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주 원장이 김 의사가 다시 부검을 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당황해서 선 의사에게 질문을 던졌고, 이는 간접적으로 인정한 셈이 되었다.지금 이승하가 다시 그에게 물어본 것은 사건의 전체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라는 뜻이었다. 자세한 경위가 있어야 사건을 공식화하고 공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만약 그가 심형진처럼 끝까지 부인한다면, 방금 주 원장이 유도해 얻어낸 녹음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그 같은 작은 법의학자를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할 것이다.지금 협조한다면 어쩌면 이 대표가 한 번 봐줄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단지 공범일 뿐이고 주모자는 아니니까. 이 대표가 처리하려는 대상은 심형진이지 자신이 아니다.정 의사는 마음속으로 이해득실을 따져본 후 이승하에게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이 대표님, 이 일을 말하면 당신이 반드시 녹음과 녹화를 이용해 윤주원 의사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할 거란 걸 압니다. 그렇게 되면 제 직업 생활은 틀림없이 파탄 날 겁니다. 저는 위험을 무릅쓰고 실상을 말씀드릴 수 있지만, 당신은 저를 이 일에서 빼내 주셔야 합니다.”최소한 외부에 그의 신원을 보호해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하면 국내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되더라도 해외에서는 갈 길이 있을 테니까.정 의사는 심형진의 돈을 받은 것을 매우 후회했지만,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이런 의료 윤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일이 이렇게 된 만큼 자신의 퇴로를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심형진에 대해서는, 이미 함께 묶여 있던 메뚜기와의 끈이 끊어졌으니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심형진은 정 의사가 이런 조건을 제시하는 것을 보고 주먹을 꽉 쥐며 그를 노려보았다.하지만 정 의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승하만 똑바로 바라보았다.“이 대표님, 이 조건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이승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당신이 내게 조건을 제시한 첫 번째 사람이군요.”정 의사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승하가 동의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심형진이 자신의 야망을 태연히 인정하자 이승하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의학상을 받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신이 원하는 걸 절대 갖지 못하게 할 거예요.”이 잔인한 말에 심형진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무슨 권리로?”이승하는 손에 든 작은 칼을 햇빛 아래 들어 올렸다. 칼날에서 눈부신 빛이 반사됐다.“당신 목숨과 앞날이 내 손에 달렸으니까.”칼에서 반사된 빛에 눈이 부신 심형진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손목에 칼이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살갗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손목을 베어낸 사람은 피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생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심형진은 이승하가 그저 말로만 협박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로 칼을 휘두르자 크게 놀랐다...정 의사도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지만 문 앞을 막고 선 경호원에게 밀려 도로 들어왔다.이승하는 느긋하게 소수빈이 건넨 물수건으로 칼날을 닦아냈다.“심형진 씨, 내 인내심은 한계가 있어. 말하지 않으면 당신이 입을 열 때까지 계속 베어낼 수밖에 없겠지.”손목의 고통에 심형진은 이승하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남자는 교활할 뿐 아니라 무서운 짓도 서슴지 않는 자였다. 자신이 이승하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말하면 돌려보내 주시겠습니까?”이승하는 냉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심형진은 이제 이승하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피 흘리는 손목만 바라보며 망설였다.이승하의 인내심이 바닥난 듯했다. 칼끝을 심형진의 손목으로 가져가 힘줄을 도려내려 하자 심형진이 황급히 애원했다.“제발 손목 건드리지 마세요. 다 말하겠습니다...”그의 손으로 아직 수술을 해야 했다. 절대 망가뜨릴 수 없었다!“그날 원장님이 윤 선생님을 찾아와 의학상은 윤 선생님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을 때, 저는 마음에 꿍꿍이를 품었습니다. 마침 급하게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있었는데, 그 환자는
“정가혜의 일에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서는 거야?”심형진은 손목을 감싸쥐고 고개를 들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이승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그가 저지른 일을 녹음해 임 선생의 가족과 의대생들에게 보냈다. 이는 그의 퇴로를 막은 것과 다름없었다. 본국으로 돌려보내준다 해도 이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이승하가 이미 충분히 잔인하게 굴었는데 이제 와서 정가혜의 일까지 나서다니,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무슨 자격이냐고?”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하얀 장갑을 낀 손을 펴 심형진을 붙잡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손짓했다.두 경호원은 즉시 그 뜻을 알아차리고 심형진의 양팔을 잡아 이승하 앞으로 끌고 왔다. 심형진이 일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에서 손바닥이 내리꽂혔다.엄청난 힘에 얼굴이 흔들리더니 바람이 지나간 뒤 살을 찢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반쯤 꿇어앉은 심형진의 왼쪽 뺨이 순식간에 부어올랐고, 입가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는 놀란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당신...”이승하는 심형진을 때린 장갑을 벗어 옆의 쓰레기통에 버리고 소수빈이 건넨 물수건으로 손을 닦은 뒤에야 바닥에 꿇어앉은 사람을 내려다보았다.“가혜 씨는 내 아내의 친구, 즉 내 친구나 마찬가지지. 친구를 건드린 건 곧 나를 건드린 거나 다름없어. 그 계산을 내가 해야 하지 않겠나?”심형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승하를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정가혜를 친구처럼 여긴다 해도 날 때릴 자격은 없어!”그는 여태껏 한 번도 뺨을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남자한테 맞다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계산할 게 있다면 법정에 고소하든가. 법의 심판을 받게 하지, 왜 날 때리는 거야?”“조급해하지 마.”심형진의 격분과 달리 이승하는 느긋하게 대꾸했다.“법정에 서게 될 거야.”“그럼 왜 날 때린 거야?”손목을 베었을 때보다 이 뺨 때림이 더 분노를 자아냈다.이승하는 무덤덤하게 그를 힐끗 보았다.“내 아내를 대신해 때린 거야.”그녀의 친구를
심형진은 손목의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서희의 바지 끝자락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절박하게 물었다.“어서 말해 보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주서희는 이제 심형진이 너무나 혐오스러워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로 그를 걷어찼다!“당신 덕분에 오늘 밤 길가에서 죽을 뻔했어요!”심형진은 주서희가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속에 가득 찬 분노를 보고 거짓말 같지는 않다고 느꼈다.“가혜는 괜찮아요?”그는 여전히 정가혜를 좋아했다. 다만 자신의 욕망이 그녀에 대한 애정보다 컸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에 여전히 걱정이 되었다.“괜찮은지 아닌지가 이제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주서희의 무표정한 얼굴에 심형진은 깊게 눈썹을 찌푸렸다.“주 원장님, 당신...”“날 부르지 마세요. 당신이 역겨워요.”시의를 모함하고 정가혜를 괴롭히는 등 심형진은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다 했다.“오늘부터 병원에 당신이란 사람은 없어요.”그의 직위를 박탈한 후 주서희는 몸을 돌려 이승하를 향했다.“이 대표님, 저는 먼저 가서 가혜 씨를 보고 오겠습니다.”이승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서희는 자리를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이승하는 천천히 일어섰다.우뚝 선 남자의 모습은 심형진 앞에 태산이 내려앉은 듯했다. 바닥에 웅크린 심형진은 그를 보며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당신... 더 뭘 하려는 거죠?”정가혜에 대한 조그마한 걱정보다 지금 이 순간 이승하가 자신에게 다시 손을 댈까 봐 더 두려웠다.그는 이승하 같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 명성을 중요하게 여겨 그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승하는 상식을 벗어나 오히려 권력을 이용해 제멋대로 행동했다. 정말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심형진은 결심했다. 여기서 빠져나가면 이승하의 오늘 행동들을 폭로해 그를 여론의 뭇매를 맞게 할 것이다! 모든 언론과 인터넷을 총동원해 이승하를 함께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심형진이 입을 열자마자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굳어버렸다.“중증 우울증에 걸렸어요. 당신 아내를 그리워하다 병이 든 거죠...”심형진은 꼼짝도 않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눈썹을 치켜 올리고 거침없이 큰 소리로 웃었다.“이 대표님, 당신이 가혜를 대신해 나를 심판하려 하는데, 누가 송사월을 대신해 당신을 심판할까요?”“당신은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고도 떳떳하게 살고 있지만, 송사월은 영원히 지옥 속에서 살고 있어요!”심형진의 음침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이승하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아마도 소수빈이 더는 듣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돌아서서 빠르게 심형진에게 다가가 옷깃을 잡아 올리고는 주먹으로 그를 때려 기절시켰다! 닭 던지듯 기절한 심형진을 바닥에 내팽개친 후, 소수빈은 이승하 곁으로 돌아와 무척 침착하게 그를 달랬다.“대표님, 심형진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대표님은 송사월에게 빚진 게 없었다. 기껏해야 같은 여자를 사랑했을 뿐이다. 오해나 갈등이 있었다면 서유와 헤어진 그 해의 일이겠지.하지만 그때 서유와 송사월은 연인 사이도 아니었고, 그때 대표님이 서유를 찾아갔다고 해서 끼어든 것도 아니니 빼앗았다고 할 수 없었다.그 후에 송사월이 따라 자살을 시도했을 때 대표님이 그를 구해줬고, 인력과 물자, 재력을 들여 그를 보호하고 살아가도록 격려하셨다.서유가 돌아왔을 때도 대표님은 성의를 다하셨고, 그의 부모 원수를 갚아주고 심지어 구씨 집안도 되찾아 주셨다. 송사월에게 빚졌다 해도 이미 다 갚으신 거나 다름 없었다.소수빈은 세 사람 사이의 모든 은원과 갈등을 지켜본 사람으로, 대표님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굳이 잘못을 찾자면 대표님이 처음에 서 양에게 그렇게 냉담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송사월이 기억을 되찾고 돌아왔어도 별 문제가 없었을 테니까.하지만 분명 이승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유의 마음속에 송사월이 차지하
입원실, 7층 병실.서유는 면봉에 약을 묻혀 정가혜의 팔에 발랐다. 힘이 좀 세었는지 정가혜가 아프다고 소리를 내자 서유의 손이 멈칫했다. “미안해.”정가혜가 괜찮다고 하려는 찰나, 옆에 앉아있던 이연석이 갑자기 서유의 손에서 면봉을 가져갔다. “내가 할게요.”서유와 정가혜는 잠시 놀랐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면봉을 들고 정성스레 약을 발랐다.그의 손길이 무척 부드러워 아프지 않게 하려 조심하는 게 보였다. 이런 이연석의 모습에 정가혜는 잠시 망설이다 담담히 말을 꺼냈다.“연석 씨, 서유가 여기 있으니 먼저 돌아가세요.”정가혜는 이미 여러 번 이런 말을 했지만 이연석은 가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기만 했다.“형수님 몸이 좋지 않으니 먼저 가서 쉬세요.”꼼꼼히 약을 바르던 남자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는 서유를 바라보았다.“형수님, 제가 있으니 걱정 마세요.”이 말뜻을 서유가 못 알아들었다면 좀 둔한 사람일 것이다.“가혜야, 연이가 혼자 집에 있어서 걱정되네. 내일 다시 올게.”정가혜 입을 열기도 전에 서유는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돌아섰다.다만 문 앞에 이르러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이연석을 돌아보았다.“도련님, 잠깐 나와 봐요. 할 말이 있어요.”그제야 이연석이 손에 든 면봉을 내려놓았다.“잠깐만 기다려요.”정가혜는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른 채 두꺼운 유리 너머로 복도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서유는 하얗고 깨끗한 얼굴을 들어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이연석을 보며 눈썹을 찌푸리고 말을 꺼냈다.“연석 씨, 지금 가혜에 대한 마음이 어떤 거예요?”좋아하는 건지,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아직 장난이 덜 끝난 건지?이연석은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려 약간 피곤해 보이는 눈을 드러냈다.“형수님, 저는 가혜 씨를 사랑합니다.”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서유 앞에서 정가혜를 사랑한다고 직접 인정한 것이었다. 전혀 숨기지 않았다.진지한 표정과 태도로 말하는 이연석을 보며 서유는
“꼭 당신을 믿지 않는 게 아니에요. 그저 두려울 뿐이죠. 만약 결혼 후에 절대 바람피우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면, 시간을 좀 두고 나중에 가혜에게 말해 보세요. 지금은 몰아붙이지 마시고요.”이 말을 듣고 이연석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형수님, 저를 불러내신 건 가혜 씨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말리려는 게 아니었나요?”서유의 온화한 얼굴에 고요하고 우아한 미소가 번졌다.“내 말은 여전히 같아요. 모든 건 도련님 마음에 달렸어요. 도련님께서 진심으로 가혜를 대하고, 가혜도 당신과 함께하길 원한다면, 나는 당연히 막지 않을 거예요.”이연석은 서유가 이렇게 이해해줄 줄은 몰랐다. 굳게 다문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고마워요, 형수님.”서유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들어가서 함께 있어요. 난 승하 씨 좀 찾아볼게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그녀가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이연석이 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형수님, 방금 가혜 씨의 마음에 제가 있다고 하신 말씀... 정말인가요?”서유는 고개를 돌려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스스로 느끼지 못하나요?”이연석은 정가혜를 안고 병원에 왔을 때 그녀가 했던 설명을 떠올렸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가 자신을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할까 봐 설명한 것일까?정가혜의 마음에도 자신을 향한 약간의 호감이 있다는 생각에 이연석의 눈썹이 천천히 펴졌다.“그럼 형수님, 어서 돌아가세요.”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이연석을 보며 서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이게 전형적인 쓰고 버리기 아닌가?이연석은 급히 병실로 들어가 정가혜가 혼자 면봉으로 약을 바르고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다가가 면봉을 받아들었다.“누워 있어요. 내가 할게요.”정가혜는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의 단정한 얼굴에 밝은 미소가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서유가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약을 정성스레 바르던 이연석의 동작이 점점 느려졌다.그는 칠흑 같은 눈동자를 들어 창백한 얼굴의 정가혜를
소지섭은 서유에게 이승하가 볼일을 처리하러 갔으니 잠시 병원에서 기다리라고 전했다.서유는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 휴대폰을 보지 않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이승하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 멀리서 그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그림자를 발견하고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서유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멀리 서 있는 이승하를 보았다.그녀는 서둘러 일어나 이승하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보니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여보, 무슨 일 있어요?”그 맑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이승하는 순간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워 시선을 돌렸다.그의 어색한 표정을 느낀 서유는 발끝을 들어 그 아름다운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왜 그래요? 누가 당신을 화나게 했나요?”결혼 후 서유의 눈에는 오직 그의 모습만 담겨 있었고, 다른 사람은 더 이상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이승하는 그녀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며, 송사월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더 이상 송사월을 위해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녀가 송사월에 대해 여전히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걸을 수 없는 그의 다리에 대한 죄책감...만약 그녀가 송사월이 그녀를 그리워하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욱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할 것이다.송사월의 우울증은 중증이었다. 그를 우울증에 빠지게 한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그를 구할 수 없었다.그리고 그를 우울증에 빠지게 한 사람은 20여 년의 어린 시절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사랑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가족 같은 애정은 여전했다.게다가 어린 시절 송사월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이런 은혜에, 정가혜가 알게 되면 분명 송사월을 돕고자 할 것이다.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얻지 못해서 병이 된 것이다.오직 얻어야만 그를 도울 수 있다.이승하는 머릿속으로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기에 그는 골치가 아팠다.그가 대답 없이 자신을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