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당신이 나한테 이러는 걸 언니가 알았다면 언니는 분명 이 심장을 남기지 않을 거예요.”그녀의 말이 지현우의 가슴을 찔렀고 그의 그윽한 눈동자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고 휘청거리는 그의 뒷모습은 더없이 쓸쓸해 보였다.그러나 서유는 그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고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조지의 말로는 그녀는 회복이 빨리 되고 있고 한 달 정도 더 재활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잠시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중요한 건 그녀는 이미 국내에서 죽은 사람이었고 개인정보도 없어서 어떻게 귀국해야 할지 막막했다. 김초희의 여권으로 몰래 비행기표를 끊어 귀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김초희는 사망신고를 한 적이 없어서 그녀의 개인정보는 여전히 Y국에 있는 상태였다.게다가 그녀와 김초희는 생김새도 비슷하고 지금은 스타일링도 비슷해서 화장만 비슷하게 하면 입국장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통과되지 못한다면 구치소에 구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구치소에 있는 것이 지현우 곁에 남아서 김초희의 대역이 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었다. 다만, 김초희의 여권은 지현우의 방에 있었다. 이 해변의 큰 별장은 지현우가 김초희에게 사준 것으로 별장 안에는 두 사람이 함께 지냈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지현우가 김초희의 물건을 모두 자신의 방에 모아두었기 때문에 서유는 여권을 손에 넣으려면 그를 찾아가야 했다. 서유는 그가 집에 없는 틈을 타 몰래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번에 지현우의 방으로 처음 들어갔다. 방 안에 온통 언니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언니가 죽은 후 지현우가 얼마나 미친 듯이 언니를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언니는 영원히 돌아올 수가 없고 지현우는 언니의 초상화만 보면서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서유는 생각을 접고
지현우는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거절해도 돼요. 하지만 귀국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서유는 그저 멍한 표정이었다. 지현우는 여권으로 반지 함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5분만 더 시간 줄게요.”그 뜻인 즉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것이다. 거절하면 앞으로 귀국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했다.서유는 큰 돌덩이로 가슴을 짓누르듯 숨통이 조여왔다. 너무 어려운 선택이었다.지현우는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녀의 표정 변화를 관찰했다. 그는 확신에 찬 표정이었고 매우 태연했다.주어진 시간이 지나고 서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당신이 말한 대로 할게요. 근데 그냥 법적으로, 명의만 부부인 거예요.”이를 들은 지현우가 콧방귀를 꼈다.“그게 아니면 뭔데요?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지현우는 다이아 반지를 반지 함에서 꺼내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라고 눈짓했다.서유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지현우는 투박하게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는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일 성당 가요.”그는 이렇게 말하더니 김초희의 여권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서유는 약지에 낀 반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뭔가 이번 생은 이렇게 지현우에게 단단히 묶일 것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아니다. 애초에 그가 자기 누나의 심장을 그녀에게 이식한 순간부터 묶였다고 봐야 했다.지현우가 무슨 수단으로 서유의 신분부터 얼굴까지 김초희로 바꿨는지 모른다.하지만 오늘부터 그녀는 더 이상 서유가 아니라 김초희다.한 달 뒤, 서유는 서울로 가는 국제항공에 탑승했다.일등석 창가 자리에 앉은 서유는 창밖을 내다보며 멍을 때렸다.선신물이 곧 닫히려는데 기다란 체구를 가진 누군가가 잽싸게 안으로 들어왔다.서유는 그를 보자마자 놀란 듯 동공이 살짝 커졌다.“혼자 돌아가라면서요?”지현우는 그녀의 옆
빛은 잃었지만 여전히 잘생긴 눈은 그녀를 보자마자 색감을 조금 되찾은 듯 보였다.수척하면서도 준수한 얼굴에 기쁨이 차올랐다. 눈동자는 그리움으로 가득했다.온 세상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 옆을 지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눈앞에 오로지 그녀만 남은 느낌이었다.그는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그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렇게 눈시울이 점차 붉어졌다.‘죽지 않은 거야?’‘살아 있었던 거야?’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서유를 향해 걸어갔다.서유는 그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몸을 돌려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해 걸어오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눈동자를 가득 채웠던 그리움이 사라지고 표정은 다시 차가워졌다. 눈빛도 어느새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그는 마치 낯선 사람을 보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유도 그런 그의 눈빛을 읽어냈고 불안했던 마음이 다시 차분해졌다.그는 역시 그녀의 죽음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살아 돌아온 그녀를 보고도 그저 잠깐 놀랐을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그녀는 입을 앙다문 채 망설임없이 몸을 돌려 수하물 컨베이어로 향했다.서유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이승하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더니 손에 쥔 약을 내려다보았다.졸피뎀을 그만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유증이 심해지니 벌건 대낮에도 환각이 보이는 것이다.하지만 이번 환각으로 본 서유는 다른 때와 조금 달랐다.허리춤까지 길렀던 머리를 단발로 잘랐고 옷도 옅은 컬러에서 환한 레드로 바뀌었다.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 힘들어하는데 먼저 정신을 차린 소수빈이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조금 전에 서유 씨 본 거 같은데요?”이 말에 이승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크고 웅장한 몸집이 그렇게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지현우가 수하물 컨베이어에서 짐을 내리는데 마침 서유가 그쪽으로 걸어갔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말했다.“거기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잖아요?”퉁명스러운 말투는 마치 말을 듣지 않은 서유를 나무라는 것 같
서유는 지현우에게 굽신거리는 기사를 보고 살짝 어리둥절했다.그렇게 아무것도 모른채 차에 오른 서유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지현우를 쳐다봤다.“현우 씨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Y국에서 1년을 같이 지냈지만 지현우가 일자리를 찾거나 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귀국하자마자 대표님이라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지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약간은 오만한 말투로 물었다.“건축 설계사에요.”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설명을 덧붙였다.“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건축 설계사 중에 대표님은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서유는 기사의 말을 이용해 되물었다.“그럼 1위는 누구예요?”기사가 갑자기 입을 꾹 닫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현우도 그저 고개를 돌려 창밖만 뚫어져라 쳐다봤다.마치 무슨 민감한 화제라도 꺼낸 듯 차 안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졌다.서유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설마 세계 1위라는 사람이 현우 씨 누나되는 분인가?’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한 별장 앞에 멈췄다. 기사는 차를 차고에 대고 캐리어를 꺼냈다.기사는 캐리어를 앞으로 끌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대표님, 초희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지현우는 이 별장의 지리를 잘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기사가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그는 심드렁하게 뒤를 따랐다.서유도 천천히 별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장 환경을 보니 Y국에서 지내던 별장과 구두가 비슷했다.아마 지현우가 외국에 있을 때 미리 기사에게 연락해 김초희가 좋아하던 스타일로 매입한 별장인 것 같았다.하지만 서유는 구도니, 스타일이니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빨리 정가혜와 송사월을 만나고 싶었다.그녀는 지현우가 보는 앞에서 2층의 안방을 제외한 다른 방 하나를 선택하고는 다급하게 물었다.“이제 가봐도 되죠?”지현우는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어 서서는 느긋하게 물었다.“운전할 줄은 알아요?”서유는 이를 악물더니 말했다.“알아요!”지현우는 몸을 돌려 서재로 향하더니 차키 하나를 가져와
서유가 아직 누구의 목소리인지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강이설이 3살 좌우의 어린아이를 안고 서유 앞에 나타났다.서유는 잠깐 멈칫했지만 강이설이 잠시 정가혜와 강은우의 집에 얹혀사는 줄로만 생각하고 더 캐묻지 않았다.“저는 당신 올케 되는 사람의 친구입니다. 가혜 지금 집에 있나요?”강이설은 처음에 화려하게 차려입은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다가 서유가 입을 열어서야 누군지 생각났다.“당신, 당신...”강이설은 얼굴이 핼쑥해지더니 아이를 안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귀신이야!”서유는 이내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고 앞으로 나서며 자신은 귀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강이설은 그녀의 행동에 놀라 얼른 안으로 달려갔다.“여보, 그 빌어먹을 년의 친구가 귀신이 되어 우리를 찾아왔어요!”서유는 이를 듣더니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지금 누구를 여보라고 부르는 거지? 빌어먹을 년은 또 누구고?’서유가 미간을 찌푸리고 의아해하는데 강은우가 주방에서 걸어 나오더니 위아래를 레드로 맞춰 입은 서유를 보고 놀라서 혼비백산했다.“당신...”강은우는 뭔가 크게 켕기는 게 있는 듯 강이설보다 더 크게 놀라며 말도 제대로 못 했다.서유는 강은우와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는지라 바로 강은우 앞으로 다가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가혜 지금 어디 있어요?”강은우는 바짝 다가온 서유의 몸에서 풍기는 옅은 향기를 맡고 나서야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귀신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서유는 3년 전에 이미 죽었는데 왜 갑자기 멀쩡하게 여기에 나타난 건지 의문이었다.강은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는 서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보니 서유가 한 말을 아예 듣지 못했다.서유는 짜증을 내며 다시 물었다.“가혜, 어디 있냐고요?”강은우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아직도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아마도... 클럽에 나갔을 거예요...”정가혜가 클럽을 나간다 해도 거의 밤에 나갔지 낮에
그렇게 저녁 9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는데 데스크 직원이 오늘은 정가혜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며 일단 오늘은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서유는 어쩔 수 없이 조급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클럽을 나섰다.주차장으로 걸어가 차를 픽업하려는데 크고 건장한 체구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고개를 든 서유는 빨갛게 충혈된 예쁜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순간 심장이 덜컹했고 자기도 모르게 도망가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더니 허리를 휘감으며 두 사람의 거리를 확 좁혔다.다른 손은 그녀의 등에서 머리로 더듬더듬 올라갔고 그렇게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온 힘을 다해 서유를 으스러질 듯이 꼭 끌어안은 남자는 조각 같은 턱을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갖다 댔다.그녀의 체온과 익숙한 향기를 느끼고 나서야 이승하는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자각했다.텅 빈 가슴을 안고 3년을 살아왔는데 그녀를 꼭 껴안은 순간 잠깐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그렇게 오래 그리워한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니, 이승하는 서유를 되돌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를 몸속에 스며들게 해 그녀의 존재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서유는 약간 어리둥절했다. 이승하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찬 바람이 쌩쌩 불더니 지금 이렇게 갑자기 끌어안는 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공공장소에서 그녀를 이렇게 안은 적이 없었다. 서유는 3년 동안 이승하의 머리가 이상해진 거라고 생각했다.서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버둥거리며 이승하를 밀어냈지만 이승하는 한 손으로 서유의 팔목을 꾹 누르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를 차 문에 밀착시켰다.“당신...”서유가 욕설을 퍼붓기도 전에 그는 허리를 굽히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빨간 입술에 키스했다.입
“서유는 누구예요? 저는 김 씨에요. 서 씨가 아니라. 설마 죄를 짓고 사람을 잘못 알아봐서 그랬다는 둥 그런 핑계 대려는 거 아니죠?”서유는 이승하의 손을 뿌리치고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손에는 핸드폰을 꼭 쥔 채 앞으로 팔짱을 끼고는 턱을 살짝 들고 이승하를 노려보고 있었다.표정이 오만했고 말투도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온순하고 얌전했던 서유와는 완전 딴판이었다.하지만 뼈에 새길만큼 익숙한 얼굴은 여전했다. 그저 화장을 조금 짙게 했을 뿐이었다.이승하의 잘생긴 얼굴은 불신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분명 그가 찾던 서유가 맞았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뒤로 목을 빼더니 그의 터치를 피했다.“저기요. 자꾸 이렇게 무례하게 굴면 사람 부를 거예요.”이승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혹시 아직도 내 탓 하는 거야?”이승하의 말투에서 난감함과 셀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서유는 눈까풀이 파르르 떨렸지만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다. 이승하를 바라보는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네요.”서유는 격렬한 키스로 약간 부어오른 입술을 만지작거리더니 역겹다는 표정으로 이승하를 노려봤다.“됐어요. 그냥 미친개한테 물린 거라고 생각하죠 뭐.”그녀는 이렇게 말하더니 얼른 몸을 돌려 자신의 차로 향했다.차 문을 열자마자 뒤에서 크고 예쁜 손이 나타나 차 문을 세게 다시 닫았다.서유에게 반항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고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미친 사람 아니야! 얼른 내려줘요! 사람 살려!”서유는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힘껏 발버둥 쳤지만 이승하의 힘은 놀라울 정도로 컸다.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으니 서유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서유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먹히지 않자 그의 어깨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듯 그녀를 안고 타고 온 스포츠카로 향했다.그는 한 손으로 조수석의 문을 열더니 서유
예전에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렇게 구걸하다시피 말한 적은 종래로 없었다.서유는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이 수척해진 듯했다. 잠을 잘 잘 자지 못하는지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올라와 있었다.생김새는 변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매우 피곤해 보였고 핼쑥했다. 마치 3년간 잘 지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이제 이런 건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그녀는 지금 이승하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었고 그저 그를 최대한 밀어내 멀어지고 싶었다.서유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저기요, 주민등록증 차에 놓고 왔는데 가져다가 보여드릴까요?”서유는 태연하고 침착했지만 자신감 있는 표정이었다. 이에 이승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서유야...”서유가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진짜 사람 잘못 보셨어요.”이승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너의 생김새와 숨결은 영원히 잊을 수 없어.”서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승하가 고집스러운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더는 이렇게 그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지현우가 귀찮게 할 게 뻔했다.서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승하에게 말했다.“좋을 대로 생각해요. 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야 해요. 남편이 기다리고 있어서요.”‘남... 편?’이승하는 순간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녀의 입에서 ‘남편’이라는 단어가 나온 게 믿기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서유는 부연 설명하지 않고 차량 잠금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저기요, 아까 일어난 일은 그쪽이 사람을 잘못 봤으니 그냥 넘어갈게요. 그러니 이제 문 열고 보내줘요.”이승하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너... 남편이 있어?”서유는 전혀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승하에게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약지에 낀 반짝이는 다이아 반지를 본 순간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