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와 육성재는 첫 번째 게임이 시작된 이후로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은 버티기 힘들었다. 특히 서유는 너무나 피곤했지만 이승하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반면 육성재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수갑에 묶여 있어 어쩔 수 없이 몸을 웅크린 채 버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9호 방의 조작 패널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카드 삽입 구멍이 아니라 두 끼의 식사가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서양식 저녁 식사로, 우유와 음료, 그리고 생수도 함께 나왔으며 모두 플레이어들을 위한 것이었다. 육성재는 서유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음식을 다 먹게 하고는 요구했다. “나랑 화장실 좀 같이 가줘요.” 서유는 마지막으로 우유를 마신 뒤, 빈 잔을 내려놓고 화장실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래요.” 이런 환경에서 더 이상 예의를 따질 여유는 없었다. 생존과 건강이 우선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화장실로 갔고, 서유는 등을 돌려 육성재를 향하지 않고 눈을 감으며 한 손으로 귀를 막았다. 육성재는 분명 급했지만 이상하게도 화장실에 들어가니 도무지 볼일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서유를 돌아보며, 창피함과 불편함 사이에서 차라리 참기로 결심했다. 육성재는 서유를 데리고 화장실에서 나와 침대에 누워 얼굴을 이불로 덮었다. “이러면 안 돼. 앞으로 몇 라운드 더 남았는데 너...” “말 그만하고 빨리 자. 자면 괜찮을 거야.” 육성재는 아예 화장실에 가지 않으려고 물도 마시지 않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급한 건 급한 거였다. 결국, 한밤중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서유를 깨우고는 허둥지둥 그녀와 함께 다시 화장실로 갔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는 삶에 대한 애정이 모두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불 속으로
“플레이어 여러분, 화면에 네 가지 흔한 곤충이 있습니다. 나비, 반딧불이, 나방, 잠자리입니다. 이들은 각각 상자에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상자에는 어떤 곤충이 들어 있을까요?” 그들 앞에는 단 하나의 검은 상자가 있었고 네 가지 곤충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제한 시간은 여전히 5분입니다. 지금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겠습니다. 60, 59, 58...” 육성재는 무의식적으로 칼자국남을 힐끔 쳐다봤다. 그 남자는 숫자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는 구역에 있던 하얀 문이 자동으로 열리더니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당당하게 걷는 남자는 얼굴에 1-2라는 숫자가 새겨진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홉째 어르신은 처음으로 게임의 보스를 보았는데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1-2가 등장한 이후, 게임 구역의 모니터는 칼자국남의 화면에서 멈췄다. “이 사람의 초대자는 누구지?” “접니다.” 넷째 어르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1-2는 검은 방호복을 입고 온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살벌한 기운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차갑고 날카로웠다. “2-7이 당신이 비밀리에 조작했다고 신고했군. 우리랑 함께 가지.” 역시 2-7이다. 이런 일을 처리하기 위해 1-2가 직접 중구까지 내려오게 만들다니. 넷째 어르신은 느긋하게 2-7을 한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두 손을 내밀었다. 1-2 뒤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수갑을 꺼내 넷째 어르신의 손에 걸고는 그를 데리고 나갔다. 문을 나서기 전에 넷째 어르신은 뒤를 돌아 아홉째 어르신을 한번 바라보았다. 둘 다 가면을 쓰고 있어 서로의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끌려 나가는 것은 칼자국남이 노출되었음을 의미했고, 이는 곧 하부 구역의 게임이 끝났음을 뜻했다. 넷째 어르신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아홉째 어르신은 무
육성재는 서유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었다.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바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밑을 보지 말고 먼저 선택해요!” 그의 큰 목소리가 서유의 혼란스러운 생각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게 했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앞에 있는 상자를 응시하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상자는 봉쇄되어 있어 열 수 없었고, 네 종류의 곤충 모두 가벼운 생명체들이라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초조하고 불안했으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한 남자가 시간이 촉박해지자 ‘나비’라고 적힌 버튼을 아무렇게나 눌렀다. 상자가 열리자 나오는 것은 나비가 아닌 나방이었다. 동시에 그의 발밑에 있던 죽음의 문이 순간적으로 열렸다. 다행히도 그 남자는 원형 위치에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칼자국남처럼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게임장에서 벗어나면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게임장의 문을 나서는 순간, 그가 밟고 있던 바닥의 네모난 타일이 갑자기 열렸다.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떨어졌고, 그와 인접한 타일들도 하나하나 열리기 시작했다. 즉, 발밑의 원형 표식뿐 아니라 그들이 밟고 있던 바닥 전체가 죽음의 문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선택을 하지 않으면 모두 떨어져 뱀에게 잡아먹힐 운명이었다. 그 남자가 뱀에게 살점이 하나하나 찢기며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본 서유는 견딜 수 없이 구역질이 났다. 그제야 그녀는 왜 아무도 이 9라운드의 게임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다. 매 라운드가 생사의 고비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5, 4...” “서유 씨!” 육성재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에 크게 울려 퍼졌다. 서유는 마치 모든 걸 내던진 듯, 옆의 남자처럼 ‘나비’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상자가 열리자, 파란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펴며 자유를 찾은 듯 위로 날아올랐다. 육성재는
서유와 육성재는 일곱 번째 게임이 끝난 후, 예전처럼 일주일간의 간격을 두고 다음 게임이 시작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기계음이 바로 울렸다. “플레이어님, 내일 네 번째 층의 노년 공간에서 여덟 번째 게임이 시작됩니다. 미리 준비해 주십시오.” 서유와 육성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혹시 칼자국남의 배후 인물이 드러났기 때문에 게임이 앞당겨진 걸까? 그럴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정해진 규칙대로 일주일 간격으로 게임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변경되었을까? 하지만 칼자국남의 배후 인물은 대체 누구일까? 그가 왜 두 사람을 도와주면서도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은 걸까? 그들은 혼란스러웠지만 이미 게임에 들어와 버린 이상 나갈 수 없었고, 게임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서유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면서도 머릿속에는 칼자국남이 뱀에게 삼켜지던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이곳에 온 이후로 서유는 피비린내 나는 장면을 수없이 많이 봐왔고, 매번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유독 다르게 느껴졌다. 아마도... 택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맞은편 침대에 누워 있던 육성재는 그녀가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 “잠이 안 오면 나랑 얘기라도 할래요?” 서유는 몸을 돌려 손을 볼에 댄 채로 물었다. “택이는... 정말 뱀한테 잡아먹힌 걸까요?” 육성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저었다. “몸놀림이 워낙 빠르니까 아마 잘 빠져나왔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 그렇게 많은 뱀들을 택이가 단 몇 초 만에 전부 물리칠 수 있었을까? 육성재는 서유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내일 또 게임이 있으니까 우선 푹 쉬어요.” 서유는 다시 물었다. “내일은 어떤 게임일까요?” 육성재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서유는 또
서유는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 다음 날 아침 기분이 괜찮았다. 덕분에 게임에 임할 때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이번 여덟 번째 게임은 이전 게임들과는 조금 달랐다. 벽에 새로운 화면이 생겼고 그 위에는 총 54장의 카드가 펼쳐져 있었다. “두 명의 플레이어는 지금 아무 카드나 선택하십시오.” 서유와 육성재는 어떤 게임을 하게 될지 몰라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마도 같은 숫자의 카드를 뒤집는 게임이거나 선택한 카드 수가 많은 쪽이 이기는 게임일 거예요.” 육성재의 분석은 타당해 보였고 서유도 그의 의견을 따랐다. 그들은 각자 앞으로 나가 화면에서 원하는 카드를 클릭했다. 서유는 A 카드를, 육성재는 2 카드를 선택했다. 이 두 카드는 각각 네 장씩 있어 확률이 조금 높아 보였지만, Ace는 항상 예측을 벗어난 선택을 한다. 카드를 고르고 나자 54장의 카드는 모두 뒤집혀 그들에게 뒷면을 보였다. 동시에 카드의 순서가 순식간에 뒤섞여 상하좌우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두 명의 플레이어는 방금 선택한 카드의 숫자와 문양이 정확히 일치하는 카드를 뽑으십시오.” 다행히도 서유는 카드를 고를 때 문양을 정확히 기억해 두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머릿속이 하얘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54장의 카드 중에서 어떻게 5분 내에 정확한 카드를 고를 수 있을까? “어차피 다 운이니까 그냥 직감대로 골라요.” 육성재의 말은 맞았다. 어떻게 골라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육성재의 침착한 태도에 영향을 받은 서유는 긴장감이 조금 가라앉았다. 육성재는 옆에서 기다리며 서유가 먼저 선택하게 했다. 그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만약 그녀가 틀린 카드를 고르면 자신이 대신 책임지기로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에게 아홉 번째 라운드까지 꼭 데려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홉 번째 라운드까지 가야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만약 이승하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그녀를 만나러 올 것이
“성재 씨!!!” 서유는 필사적으로 두 주먹을 꽉 쥐고 미친 듯이 유리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 유리문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녀의 주먹은 벽에 부딪혔다. 아픔이 밀려왔지만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계속해서 벽을 쳤다. 작고 여린 손은 피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그 피가 벽을 붉게 물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벽은 여전히 당당하게 서 있었고,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서유는 온 힘을 다해 벽을 두드렸지만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손은 점차 힘없이 유리문에서 미끄러졌다. 눈물 가득한 절망은 그녀를 아무런 의식 없는 도자기 인형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성재 씨, 난 이 벽을 부술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구해주지 못해서...” 서유는 바닥에 주저앉아 생과 사를 가로막는 하얀 벽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몸속의 모든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손발이 차가워졌다. 육성재... 그 자존심 높고 조울증을 앓고 있었으며 조금은 괴팍했던 남자가, 자신 때문에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 서유의 눈에서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만약 자신만 아니었다면 육성재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그녀의 잘못이었다. 이승하도, 택이도 찾지 못한 그녀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고 결국 그에게까지 피해를 입혔다. 서유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는데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그가 따라오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그를 막아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서유는 피투성이가 된 육성재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순간 심장이 마구 쪼여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서유는 벽에 기댄 채 두 무릎을 감싸 안고 고개를 팔 사이에 묻었다. 육성재의 죽음과 극도의 피로, 그리고 정신적 붕괴는 그녀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사람을 죽게 만든 죄를 짊어진 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 아무도 만날 염치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특
기계음이 울릴 때까지 서유는 자신이 이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만약 육성재가 조금만 더 천천히 갔더라면 아마 황천길에서 그와 마주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유는 굳어버린 입가를 억지로 올리며 육성재가 남겨준 사과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이번에는 모든 방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맞은편의 9호 방, 10호 방, 그리고 수많은 방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문가에 기대어 왜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수다를 떨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 모두 각자가 선택한 공간에서 죽었을 것이다. 첫 번째 라운드에서였을 수도 있고, 다섯 번째 라운드였을 수도 있다. 어느 라운드에서든 결국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서유는 홀로 복도를 걸으며 누군가 나타나, 웃으며 ‘나도 살아남았어’라고 인사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서유는 기계음의 안내에 따라 아홉 번째 라운드의 카지노로 향했다. 이곳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이제는 온통 하얀색이 아닌 황금빛과 화려함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이 방은 마치 Ace의 배후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상징하는 듯했다. 그가 얼마나 부유하면 이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만큼이나 하찮은 존재였다. 그는 이곳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죽는 지를 내려다볼 것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 따위는 없고 오직 장난질만 일삼는 악독한 자였다. 서유는 가슴 가득 분노를 품은 채 조작대 앞에 서서 안내에 따라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그녀는 규칙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듣지 않았다. 두려울 것도 없이 무작위로 선택했다. 어차피 무엇을 선택하든 맹목적인 선택일 뿐이고,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엔 죽음이라는 결말뿐이었다. 그녀는 만약 죽음의 문을 선택하면, 두개골을 열고 있던 검은 옷의 사람에게 이승하가 지금 어두운 곳에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생존의 문을 선택하면, 다른 게임 구역을 계속해서 도전하
이승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서유의 손은 그의 얼굴에서 천천히 옮겨져 그의 옷을 만지기 시작했다.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셔츠 위에 새겨진 금색 글씨. Ace-Inviter-2-9. 이것은 그가 루드웰에 속하게 되었으며, 평범한 검은 옷을 입은 자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음을 의미했다. 그는 루드웰의 배후에 들어갔고, 서유를 이곳으로 초대한 2-7과 같은 등급에 있었다. 그는 그동안 계속해서 루드웰 있었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서유는 눈물이 마치 끊어진 구슬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조금씩 이승하의 옷을 더 꽉 잡으며,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 어디 다친 거예요? 그래서 집에 돌아올 수 없었던 거죠? 나한테 연락할 수도, 날 보러 올 수도 없었던 거죠?” 그녀의 눈물은 한 방울, 또 한 방울 이승하의 가슴에 떨어졌는데 그를 숨조차 쉴 수 없게 아프게 만들었다. 이승하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야, 내가 약속을 어긴 거야. 미안해.” 서유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발끝을 세워 그의 머리를 만지려고 했으나 이승하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잡아 막았다. 이승하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붙잡아 생명의 문 쪽으로 이끌었다. 서유는 그의 뒤를 따르며 그의 뒷머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짙은 머리카락이 그대로 있었는데 두개골을 연 흔적은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서유는 눈물로 가득 찬 눈을 들어 침묵하는 이승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두운 마음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다. 이승하는 마치 시간이 부족한 듯, 그녀를 빠르게 생의 문 안으로 밀어 넣으며 두 글자를 말했다. “떠나.” 그 두 글자는, 서유가 들었던 종이쪽지에 적힌 ‘떠나’와 다를 바 없었다. 아주 차갑고, 감정 없이 그녀의 몸과
설산에서 쓰러진 나무들은 이 세상과 저세상을 가로지른 썩은 나무와 같았다. 넘어가려고 하다가 발길을 멈추고 나무 위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뒤따라오던 하준이는 이승하의 모습을 보고 우산을 쓰고 걸음을 옮겼다.우산의 가장자리로 내려앉은 흰 눈, 긴 속눈썹을 살짝 떨던 그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손을 내밀어 옆에 있는 나무를 툭툭 두드렸다.“앉거라.”하준이는 그가 눈 맞을까 봐 우산을 거두지 않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팔꿈치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우산을 이승하의 옆으로 기울였다. 오늘의 아버지는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검은 코트에 흰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그는 옷차림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지만 애써 가꾼 얼굴에는 어느덧 이별이 은은히 배어 있었다. “아버지.” 하준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두 부자간에 할 말은 이미 다 한 것 같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얇은 정장 차림의 이하준을 쳐다보았다. 코트를 벗어 자연스럽게 아이의 몸을 감쌌다. 아이가 다시 코트를 벗어 다시 돌려주려 하자 그가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점점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존재. 하준이는 지금의 마음을 무슨 말로 형용할지 몰랐다. 아버지의 여온이 깃든 옷을 꽉 쥔 채 아이처럼 그의 따뜻한 품을 말없이 느꼈다. 우산 가장자리를 따라 끝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얼마 후, 무거운 이하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아버지, 절 위해 할 수 있는 아직 많아요. 그러니까 절 믿으세요. 제가 반드시 그 칩을 꺼낼 겁니다.”검은 정장 차림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그가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는 우산을 따라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3년을 연구했으니... 네가 이 칩을 꺼낼 수 있을 거라고 난 믿는다.”하준이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제가 의학 공부를
이하준의 성인식 당일, 눈이 펑펑 내렸다. 예전에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녀가 깨어나던 날처럼 눈이 펑펑 내렸었다.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깜빡하고 멍하니 창가에 서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드레스룸에서 나온 이승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창가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다가갔다. 뼛속 깊이 새겨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햇살 아래, 아름다운 그녀가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그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낙인처럼 그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이번 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고 잊을까 봐 두려운 것이 바로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의 인생은 고작 50년도 채 되지 않았고 하늘은 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자신에게 불공평하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서유를 떠나는 게 가슴이 찢어질 뿐이다. 이 몸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고 그녀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미련은 그가 떠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씁쓸한 미소를 짓던 그가 다시 힘겹게 몸을 이끌고 드레스룸으로 향하더니 퍼 코트를 챙겨와 서유의 몸을 감싸주었다. 자신을 감싸안은 손길에 흠칫하던 그녀는 이내 눈을 내리깔고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그 위에 덮었다. “손이 많이 차가워요.”“날씨가 추워지니까 그런 거야.”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을 안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까만 눈동자 속에 여전히 잘생긴 그의 얼굴이 비춰지자 그녀는 순간 울컥했다.“당신한테 아직 하지 못한 얘기가 너무 많은데. 조금만... 더 조금만 늦게 떠나면 안 돼요?”그 말에 흠칫하던 그가 천천히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는 그녀의 콧등을 살짝 어루만졌다. “바보. 내가 가긴 어딜 가겠어? 당신 옆에 꼭 붙어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그의 손을 잡은 채 발끝을 세우고 고개를 들어 남자의 차가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승하 씨
그가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연석도 알고 있었다. 그가 오기 전, 이연석은 로봇 앞에 서서 끊임없이 로봇 기능을 체크하고 있었다. 유리창 안, 이연석이 코드를 빠르게 두드리자 그 옆에 있던 로봇이 실제 사람처럼 말을 하였고 그 모습에 이승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연석아...”그의 목소리에 이연석은 행동을 멈추고 옆으로 몸을 돌려 둘째 형을 쳐다보았다.최근 몇 년 동안, 로봇을 개발하기 위해 이승하는 고통을 무릅쓰고 밤낮으로 바삐 돌아쳤다. 둘째 형이 안쓰러웠던 이연석은 그를 돕기로 결심했다. 둘째 형보다 능력은 훨씬 떨어지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결국 마지막 단계를 완성하게 되었다. “형, 언제쯤 형수한테 보여줄 거예요?”그가 자신을 부축하려는 이연석의 손을 밀치고는 허리를 곧게 펴고 로봇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손을 뻗어 머리 뒤의 스위치를 누르자 로봇이 그와 똑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고 그 모습에 그가 또다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게 있으면 내가 떠난 후에도 서유가 외롭지는 않겠지...”이승하가 연구 개발한 칩은 미리 앞으로의 10년, 20년 동안의 말을 모두 녹음해 둔 칩이었다. 서유가 그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싶다면 계속 살아가야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 건 바보 같은 여자가 자신을 따라 죽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가 계속 살기를 바랐고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죽기 전에 로봇이 완벽하게 제작된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다. 서유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는 안색이 점차 굳어졌다. “내가 떠나면 그때 이 로봇을 서유한테 보여줘. 그리고 하준이를 도와 회사를 꼭 지키거라.”둘째 형의 마지막 당부에 이연석은 눈시울이 붉어졌다.“형, 정말 방법이 없는 거예요?”그동안 유명한 의사를 수없이 많이 찾아다녔고 머리를 바꾸는 수술까지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
어두컴컴한 방안, 이하준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어떻게 그 엄청난 고통을 무릅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지금껏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인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철이 없었던 그는 아빠를 무시한 적도 많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한 못된 짓을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던 소년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쏟았고 마치 버림받은 아이처럼 온몸이 떨릴 정도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예전에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죽음이 닥쳐오니 자신이 얼마나 부모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밤새 의학 서적을 뒤적거리며 칩을 꺼내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그는 머리 수술에 관한 모든 서책을 다 뒤져보았다. 윤주원과 조지 그리고 알고 있는 유명한 의사들에게 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결론은 모두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칩을 꺼내는 동시에 그 안의 바이러스가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에 이하준은 밤새 넋을 잃은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달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안, 앞길을 밝혀 주는 등불조차 없이 깜깜하기만 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이하준은 다음날 한결같이 다정한 부모님의 모습에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두 분이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던 건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인 건가요? 그래서 더 서로를 소중히 여긴 거 아닌가요?”서유도 이하준처럼 마음이 아팠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니 예전보다는 침착할 수 있었다.“시간이 많든 적든 부부는 서로를 아껴야 더 오래갈 수 있는 거야.”식탁에 앉은 이하준은 굳어진 입꼬리를 살짝 올릴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고개를 돌려 겉으로는 죽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맞은편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빠, 저 의학 공부하고 싶습니다.”의학을 배우고 싶었다. 그의 능력이라면 분명 칩을 꺼낼 때 필요한 강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