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머릿속에 있는 칩은 1-2가 나한테 넣으라고 했던 거고 이승하를 초대자로 만든 것도 1-2이야. 1-2는 이승하의 능력을 눈여겨봤기 때문에 몰래 1-1의 권한을 풀어도 이승하를 죽이지 않았던 거야. 1-2한테 이승하는 아직 필요한 사람이라는 뜻이겠지.”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태규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말을 이어갔다. “태규 씨, 1-2가 나한테 30분 동안 권한을 준 건 맞지만 우리 마음대로 하라고 한 건 아니잖아. 그 사람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자. 이승하는 구금실로 보내고 1-2가 직접 처벌하게 놔둬.”그 말을 듣고 봉태규는 폭파 버튼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떼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지금 죽이지 않다가 이승하가 나중에 1-2의 신임이라도 얻어서 1-2의 힘을 빌려 우리를 죽이려고 하면 그땐 어떡할 거야?”“잊었어? 우리가 이승하의 가장 큰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걸. 만약 1-2가 이승하를 중용한다면 그땐 이승하의 신분을 폭로할 거야. 처참히 죽게 할 거라고.”살의가 가득한 그녀의 눈을 보고 봉태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봉태규는 이승하와 함께 S 조직에 들어갔지만 강중헌은 이승하를 더 마음에 들어 했다. 직접 이승하를 가르쳤고 어른이 돼서는 리더 자리도 이승하에게 넘겨주었다. 반면, 그는 이승하의 부하가 될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택이와 소지섭 같은 이승하의 심복도 아니었다. 진작부터 이승하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늘 당당하고 남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승하의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하여 이렇게 루드웰의 존재를 알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도 생겼다. 이승하한테 버림받고 시달리는 연지유를 보며 그는 이승하가 더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연지유를 데리고 루드웰에 의탁하게 된 것이다. 연지유는 그보다 더 이승하를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수할 기회를 그녀한테 양보했다. 그녀한테 S 조직 멤버의 리스트를 넘겨주고 그녀가 1-2와 거래하여 루드웰의 조작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기꺼이 뒤로
한편, 생의 문으로 나온 서유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무인도에 누워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캐리어와 보너스를 받을 주소가 적힌 종이가 놓여있었다. Ace는 상금을 지정된 장소에 두고 게임에 성공한 플레이어들이 직접 찾아가는 방식이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그들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인 것 같다. 그녀는 주소를 잘 챙겨 다시 캐리어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안가로 다가갔다. 배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배는 찾지 못하였고 누군가를 마주치게 되는데 그 사람은 바로 그녀가 가장 만나기 싫었던 연중서였다. 연중서는 딸 때문에 지금은 루드웰에서 일부 검은 옷차림을 한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가 사람들을 데리고 해안가에서 서서 서유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서유, 오랜만이군.”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서유는 바로 도망쳤고 연중서의 손짓에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재빨리 앞으로 다가왔다.빠르게 도망친 서유는 이내 풀숲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키와 비슷한 높이의 풀숲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재빨리 피신할 수 있었다.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고 그녀가 도망친 길을 따라가면서 칼로 풀숲을 헤집었다.다들 서유보다 키가 컸던 터라 그녀가 움직인 흔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저 놀이 삼아 그녀의 뒤를 천천히 쫓았을 뿐. 얼마 후, 인내심이 바닥난 그들은 재빨리 그녀의 위치를 찾아냈고 검은 주머니로 그녀의 머리를 감싼 다음 그녀를 어깨에 메고 바로 배에 올라탔다. 배가 인적이 없는 깊은 바다로 항해할 때, 연중서는 그제야 그녀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주머니를 벗겼다. 시선이 맑아지는 순간, 서유는 갑판 위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친아버지인 그가 다른 딸을 위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연중서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미간 사이가 연지유와 많이 닮은 듯했고 그와도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서유는 싫은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당신 덕분에 언니도 죽었어요.”김영주가 Y국 거리에서 굶어 죽고 김초희가 달동네를 떠돌고 그녀가 고아가 된 건 모두 연중서의 탓이었다. 모질고 잔인한 그로 인해 세 모녀는 헤어지게 되었고 각자 처참한 길을 걷게 되었다. 반면, 연중서의 곁에서 연지유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났다. 연중서는 그녀를 위해 모든 뒷길을 열어주었고 남부러울 것 없이 키웠다. 그녀는 김초희처럼 여기저기 구걸하지도 않았고 서유처럼 비참하게 살지도 않았다. “초희도... 죽었다고?”경악하던 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서유의 손을 덥석 잡았다.“그 바다에서 살아났던 사람들이 왜 죽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서유는 또다시 그의 손을 뿌리쳤다. “걱정하는 척 가식 좀 그만 떨어요. 내 물음에 대답부터 해요. 그 당시 왜 소유진을 도와준 거예요?”그녀는 김영주가 연중서에게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연중서가 왜 김영주를 도왔는지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소유진의 정체가 김영주라는 것을 알고 김영주의 엄청난 유산이 탐나서 계획적으로 접근한 건 아닐까?정말 그런 거라면 김영주는 그가 놓은 덫에 걸려 지옥으로 끌려들어 간 것이다. 김영주의 일생이 너무나 가치 없는 건 아닌 건지? 쌀쌀한 서유의 태도에도 연중서는 화를 내기는커녕 차분하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그때 너희 엄마가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채 Y국 거리를 걸어다니는 걸 보고 불쌍한 마음에 집에 데려와 먹을 것도 주고 살 곳도 마련해주고 살아가라고 격려도 해줬었어.”“그 후,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했고 마침 그때 너희 엄마를 공항에서 마주치게 되었었어. 당시 너희 엄마는 이미 성형을 한 상태라 난 알아보지 못했지. 너희 엄마가 먼저 말하는 바람에 알아보게 된 거야. 내가 예전에 도와줬던 여자라는 것을.”“너희 엄마는 고마웠다면서 우리 회사에 투자했고 동아 그룹은 그제야 다시 살아났어. 많이 고마웠어. 그래서 너희 엄
그 순간, 연중서는 난처해졌다. 그의 이상함을 알아차린 연지유가 즉시 물었다.“아빠, 서유가 아빠한테 뭐라고 했어요? 왜 아빠가 서유 그 여자를 위해 사정하는 거냐고요?”평소에 연중서는 연지유의 부탁이라면 무작정 들어주었다.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 따다 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서유 그 여자를 위해 사정을 하고 있다?“설마 서유가 아빠한테 꼬치라도 쳤어요? 정말 뻔뻔하고 천하기 짝이 없네.”“그럴 리가. 내가 나이가 몇인데 그런 유혹에 넘어가냐? 그리고 난 평생 너희 엄마만 사랑했어.”그 말에 서유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김영주의 재산으로 연지유 두 모녀를 보살폈으면서 지금 그녀의 앞에서 정부와의 사랑을 운운하고 있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다. 그녀가 비웃고 있는 걸 연중서는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때, 전화기 너머로 가슴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서유가 아무리 사정해도 오늘 반드시 서유를 죽여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을 거라고요.”이런 협박은 어렸을 때부터 잘 먹혔다. 연중서는 고개를 돌리고 서유를 쳐다보았다. 딸이니까 죄책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감정이 없는 서유보다는 오랜 시간 애지중지 키워온 연지유가 그한테는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알았어.”그제야 연지유는 울음을 그쳤지만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신신당부했다.“손정태한테 동영상 찍으라고 해요. 매일 그걸 보면 속이 뻥 뚫릴 것 같으니까.”그녀의 요구에 연중서는 뭐든 다 들어주었고 알았다고 한 뒤 전화를 끊고는 핸드폰을 손정태에게 건네주었다.“카메라 켜고 찍어둬.”말을 마친 그가 서유를 향해 다가갔다.“내 딸이 죽는 걸 난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말인데 초아야... 미안하구나.”그 말에 서유는 차갑게 웃었다. 연중서는 그녀에게 반격할 틈조차 주지 않고 바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그의 팔을 덥석 잡고 그와 함께 배에서 떨어졌다. 도망갈 수 없다면
얼마 후, 이승하가 심장을 움켜쥐며 정신을 차렸다.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아픈 가슴을 꼭 감쌌다.무의식적으로 서유 생각이 나서 더 가슴이 아팠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제멋대로 그녀를 쫓아낸 게 잘한 건지 모르겠다. 자꾸만 불안한 느낌이 들었고 뭔가를 잃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엄청난 고통에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을 뻗어 쇄골 위의 이빨 자국을 만지고 나니 비로소 아픔이 조금은 덜한 듯했다. 서유가 그에게 남긴 흔적이었다. 고독한 마음이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가 남긴 흔적과 함께하니 그렇게까지 외롭지는 않았다. 다만 눈앞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옆 방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그는 몸을 곧게 펴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고 뒤죽박죽인 모스 코드에서 [내가 넷째 어르신이다]라는 정보를 알아냈다.그는 바로 손가락을 뻗어 벽에 가볍게 두드렸다. 옆쪽 구금실에 갇혀있던 넷째 어르신은 이승하와 암호를 맞춘 후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손을 들어 계속 암호를 보냈다.[육성재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차가운 눈빛에 음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칩에 의해 통제된 그는 연지유와 봉태규를 죽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린다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손가락을 뻗어 담담하게 벽을 두드렸다. [8라운드의 게임이 끝난 후 육성재는 죽었습니다.]벽에 대고 있던 넷째 어르신의 손이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졌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벽을 두드렸다.[알았네.]이승하는 긴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눈 밑의 감정을 숨긴 채 다시 벽을 두드렸다.[누나인 김윤주의 자식 아닌가요? 복수 하셔야죠?]가면을 쓰지 않은 김종수는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잘생긴 이목구비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가 벽에 기댄 채 무심하게 벽을 두드렸다.[육성재는 내가 무사히 떠나보낼 거라고 했잖아.]그는 위층 구역에 사람을 진작에 심어놓았었다. 만약
이승하에 대해 아직 불확실한 건 많지만 1-2는 이례적으로 이승하에게 플레이어 초대자의 신분을 주었다. 비록 칩으로 그를 제어하고 컨트롤러를 봉태규에 맡겼지만 그는 여전히 이승하를 중시했다. 이 일들이 일어났을 때 김종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플레이어들과 짜고 거액의 베팅을 했다고 연지유가 그를 고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누명을 씌울 수 있었던 건 그가 초대인을 픽업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지유는 그의 권한을 빼앗고 그가 이끄는 사람들을 빼앗기 위해 몇 번이나 그를 고발하였고 1-2는 S 조직의 멤버 리스트를 위해 그한테 참으라고 했다. 그들이 리스트를 다 토해내면 그들을 제거하겠다고 하면서. 연지유와 봉태규도 똑똑하게 매번 한두 사람의 이름만 공개했다. 그러나 그들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리스트는 두 사람의 머릿속에 있었고 멤버가 얼마나 있는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을 잘 대우해야 했고 높은 자리를 줘야 했다. 이승하가 처음 왔을 때, 김종수는 그 고발 때문에 1-2한테 벌칙을 받고 C 구역으로 이동했다. Ace는 사실 이 한 개 구역만 있는 게 아니었다. ABC의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구역마다 또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상, 중, 하 구역으로 구분되었고 이 세 구역의 권한은 모두 잠겨 있는 상태로 모든 층에 감시 카메라가 있어서 누구도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었다.그들의 규칙은 간단했다. 중간 구역의 초대자는 아래 구역의 플레이어들이 사활을 걸고 게임을 하는 걸 관람하였고 위층 구역의 배후자는 중간 구역의 초대자가 공평하게 베팅했는지에만 관심을 두었다. 만약 S 조직의 멤버를 발견하게 되면 바로 화학 구역으로 보내버렸다. 화학 구역은 ABC의 3개 구역을 제외한 다른 곳에 있었고 전문적으로 S 조직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그곳의 책임자는 1-3이었다. 1-1은 모든 구역의 프로그래밍과 칩 연구 개발을 담당하였고 1-2는 게임 플레이 프로그래밍과 게임 구역의 관리를 담당하였다
이승하에게 당한 적이 있었던 그들은 재빨리 앞으로 다가가 이승하의 손과 발을 제압하고 그에게 반격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사실 그가 반격할 생각이었다면 1-2가 들어왔을 때 이미 손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있었다. 1-1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의 임무를 영원히 완수할 수 없을 것이다. 1-2는 그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이승하에 대한 좋은 인상도 조금은 줄어들었다. “당신이 아래 구역의 권한을 풀었으니 Ace의 규칙에 따라 그 벌로 전기 충격을 받아야 마땅하나 아무리 해도 당신을 굴복시킬 수가 없어서 방식을 바꿔보기로 했어.”1-2가 턱을 치켜들자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이승하를 바닥에 쓰러뜨린 후 칼을 꺼내 소독하고는 이승하의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마스크 아래 1-2의 시선을 따라 칼이 이승하의 옷을 살짝 자르고 옆구리 방향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손발이 묶인 이승하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가지런히 다듬어진 손톱이 손바닥 안에 박힐 정도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지만 칼에 베인 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를 약간 기울인 채 벽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서유가 아이를 가졌고 벌써 5개월이 지났으니 5개월 뒤면 그도 아빠가 될 것이다.아이가 그를 더 닮을지 아니면 서유를 더 많이 닮을지. 누구를 닮든 엄청 예쁠 것이다.아이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데 칼을 쥐고 있던 1-2의 손에 힘에 더 들어갔다. 아팠지만 꿋꿋하게 이를 악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떨고 있는 그의 모습에 연지유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를 달래려는데 그녀를 본 순간, 그가 갑자기 싸늘하게 눈을 감았다.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일그러졌다.“쌤통이다.”짧게 욕설을 퍼붓더니 그녀는 고개를 들고 1-2를 바라보았다.“제가 하겠습니다. 어르신의 손을 더럽히지 마세요.”1-2는
서유를 밀던 연중서가 그녀에게 끌려가 배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이승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초췌하게 변했고 눈앞이 흐려졌다. 영상 속, 두 사람이 추락한 바다를 쳐다보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지만 결국 연중서 혼자만 헤엄쳐 올라왔고 이내 바닷물은 잠잠해졌다.영상이 멈추자 갑자기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사방이 조용해지면서 몸에 힘이 풀렸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고 한 가닥의 희망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손을 뻗었지만 벌벌 떨리는 손은 몇 번이나 축 늘어졌고 온 힘을 다해 뻗어보니 마침내 쇄골 위에 새겨진 이빨 자국에 손끝이 닿았다. 연지유가 내 목숨을 가지고 당신을 위협한다면 난 기꺼이 죽어줄 거예요. 당신을 찾아 이곳에 오면서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으니까요. 당신이 살아있다면 당신과 함께 싸울 것이고 당신이 죽었다면 나 또한 죽을 거예요. 약속했잖아요. 죽든 살든 평생 함께하기로. 서유는 그와 함께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아 했다. 그런 그녀를 제멋대로 쫓아내다니. 그게 그녀를 위한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말 그녀를 위한 일인 걸까?그녀에게 좋은 일이었다면 지금 그녀는 왜 바다에 빠진 걸까?예전에도 그녀를 지켜준다고 해놓고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줄이야. 이혼 합의서에 강제로 사인하는 그 모습이 떠올라 그는 절망에 빠졌고 온몸이 싸늘해졌다. 독단적인 그의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그녀를 쫓아내면 그녀와 아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옥의 악귀가 그녀를 이리 계속 따라다닐 줄이야. 그가 조금만 방심하면 그들은 그녀를 갈기갈기 찢고 산 채로 삼키고 시체조차 그에게 남겨주지 않을 것이다.그가 틀렸다. 큰 실수다. 다른 여자와 연기까지 하면서 그녀한테 상처를 주지 말았어야 했다. 상처를 준 것도 모자라 그녀 혼자 쓸쓸히 떠나는 걸 지켜만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를 안고 모든 것을 막아줘야 했다.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