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이승하의 생각을 잘 몰랐다. 그저 이승하는 걱정하면서 얘기했다.“전에 임무 하러 갈 때는 그저 하루, 이틀이었는데 이번에는 왜 한 달이나 걸려요? 위험한 거죠? 맞죠?”이승하는 조용히 서유를 쓰다듬어주면서 얘기했다.“조금 위험할 수도 있어. 하지만 날 믿어. 아무 일도 없을 거야.”서유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그럼 날 데리고 가요.”이승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얘기했다.“서유야, 내 주변 동료들은 다 남자라 널 데리고 가기 어려워.”서유는 이승하가 본인을 데리고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라도 말해보고 싶었을 뿐이다.진짜 서유를 데려간다고 해도 서유는 그에게 짐만 될 것이다.서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승하의 옷깃만 잡은 채 얼굴을 그의 가슴에 붙였다.“난 왜 이렇게 쓸모없을까요.”이승하를 도와주지도 못하고 집에서 가만히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본인이 너무 쓸데없는 사람 같았다.이승하는 미소 지으면서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말했다.“네가 있어서 내 삶이 의미가 있는 거야.”서유가 없다면 그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이승하의 목숨을 쥐고 있는 것과도 같은데, 서유가 쓸데없는 사람이라.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사람도 이승하고, 지금 위로를 건네는 사람도 이승하다. 서유는 자기를 영원히 사랑해 주는 이승하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여보,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찾으러 갈 거예요.”두 사람은 죽든지 살든지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이승하가 반대했다.“만약 한 달 뒤에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꼭 내 상황을 전할게. 절대 날 찾아오지 마.”그러니까 한 달은 그저 그가 정한 시간이었다. 이승하는 한 달 안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서유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만약 한 달 뒤에 안 돌아오면 난 다른 남자한테 갈 거예요.”이승하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슬펐다.“서유야, 나더러 빨리 오라는 거지. 알겠어. 꼭 돌아올게. 하지만 어떤
서유는 이승하의 위로 속에서 울다가 쓰러졌다. 꿈속에서는 이승하가 피를 덮어쓰고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서유가 어떻게 붙잡으려고 애를 써도 그의 옷깃조차 잡지 못했다. 악몽 속에서 깨어나 눈을 뜬 순간, 이승하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떠난 건가? 이렇게 떠난 건가? 아직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고 포옹도 못 했는데 이렇게 간 건가?“승하 씨!”10일 후에 간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사라졌다고?서유는 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발이 바닥에 닿기 전에 한 남자가 밖에서 들어와 서유 앞으로 다가오더니 얼른 그녀를 막아 나서서 다시 침대로 눕혔다.“바닥이 차.”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직접 보고 나서야 서유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승하 손에 들린 꿀물을 보았을 때는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서유는 그제야 자기 바지를 확인해 보았다. 바지와 속옷 다 갈아입혀져 있었다.서유는 본인이 생리가 온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얼굴이 새빨개졌다.“승하 씨가 갈아입혀 준 거예요?”이승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잘 자고 있길래 깨울 수가 없었어.”서유는 부끄러워했다. 그러면서도 결벽증인 이승하가 이런 일을 직접 해준 것에 놀랐다.“앞으로는 이러지 마요. 날 깨우면 되죠.”서유는 이승하의 고귀한 손이 고작 생리대를 바꾸는 일을 할 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승하는 그저 웃으면서 대답했다.“넌 내 아내인데,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건 당연한 거지.”그는 개의치 않아 하면서 꿀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서유의 입가에 가져가 주었다.“이거 다 마시면 내려가자.”서유가 생리할 때마다, 이승하는 주태현을 시켜 많은 보건품을 준비하도록 한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계속 서유의 곁에서 서유가 다 먹는지 확인한다. 서유는 그 덕분에 잘 먹고 잘 쉬어서 얼굴이 포동포동해진다. 피부도 투명하게 빛나는 게 마치 금방 입학한 대학생 같았다. 하지만 이승하는 위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자꾸만 살이 빠졌다. 그럴 때마다 서유는 어떻게든 요리를 직
밤새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그렇게 이튿날 아침이 되자 그제야 먹구름이 조금씩 걷혔다.이승하는 시선을 내려 품속의 여자를 쳐다보다가 한참 있다가 그녀를 풀어주었다.그는 서유가 잠든 줄 알고 침대에서 내려와 옷을 챙기고 걸어 나갔다.침대에 누워있는 서유는 눈을 뜨고 이승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그리고 이승하가 주태현에게 서유를 잘 보살피라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 소지섭에게도 똑같은 말을 해주었다.또 연이에게 과자를 몰래 먹지 말라고, 이모 말을 잘 들으라고 당부하는 것도 들었다.이승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인지, 10일 전에 이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는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누워있던 서유는 겨우 몸을 일으켜 욕실로 가서 씻고 나온 후 화장대 앞에 앉아 간단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캐리어를 꺼내 이승하의 탈의실로 왔다.이승하는 이연석과 통화를 한 후 돌아와 탈의실에 은백색 캐리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여자는 그를 등진 채 개어놓은 옷을 하나하나 캐리어에 넣고 있었다.그 작은 뒷모습을 보면서 이승하의 심장이 아려왔다. 발이 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서유는 정장과 셔츠를 다 정리해서 넣었다. 바지를 정리하려고 할 때 거울 너머로 이승하를 발견했다.바지를 잡은 손이 그대로 굳었다. 서유는 슬픈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고 몸 돌려 이승하를 보면서 웃으면서 얘기했다.“여보, 당신을 도와서 짐을 싸고 있었어요. 챙겨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얘기해요. 내가 챙길게요.”이승하는 시선을 내려 빽빽한 속눈썹 아래로 붉어진 두 눈을 보고 그녀의 앞으로 와 서유를 품에 안았다.“없어. 괜찮아.”그 포옹 속에서 미련을 느낀 서유는 눈물을 꾹 참으면서 그를 밀어냈다.“그럼 먼저 일 봐요. 난 이거 다 정리하고 갈게요.”이승하는 이런 일은 고용인들을 시키면 된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유는 마지막으로 그를 위해 뭐라도 하기 위해 이러는 것이다.그래서 막지도 못
이연석은 미간을 찌푸리고 이승하와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 이승하는 테이블 앞에 앉은 후 서랍을 열고 봉투 두 개를 꺼내 이연석에게 주었다.“내가 한 달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이 편지를 서유한테 건네줘.”편지봉투는 핑크색이었다. 그 안에는 이승하가 직접 쓴 편지가 있었다. 내용은 모르지만 이연석은 일단 그 봉투를 받고 의아한 시선으로 이승하를 쳐다보았다.“형, 도대체 어디 가는 거예요?”이승하는 머뭇거리면서 손에 흰색 편지봉투를 꽉 쥐었다.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이연석이 다시 한번 물으려고 했다. 이승하는 결심을 한 듯 그 봉투를 주면서 말했다.“만약 내가 3개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이 편지를 송사월한테 줘.”송사월과 서유가 무슨 사이인지, 이연석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하가 송사월을 언급하고 또 송사월에게 편지를 쓴다고? 이건 분명히 유서 같은 것이다!“형, 도대체 어디를 가기에 이러는 거예요!”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일을 시키다니. 이연석이 어떻게 마음 놓고 있겠는가.이승하는 조급해하는 이연석을 힐끔 보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가업을 물려받으려고 그래?”“그거랑은 상관없잖아요. 지금 알려주지 않으면 편지는 그대로 버릴 거예요!”이연석은 그렇게 말하고 편지봉투를 내려놓은 채 팔짱을 끼고 고개를 쓱 돌렸다.이연석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졌지만 아직도 유치했다. 이승하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가끔 네가 부러울 때가 있어.”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서 걱정 없이 자랐다. 언제 어디서나 기분이 나쁘면 떼를 써도 되고 그 누구도 이연석에게 진중함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이승하는 어릴 때부터 달랐다. 그는 진중해야 했고 신중해야 했으며 매 선택의 순간에 이익을 따지고 있어야 했다.이연석은 처음으로 이승하의 말투에서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이연석이 아는 이승하는 항상 올곧고 꺾이지 않는 사람이다.하지만 지금 보는 이승하는 달랐다.어쩌면 이승
계단에서 걸어 내려온 이승하는 서유가 주방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다가가 냄비를 대신 들어주면서 말했다.“여보, 앞으로 이런 일은 고용인들을 시켜. 그러다가 손 데겠어.”부드러운 말투가 서유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미련이 고여 넘쳐흘렀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네...”이승하는 냄비를 내려놓고 강도윤과 강세은을 바라보았다. 약간 미간을 좁힌 그가 몸을 돌려 서유의 손을 잡고 얘기했다.“서유야, 나 이제 가야 해. 집에서 조심하고 잘 있어...”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결국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하지만 이승하에게 그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얼른 손을 들고 테이블 위를 가리키면서 이승하의 시선을 끌었다.“여보, 내가 저녁을 준비했는데, 먹고 가면 안 돼?”문 앞에 서 있던 강도윤은 그 말을 듣고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더니 얘기했다.“이 대표님, 반 시간 뒤에 배가 출발할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이승하는 강도윤을 무시하고 서유를 데리고 의자에 앉았다.그 모습을 본 강도윤은 강세은을 보더니 다시 서유를 쳐다보았다.이번만큼은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이승하에게 그녀가 만든 저녁을 주고 싶었다.하지만 서유는 결국 그렇게 할 수 없었다.이승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서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보, 사람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요.”숟가락을 들고 있던 이승하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이윽고 국물을 떠서 서유의 입가로 가져갔다.이승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 마시라고 눈치를 주었다. 서유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가요.”숟가락을 든 이승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이승하는 서유를 쳐다보다가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떠나는 이승하는 아주 칼 같았다. 한 번도 서유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냉혈한처럼 말이다.그런 이승하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서유는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이렇게 이별인 줄 알았는데, 문밖으로 나가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이윽고
이승하 뒤에 있던 강도윤은 몇 걸음 뗀 후 갑자기 멈춰서서 차에 있는 강세은을 바라보았다.“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시집이나 가.”강세은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떠나가는 강도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강도윤을 향한 짝사랑은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다.하지만 강도윤에게 있어서 감정은 사치다. 그는 아마 강세은의 사랑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아까 그 말은 마치 강세은의 짝사랑을 알고 있었다는 것만 같았다.차갑기만 했던 강세은의 눈에 눈물이 돌았다. 점점 눈물이 차올랐고 어느새 붉게 번졌다.‘오빠가 돌아오지 않으면 영원히 다른 남자한테 가지 않을 거야.’이승하가 떠난 후, 서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서재 소파에 앉아서 몸을 웅크리고 창밖을 보면서 멍때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심이준이 몇 번이나 와서 설계도를 그리라고 재촉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멍한 모습을 보면 어쩔 수가 없었다. 그저 연이를 데리고 와서 서유를 기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서유는 가끔가다 그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가장 힘든 것은 저녁이었다. 서유는 이승하를 안고 자는 것에 습관 되어있었는데 이승하가 없으니 불도 끄지 못했다. 새벽에 깨어나 갑자기 옆자리가 텅 비었다는 걸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임무를 수행하러 간 이승하는 핸드폰이 없었다. 서유와 연락할 수도 없고 영상통화를 할 수도 없었다. 서유는 그저 멍하니 집에 앉아서 설계도를 그리면서 이승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JS그룹 쪽에서 이연석은 이미 이승하의 지시대로 얘기해 두었다. 사람들은 이승하가 새로운 사업을 확장하러 한 달 동안 북미로 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이연석이 이승하의 자리를 대체한다.그는 그룹 내부를 진정시켰지만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이승하가 갔다는 것을 듣고 주식 배분의 일을 걸고 이연석을 귀찮게 했다.이연석은 매일 친척들한테 둘러싸였다. 출근하러 갈 때도, 회의하러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형들이 얘기해줘서 겨우 참을 수 있
30일, 마지막 날 밤, 서유는 별장 밖에 서서 손목시계의 시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계의 바늘이 12시를 가리킬 때까지 블루리도의 도로에 이승하가 타고 떠났던 검은 차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녀의 마음은 갑자기 가라앉았고 발걸음은 어둠의 끝으로 향했다. 그녀는 산 아래에서 차가 올라오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소지섭이 길을 막아섰다. “사모님, 위험합니다.”이승하는 소지섭에게 언제 어디서든 서유 곁을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이 기간 동안 별장 안에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그 외에는 항상 서유와 바짝 붙어 다녔다.“정해진 시간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위험을 신경 쓰겠어?”서유는 소지섭의 손을 밀치고는 상관하지 않고 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계속 달리면 이승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산길과 도로가 만나는 끝까지 미친 듯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승하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고 텅 빈 눈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연락할 방법도 없었고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도 못했으며 이승하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랐다. 항상 그녀의 뒤를 따르던 소지섭도 초조하게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불안해했다. 두 사람이 도로 끝에 서 있을 때 하늘에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름이 지나고 비가 잦아지는 가을이 왔다. 비는 크지 않았지만 가늘게 내리는 비가 그녀의 길게 풀어헤친 머리 위로 차갑게 내리며 마치 한 겹의 차가운 안개를 덮는 듯했다. 소지섭은 점점 더 굵어지는 빗줄기와 얇은 옷을 입고 있는 서유를 보며 그녀에게 돌아가자고 권유하고 싶었지만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망설이다가 재빨리 외투를 벗어 서유에게 내밀었다. “사모님, 비가 많이 옵니다. 제 옷으로 비를 가리시죠.”서유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버려진 인형처럼 생기가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소지섭은 그녀의 반응이 없자 몇 초 망설인 후에 외투를 펼쳤다.
짧은 한 줄의 글이 서유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눈물이 편지 위로 떨어졌다. “거기서 잘 지내고 있나요?”서유는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전해준 낯선 사람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그녀의 얼굴을 가득 채운 눈물을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세요.”“언제 돌아오나요?”“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위치가 어딘지 알 수 있나요? 제가 보러 갈 수 있을까요? 저...”서유가 더 물어보려 했지만 그 사람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사모님,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더는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그는 서유가 대답할 틈도 없이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서유는 편지를 꽉 쥐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빠르게 떠나는 차를 바라봤다...도로 맞은편, 나무 아래 숨어 있던 검은 차도 시동을 걸고 뒤따라 떠났다. 차 안에 있던 이연석은 창밖에서 점점 작아지는 서유를 한 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승하의 아내는 아마도 편지를 전해준 사람이 자신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미 이승하는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기에 진정한 심부름꾼은 없었다. 이연석은 손에 쥐고 있는 또 다른 흰색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두 달 후, 이 편지가 그의 손에 영원히 남아있길 바랐다. 또한 그의 형이 깊은 수렁에서 빨리 돌아오길 간절히 원했다.서유는 이승하가 보내준 편지를 꼭 쥐고 그가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달했다는 사실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가 살아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있다면, 그가 무사하다면 두 달을 더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신념으로 서유는 강인하게 집에 머물며 이승하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 정가혜가 가끔 그녀를 찾아와 위로해 주었고 따뜻한 힘을 주었지만 남편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마음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서유는 식욕도 없었고 살도 많이 빠졌다. 주태현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자주 그녀에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