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서유의 손은 그의 얼굴에서 천천히 옮겨져 그의 옷을 만지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셔츠 위에 새겨진 금색 글씨. Ace-Inviter-2-9. 이것은 그가 루드웰에 속하게 되었으며, 평범한 검은 옷을 입은 자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음을 의미했다. 그는 루드웰의 배후에 들어갔고, 서유를 이곳으로 초대한 2-7과 같은 등급에 있었다. 그는 그동안 계속해서 루드웰 있었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서유는 눈물이 마치 끊어진 구슬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조금씩 이승하의 옷을 더 꽉 잡으며,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 어디 다친 거예요? 그래서 집에 돌아올 수 없었던 거죠? 나한테 연락할 수도, 날 보러 올 수도 없었던 거죠?” 그녀의 눈물은 한 방울, 또 한 방울 이승하의 가슴에 떨어졌는데 그를 숨조차 쉴 수 없게 아프게 만들었다. 이승하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야, 내가 약속을 어긴 거야. 미안해.” 서유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발끝을 세워 그의 머리를 만지려고 했으나 이승하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잡아 막았다. 이승하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붙잡아 생명의 문 쪽으로 이끌었다. 서유는 그의 뒤를 따르며 그의 뒷머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짙은 머리카락이 그대로 있었는데 두개골을 연 흔적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서유는 눈물로 가득 찬 눈을 들어 침묵하는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두운 마음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다. 이승하는 마치 시간이 부족한 듯, 그녀를 빠르게 생의 문 안으로 밀어 넣으며 두 글자를 말했다. “떠나.” 그 두 글자는, 서유가 들었던 종이쪽지에 적힌 ‘떠나’와 다를 바 없었다. 아주 차갑고, 감정 없이 그녀의 몸과
이승하는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는 카운트다운 소리를 들었다. 두개골이 열리고 칩이 이식된 후, 그의 위치와 말은 모두 감시되고 있었다. 방금 그는 아홉 번째 라운드의 프로그램을 수정했고, 1-1이 설정한 프로그램도 해킹하여 권한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나타나 말을 꺼낸 순간, 1-2는 이미 그가 게임 구역의 프로그램을 변경한 것을 알아챘다. 지금 1-2는 즉시 폭파 프로그램을 가동하지 않고 5분의 카운트다운을 보내며 그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고 5분 안에 돌아가지 않으면 그의 머리는 폭발하고, 그녀 역시 죽게 될 것이다. 이승하는 서유의 뒷머리에 겨누어진 붉은 사살 레이저를 보며 꽉 쥐었던 주먹을 서서히 풀었다. 그는 재빨리 서유를 안아 생명의 문 안으로 집어넣고,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눌러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나는 당분간 돌아갈 수 없어. 너는 빨리 떠나. 그리고 다시는 나를 찾지 마. 너무 위험해.” 그의 머리는 통제되고 있었으며 루드웰에서 100미터만 벗어나면 자동으로 폭발하게 되어 있었다. 이승하는 그녀가 불안해하지 않기를 바랐기에 말을 마치고는, 재빨리 돌아서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서유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걸음을 옮겨 그를 쫓아가려 했고, 그 순간 이승하가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고 했잖아. 내 말을 그냥 흘려듣더니 이제는 육성재까지 연루시켰어. 그걸로도 부족해?” 그 한마디에 서유의 손과 발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마치 인형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난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요. 당신이 너무 걱정돼서, 그래서 찾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가 성재 씨를 데리고 온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을 일부러 연루시킨 것도 아니에요...’ 이런 말들이 서유의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승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듣지 않았다.
이승하는 그 목소리를 듣고 차가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연지유가 하이힐을 신은 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는 조종기를 들고 있는 봉태규와 두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승하의 음침한 눈빛은 봉태규의 손에 있는 조종기를 강하게 응시했다. 그는 S 멤버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1-2는 그를 높이 평가해 칩의 조종권을 그에게 맡긴 상태였다. 이승하가 연지유에게 손을 대기만 하면 봉태규는 조종기를 사용해 그를 제어할 것이고, 이승하가 봉태규에게 손을 대면 1-2가 칩의 프로그램을 가동해 그를 고통에 빠뜨리며 복종하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그들 사이의 관계는 이미 완벽한 고리로 얽혀 있었다. 그의 뇌에 이식된 칩의 조종이 누구 손에 있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서유가 떠날 수 있는 권한을 1-2가 연지유에게 넘겼다는 것이었다. 이제 연지유의 손에는 서유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이승하는 차가운 눈빛을 들어 연지유를 쳐다보며 말했다. “권한을 해제할 수 있는 조작대는 어디에 있지?” 방금 그가 사용한 조작대는 소용이 없었다. 이곳을 통제하는 조작대를 찾아야만 프로그램을 해제할 수 있었다. “1-2가 가지고 있어. 하지만 너는 상구역에 갈 권한이 없어. 보스를 찾을 수 없으니 이곳을 떠나는 프로그램도 해제할 수 없겠지.” 연지유는 매번 이승하 앞에 나섰을 때 예상치 못하게 그에게 제압당하곤 했다. 이번에는 조심해서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 죽음의 문에서 이승하를 제압했던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왔다. 비록 그가 죽음의 문에서 혼자 열 명을 상대할 수 있었지만 결국 수적으로 밀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제압당해 두개골을 열고 강제로 칩을 이식당했다. 이승하가 머리를 강제로 절개당하고 피가 흘러내릴 때조차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던 모습을 떠올리자 연지유의 마음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승하는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위해 검은 옷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아무 말 없이 이혼 협의서를 건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떼려 했지만 여러 번 울컥거려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가에 맺힌 물기가 번져나가 점차 눈물을 이뤘고, 그 뜨거운 눈물이 눈꺼풀을 타고 떨어지더니 이혼 협의서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 눈물은 종이를 적셨고 동시에 이승하의 눈가도 촉촉하게 만들었다. 그는 서유를 제대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서류를 그녀의 손에 쥐여준 뒤, 빠르게 몸을 돌려 등을 보인 채 한마디를 남겼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차가운 어조 속에 그 떨림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사인해.” 서유는 미소를 살짝 지으며 눈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호했던 그 커다란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결국 그를 더 사랑하고 있었기에 심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작은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아 그를 돌려세웠다. 그가 다시 자신을 향해 돌아서자, 서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생의 문 위에 있는 스크린을 가리켰다. “아까 나보고 가라고 했죠.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직 시간이 안 돼서 못 갔을 뿐이에요. 시간 되면 바로 떠날 거예요. 다시는 승하 씨를 찾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이혼만 하지 말아줘요, 응?” 서유는 이승하가 자신을 떠나게 하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는 것을. 그래서 마지막에는 그의 말에 순순히 따랐고 게임의 아홉 번째 생의 문 안에 남아 있었다. 문이 닫히지 않았기에 그녀는 떠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런 식으로 그녀를 떠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서유는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몇 년 전,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나를 버렸어요. 이제 나도 알아요. 당신은 또다시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나를 떠나게 하려는 거겠죠. 나는 당신이 원한다면 떠날게요. 그런데 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이렇게 매정하게
이미 말을 이렇게까지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그녀를 밀어내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서유는 자신이 참으로 처참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그럼 이유는요? 최소한 약속을 어긴 이유는 있어야 하지 않아요?” 연지유는 이승하의 팔을 꼭 끌어안으며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못 알아차리겠어? 승하 씨는 이제 나랑 함께하려고 해.” 서유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사람이 당신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어떻게 함께하겠어요. 날 죽이고 싶으면 그냥 바로 해요. 승하 씨를 더럽히지도 말고 나도 불쾌하게 하지 마요.” 연지유는 그 말을 듣고도 화내지 않고 하얀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전엔 나를 싫어했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 내가 승하 씨 아이를 임신했으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 이 말에 그동안 간신히 버텨온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한기가 번지며, 이승하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것이라는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유의 시선은 연지유의 득의양양한 얼굴에서 서서히 이승하의 얼굴로 옮겨졌다. “아니라고 말만 해주면 믿을게요.” 이승하는 극심한 두통으로 차가운 땀을 흘리며, 머릿속에서 울리는 빠듯한 카운트다운 소리를 들었다. 그는 서유의 얼굴을 지나 그녀의 머리 뒤에 겨눠진 붉은 저격선에 시선을 두었다. 그의 눈가에 섞인 붉은 빛은 조명에 반사되며 사라졌다. 이내 그 자리에 차가운 빙하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감정을 통제하는 데 능한 그였기에 그 붉은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차가운 태도였다. “술에 취해서 실수했어.” 이 한마디는 서유를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수많은 손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그 순간, 서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
서유의 눈에 담긴 감정은 이전에 본 적 없는 차가움이었다. 마치 더 이상 그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듯한 눈빛. 그런 눈빛을 본 이승하는 깨달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 것이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과거에도 그는 그녀를 이렇게 상처 입힌 적이 있었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이번에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서유의 성격상 어떤 이유가 있든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승하는 서유를 잃는 것이 두려웠다. 다른 남자와 그녀가 함께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명과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면 나머진 그 모든 것보다 하찮아 보였다. 그는 서서히 주먹을 풀고 서유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하의 답을 들은 서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고 결국 그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약 이승하가 단지 술에 취해서 실수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말하면 서유는 그를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연지유를 사랑한다고 인정한 순간, 서유는 그가 단 한 번도 연지유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승하는 서유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며칠 만에 다른 여자를 사랑할 리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모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유는 이런 방식으로 상처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몇 번이고 상처를 받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그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견뎌온 자신이 마치 바보 같았다. 서유는 그를 붙잡아 보았고 분명히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었다. 심지어 그와 함께 맞서 싸우겠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이승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여기 남을 이유는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이곳에 혼자 남도록 내버려두자고 그녀는 결심했다. 서유는 이혼 협의서에 꽂혀 있던 펜을 갑작스럽게 뽑아 들고 자신의 이름을 재빨리 서명한 후, 그 협의서를 이승하
한동안 그 자리에서 굳어있던 이승하는 혼이 빠진 채 이혼 합의서를 찢어버렸다. 그러고는 아픈 마음을 숨기며 싸늘한 눈빛으로 옆에 있는 연지유를 쳐다보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서유한테 상처도 줬고 이혼 합의서에 사인도 했어. 그러니까 이제 루드웰로 들어가는 권한을 줘.”옆에서 쭉 지켜보고 있던 연지유는 그가 이혼 합의서를 찢어버리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그녀가 원하는 건 이승하가 죽기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이었고 서유에게 또다시 버림받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니까. 그녀의 뜻대로 됐으니 이혼 합의서를 찢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그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끝이 닿기도 전에 그가 몸을 돌렸다. 흠칫하던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을 비볐다.“서유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태규 씨가 이미 처리해 뒀어.”그녀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번호 2-8의 봉태규였다. 한편, 봉태규는 지금 위쪽 프로그램실에 앉아 칩 컨트롤러를 들고 CCTV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연지유를 차갑게 쳐다보던 그가 빠르게 콘솔로 다가갔고 깨져버린 모니터의 녹색 버튼이 루드웰의 출구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루드웰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플레이어들이 안전하게 떠났다는 글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는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던 중 차가웠던 그의 눈빛은 점점 살벌하게 변해갔다. 깨진 유리 조각을 쳐다보던 그가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뻗어 한 조각 덥석 손에 쥐고는 다시 9라운드 게임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연지유는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콘솔에 기대어 앉아 머리를 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콘솔 말이야. 프로그램을 수정할 수는 없지만 생의 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화면에 보이는 지도는 가짜가 아니야. 너랑 한 약속 지켰는데 날 죽일 필요까지 있겠어?”진작부터 그가 배신할 줄 알았던 연지유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게다가 그가 자신에게 손을 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여유만만한
“이승하의 머릿속에 있는 칩은 1-2가 나한테 넣으라고 했던 거고 이승하를 초대자로 만든 것도 1-2이야. 1-2는 이승하의 능력을 눈여겨봤기 때문에 몰래 1-1의 권한을 풀어도 이승하를 죽이지 않았던 거야. 1-2한테 이승하는 아직 필요한 사람이라는 뜻이겠지.”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태규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말을 이어갔다. “태규 씨, 1-2가 나한테 30분 동안 권한을 준 건 맞지만 우리 마음대로 하라고 한 건 아니잖아. 그 사람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자. 이승하는 구금실로 보내고 1-2가 직접 처벌하게 놔둬.”그 말을 듣고 봉태규는 폭파 버튼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떼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지금 죽이지 않다가 이승하가 나중에 1-2의 신임이라도 얻어서 1-2의 힘을 빌려 우리를 죽이려고 하면 그땐 어떡할 거야?”“잊었어? 우리가 이승하의 가장 큰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걸. 만약 1-2가 이승하를 중용한다면 그땐 이승하의 신분을 폭로할 거야. 처참히 죽게 할 거라고.”살의가 가득한 그녀의 눈을 보고 봉태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봉태규는 이승하와 함께 S 조직에 들어갔지만 강중헌은 이승하를 더 마음에 들어 했다. 직접 이승하를 가르쳤고 어른이 돼서는 리더 자리도 이승하에게 넘겨주었다. 반면, 그는 이승하의 부하가 될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택이와 소지섭 같은 이승하의 심복도 아니었다. 진작부터 이승하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늘 당당하고 남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승하의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하여 이렇게 루드웰의 존재를 알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도 생겼다. 이승하한테 버림받고 시달리는 연지유를 보며 그는 이승하가 더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연지유를 데리고 루드웰에 의탁하게 된 것이다. 연지유는 그보다 더 이승하를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수할 기회를 그녀한테 양보했다. 그녀한테 S 조직 멤버의 리스트를 넘겨주고 그녀가 1-2와 거래하여 루드웰의 조작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기꺼이 뒤로
설산에서 쓰러진 나무들은 이 세상과 저세상을 가로지른 썩은 나무와 같았다. 넘어가려고 하다가 발길을 멈추고 나무 위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뒤따라오던 하준이는 이승하의 모습을 보고 우산을 쓰고 걸음을 옮겼다.우산의 가장자리로 내려앉은 흰 눈, 긴 속눈썹을 살짝 떨던 그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손을 내밀어 옆에 있는 나무를 툭툭 두드렸다.“앉거라.”하준이는 그가 눈 맞을까 봐 우산을 거두지 않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팔꿈치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우산을 이승하의 옆으로 기울였다. 오늘의 아버지는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검은 코트에 흰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그는 옷차림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지만 애써 가꾼 얼굴에는 어느덧 이별이 은은히 배어 있었다. “아버지.” 하준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두 부자간에 할 말은 이미 다 한 것 같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얇은 정장 차림의 이하준을 쳐다보았다. 코트를 벗어 자연스럽게 아이의 몸을 감쌌다. 아이가 다시 코트를 벗어 다시 돌려주려 하자 그가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점점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존재. 하준이는 지금의 마음을 무슨 말로 형용할지 몰랐다. 아버지의 여온이 깃든 옷을 꽉 쥔 채 아이처럼 그의 따뜻한 품을 말없이 느꼈다. 우산 가장자리를 따라 끝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얼마 후, 무거운 이하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아버지, 절 위해 할 수 있는 아직 많아요. 그러니까 절 믿으세요. 제가 반드시 그 칩을 꺼낼 겁니다.”검은 정장 차림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그가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는 우산을 따라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3년을 연구했으니... 네가 이 칩을 꺼낼 수 있을 거라고 난 믿는다.”하준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제가 의학 공부를
이하준의 성인식 당일, 눈이 펑펑 내렸다. 예전에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녀가 깨어나던 날처럼 눈이 펑펑 내렸었다.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깜빡하고 멍하니 창가에 서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룸에서 나온 이승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창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다가갔다. 뼛속 깊이 새겨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햇살 아래, 아름다운 그녀가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그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낙인처럼 그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이번 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고 잊을까 봐 두려운 것이 바로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의 인생은 고작 50년도 채 되지 않았고 하늘은 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자신에게 불공평하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서유를 떠나는 게 가슴이 찢어질 뿐이다. 이 몸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고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미련은 그가 떠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씁쓸한 미소를 짓던 그가 다시 힘겹게 몸을 이끌고 드레스룸으로 향하더니 퍼 코트를 챙겨와 서유의 몸을 감싸주었다. 자신을 감싸안은 손길에 흠칫하던 그녀는 이내 눈을 내리깔고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그 위에 덮었다. “손이 많이 차가워요.”“날씨가 추워지니까 그런 거야.”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까만 눈동자 속에 여전히 잘생긴 그의 얼굴이 비춰지자 그녀는 순간 울컥했다.“당신한테 아직 하지 못한 얘기가 너무 많은데. 조금만... 더 조금만 늦게 떠나면 안 돼요?”그 말에 흠칫하던 그가 천천히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는 그녀의 콧등을 살짝 어루만졌다. “바보.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당신 옆에 꼭 붙어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의 손을 잡은 채 발끝을 세우고 고개를 들어 남자의 차가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승하 씨
그가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연석도 알고 있었다. 그가 오기 전, 이연석은 로봇 앞에 서서 끊임없이 로봇 기능을 체크하고 있었다. 유리창 안, 이연석이 코드를 빠르게 두드리자 그 옆에 있던 로봇이 실제 사람처럼 말을 하였고 그 모습에 이승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연석아...”그의 목소리에 이연석은 행동을 멈추고 옆으로 몸을 돌려 둘째 형을 쳐다보았다.최근 몇 년 동안, 로봇을 개발하기 위해 이승하는 고통을 무릅쓰고 밤낮으로 바삐 돌아쳤다. 둘째 형이 안쓰러웠던 이연석은 그를 돕기로 결심했다. 둘째 형보다 능력은 훨씬 떨어지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결국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게 되었다. “형, 언제쯤 형수한테 보여줄 거예요?”그가 자신을 부축하려는 이연석의 손을 밀치고는 허리를 곧게 펴고 로봇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손을 뻗어 머리 뒤의 스위치를 누르자 로봇이 그와 똑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고 그 모습에 그가 또다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게 있으면 내가 떠난 후에도 서유가 외롭지는 않겠지...”이승하가 연구 개발한 칩은 미리 앞으로의 10년, 20년 동안의 말을 모두 녹음해 둔 칩이었다. 서유가 그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싶다면 계속 살아가야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 건 바보 같은 여자가 자신을 따라 죽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가 계속 살기를 바랐고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죽기 전에 로봇이 완벽하게 제작된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서유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는 안색이 점차 굳어졌다. “내가 떠나면 그때 이 로봇을 서유한테 보여줘. 그리고 하준이를 도와 회사를 꼭 지키거라.”둘째 형의 마지막 당부에 이연석은 눈시울이 붉어졌다.“형, 정말 방법이 없는 거예요?”그동안 유명한 의사를 수없이 많이 찾아다녔고 머리를 바꾸는 수술까지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
어두컴컴한 방안, 이하준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어떻게 그 엄청난 고통을 무릅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지금껏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철이 없었던 그는 아빠를 무시한 적도 많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한 못된 짓을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던 소년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쏟았고 마치 버림받은 아이처럼 온몸이 떨릴 정도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예전에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죽음이 닥쳐오니 자신이 얼마나 부모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밤새 의학 서적을 뒤적거리며 칩을 꺼내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그는 머리 수술에 관한 모든 서책을 다 뒤져보았다. 윤주원과 조지 그리고 알고 있는 유명한 의사들에게 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결론은 모두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칩을 꺼내는 동시에 그 안의 바이러스가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에 이하준은 밤새 넋을 잃은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달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안, 앞길을 밝혀 주는 등불조차 없이 깜깜하기만 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이하준은 다음날 한결같이 다정한 부모님의 모습에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두 분이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던 건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 건가요? 그래서 더 서로를 소중히 여긴 거 아닌가요?”서유도 이하준처럼 마음이 아팠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니 예전보다는 침착할 수 있었다.“시간이 많든 적든 부부는 서로를 아껴야 더 오래갈 수 있는 거야.”식탁에 앉은 이하준은 굳어진 입꼬리를 살짝 올릴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고개를 돌려 겉으로는 죽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맞은편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빠, 저 의학 공부하고 싶습니다.”의학을 배우고 싶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분명 칩을 꺼낼 때 필요한 강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