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만해! 강 부장, 여기까지 와놓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어? 왜 순진한 척이야? 구 대표도 강 부장을 가만히 뒀을 리가 없다는 거 알아!”김주한은 강하리를 안고 그녀의 목에 키스했다.더러운 술 냄새가 덮쳐 오자 강하리는 역겨워서 몸부림을 쳤다.“강 부장, 술을 마시겠으면 제대로 마셔. 강 부장이 술을 물로 바꿔치기 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누구 앞에서 장난이야? 응?”김주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진짜 술이 들어있는 술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강하리의 턱을 잡고 술을 부었다.강하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술을 뱉어내고 싶었지만 저도 모르게 삼켜 버렸다.“이런 자리에서 술을 안 마시려고 했어? 강 부장, 도와달라고 하면서 이런 태도를 보이면 안 되지.”강하리를 격렬하게 기침했다.김주한은 그녀의 셔츠를 잡고 옷깃을 풀어헤쳤다.강하리의 섹시하고 아름다운 쇄골이 드러나자 김주한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그가 고개를 숙여 키스를 하려고 하자 강하리는 다리를 들어 김주한의 발을 힘껏 밟았다.뾰족한 하이힐 굽 때문에 김주한은 고통스러워 소리를 질렀다.이 틈을 타 강하리는 바로 문 앞으로 달려갔다.하지만 그녀가 문을 열려고 할 때 김주한이 뒤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도망가려고? 그렇게 할 수 있나 보자고!”절망이 덮치자 강하리는 좌절했다.하지만 그녀가 몸부림칠 때 익숙한 두 눈이 보였다.구승훈은 입에 담배를 문 채 문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벽에 기댄 채 그저 구경하고 있었다.“계속해요. 나 때문에 흥을 깨지 말고.”남자의 목소리는 엄동설한의 눈처럼 차가웠다.김주한은 ‘쯧’하고 강하리의 머리카락을 놓았다.강하리는 몸에 힘이 풀려 바로 문을 잡고 섰다.구승훈은 그녀를 쳐다보다가 셔츠의 옷깃이 풀린 것을 발견하고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그녀를 비꼬았다.“강 부장,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하는 거야?”강하리는 감정을 억누르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니요.”강하리는 눈이 빨개진 채로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난 다른 사람과 자는 걸 원한 적이 없어요.”“그럼 여긴 왜 왔어!”강하리는 심호흡하고 덜 비참해 보이려고 애썼다.“대표님, 송유라 씨가 끝까지 저에게 협조하지 않았고 매니저와도 연락이 닿지 않아서 김 대표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어요.”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잡고 물었다.“정말 일 때문에 그런 거야? 아니면 저 사람이 네가 선택한 새로운 스폰서인가?”강하리는 턱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구승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제가 생각하고 있는 스폰서 후보가 많아요.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절대 저런 사람을 선택하진 않죠.”구승훈의 눈에서 분노의 불이 순식간에 타올랐다.그는 그녀의 손목을 부러뜨리려는 듯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레스토랑 밖으로 끌어낸 다음 차에 밀어 넣었다.차는 쏜살같이 달려 나갔고 구승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강하리도 당연히 조용히 있었다. 구승훈에게 김주한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묻지도 않았다.이 상황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김주한은 송유라 소속사의 대표인데 어떻게 강하리 때문에 김주한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겠나?차는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멈춰 섰다.구승훈은 차에서 내려 넥타이를 풀고 건물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집에 가.”강하리는 떨리는 손으로 옷깃 단추를 채우고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집으로 돌아온 구승훈은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욕실에서 나와 강하리에게 다가갔다.강하리는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구승훈은 그녀에게 숨을 틈도 주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방금 잠겼던 단추가 다시 한번 그의 손에 의해 찢어졌고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그에게서 온화함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녀의 몸에 걸친 옷을 모두 찢어버릴 정도로 거칠기까지 했다.강하리는 갑자기 구승훈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깨달았다.그가 아이를 해칠까 봐 두려워
하지만 강하리는 눈물을 통제할 수 없었다.구승훈은 베란다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후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형, 무슨 일이야?”구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김주한이 여배우들과 같이 있는 사진 사본을 그 사람 처남한테 보내줘.”구승재는 잠시 당황했다.김주한은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여 성공한 남자였다.그가 큰돈을 벌 수 있었던 이유는 아내의 처가 때문이었다.김주한 아내의 성은 최 씨였는데, 최씨 가문은 창업 초기부터 항상 회색지대에서 활동했다.지금 최씨 가문의 사업은 김주한의 처남이 책임지고 있다.김주한의 아내는 오빠들의 예쁨을 받으며 응석받이로 자랐다.그런 그녀가 김주한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최씨 가문에서는 내키지 않았지만 딸이 원하니 최씨 가문은 김주한을 지원해 줄 수밖에 없었다.초기에 김주한은 사고도 치지 않고 조용히 있었지만, 사업이 점점 더 커지면서 점차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놀면서도 감히 큰 사고를 치지는 않았다.대부분의 경우 소속사의 연예인에게 찝쩍댔다. 그와 만난 연예인들은 약간의 혜택을 받고 나서는 감히 큰소리를 치지 못해서 사람들은 알고도 모른 척했다.하지만 이 사진들이 김주한의 처남에게 보내지면 김주한은 매우 곤란해질 것이다.구승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그 사람이 형을 건드렸어? 아니면... 설마 그 사람이 송유라한테 뭐 한 거야?”그렇게 물은 후 구승재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어쨌든 송유라는 김주한 소속사의 연예인이었다.그리고 송유라 외에 구승훈을 그렇게 간섭하게 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강하리는...이제 그조차도 강하리에 대한 형 구승훈의 태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분명히 신경 쓰는 것 같지만 그녀에게 매우 잔인했다. 그렇다고 관심이 없다고 하기에는 그녀를 잘 챙겨주었다.구승훈은 더 이상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대충 말했다.“그건 아니지만 혼 좀 내주려고.”그렇게 말한 후 그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한 모금 깊게
강하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대답도 없었다.당연히 그녀는 억울했지만 그걸로 이 남자의 동정이나 부드러움을 얻을 수는 없었다.“김주한이 집적거릴 때 못 봤던 거야, 아니면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거야?” 구승훈은 강하리의 목덜미를 잡고 강제로 고개를 들도록 했다.하지만 강하리는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김 대표님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거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송유라는 협조하지 않고, 매니저는 전화도 받지 않는 상황에 구 대표님은 송유라를 모델로 고집하는데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구승훈은 바로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일을 제대로 못 하겠으면 사람을 바꿀 거야!”“대표님, 업무에 협조하지 않은 건 송유라라는 걸 분명히 해 주세요!”구승훈은 코웃음을 쳤다. “유라가 왜 협조를 안 하겠어? 강하리, 내가 유라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어? 네가 어떤 태도로 유라를 대했는지 생각해 봐!”강하리는 숨 막힐 듯 가슴이 아파 눈을 내리깔았다.송유라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문제였을까? 처음부터 자신을 괴롭힌 건 송유라가 아닌가?강하리는 지금껏 참아온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남자의 눈엔 그녀의 잘못만 보이고 송유라가 그녀를 괴롭히는 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잠시 뒤 강하리는 웃으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그럼 대표님은 모든 게 저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구승훈은 소파에 몸을 기대었고, 무표정한 얼굴엔 조금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내가 말했듯이 누가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강하리, 네가 송유라와 맞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강하리는 심장이 바늘에 찔리듯 아팠고 안색도 약간 하얗게 변했다.확실히 그녀에게 그럴 자격이 없었다. 송유라의 뒤에는 송씨 가문이 있었고 곁에는 구승훈이 있었다. 게다가 연예계에서 떠오르는 스타인데 뭘 갖고 그녀와 맞선단 말인가?강하리는 구승훈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그는 처음부터 송유라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고 냉정하게 그녀에
“오늘 안 하면 안 돼요?”구승훈은 잠시 멈칫했다. “강 부장, 내가 너한테 그 많은 돈을 들인 이유가 나한테 반항하라는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마!”그 말을 들은 강하리는 심장이 쿵 했다.그렇다, 그녀는 구승훈이 욕망을 분출하기 위해 찾은 존재였다.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을까?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그의 요구에 협조했다.구승훈은 그녀를 처벌하듯 아주 잔인하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마치 그녀를 산 채로 잡아먹고 싶은 것 같았다.강하리는 그에게 협조하면서도 너무 세게 하지 않도록 부탁했다.새벽 두 시까지 뒤척이고 나서야 구승훈은 마침내 멈췄고, 강하리는 지쳐서 얼굴에 흐르는 땀이 쇄골에 떨어졌는데 약간 아파서 보니 거기에는 구승훈이 남긴 이빨 자국이 있었다.김주한이 남긴 붉은 자국은 모두 이빨 자국으로 덮여 있었다.뜨거운 샤워 물을 틀어놓은 구승훈에게서 조금의 온화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는 그 이빨 자국을 내려다보며 강하리에게 물었다.“안 아파?”강하리가 고개를 젓자 구승훈은 큰 손으로 그 부위를 꽉 눌렀다.“이제 아파?”강하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지만 구승훈은 조금도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그래, 그렇게 아파야지. 강 부장, 네 주제를 파악하고 오늘처럼 다시는 자신을 더럽히지 마.”강하리는 자신을 위해 해명하고 싶었다.“난 더럽지 않아요!”구승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더럽혀지지 않을 거라고 감히 말할 수 있어?”그 말에 강하리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그의 말대로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런 상황에서 구승훈이 오지 않았더라면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김주한은 손에 다 넣은 고기를 놓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원래는 야외 자리로 예약했는데 그 사람이 장소를 안으로 바꿀 줄은 몰랐어요.”“그래서?”구승훈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해명이 아니었다.“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강하리는 겨우 말을 꺼냈다.그제야 구승훈은 만족한 표정으로
강하리는 자기가 이른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어젯밤에 자신의 입으로 구승훈에게 송유라가 잘 협조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김주한을 찾아간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그런데 구승훈이 진짜로 송유라에게 경고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송유라는 그의 첫사랑이고, 구승훈은 한 번도 그녀에게 심한 말을 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아마도 일을 빨리 진행해야 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강하리의 마음은 살짝 흔들렸다.심장이 벌렁벌렁해서 침착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생각해 보니 스스로 너무 불쌍해 보였다. 구승훈이 조금만 잘해줘도 그녀는 남몰래 한참 동안 기뻐했기 때문이다.강하리는 장 매니저와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촬영 준비를 했다.사진작가와 얘기를 마친 뒤 또 현장 스태프와도 의논했다.모든 준비를 마치자 송유라도 메이크업을 끝냈다.송유라는 강하리의 앞으로 와서 웃으며 말했다.“승훈 오빠가 나를 위해 환영회를 열어준다고 했으니 너도 와서 같이 놀아.”강하리는 단칼에 거절했다.“싫어. 내가 가면 다들 불편할 텐데.”말을 마친 뒤 그녀는 돌아서서 옆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송유라는 기뻐서 활짝 웃었다.“겁나? 아니면 승훈 오빠가 나한테 너무 잘해줄까 봐 질투 나?”강하리는 가슴이 저릿저릿했다.확실히 구승훈과 송유라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강하리는 아주 오랫동안 노력해야 어쩌다 한번 구승훈이 그녀에게 잘해주는데, 송유라는 언제든지 그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구승훈은 마음을 아끼지도 않고 숨기지 않으며 송유라에게 잘해주었다.그것에 비하면 강하리는 자신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강하리는 송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유라 씨, 곧 촬영 들어가요.”송유라는 그녀를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촬영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기획안 자체는 육가현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송유라는 육가현과 스타일이 매우 달랐다.사진작가가 불만족스러워하자 강하리는 그 자리에서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강하리는 이런 점에서 송유라에게 감탄했다.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서라면 별의별 짓도 할 수 있었다.만약 오늘 가지 않는다면 송유라와 대립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그녀는 마음속의 번뇌를 억누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갈게요.”송유라는 순간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강 부장님, 너무 좋아요.”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예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으며 송유라가 떠나자, 강하리의 귀가에 대고 한마디 속삭였다.“우리 대표님 눈이 멀었나 봐요. 어떻게 이딴 걸 좋아할 수 있어요!”강하리는 웃었다. 그렇다. 그녀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구승훈의 주변에는 온갖 종류의 여자들이 차고 넘쳐났는데 그중에는 청순한 여자, 섹시한 여자, 화사한 여자, 대범한 여자, 어떤 여자든 있었지만 왜 하필 송유라에게 반했을까?그녀가 송유라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얼굴만 빼면 봐줄 만한 데가 정말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구승훈은 송유라가 좋다는데 무슨 방법이 있을까?“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걸 어쩌겠어.”안예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그들은 함께 차를 타고 히비스커스로 향했다. 송유라가 입구에서부터 구승훈의 이름을 대자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샀다.강하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척 묵묵히 뒤따랐다....구승훈은 마침내 와서 송유라의 체면을 크게 살려줬다.강하리는 구석진 곳에 앉아 조용히 식사하며 상석에 앉은 송유라가 다른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옆에서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며 가끔 그녀 때문에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이때 강하리는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생활이 어려워 정서원을 따라 여기저기 전전하며 살았지만, 정서원은 그녀를 끔찍이 아꼈다. 정서원은 예전의 기억을 잃었지만, 본능적으로 노래와 춤에 소질을 보였고 강하리는 어릴 때부터 그런 정서원을 따라 춤을 배웠다. 비록 시골이지만 어린 공주님처럼 살았다.나중에 강하리는 구승훈을 만
송유라는 손에 술 두 잔을 들고 강하리에게 다가왔다.강하리는 그녀가 술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할지 예상이 가서 순간 머리가 아파 났다.과연 곧바로 송유라는 술 한 잔을 강하리에게 들이밀며 말했다.“강 부장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일이 계속 밀렸죠. 그리고 또 저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도 받고요. 지금 사과할게요.”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술을 보고 고개를 들어 송유라와 눈을 마주쳤다.“사과는 안 해도 돼요. 같이 일하는데 당연히 안 맞는 부분도 있을 수 있죠. 그건 대화를 통해 잘 풀면 되고요. 술도 사양할게요. 제가 요즘에 몸이 좀 안 좋아서.”강하리는 송유라가 건네는 술을 받지 않고 말을 마친 후 바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그때 송유라가 그녀의 앞으로 가로막았다.“강 부장님, 설마 절 용서 안 하겠다는 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왜 술을 안 마시는 거예요?”강하리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송유라 씨,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는 같이 일하다가 안 맞는 부분을 발견한 거니까 용서하고 안 하고 할 게 없어요. 그리고 저 정말 몸이 안 좋다니까요.”하지만 송유라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얼마 안 되는데도요? 제가 듣기론 강 부장님 예전에 술 잘 마셨다고 하던데요.”강하리는 예전에 확실히 주량이 강했다.회사에 금방 들어와서 구승훈의 비서로 일했는데, 그때는 회사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구승훈과 함께 밖에서 계약을 많이 따내야 했다. 그래서 주저하지도 않고 술을 거침없이 마셨었다.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어제 삼킨 소량의 술 때문에 이미 마음속에 죄책감이 가득했던 터라 오늘은 절대 마시면 안 된다.“송유라 씨, 정말 미안한데 이제 제가 몸이 좋아지면 단둘이 술자리를 가져도 될까요?”송유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 말은 확실히 날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군요.”강하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미안해요. 그냥 정말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지금 몸 상태가 허락 안 해요.”“어디가 아픈데요? 보기엔 멀쩡한데요?
돌아가는 길에 구승훈은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형...”구승재는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형과 주해찬이 나누는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형수님에 대한 이야기임은 분명했다.“형수님...”구승재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문득 형이 극도로 피곤한 듯 뒤에서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순간 구승재는 입을 다물었다.잠든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차마 방해할 수 없었다.그동안 강하리와 헤어진 후 지금까지 형은 극도의 피로로 고통을 잊으려는 듯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구승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강하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형수님, 방금 주해찬 씨가 우리 형을 괴롭혔어요.]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하리가 그 메시지를 보고는 미간을 꾹 누르며 주해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주해찬은 휴대폰으로 걸려 온 전화를 잠시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통화버튼을 눌렀다.“하리야, 아직도 안 잤어?”강하리가 대답하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해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방금 나랑 구승훈이 너희 집 아래에서 싸운 것 때문에 그래?”강하리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두 사람 싸웠어요?”주해찬은 여전히 아픈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그 사람 못 이겨.”강하리는 문득 그래서는 안 되지만 주해찬의 말에 안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녀는 구승훈의 몸에 있는 부상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날 응급실에서 본 구승훈의 몸 여러 군데에 상처가 가득했다.게다가 그날 아침 정안 건물에서 두 경호원이 업혀 나오던 것과 엉망진창인 구승훈의 모습을 봤을 때, 지금 몸에 남은 상처가 그날 응급실에서 본 것보다 절대 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선배, 미안해요.”주해찬이 웃었다.“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무턱대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으니까. 난 그냥 그 사람이 널 너무 괴롭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나선 거야. 하리야, 네가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강하리가 입술을
“한 대 피울래요?”구승훈이 대답하지 않자 주해찬은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켰다.구승훈도 마찬가지로 담배에 불을 붙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그렇게 정적이 흘렀다.“당신이 하리한테 잘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당신을 위해 모든 걸 제쳐둔 채 온 힘을 다해 애쓰는 걸 보면서 다시는 걔한테 상처 주지 않을 줄 알았어. 그래서 나도 마음 놓고 떠났던 거야.”그렇게 말한 뒤 주해찬은 또 한 번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결혼식장에서 하리를 혼자 내버려둬? 구승훈, 대체 이유가 뭐야? 왜 매번 그런 식으로 자꾸만 하리에게 상처를 주는 건데?”구승훈은 대답하지 않고 담배만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하리 사이에 벌어진 일에 주해찬 당신이 왜 끼어들어?”주해찬은 코웃음을 쳤다.“왜 끼어드냐고? 그러는 당신은 방금 아무 상관도 없는 날 왜 때렸는데?”주해찬은 구승훈을 바라보았다.“구승훈, 난 가끔 정말 당신이 이해가 안 돼. 그렇게 하리에게 마음 쓰면서도 대체 왜 자꾸만 상처를 주는 거야?”구승훈은 엄지와 검지로 담배 끝을 잡고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자조적인 웃음을 드러냈다.“상처를 줄 생각이 없었다고 하면 믿을 건가?”주해찬은 말이 없었다.자신이 둘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던 때가 떠올랐다.그녀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깊은 상처만 남기고 말았다.사랑이란 게 이럴 때 보면 참 모순적이다.“날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주해찬도 고개를 들어 꼭대기 층을 바라보았다.“난 포기했어. 이젠 그냥 좋은 선배가 되고 싶을 뿐이야. 하리 마음속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관계가 있더라고.”구승훈이 피식 웃었다.“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한밤중에 선물이나 주려고?”“난 단지 오늘 파티에서 구 대표님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갔다는 걸 들어서, 하리가 걱정되는 마음에.”구승훈은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주해찬은 구승훈
주해찬은 이미 자리를 떠났지만 동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주차된 차가 눈에 들어왔다.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차다.사고가 났을 때 자신을 향해 돌진했던 차가 바로 지금 앞에 있던 차와 거의 똑같았다.그는 다가가 창문을 두드렸고 차창을 내리자 놀랍게도 거기엔 구승훈의 경호원이 있었다.준봉도 주해찬을 보고 살짝 놀랐다.노민우 말로는 강하리가 한밤중에 주해찬 마중을 나갔다던데 주해찬도 이 밤에 그녀를 찾아올 줄이야.“준봉 씨, 맞죠?”주해찬이 웃으며 묻자 준봉이 적대시하며 대꾸했다.“주해찬 씨, 무슨 일이죠?”주해찬이 뒷좌석을 슬쩍 들여다보자 구승훈은 보이지 않았다.“그쪽 대표님 올라가셨나요?”준봉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해찬은 알 수 있었다.밑에서 기다렸을 때 구승훈이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건 구승훈이 그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그가 2시간 넘게 기다렸으니 구승훈은 아마 3시간은 더 위층에서 기다렸을 테다.보아하니 그도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게 분명했다.‘준봉이 떠나지 않았다는 건 구승훈도 아직 가지 않았다는 뜻이겠지.’그래서 그도 가다 말고 다시 돌아왔다.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다.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구 대표님, 오랜만이네.”구승재는 주해찬을 보는 순간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무의식적으로 형을 힐끗 쳐다보았다. ‘오늘 또 싸우는 건 아니겠지?’하지만 놀랍게도 구승훈은 침착하게 그를 향해 말했다.“차에 가서 기다려.”구승훈이 말을 마친 후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이자 구승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형, 아직 몸 회복되지 않았어.”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구승훈이 그를 돌아보았다. 구승재는 곧장 입을 다물고 맞은편에 서 있던 주해찬을 흘깃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로 향했다.“주해찬 씨도 오랜만이네.”구승훈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담뱃재를 털었다.주해찬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다가 갑자기 구승훈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슬쩍 본
그때 그의 기분이 어땠던가, 아마도 행복했던 것 같다.하지만 옆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마음은 여전히 공허했다.그렇게 어느새 술병이 바닥을 드러냈다.침실 문에 기대어 저쪽 주방에서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는 구승훈은 이제야 마음이 꽉 찬 것 같았다.강하리는 부엌에 서서 계속 끓고 있는 냄비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후 심호흡을 한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구승재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불을 끄고 국 한 그릇을 떠서 밖으로 나갔다.“마시면 가야 해?”“안 마시고 가도 돼.”국물을 손에 든 구승훈은 다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샤워하게 욕실 좀 써도 될까?”강하리가 눈을 흘겼다.“선 넘지 마.”구승훈이 그릇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나 좀 먹여줄래?”“얼굴에 확 부어줄까?”구승훈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강하리는 그를 무시한 채 돌아서서 서재로 들어갔다.전에 최하영과 의논했던 대로 안현우에게 함정을 파도 빈 껍데기만 둘 수는 없었다.그녀의 손에서 기획서가 차츰 구색을 갖춰갔다.그런데 구승훈은 여전히 침실 문 앞에 서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강하리는 조용히 컴퓨터를 닫았지만 밖에 있는 사람과 약속이라도 한 듯 서재에서 나가지 않았다.두 사람은 그렇게 안팎으로 각자 떨어져 있었다.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웃기게도 편안함이 느껴졌다.초인종이 울렸을 땐 새벽 세 시였다.그 소리에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다가가려는데 서재 문이 열렸다.강하리는 그를 쳐다보더니 곧장 문으로 향했다.“아주 바쁘네.”등 뒤에서 들리는 구승훈의 목소리엔 짙은 질투가 배어 있었다.“이 시간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강하리는 술에 취한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무시한 채 다가가 문을 열었다.“보지도 않고 문을 여는 건 자주 들락거리는 사람이란 뜻인데...”“형수님, 우리 형 어디 있어요?”구승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구승재를 향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넌 여기 왜 왔어?”‘나
익숙한 향기, 익숙한 체온, 익숙한 사람.강하리는 잠시 밀치는 것도 잊었다.구승훈은 그녀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조금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벌렸고, 구승훈은 그녀가 물러설 틈도 주지 않고 조급하게 파고들었다.강하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구승훈이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한 손으로 목뒤를 감싼 채 다른 한 손은 니트 안으로 집어넣은 뒤였다.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강하리는 순간적으로 몸부림을 쳤다.그런데 구승훈이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구승훈...”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승훈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았고, 굳은살이 박인 손이 닿은 곳에서는 전율이 일었다.강하리의 몸이 순간 경직되고 구승훈은 그 틈에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남자는 그녀의 어깨 위로 얼굴을 파묻고 씁쓸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강하리는 화를 내며 남자를 옆으로 밀쳐내고 일어나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구승훈, 미쳤어?”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렸다.“응.”그는 반박하지 않고 놀랍게도 그냥 인정했다.어쩌면 정말로 미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이혼 얘기를 꺼낼 때도 강하리 같은 여자에게 들이대는 남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었다.하지만 막상 다른 남자와 웃고 떠들고 심지어 다른 남자의 선물까지 받는 그녀를 보며 그는 마음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강하리는 짧은 대답에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잃었다.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말했다.“늦었어. 이만 가.”그러고는 이내 한 마디를 덧붙였다.“앞으로는 여기 오지 마. 연정이 보고 싶으면 아주머니가 데리고 갈 거야.”하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구승훈,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구승훈은 웃으며 일어나 강하리 앞에 섰다.“강하리, 임희주랑 나랑 있는 거 보면 조금도 질투 안 나?”강하리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질투하겠어?
주해찬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됐어, 들어가. 며칠 뒤 동창회에서 보자.”강하리는 주해찬이 떠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다가 뒤돌아 위층으로 향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현관에 연정이를 안고 서 있는 구승훈이 보였다.연정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구승훈은 불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연정이를 안고 있었다.강하리는 멍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구승훈이 이 시간에 연정이를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그런데 구승훈은 그녀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방금 데이트하고 왔어?”그렇게 말하며 그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에 들려 있는 가방으로 향했다.“내가 주는 선물은 안 받으면서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은 받네?”강하리는 구승훈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다가가 연정이를 안으려 했지만 구승훈이 피했다.“깨지 않게 내가 안고 들어갈게.”강하리가 그를 흘겨보았다.“굳이 한밤중에 데리고 올 필요는 없었어.”“아주머니가 요리하다 데어서 연정이를 돌보기 불편해.”강하리가 얼굴을 찡그렸다.“많이 다치셨어?”“심각한 건 아니지만 며칠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연정이를 심씨 가문에 며칠만 맡겨두는 게 어때?”강하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구승훈이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자 구승훈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왜, 난 이제 강 대표님 집도 못 들어가나?”강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문을 열었다.방 안의 불이 서서히 켜지고 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는 외투를 벗고 신발을 갈아 신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주해찬이 준 선물은 현관에 있는 캐비닛 위에 올려놓은 채.구승훈은 그것을 보고 손을 뻗어 가방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강하리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현관에 서 있었다.“연정이 침대에 눕히고 그만 가.”하지만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슬리퍼 어디 있어?” 강하리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씩씩거리며 신발장에서 슬리퍼 한
임희주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강하리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도와준다고?’임희주는 차갑게 비웃었다.“강하리 씨, 승훈 씨한테서 날 떼어놓으려는 건가요?”강하리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이미 그쪽이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요.”임희주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하지만 남에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 느낌이 무척 역겨웠다.“떠나고 싶은 건 맞는데 제가 왜 구승훈을 놔두고 그쪽을 믿겠어요?”강하리는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믿지 않아도 돼요. 나도 강요할 생각 없으니까. 당신이랑 구승훈 사이도 딱히 관심 없어요. 하지만 날 건드리진 마요. 안 그럼 구승훈이 당신을 지켜줘도 난 여전히 당신을 이곳에서 발붙이지 못하게 할 수 있어요.”임희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강하리 씨, 구승훈 씨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당연히 알죠. 안 그럼 그쪽이 어떻게 구승훈 옆에 붙어 있겠어요? 하지만 임희주 씨, 생각 잘해요. 당신이 B시에서 멀쩡히 지낼 수 있는 건 단지 구승훈을 돕고 있다는 이유 하나뿐이에요. 그러니 얌전히 구승훈에게 협조해요. 안 그럼 여초연이나 구승훈이 움직이기 전에 나와 심씨 가문이 당신 절대 살아서 B시 못 나가게 할 테니까. 구승훈에게 순순히 협조하면 우리도 여초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와줄게요. 생각 잘해봐요.”말을 마친 강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그제야 임희주는 강하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내키지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강하리 씨,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모르겠어요? 지금 구승훈 씨 옆에 있는 사람은 저예요. 당신이 뭔데 사모님 행세를 하면서 날 협박해요?”강하리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가는데 뒤이어 임희주의 말이 들렸다.“나랑 구승훈 씨가 이미 잤다고 하면 믿겠어요?”강하리의 걸음이 우뚝 멈추고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애
강하리가 웃었다.“싱글인 여자에게 커리어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근데 우리 천아름 디자이너님을 모시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단 말이지.”주얼리 업계에서 천아름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다.게다가 그녀 본인의 브랜드도 있었기에 그런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자신이 데려올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천아름은 잠시 침묵했다.“생각해 봐야겠어. 며칠 후에 대답해 줄게.”강하리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세 사람이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자정이 가까워졌다.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가정부가 휴대폰으로 보내온 메시지를 확인했다.케이크 앞에서 구승훈은 연정이를 안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그녀는 조용히 대화창을 끄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여초연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임희주는 여초연보다 강하리의 연락이 먼저 올 줄은 몰랐다.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결국엔 받았다.“강하리 씨, 무슨 일이죠?”임희주의 목소리는 병원 앞 카페에서 말할 때처럼 언제든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유로움으로 가득했다.“임 선생님, 나와서 얘기 좀 해요.”강하리의 목소리도 임희주와 비슷하게 들렸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녀에겐 고고함이 배어 있었다.그녀야말로 대결에서 이긴 승자 같았다.임희주는 이를 살짝 갈았다.그녀는 심씨 가문 아가씨고 진태형의 유일한 딸이다.구승훈이 없어도 여전히 B시 전체가 부러워하는 공주님이다.임희주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질투, 원망 같은 것들. 왜 상대는 태생부터 타고났는데 그녀는 자유조차 바랄 수 없는 것인지.하지만 뭐라 해도 지금 구승훈은 그녀의 곁에 있지 않나.“강하리 씨,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거죠? 구승훈 씨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 “아니, 당신 얘기요.”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지만 길거리에는 여전히 커플들이 오가고 있다.강하리는 길가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우유 한 잔을 주문했다.따뜻한 우유를
구승훈은 바지에 크림을 잔뜩 묻혀놓은 꼬마 녀석을 내려다보며 마음이 녹아내렸다.허리를 숙여 연정이를 안아 든 그가 크림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뽀뽀를 해줬다.가정부가 나와서 이 모습을 보고 웃으며 연정이가 먹던 케이크를 가져가더니 아이의 손을 닦아주었다.“대표님, 옷 갈아입고 오세요. 저녁 준비 곧 끝나요.”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시선이 방 곳곳을 훑어보았다.보고 싶은 사람이 보이지 않자 형언할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왔다.가정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사모님께선 저와 아가씨를 여기로 데려다주고 가셨어요. 아가씨랑 함께 생일 보내라고 말씀하셨어요.”구승훈이 입꼬리를 올리며 휴지로 연정이 얼굴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었다.“다른 말은 안 했나요?”가정부가 웃으며 답했다.“맛있는 음식 많이 하라고 하셨어요. 대표님 건강을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그래요?” 구승훈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그 사람 최근에... 주해찬과 자주 연락합니까?”가정부가 멈칫했다.“주해찬 씨는 해외로 가지 않았나요? 돌아왔어요?”구승훈의 입꼬리가 남몰래 올라갔다.서산 퍼스트 빌리지에 웬일로 사람 냄새가 났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저 멀리 별장의 불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자기야, 나와서 한잔해.”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는 사실 나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돌아가면 잠을 못 이룰 것 같아서 그냥 나갔다.술을 마신다고 하지만 손연지는 손에 음료를 들고 있고, 평소 술에서 손을 떼지 않던 천아름도 오늘은 음료만 홀짝이니 강하리가 웃으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천아름은 눈썹을 치켜뜬 채 그녀를 바라보며 음료를 손에 쥐어줬다.“자, 취하기 전엔 집에 안 가.”강하리가 손연지와 잔을 부딪쳤다.“대단하신 천아름 디자이너님께서 무슨 일이지?”손연지는 고개를 저었다.“며칠째 이러고 있어. 넌 어때? 구승훈이랑 아직도 그래? 그 개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강하리는 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