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가 아직 누구의 목소리인지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강이설이 3살 좌우의 어린아이를 안고 서유 앞에 나타났다.서유는 잠깐 멈칫했지만 강이설이 잠시 정가혜와 강은우의 집에 얹혀사는 줄로만 생각하고 더 캐묻지 않았다.“저는 당신 올케 되는 사람의 친구입니다. 가혜 지금 집에 있나요?”강이설은 처음에 화려하게 차려입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다가 서유가 입을 열어서야 누군지 생각났다.“당신, 당신...”강이설은 얼굴이 핼쑥해지더니 아이를 안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귀신이야!”서유는 이내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고 앞으로 나서며 자신은 귀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강이설은 그녀의 행동에 놀라 얼른 안으로 달려갔다.“여보, 그 빌어먹을 년의 친구가 귀신이 되어 우리를 찾아왔어요!”서유는 이를 듣더니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지금 누구를 여보라고 부르는 거지? 빌어먹을 년은 또 누구고?’서유가 미간을 찌푸리고 의아해하는데 강은우가 주방에서 걸어 나오더니 위아래를 레드로 맞춰 입은 서유를 보고 놀라서 혼비백산했다.“당신...”강은우는 뭔가 크게 켕기는 게 있는 듯 강이설보다 더 크게 놀라며 말도 제대로 못 했다.서유는 강은우와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는지라 바로 강은우 앞으로 다가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가혜 지금 어디 있어요?”강은우는 바짝 다가온 서유의 몸에서 풍기는 옅은 향기를 맡고 나서야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귀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서유는 3년 전에 이미 죽었는데 왜 갑자기 멀쩡하게 여기에 나타난 건지 의문이었다.강은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는 서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보니 서유가 한 말을 아예 듣지 못했다.서유는 짜증을 내며 다시 물었다.“가혜, 어디 있냐고요?”강은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아직도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아마도... 클럽에 나갔을 거예요...”정가혜가 클럽을 나간다 해도 거의 밤에 나갔지 낮에
그렇게 저녁 9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는데 데스크 직원이 오늘은 정가혜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며 일단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서유는 어쩔 수 없이 조급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클럽을 나섰다.주차장으로 걸어가 차를 픽업하려는데 크고 건장한 체구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고개를 든 서유는 빨갛게 충혈된 예쁜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순간 심장이 덜컹했고 자기도 모르게 도망가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더니 허리를 휘감으며 두 사람의 거리를 확 좁혔다.다른 손은 그녀의 등에서 머리로 더듬더듬 올라갔고 그렇게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온 힘을 다해 서유를 으스러질 듯이 꼭 끌어안은 남자는 조각 같은 턱을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갖다 댔다.그녀의 체온과 익숙한 향기를 느끼고 나서야 이승하는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자각했다.텅 빈 가슴을 안고 3년을 살아왔는데 그녀를 꼭 껴안은 순간 잠깐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그렇게 오래 그리워한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니, 이승하는 서유를 되돌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를 몸속에 스며들게 해 그녀의 존재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서유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이승하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찬 바람이 쌩쌩 불더니 지금 이렇게 갑자기 끌어안는 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공공장소에서 그녀를 이렇게 안은 적이 없었다. 서유는 3년 동안 이승하의 머리가 이상해진 거라고 생각했다.서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버둥거리며 이승하를 밀어냈지만 이승하는 한 손으로 서유의 팔목을 꾹 누르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를 차 문에 밀착시켰다.“당신...”서유가 욕설을 퍼붓기도 전에 그는 허리를 굽히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빨간 입술에 키스했다.입
“서유는 누구예요? 저는 김 씨에요. 서 씨가 아니라. 설마 죄를 짓고 사람을 잘못 알아봐서 그랬다는 둥 그런 핑계 대려는 거 아니죠?”서유는 이승하의 손을 뿌리치고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손에는 핸드폰을 꼭 쥔 채 앞으로 팔짱을 끼고는 턱을 살짝 들고 이승하를 노려보고 있었다.표정이 오만했고 말투도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온순하고 얌전했던 서유와는 완전 딴판이었다.하지만 뼈에 새길만큼 익숙한 얼굴은 여전했다. 그저 화장을 조금 짙게 했을 뿐이었다.이승하의 잘생긴 얼굴은 불신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분명 그가 찾던 서유가 맞았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뒤로 목을 빼더니 그의 터치를 피했다.“저기요. 자꾸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사람 부를 거예요.”이승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혹시 아직도 내 탓 하는 거야?”이승하의 말투에서 난감함과 셀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서유는 눈까풀이 파르르 떨렸지만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다. 이승하를 바라보는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네요.”서유는 격렬한 키스로 약간 부어오른 입술을 만지작거리더니 역겹다는 표정으로 이승하를 노려봤다.“됐어요. 그냥 미친개한테 물린 거라고 생각하죠 뭐.”그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얼른 몸을 돌려 자신의 차로 향했다.차 문을 열자마자 뒤에서 크고 예쁜 손이 나타나 차 문을 세게 다시 닫았다.서유에게 반항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고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미친 사람 아니야! 얼른 내려줘요! 사람 살려!”서유는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힘껏 발버둥 쳤지만 이승하의 힘은 놀라울 정도로 컸다.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으니 서유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서유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먹히지 않자 그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녀를 안고 타고 온 스포츠카로 향했다.그는 한 손으로 조수석의 문을 열더니 서유
예전에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렇게 구걸하다시피 말한 적은 종래로 없었다.서유는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이 수척해진 듯했다. 잠을 잘 잘 자지 못하는지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올라와 있었다.생김새는 변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매우 피곤해 보였고 핼쑥했다. 마치 3년간 잘 지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이제 이런 건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그녀는 지금 이승하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었고 그저 그를 최대한 밀어내 멀어지고 싶었다.서유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저기요, 주민등록증 차에 놓고 왔는데 가져다가 보여드릴까요?”서유는 태연하고 침착했지만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다. 이에 이승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서유야...”서유가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진짜 사람 잘못 보셨어요.”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너의 생김새와 숨결은 영원히 잊을 수 없어.”서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승하가 고집스러운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더는 이렇게 그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지현우가 귀찮게 할 게 뻔했다.서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승하에게 말했다.“좋을 대로 생각해요. 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야 해요. 남편이 기다리고 있어서요.”‘남... 편?’이승하는 순간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녀의 입에서 ‘남편’이라는 단어가 나온 게 믿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서유는 부연 설명하지 않고 차량 잠금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저기요, 아까 일어난 일은 그쪽이 사람을 잘못 봤으니 그냥 넘어갈게요. 그러니 이제 문 열고 보내줘요.”이승하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너... 남편이 있어?”서유는 전혀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승하에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약지에 낀 반짝이는 다이아 반지를 본 순간
이승하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손을 들어 서유의 눈을 가리며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억지로 키스를 이어갔다.지현우는 이런 어이없는 광경에 눈을 부라리더니 언짢은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앞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향했다.그는 허리를 숙이고는 차 문을 두드렸다.“초희 씨, 내려요.”서유는 지현우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더니 그녀를 꽉 누른 채 키스해 대는 이승하를 밀쳐냈다.그녀는 숨이 가빠왔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이승하에게 말했다.“문 열어요. 남편이에요.”이승하는 표정이 굳더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고개를 들어 밖에 서 있는 남자를 스캔했다.깔끔한 회색 슈트를 입은 지현우는 매우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차갑고 도도하지만 귀티가 좔좔 흐르는 게 딱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이승하는 지현우의 생김새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지현우가 서유를 김초희라고 불렀다는 것에 신경이 곤두섰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안전벨트를 당겨 서유에게 매주고는 자세를 고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서유를 태운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지현우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부가티를 보며 표정이 일그러졌다.이래서 귀국하기 싫었던 건데 역시나 오자마자 귀찮은 일이 생겨버렸다.그는 다시 자기 차로 돌아와 올라타더니 빠른 속도로 뒤를 따랐다.이승하는 180까지 속도를 올리고 분노의 질주를 선보였다.지현우도 또라이라 상대가 얼만큼 올리면 그도 얼만큼 내달렸다.서유는 안전벨트를 꼭 붙들고 차가운 표정으로 운전하는 이승하를 힐끔 쳐다보다가 다시 뒤에서 바짝 따라오는 지현우를 돌아봤다.그녀는 둘이 이렇게 쫓고 쫓기다가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두려워 입을 열었다.“내 남편한테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당신 고소할 거예요.”그녀는 여전히 자기가 서유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을 남편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에 이승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그는 차를 세울 생각이 없었고 바로 JS그룹 소유의 별장으로 향했다.차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는 바람에 서유는 멀미가 났고
그 방망이는 마치 서유의 몸에 내리치는 것처럼 서유를 두렵게 했고 이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다가 돌부리를 잘못 밟고 몸이 휘청거렸다.그렇게 넘어지려는데 뒤에서 커다란 손 하나가 정확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고개를 돌려보니 이승하가 서늘한 눈빛으로 지현우를 노려보고 있었고 이 광경을 본 서유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이승하의 신분은 지현우라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 그녀는 얼른 이승하를 뿌리치고 용기 내어 지현우의 손을 잡았다.“여보... 그만하고 이제 가요.”‘여보?’지현우는 방망이질을 멈추더니 불만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마치 왜 함부로 그렇게 부르냐고 원망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서유는 지금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지현우의 팔을 끌어안으며 까치발을 하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협조 좀 해줘요.”그러나 지현우는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콧방귀를 끼더니 말했다.“자초한 일이니 직접 해결해요.”서유는 낮은 목소리로 다소 조급하게 말했다.“만약 저 사람이 나를 데려간다면 우리 언니 심장도 같이 가져가는 거예요.”“...”지현우는 할말을 잃었다.그러더니 손에 든 방망이를 내려놓고 협조했다.“가요.”서유는 수그러든 그의 태도에 그의 팔을 단단히 부여잡고 몸을 돌렸다.“거기 서!”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지현우는 걸음을 멈췄다.서유는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신경 쓰지 마요.”하지만 지현우는 오히려 몸을 돌리더니 손에 든 방망이를 돌리며 턱을 살짝 든 채 이승하를 쳐다봤다.“제 아내를 괴롭힌 것도 뭐라 안 했는데 오히려 다시 시비를 거네요? 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요?”이승하는 지현우를 아예 대놓고 무시하고는 뚜벅뚜벅 서유 앞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나랑 가자.”서유가 거절하기도 전에 지현우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감싸더니 품에 꼭 끌어안으며 이승하를 도발했다.“왜 그래야 되는데요?”이승하는 서유를
어두운 가로등 불빛 아래 커다란 몸집 하나가 길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그냥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까만 세단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그 차는 꼬박 3년을 그리워한 여자를 싣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쫓아가려는 충동을 애써 참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주서희는 소준섭의 품속에서 핸드폰 진동을 들었다. 핸드폰은 소준섭 쪽 머릿장에 놓여 있었다.그녀가 몸을 일으켜 전화를 가져오려 했지만 소준섭은 그런 그녀가 내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주서희의 핸드폰을 그녀에게 던져주었다.그러더니 주서희를 등지고 누웠다. 진동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깬 게 많이 언짢아 보였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아예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는 않았다.주서희는 그런 소준섭의 뒷모습을 보며 잠자리를 가진 뒤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애써 만들어낸 만족스러운 표정을 싹 거두고 싸늘해졌다.그녀는 전화를 받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대표님...”이승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서희야, 심부전 말기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어?”주서희가 잠시 멈칫했다.심부전 말기, 이 다섯 글자는 이승하에게 금기어였다. 3년 동안 그 누구도 이 단어를 꺼내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지금 와서 심부전 말기를 갑자기 꺼냈다는 건 아직도 서유의 죽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주서희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입을 열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저는 심장병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이승하가 전화를 끊으려는데 주서희가 덧붙였다.“대표님, 조지라는 분이 있는데 국제적으로 유명한 심장병 전문가입니다. 대표님께서도 알고 계실 거예요.”이승하의 눈동자에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얼른 전화를 끊더니 조지에게 연락했다.Y국.바닷가에서 산책하던 조지는 이승하가 걸어온 전화를 보고는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받을 때까지 걸어오는 이승하를 못 이겨 끝내는 이를 악물고 전화를 받았다.이승하는 간단하게 인사하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까만 세단 내부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서유는 몰래 지현우를 힐끔 쳐다봤다.그는 한 손으로 차를 운전하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가끔 핸들을 톡톡 건드렸다.잘생긴 얼굴에는 특별한 표정이 없었고 조금 전 그 남자가 누구인지도 묻지 않았다.그는 마치 그녀에게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그냥 그녀의 몸속에서 뛰고 있는 이 심장이 그의 옆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서유가 그의 속내를 이렇게 추측하고 있는데 지현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방금 본 그 남자가 이승하예요?”서유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남자가 왜 그렇게 많아요?”“...”서유는 말문이 막혔다.남자가 많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서유는 살짝 짜증을 내며 되물었다.“내 과거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지현우는 잠깐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더니 싸늘하게 대답했다.“전혀요...”관심이 없다면서 묻긴 왜 묻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서유는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홱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차는 이내 별장에 도착했고 서유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방으로 향했다.문이 닫히기 전 지현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문 잠그지 마요.”서유는 밤에 불쑥불쑥 나타나지 말라고 너무 무섭다고 얘기하려는데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탈칵 문을 잠갔다.“...”서유는 다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정가혜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3년간 서유가 죽고 믿었던 강은우에게 배신당하며 정가혜가 얼마나 마음고생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고 얼마나 고생해야 클럽 사장까지 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밤새워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새벽이 되어서야 서유는 조금 졸려와 잠깐 잠에 들었다. 다시 깨었을 땐 이미 점심이었다.그녀가 비몽사몽해서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메이드 차림의 도우미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사모님, 깨셨나요?”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거북해 서유는 미
설산에서 쓰러진 나무들은 이 세상과 저세상을 가로지른 썩은 나무와 같았다. 넘어가려고 하다가 발길을 멈추고 나무 위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뒤따라오던 하준이는 이승하의 모습을 보고 우산을 쓰고 걸음을 옮겼다.우산의 가장자리로 내려앉은 흰 눈, 긴 속눈썹을 살짝 떨던 그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손을 내밀어 옆에 있는 나무를 툭툭 두드렸다.“앉거라.”하준이는 그가 눈 맞을까 봐 우산을 거두지 않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팔꿈치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우산을 이승하의 옆으로 기울였다. 오늘의 아버지는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검은 코트에 흰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그는 옷차림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지만 애써 가꾼 얼굴에는 어느덧 이별이 은은히 배어 있었다. “아버지.” 하준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두 부자간에 할 말은 이미 다 한 것 같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얇은 정장 차림의 이하준을 쳐다보았다. 코트를 벗어 자연스럽게 아이의 몸을 감쌌다. 아이가 다시 코트를 벗어 다시 돌려주려 하자 그가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점점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존재. 하준이는 지금의 마음을 무슨 말로 형용할지 몰랐다. 아버지의 여온이 깃든 옷을 꽉 쥔 채 아이처럼 그의 따뜻한 품을 말없이 느꼈다. 우산 가장자리를 따라 끝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얼마 후, 무거운 이하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아버지, 절 위해 할 수 있는 아직 많아요. 그러니까 절 믿으세요. 제가 반드시 그 칩을 꺼낼 겁니다.”검은 정장 차림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그가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는 우산을 따라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3년을 연구했으니... 네가 이 칩을 꺼낼 수 있을 거라고 난 믿는다.”하준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제가 의학 공부를
이하준의 성인식 당일, 눈이 펑펑 내렸다. 예전에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녀가 깨어나던 날처럼 눈이 펑펑 내렸었다.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깜빡하고 멍하니 창가에 서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룸에서 나온 이승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창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다가갔다. 뼛속 깊이 새겨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햇살 아래, 아름다운 그녀가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그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낙인처럼 그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이번 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고 잊을까 봐 두려운 것이 바로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의 인생은 고작 50년도 채 되지 않았고 하늘은 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자신에게 불공평하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서유를 떠나는 게 가슴이 찢어질 뿐이다. 이 몸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고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미련은 그가 떠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씁쓸한 미소를 짓던 그가 다시 힘겹게 몸을 이끌고 드레스룸으로 향하더니 퍼 코트를 챙겨와 서유의 몸을 감싸주었다. 자신을 감싸안은 손길에 흠칫하던 그녀는 이내 눈을 내리깔고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그 위에 덮었다. “손이 많이 차가워요.”“날씨가 추워지니까 그런 거야.”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까만 눈동자 속에 여전히 잘생긴 그의 얼굴이 비춰지자 그녀는 순간 울컥했다.“당신한테 아직 하지 못한 얘기가 너무 많은데. 조금만... 더 조금만 늦게 떠나면 안 돼요?”그 말에 흠칫하던 그가 천천히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는 그녀의 콧등을 살짝 어루만졌다. “바보.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당신 옆에 꼭 붙어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의 손을 잡은 채 발끝을 세우고 고개를 들어 남자의 차가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승하 씨
그가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연석도 알고 있었다. 그가 오기 전, 이연석은 로봇 앞에 서서 끊임없이 로봇 기능을 체크하고 있었다. 유리창 안, 이연석이 코드를 빠르게 두드리자 그 옆에 있던 로봇이 실제 사람처럼 말을 하였고 그 모습에 이승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연석아...”그의 목소리에 이연석은 행동을 멈추고 옆으로 몸을 돌려 둘째 형을 쳐다보았다.최근 몇 년 동안, 로봇을 개발하기 위해 이승하는 고통을 무릅쓰고 밤낮으로 바삐 돌아쳤다. 둘째 형이 안쓰러웠던 이연석은 그를 돕기로 결심했다. 둘째 형보다 능력은 훨씬 떨어지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결국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게 되었다. “형, 언제쯤 형수한테 보여줄 거예요?”그가 자신을 부축하려는 이연석의 손을 밀치고는 허리를 곧게 펴고 로봇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손을 뻗어 머리 뒤의 스위치를 누르자 로봇이 그와 똑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고 그 모습에 그가 또다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게 있으면 내가 떠난 후에도 서유가 외롭지는 않겠지...”이승하가 연구 개발한 칩은 미리 앞으로의 10년, 20년 동안의 말을 모두 녹음해 둔 칩이었다. 서유가 그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싶다면 계속 살아가야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 건 바보 같은 여자가 자신을 따라 죽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가 계속 살기를 바랐고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죽기 전에 로봇이 완벽하게 제작된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서유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는 안색이 점차 굳어졌다. “내가 떠나면 그때 이 로봇을 서유한테 보여줘. 그리고 하준이를 도와 회사를 꼭 지키거라.”둘째 형의 마지막 당부에 이연석은 눈시울이 붉어졌다.“형, 정말 방법이 없는 거예요?”그동안 유명한 의사를 수없이 많이 찾아다녔고 머리를 바꾸는 수술까지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
어두컴컴한 방안, 이하준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어떻게 그 엄청난 고통을 무릅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지금껏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철이 없었던 그는 아빠를 무시한 적도 많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한 못된 짓을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던 소년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쏟았고 마치 버림받은 아이처럼 온몸이 떨릴 정도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예전에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죽음이 닥쳐오니 자신이 얼마나 부모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밤새 의학 서적을 뒤적거리며 칩을 꺼내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그는 머리 수술에 관한 모든 서책을 다 뒤져보았다. 윤주원과 조지 그리고 알고 있는 유명한 의사들에게 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결론은 모두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칩을 꺼내는 동시에 그 안의 바이러스가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에 이하준은 밤새 넋을 잃은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달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안, 앞길을 밝혀 주는 등불조차 없이 깜깜하기만 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이하준은 다음날 한결같이 다정한 부모님의 모습에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두 분이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던 건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 건가요? 그래서 더 서로를 소중히 여긴 거 아닌가요?”서유도 이하준처럼 마음이 아팠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니 예전보다는 침착할 수 있었다.“시간이 많든 적든 부부는 서로를 아껴야 더 오래갈 수 있는 거야.”식탁에 앉은 이하준은 굳어진 입꼬리를 살짝 올릴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고개를 돌려 겉으로는 죽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맞은편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빠, 저 의학 공부하고 싶습니다.”의학을 배우고 싶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분명 칩을 꺼낼 때 필요한 강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