러 올 수가 없었어.”정가혜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널
정가혜는 서유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는 서유의 체온이 점차 식어가는 게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서유야, 나도 믿기지 않지만...”정가혜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3년 전, 정가혜는 송사월이 결국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몰래 그의 뒤를 따라 묘지로 향했다.묘지에 도착했지만 송사월은 보이지 않고 묘비에 튄 핏자국만 보였다.정가혜는 마음이 불안해져 송사월을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이튿날 바로 기사가 났다. 화진 그룹의 김시후가 묘지에서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그제야 정가혜는 송사월이 정말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되었다.정가혜는 서유를 꼭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혔다.“미안해, 서유야. 내가 사월이를 잘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아니야...”서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긴 듯 아팠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많은 사람이 서유에게 송사월은 죽었다고 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그녀도 정가혜에게서 직접 듣고 싶어서 서둘러 귀국한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정가혜마저 그녀에게 송사월이 죽었다고 말해주고 있다.믿을 수밖에 없었다. 서유는 송사월에게 빚을 진 건 늘 자신이라고 생각했다.송사월이 차 사고를 당한 것도 서유와 다투고 서유를 구하려다 대신 차에 뛰어든 것이었다.서유가 다른 남자와 있는 걸 제일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몸을 파는 방법으로 수술비를 마련했다.송사월은 그녀를 원망하고 욕했지만 그녀는 그런 송사월을 이해할 수가 없어 화를 내며 병원을 나섰고 그렇게 화진 그룹 사람들이 송사월을 데려가게 되었다.하지만 송사월은 그녀를 위해 차에서 뛰어내리면서도 화진 그룹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고 그 충격으로 기억을 잃게 된 것이다.그러다 뒤에 서유는 송사월을 찾아갔다가 김준혁의 손에 호되게 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송사월이 그런 줄로만 알고 송사월에게 완전히 실망했다.그 순간부터 송사월과 서유는 철
서유는 눈물이 마르고 몸이 나른해질 때까지 울었다.정가혜는 그녀를 부축하여 방에 가서 쉬게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소리 없이 거절했다.벽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아 두 팔을 두르고 머리를 팔꿈치에 파묻었다.잔뜩 움츠린 몸은 세상에 버림받아 홀로 남은 듯 외로워 보였다.정가혜는 그녀의 모습에 차마 방해하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을 물린 후, 몸을 웅크리고 앉아 곁을 지켰다.3년 전, 두 절친이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가혜도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지금의 그녀는 남편에게 배신당해 세상이 무너졌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그녀는 복수를 해야만 했다. 강은우, 박하선, 연지유 그리고 이승하에게 복수하기 전에는 절대 죽을 수 없었다.그녀는 이런 신념으로 버텨왔지만 살아서 서유를 만날 줄은 몰랐다.서유를 만났으니 절대 서유가 바보 같은 짓을 하게 놔둘 수 없었다.지난번에는 그녀의 부주의로 송사월을 지키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최선을 다해 서유를 지켜야 했다.그녀는 손을 들어 서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이러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따듯함을 전해주려 했다.어느덧 시간이 흘렀고,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오기 전까지 그들은 요지부동이었다.정가혜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시종일관 서유에게 향한 것을 보고 바짝 긴장했다.그에게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남자는 서유에게 다가와 긴 손가락으로 서유의 머리를 밀었다.“열 시예요. 이제 집에 가야죠.”서유는 지현우의 목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지현우는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자 눈살을 찌푸리고 허리를 약간 숙인 다음 인내심 있게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초희 씨, 나랑 집에 가요.”서유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들어 지현우를 보았다.“오늘은 돌아가기 싫어요...”서유는 여기에 남고 싶었다. 정가혜와 함께 조용히 자신을 위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지현우는 그녀의 말에 표정이 바로 어두워지더니 말했다.“다시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의 눈 부신 햇살이 마루 너머로 천천히 쏟아져 들어왔다.서유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주 따뜻했지만 또 낯설었다.자신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정가혜가 따듯한 물을 들고 들어왔다.“서유야, 깼어?”서유는 정가혜를 보고는 이곳이 그녀의 새집이라고 추측했다.그녀는 나른한 몸을 억지로 지탱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어.”정가혜는 물을 옆에 두고 서유를 부축해 침대 머리맡에 기대게 하면서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너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기절한 거래...”서유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가혜야.”정가혜는 손을 들어 그녀 이마의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바보야, 왜 그런 말을 해. 언니로서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잖아. 널 돌보는 건 어릴 때부터 내 의무였어...”오랜만에 듣는 따듯한 말에 서유는 차가웠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고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정가혜는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 손바닥만 한 서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서유야, 그만 울어. 그럼 나도 마음이 아프잖아.”서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울음을 그쳤다.정가혜는 그녀가 여전히 전처럼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서유가 살아 있어서 참 다행이야. 내 인생에 드디어 빛이 생겼어.’정가혜는 물컵을 들고 서유의 입에 건넸다.“물부터 마셔.”서유는 입을 벌리고 조금씩 마셨다. 메마른 목이 점차 촉촉해졌다.“가혜야, 나 사월이 묘지에 데려다 줄래?”정가혜는 물컵을 내려놓고 서유를 바라보았다.“묘지는 없어. 김씨 가문 사람들 말로는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고 했어.”서유는 송사월의 비보를 듣고 곧장 부산으로 향했지만 시신을 볼 겨를도 없이 김씨 가문 사람들은 장례식을 치렀다.정가혜의 말을 듣고 나서 서유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묘지도 없으니 마치 이 세상에 송사월이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