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참 어리석어 보였다.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그의 외투 주머니를 살펴보며 그를 도와 열쇠를 찾았다.안팎을 샅샅이 뒤졌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열쇠를 안 가지고 온 건 아니죠?””그럴 리가요.”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외투 주머니와 바지 주머니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Ace의 사람들이 열쇠를 가져간 게 틀림없어요.”화가 난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빌어먹을 놈들. 내 눈에 띄기만 해봐. 모조리 다 죽여버릴 거야.”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 캐리어까지 가져왔는데 설마 열쇠를 가져갔겠어요?”“뭐라고요?”그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서유는 그를 향해 턱을 치켜올렸다.“저쪽이요.”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마침 구석에 놓인 캐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캐리어도 들고 오게 해놓고는 내 열쇠만 가져간 거예요? 일부러 나한테 이러는 건가?”열쇠를 제외하고도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모조리 빼앗아 갔다. 핸드폰, 작은 칼, 독극물, 추적기 등 방어용으로 쓰이는 물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전자기기 같은 건 당연히 빼앗아 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수갑의 열쇠를 가져갔으니 계속 이리 육성재와 묶여 있어야 한단 말인가?그도 그걸 의식한 것인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고 마침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은 벽에 기댄 채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캐리어 안에 칼 있어요?”루드웰에 들어오기 전에, 육성재 때문에 꽤 많은 현금을 썼고 루드웰에 들어온 후에는 그가 열쇠를 잃어버려 지금 함께 묶여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그녀는 그가 원망스러워 대꾸하기 싫었지만 예의상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없어요.”“그럼 다른 도구는요?”그녀는 짜증 섞인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아무것도 없으니까 더
콘솔 입구에는 톱니바퀴가 있었고 황금잎 가장자리의 톱니바퀴와 일치해야만 황금잎을 넣을 수 있었다.두 사람은 그제야 황금잎마다 가장자리의 모양이 다른 것이 입구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육성재는 콘솔을 만지며 이리저리 훑어보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서유는 황금잎을 꺼내 지시에 따라 콘솔 입구에 황금잎을 넣었다. 넣는 순간 기어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곧이어 다시 기계음이 들려왔다.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초대자 번호2팀의 7번, 플레이어의 새 코드명은 십자입니다.”기계음이 끝나고 콘솔은 다시 황금잎을 뱉어냈다. 확인해 보니 황금잎의 앞면에 십자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숫자 2-7이 새겨져 있었다. 그 말인즉 그녀를 루드웰에 초대하는 사람은 루드웰의 번호가 2-7이고 상대방의 번호에 따라 플레이어에게 새로운 코드명을 부여하고 그녀가 2팀 7번 아래에 속한 플레이어임을 뜻하였다. 배후에서 왜 번호를 매기는지 서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드웰의 배후가 한 사람이 아니라 한 무리의 사람들인 걸까? 그래서 번호를 매겨 원하는 플레이어를 초대하는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그녀가 의심하고 있을 때 육성재도 황금잎을 넣었고 곧 콘솔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초대자 번호 1팀 4번, 플레이어의 새 코드명은 바보입니다.”아무 말이 없던 육성재는 튕겨 나온 황금잎을 꺼내 확인해 보았고 ‘바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고 서유가 들고 있는 황금잎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왜 서유 씨 코드명은 십자고 내 코드명은 바보입니까?”“아마도 당신을 초대한 자가 당신이 좀... 그래서...”그가 자존심이 상할까 봐 그녀는 대놓고 뭐라 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젠장.” 화가 난 그는 황금잎을 집어 던지고 고개를 든 채 미친 듯이 카메라를 찾았다.“1팀 4번의 초청자, 당장 나와. 내 손에 죽고 싶어?”대형 스크린
10분 동안 침묵이 흘렀고 잠시 후 콘솔 옆의 벽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Ace의 외부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다.“게임을 포기한 플레이어들은 방을 나가주세요.” 서유와 육성재는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동시에 발걸음을 옮겼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방문을 나서려는 순간, 두 개의 붉은 선이 각각 그들의 이마를 겨냥하였다.“게임을 계속하기로 선택한 플레이어들은 방으로 돌아가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바로 사살할 겁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육성재를 끌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이내 이마의 붉은 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붉은 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저 멀리에 있는 눈부신 벽이 눈에 들어왔다. CCTV가 어디에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이미 전방위적으로 감시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이제부터 말조심해야겠어요.”서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적외선 안쪽에 자리를 잡고 방 바깥의 환경을 살폈다. 문 밖은 복도였고 복도 양쪽에는 방들이 가지런히 늘어섰고 방마다 똑같은 인테리어에 문에는 방 번호가 새겨져 있었다.두 사람이 있는 방 번호는 9번이었고 그 맞은편에 있는 방도 9번이었다. 맞은편의 방문도 열린 상태였고 안에 있던 남자가 의아해하며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왜 두 사람이에요?”“함께 왔어요.” 서유는 짧게 대답하였고 육성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남자를 힐끗 쳐다보다가 바로 건너편 10번 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안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중년 남자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그 남자를 처음 본 순간 육성재는 느낌이 안 좋았다.그 남자가 너무 무섭게 생겨서일까? 얼굴에 흉터가 여러 개 있었고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쳐다보니 말할 수 없이 흉악한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서유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자로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무슨 목적으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눈빛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모두 아무 말도 없이 2-9의 위치를 바라보았다.“아홉...”“9번 방은 넷째 어르신의 사람들이 맡고 있는데요.”1팀의 누군가가 2팀의 아홉째 어르신이 사라졌다고 말하려는 그때 한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 여자는 분명 2-9를 감싸기 위해서 일부러 넷째 어르신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었다. 넷째 어르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1팀의 주요 인물이 입을 열지 않으니 나머지 팀원들도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넷째 어르신. 사람들을 데리고 지금 당장 구금실로 가서 조사를 받으세요.”기계음이 사라지자 넷째 어르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오다가 2-7 자리를 지나치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엄청난 카리스마에 위압감이 넘쳤지만 2-7자리에 있는 여자는 두 손을 가슴에 두른 채 앞을 쳐다보며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두고 보지.” 넷째 어르신은 차갑게 그 말을 남기고 계단을 내려와 프로그램실 쪽으로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다가 마침 아홉째 어르신과 마주쳤다. 스치듯 지나가던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한발 늦었네.”Ace 콘솔의 프로그램은 파헤치기가 매우 어려웠다. 아홉째 어르신이 한발 늦긴 했어도 그는 꽤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짧은 시간이었고 그의 사람들이 누명을 쓰게 되었지만 최소한 플레이어 방의 CCTV 화면을 껐으니까. 아홉째 어르신은 넷째 어르신을 무시한 채 곧장 관람 구역으로 돌아갔다. 뒤돌아선 넷째 어르신이 아홉째 어르신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가면 아래의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그는 잠시 서 있다가 프로그램실로 향했고 지문과 홍채 인식을 마치고 프로그램실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9번 방을 맡고 있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한테 지금 당장 구금실로 가라고 명하고는 이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아까 그 모퉁이, 아홉째 어르신이 그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넷째 어르신은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다가갔다.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에 육성재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과했다.“미안해요.”한 소리 하려고 했지만 그의 눈을 쳐다보는 순간 문득 이승하 생각이 났다.이승하는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늘 이렇게 굽신거리며 그녀에게 사과했었다. 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계속해서 콘솔을 쳐다보았다.“플레이어들은 지금 바로 선택 구역으로 이동해주세요.”기계음은 사라지고 문이 다시 열렸다. 다만 이번에는 아까의 모습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하얀빛이 4층 계단 위쪽에서 내리비쳤고 마치 천국의 길목에 닿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플레이어 여러분, 1분 안에 선택 구역으로 오세요.”“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자들은 사살할 것입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자들은 사살할 것입니다.”“지금 바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겠습니다. 60, 59, 58...”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서유와 육성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총 4개의 코너를 돌게 되는데 이는 소년, 청년, 중년의 공간을 넘어 노년 공간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만 이것들은 모두 서유의 추측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계단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모두 폐쇄되어 있었고 두꺼운 흰색 벽이 모든 시야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4층 공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화려한 옷차림의 칼자국남이었는데 두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두 사람은 왜 수갑을 차고 있어요?”그 말이 나오자마자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녀와 육성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설마 납치돼서 온 건 아니죠?”“이 게임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거 아니었어요?”도도한 육성재는 그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한편, 서유는 담담하게 그 옆에 서 있었다. 몇몇 남자들은 서유의 얼굴과 몸매를 보고 눈빛을 반짝였다.“이봐요, 아가씨. 설마
플레이어들이 각자 위치를 선택한 후, 기계음이 다시 울렸다. “플레이어 여러분, 초대장을 콘솔에 꽂고 신분을 확인해 주세요.”테이블 위에 콘솔이 두 개 나타났고 그것을 쳐다보고 있던 육성재는 황금잎을 넣고 싶지 않았다. “5초 안에 황금잎을 꽂아주세요. 완성하지 못한 자는 사살될 겁니다.”이런 젠장.혼자 중얼거리던 그가 황금잎을 꺼내 콘솔에 꽂았다.“플레이어 바보, 확인 완료.”“푸읍...”옆에 있던 칼자국남은 그의 코드명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초대자에게 얼마나 미움을 샀으면 바보라는 코드를 붙여줍니까? 잘 어울리네요.”배 아플 정도로 크게 웃는 칼자국남을 그가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빤히 노려보았다.“입 닥쳐요.”칼자국남의 웃음 포인트를 정확히 찌른 것인지 그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였다. “당신의 초대자도 1-4이고, 내 초대자도 1-4입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지어준 코드명은 칼자국이에요. 얼마나 멋진 이름입니까? 바보는 정말 너무한 것 같아요.”화가 난 육성재는 주먹을 휘두르며 그를 향해 돌진했고 칼자국남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그만해요. 웃지 않을게요.”칼자국남은 두 손을 들고 투항했고 육성재는 그제야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콘솔을 향해 돌아섰다.1팀4번, 내 눈에 띄기만 해봐. 아주 갈기갈기 찢어 죽일 테니까. 서유는 조심스럽게 육성재를 쳐다보았다. 육성재가 코드명 때문에 화나 죽는 걸 걱정한 건 아니었다. Ace에서 룰을 발표하자마자 바로 게임을 시작할 줄은 몰랐다.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육성재가 참을 수 있을지 그게 걱정되었다.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육성재는 화장실 가는 일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고 1팀 4번을 빨리 잡아내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네 번째 공간의 기계음이 또 한 번 울렸다. “플레이어 여러분, 1라운드를 시작하기 전에 게임의 승패에 관한 보너스와 벌칙을 발표하겠습니다.”“1라운드 게임 보너스입니다. 첫
위의 자유로운 구경꾼들과 달리 아래 지옥의 게임존에 서 있는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한쪽 팔을 지키기 위해 1부터 4까지의 숫자 버튼을 끊임없이 쳐다보고 있었다.카운트다운 소리가 마치 죽음을 재촉하는 것 같아 온몸에 식은땀이 났지만 감히 첫걸음을 내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다들 다른 게임존의 플레이어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첫 번째 선택을 한 플레이어가 정말 영상에서처럼 로봇 청이에게 팔을 단번에 베이는 것인지 아닌지를 보고 싶었다.다들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아까 서유에게 무례를 범한 남자가 성질이 급한 편인지 잠시 지켜보더니 바로 3번 숫자 버튼을 눌렀다. 바로 그 순간, 네 개의 검은색 네모난 상자가 동시에 열렸고 아쉽게도 2부터 4번 상자에는 사과가 없었고 빨간 사과는 1번 상자 안에 있었었다. “젠장.” 이내 맞은편 빨간 대문에 죽음의 문이라는 글자가 훤히 나타났다.이와 동시에 로봇 청이의 팔이 안에서 튕겨나와 그를 향해 빠르게 뻗어갔다. 그 남자는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쳤지만 반응이 더디고 로봇의 속도를 뛰어넘을 수 없었기 때문에 몇 걸음 뛰기도 전에 로봇의 팔에 잡히게 되었다.로봇 청이는 손에 들고 있던 쇠칼을 사용하여 남자의 팔을 단번에 잘랐다. 큰 칼을 휘두르니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절단 부분이 매끄럽고 깔끔한 것이 살집이 튕기지 않았다. 로봇 청이가 팔을 자르는 순간, 노년 공간 전체에서 돼지를 잡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엄청난 고통 소리에 다들 당황하고 놀란 모습이었다. 그 남자가 있는 곳은 3번 게임존이라 바로 서유 그들의 맞은편이었다. 바닥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왼손을 뻗어 잘라나간 손을 챙기려고 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고 서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록 그 남자가 얄밉긴 하지만 이런 식의 벌칙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무서운 건 그들도 선택을 마친 후 이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데 육성재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걱정하지 말아요.” 그
로봇의 팔이 육성재를 잡으려는 순간, 칼자국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불구불 돌아요.”그 순간, 육성재는 칼자국남의 말대로 서유를 잡아당기고 재빨리 뱀처럼 구불구불 돌면서 게임존 밖으로 뛰쳐나갔다. 로봇의 팔은 직선으로 뻗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전도 할 수 있었다. 육성재가 이리저리 움직이자 로봇의 팔도 무한대로 늘어나고 끊임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로봇 청이의 프로그램은 한쪽 팔을 칼로 자르고 나서야 돌아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때문에 팔을 칼로 자를 때까지 계속 육성재를 쫓아다닐 것이다.재수가 없는 건 서유였다. 두 사람 사이에 수갑이 채워져 있어서 그녀는 육성재와 생사를 함께 해야 했다. 육성재는 도망 다닐 힘이라도 있지만 그녀는 몇 걸음 도망치니 벌써 힘이 빠졌다. 로봇의 쇠칼을 이용해 두 사람 사이의 수갑을 자를 생각을 해보았지만 로봇의 쇠칼은 너무 컸고 수갑의 위치가 가까이 있어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팔이 잘려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라 섣불리 시도해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로봇 청이의 프로그램은 인체에 닿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 생각은 바로 접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육성재를 따라다니며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점점 기력을 잃어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칼자국남은 재빨리 맞은편 3번 게임존으로 달려가 아까 팔이 잘린 남자의 품에서 팔을 낚아채 두 사람의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로봇이 육성재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 칼자국남은 급히 잘린 손을 로봇 청이의 손에 넣었다. 사람의 팔이 닿자 로봇 청이는 찰칵 소리를 내며 이미 잘린 팔을 한 번 더 잘랐고 피비린내를 맛본 로봇은 재빨리 팔을 걷었다. 순식간에 위험에서 빠져나온 육성재를 보고 서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팔이 잘려 나간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욕설을 퍼부었다. “감히 내 팔을 빼앗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한편, 아직 선택하지 않은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 광경을 보고 잇달아 따라 하기 시작했고 죽음의 문을 선택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