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민우는 살짝 민망해졌다. 그가 강하리에게 물어보자마자 구승훈이 왔기 때문이다. 꼭 구승훈이 없는 빈틈을 파고들려다가 현장을 잡힌 기분이었다.하지만 노민우가 강하리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은 구승훈도 일찌감치 눈치챘을 것이다. 예전에는 계속 마음을 들춰내지 않았지만 이제 구승훈이 곧 약혼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노민우는 용기를 내서 고백했다.그러나 지금 구승훈의 태도를 보니 약혼한다고 하더라도 강하리를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노민우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구승훈과 대적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승훈아, 왔어? 그럼 난 먼저 갈게.”말을 마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구승훈의 시선이 그를 지나쳐서 강하리에게로 향했다.“노 대표가 가는데, 강 부장은 아무 말 안 해?”입을 꾹 다물고 있던 강하리는 잠시 후에야 고개를 돌려 노민우에게 인사했다.“안녕히 가세요, 노 대표님.”고개를 끄덕인 노민우는 구승훈을 보며 말했다.“다음에 봐, 승훈아.”구승훈이 아무 대답이 없자 노민우는 멋쩍은 듯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눈을 치켜뜬 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노민우 씨와는 정말 우연히 만났을 뿐이에요.”구승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그래? 정말 이런 빌어먹을 우연이 다 있네!”미소를 지은 강하리는 눈을 치켜떴다. 눈동자에는 불필요한 감정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그러게요. 정말 기막힌 우연이죠. 저와 대표님도 이렇게 우연히 만났잖아요?”구승훈은 어두운 눈길로 눈앞에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어색해 보이는 강하리의 태도에 구승훈은 도저히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사실 오늘뿐만 아니라 그때 두 사람이 유산한 일로 다툰 이후로 그녀는 쭉 이런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더욱 선명했다.“강하리, 그딴 작은 일로 자꾸 불쾌하게 트집 잡지 마!”강하리는 씁쓸한 웃음을 토해냈다.작은 일이라고?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의 눈에는 그저 사소하고 하찮은 일로만 보일 것이다.
강하리는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명절이라 그런지 길이 다소 막혔다. 길가에는 손잡고 다니는 커플들이 즐비했다. 이때 갑자기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역시나 송유라를 위해 특별히 설정한 벨소리였다.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전화를 받았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다 오빠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안 갈 거야.”대답하자마자 구승훈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강하리는 입꼬리가 살짝 떨려왔다.“죄송해요, 제가 대표님 데이트를 방해했네요.”구승훈은 그녀를 보며 냉소를 흘렸다.“뭐 피차일반 아닌가. 나도 강 부장 데이트를 방해했잖아?”그를 슬쩍 쳐다본 강하리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차가 아파트 아래에 멈춰 섰다. 강하리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 할 때 구승훈이 갑자기 잠금장치를 눌렀다. 그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말했다.“그렇게 서둘러 내릴 필요 없어.”그러더니 강하리를 안아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두 사람은 그날 이후로 한 적이 없었다.이 이틀 동안 구승훈은 계속 기분이 아주 나빴다. 그날 밤 강하리의 눈물과 낯선 모습이 비수가 되어 그의 마음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그는 항상 자신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두 번 끊임없이 이 여자로 인해 크나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지금은 아예 마음속에서 커다란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구승훈은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헤집으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곧이어 커다란 손이 그녀의 옷 아래를 비집고 들어왔다. 순간 강하리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됐다.“돌아가서 하면 안 돼요?”구승훈은 피식 웃었다.“안 돼.”컬리넌이 거의 한 시간 동안 흔들리더니 그제야 멈췄다. 지쳐버린 강하리는 팔을 들어 올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가는 내내 그녀의 휴대폰이 계속 시끄럽게 울려대자, 구승훈은 조금 짜증이 나는 듯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손연지가 문자를 여러 개 보냈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너의 친구는 정말 한가한가 봐.”강하리는 입
구승훈은 어두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깨끗하고 예쁜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예전에 구승훈은 강하리의 웃는 얼굴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미소가 너무 거슬렸다.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떠나고 싶어?”강하리는 그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졌다.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그러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강하리, 내가 말했지. 내 동의 없이는 날 떠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이 말 영원히 기억하고 있기를 바라.”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의 턱을 놓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씻고 침대에 누웠다.다음 날.강하리가 기분이 안 좋을까 봐 걱정된 손연지는 일부러 휴가까지 내고 강하리를 찾아왔다.사실 강하리는 괜찮았지만, 굳이 손연지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침 일찍 쇼핑하러 나갔다.말이 쇼핑이지, 손연지는 돌아다니는 내내 계속 강하리의 안색만 살폈다. 강하리는 손연지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살짝 어이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나 괜찮아.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돼.”손연지는 그 말을 듣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구승훈 그 개... 바보 같은 자식 눈이 삔 게 틀림없어. 아니면 이렇게 착한 너를 옆에 두고 어떻게 송유라 그 여우 같은 년을 선택할 수 있지.”강하리는 피식 웃었다.“연지야, 우리 사이는... 처음부터 계약서에 똑똑히 적혀 있었어. 내가 원망할 것도 없어.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우리 관계만 잘 기억하고 있으면 괜찮아. 그 사람과 송유라가... 약혼하든, 결혼하든 난 신경 쓰지 않아.”예전에 강하리가 이렇게 말했으면 손연지는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하리가 오랜 시간 동안 구승훈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 그녀는 강하리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을까?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겠지.손연지는 마음이 찢어
미간을 잔뜩 찌푸린 강하리는 구승재가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지 알 것 같았다.“승재 씨, 전 가고 싶지 않아요.”그러자 구승재는 눈썹을 찡그렸다.“연회에 가려는 게 아니에요, 강 부장님. 그냥 킹스 클럽에 놀러 가는 거라고요. 진짜예요.”강하리는 구승재가 대체 무슨 의도로 찾아왔는지 몰랐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흥미도 없었고, 놀러 갈 기분도 아니었다. 강하리의 이런 모습을 본 구승재는 마음이 답답해졌다.“강 부장님, 내가 강 부장님을 해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날 한 번만 믿어봐요, 네?”강하리는 자신을 설득하는 구승재를 보고 결국 동의했다. 구승재야말로 지금까지 그녀를 제일 잘 챙겨준 사람이었다.강하리는 간단히 화장하고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저 심플한 옷차림이었지만, 구승재는 넋 놓고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강하리 같은 여자를 옆에 두고도 형은 어떻게 송유라를 바라볼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송유라보다 몇 배는 더 예뻤다.“가요.”깊은숨을 들이마신 강하리는 그를 따라갔다. 구승재는 정말로 그녀를 데리고 킹스 클럽으로 갔다.그러나 룸 문을 열던 강하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연회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부 이 룸 안에 있었다. 구승훈과 그의 어중이떠중이 친구들도 말이다.강하리를 본 구승훈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는데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강하리를 보았을 땐 순간 얼굴에 싸늘한 냉소가 번졌다.“강 부장이 여긴 왜 왔어?”남자는 무심한 태도로 물었다.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야유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안주인 같은 자태로 앉아있던 송유라도 강하리를 보자 안색이 싹 변했다.구승재는 강하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강 부장님, 미안해요. 나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뭐가 문제인지 형이 어젯밤 갑자기 생일 축하연을 취소한다고 통보했거든요.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요. 그
구승훈의 목소리를 들은 강하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걸어 나갔다.여기에 단 일 초라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 가는 것이 몹시 우스워 보일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오자마자 다시 가면 그녀는 진짜로 여기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안현우도 강하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지만, 강하리 또한 그를 좋게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여기에 남아서 불쾌감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그리고 구승훈은...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첫사랑을 옆에 두고 있으면서 강하리 더러 여기 남아서 첫사랑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이라도 하란 말인가?허리를 곧게 편 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계속 가려고 하는 그녀를 보자 구승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구승재는 그 상황을 보고 얼른 뛰어가서 강하리를 붙잡았다.“강 부장님, 여기까지 와서 왜 벌써 가려고 그래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재 씨, 미안하지만 난 이곳이 정말 싫어요.”승재는 눈썹을 찌푸리고 구승훈을 흘끗 쳐다봤다. 구승훈이 그녀를 잡길 바랐지만, 구승훈은 그저 어두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만 볼 뿐, 더는 말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이때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보고 있던 안현우가 불쑥 끼어들었다.“승재 씨, 가는 사람 붙잡지 말고 그냥 보내요. 애초에 저 여자가 낄 자리가 아니었어요. 기분 잡치게 하려고 데려온 거예요?”보다 못한 노민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안 대표, 그만해요. 강 부장님이 안 대표를 보러 온 것도 아니잖아요.”그러자 안현우는 쯧, 혀를 차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노민우를 힐끔 쳐다봤다.“노 대표, 언제부터 강 부장이랑 사이가 그렇게 좋았어요?”노민우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이왕 온 김에 좀 놀다 가요, 강 부장님. 오늘 승훈이 생일이잖아요
“차에서 기다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바로 차에 탔다. 구승훈은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송유라에게 건넸지만, 그녀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한숨을 토해 낸 구승훈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직접 송유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오늘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강하리는 고개를 떨구고 더는 차창 밖을 쳐다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드디어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는 강하리를 흘끗 쳐다보더니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강 부장 진짜 점점 대단해져 가네.”강하리는 그가 자신이 그의 앞에서 노민우 쪽으로 걸어간 것을 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일에 대해 딱히 설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땐 확실히 구승훈 옆에 앉기 싫었을 뿐이다.시선을 아래로 한 강하리는 그 문제로 더 논쟁하지 않고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저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순간 구승훈의 눈살이 잔뜩 찌그러졌다.“왜? 억울해?”강하리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아니요.”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구승훈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파트로 돌아온 구승훈은 케이크도 없는 텅 빈 식탁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강 부장, 올해는 밥 차릴 생각도 없나 봐?”강하리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차피 차려도 안 드실 거잖아요.”눈을 가늘게 뜬 구승훈은 한참 조용히 있다가 다시 말했다.“가서 국수 한 그릇 끓여줘.”말을 마친 그는 옷을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제 자리에 서서 한참 고민하던 강하리는 결국 주방으로 걸어갔다.국수를 다 삶자 구승훈도 욕실에서 나왔다. 식탁 위에 놓인 그릇을 보니 이번에도 강하리가 매해 그에게 해주었던 잔치국수였다.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안색이 드디어 밝아졌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식탁 앞에 앉아 잔치국수를 먹었다.한편 강하리는 돌아서서 욕실로 향했다. 다 씻고 나오자 구승훈은 이미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그는 창문 앞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강하리의
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눈을 떴을 때 구승훈은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채로 침대 옆에 서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피곤하면 하루 쉬어도 돼.”어젯밤 구승훈은 강하리를 거칠게 몰아붙였고 그녀는 새벽이 되어서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강하리는 고개를 저으며 바로 일어나 앉았다. 회사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쉴 수가 없었다.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럼 나랑 같이 갈래?”그러나 강하리는 재차 거절했다.“괜찮아요. 전 버스 타고 갈게요.”하지만 구승훈은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문 옆에 기대서서 그녀를 기다렸다.그를 흘끗 쳐다본 강하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으려던 찰나 무언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움찔하더니 서랍에서 작은 박스 하나를 꺼냈다.그 안에는 얼마 전 그녀가 안전을 지켜달라고 기원하며 받았던 염주가 들어 있었다.사실 구승훈의 생일 선물로 주려고 했지만, 어제 그가 물을 때 갑자기 그 슈트가 생각나더니 이내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구승훈에게 또다시 마음을 주었다가 무참히 짓밟히는 짓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이런 선물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강하리는 고개를 떨구고 그 박스를 다시 서랍 속 깊숙이 집어넣었다.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구승훈은 여전히 문 앞에 서있었다. 강하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대표님, 그 일은 어떻게 됐어요?”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진 구승훈은 잠시 침묵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강 부장은 진실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적어도 저한테는 아주 중요해요.”구승훈은 어두운 안색으로 한참을 있다가 다시 말했다.“그 일은 확실히 누군가 계획적으로 한 게 맞아.”입술을 굳게 다문 강하리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몸 옆에 떨어뜨린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입술을 바르르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송유라예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
“유라 한동안 좀 쉬라고 해.”...안예서는 회사로 출근한 강하리를 보자마자 이상한 점을 감지하였다.“부장님, 무슨... 일 있어요?”강하리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별거 아니야, 저녁에 잠을 잘 못 잤나 봐. 연말 실적 보고서 준비는 잘 돼가?”“네, 거의 다 완성됐어요.”여전히 시름이 놓이질 않는지 안예서는 강하리를 계속 살피며 얘기했다.“부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라도 말씀 해주세요. 뭐 제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누가 옆에서 아이디어라도 내주면 좋잖아요.”안예서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기특하여 강하리는 저도 몰래 웃음이 새어 나왔다.“고마워, 예서 씨.”“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안예서는 갑자기 가까이 다가서며 목소리를 낮춰 다른 얘기를 꺼냈다.“근데 부장님, 혹시 들으셨어요? 어제 대표님이 약혼을 안 했대요.”강하리는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사실 지금 제일 듣기 싫은 얘기가 바로 구승훈과 송유라에 관한 소문이었지만, 조잘대는 안예서를 그냥 내버려두었다.흥, 콧방귀를 뀌며 안예서가 말을 이었다.“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결국 이런 날이 온다니깐요. 부장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번에 송유라가 대표님과 약혼식 올린다고 SNS에서 자랑질을 얼마나 해댔는데요. 하, 이번에 코가 제대로 납작해지겠네요. 난 또 우리 대표님이 송유라를 얼마나 좋아한다고... 뭐 결국은 별거 아닌 거였네요.”강하리는 한번 웃어 보이고는 업무 모드로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하고 업무보고서나 가져와 봐.”혀를 살짝 내두르며 안예서는 서둘러 강하리의 지시대로 보고서를 챙기러 가버렸다.끝내 조용해졌다.강하리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보며 넋을 잃었다.어젯밤에 구승훈이 송유라와 약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했을 때, 솔직히 말해 그녀는 매우 기뻤다. 그 둘이 약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그것이 그녀의 사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송유라와의 원한 관계에서였든, 이유는 중
요양원 주차장.심준호는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한 진태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번 일은 저도 잘못이 있어요... 계속 하리가 구승훈을 조금만 더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까지 바보 같을 줄은 몰랐어요...”진태형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우리 딸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어.”심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가 다시 입을 뗐다.“요즘은 조시욱이 꽤 신경 써주더라고요.”진태형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 옛날 자신이 어떤 희망도 없이 심미현과의 약혼을 지키며 버텼던 것처럼, 강하리도 그렇게 쉽게 마음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하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만큼은 절대 구승훈이 다시 가까이 오게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진태형이 병실에 도착했을 땐, 백아영이 구연정을 안고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구연정은 강하리의 이마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후하고 불었다.“엄마, 아프지마...”강하리는 살며시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엄마 안 아파, 우리 연정이 걱정하지 마.”구연정은 백아영을 가리키며 말했다.“할머니 울었어.”강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할머니 저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백아영은 단호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진짜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연정이는 어쩔 뻔했니? 그런 남자 하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강하리는 속눈썹이 살짝 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백아영은 한숨을 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구연정이 환히 웃으며 진태형에게 달려갔다.진태형은 아이를 안고 병실을 둘러보다, 딸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는 눈가가 붉어졌다.“아빠, 나 괜찮아요.”“이게 괜찮은 거
손연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마침 행사 중이더라고. 쿠팡 연말 세일에서 로열 프리미엄 네덜란드 분유 있거든? 영양 흡수도 잘 되고 우리 소아과 아기들도 다 그거 먹어.”강하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손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쳐다봤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병원 응급실에서는 생체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급히 달려온 구승재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핸드폰 화면엔 강하리의 연락처가 떠 있었지만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전화를 걸지 못했다. 매번 손이 닿았다가도 다시 멈췄다. 더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곁에 서 있던 준봉과 노진우도 속만 태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떴고 그제야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의사가 나왔다.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숨을 내쉬었다.구승훈이 다시 의식을 찾은 건 해 질 무렵이었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운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강하리에겐... 알리지 마.”구승재는 목이 막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알고 있어. 형수한테는 말 안 할게.”그제야 구승훈은 안도한 듯 눈을 감았지만 구승재는 알 수 없는 억울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병원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를 아는 터라, 강하리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조용히 빠져야만 했다.그날 밤, 노민준이 직접 차를 몰고 구승훈을 요양원으로 데려갔다.“네가 또 도망치면... 그땐 나도 강하리한테 전부 말할 수밖에 없어.”구승훈은 창밖만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 거야.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노민준은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 한마디에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푹 쉬어.”병실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구승훈의 머릿속엔 강하리가 조시욱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
청소 아주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강 대표님, 아까 구 대표님이랑 병실 안에 계시던 남자분이랑 여기서 싸웠어요. 아마... 그중 누가 코피를 흘린 것 같더라고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간호사에게 병실 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조용히 말했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조시욱이 전화를 받고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마쳤다.“오늘 일은, 미안해.”그는 웃으며 말하다가 다시 강하리에게 다가가 침대로 옮겨주려 했지만 강하리가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잠시 후에 또 검사를 받을 수도 있으니 그냥 이대로 있을게요.”“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까?”그 말에 강하리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조시욱 씨. 선배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죄송해요. 지금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누굴 다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안 돼 있고요. 그러니까 굳이 매일 오시거나 이렇게 곁에 계실 필요 없어요.”조시욱은 사실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처음 만난 그날 밤부터 이미 느꼈다.하지만 그날, 피범벅이 된 채 쓰러진 그녀를 두 눈으로 본 뒤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각오로 그렇게 뛰어내렸는지 그게 궁금해졌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알고 싶어졌다.설령 그게 잠시 스쳐 가는 인연이라 해도,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내가 좀 성급했으면 미안. 진짜로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선배 부탁이라서 온 것도 맞지만... 난 그냥, 친구로서 너 도와주고 싶어서 온 거야. 어릴 때부터 정 회장님이랑 우리 할아버지 사이도 꽤 각별하셨잖아. 집안끼리도 인연이 깊고.”조시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너무 부담 갖지 마. 그냥 지금은, 네 곁에 누군가 있어 주는 게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언젠가는 과거 놓고 새로운 시작도 해야 되는 거고. 그렇지 않아?”잠시 정적이 흘렀고 강하리는 조용
구승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방금... 뭐라고 불렀지?”강하리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쩐지 너무나 낯설었다.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창백한 얼굴은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그녀가 애써 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무너지면서 심장이 바늘로 찔린 것처럼 저릿했고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임희주가... 이렇게 이 사람을 돌본 건가? 그렇다면 지금쯤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전 이제 검사를 받아야 해요. 구 대표님, 손 좀 놓아주세요.”“같이 가줄게.”그의 목소리는 마치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갈라지고 낮았다.“괜찮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그 말과 함께 간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휠체어 좀 부탁드릴게요.”간호사는 그제야 얼떨결에 제자리를 찾은 듯 다가와 그녀의 휠체어를 받았다.조시욱은 자연스럽게 손을 거두었지만 구승훈은 여전히 그녀 손에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구 대표님, 강 대표님 검사 예약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간호사의 말이 이어지자, 구승훈은 천천히, 마치 억지로 손을 떼듯 그녀를 놓았다.강하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지던 기침이 터졌다. 거칠고 깊은 기침 소리, 그리고 피비린 냄새에 조시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너, 다쳤냐?”구승훈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몸을 일으켰다. 그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있었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 따라가서 뭐 하려고?”조시욱은 다급히 앞을 막아섰다.“넌 지금 상태부터 회복해야 해. 이러다 정말 쓰러진다고.”그러나 구승훈은 대답 대신 그를 벽에 밀쳤다. 그러나 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심장을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그의 입가엔 다시 피가 번졌다.조시욱은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약해 빠져선... 넌 내 상대도 안 돼.”
구승훈은 오늘 여기서 조시욱을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조시욱이든, 주해찬이든 상관없었다. 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분명 그의 아내였으니까.“내가 자리를 피할까?”조시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제야 강하리는 시선을 돌렸다.“아니요, 그냥 하던 얘기 마저 하시죠.”조시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강하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네 지목했던 그 여자, 국정원을 통해서 확인해 봤는데... 국제 쪽에서 활동하는 킬러였어. 주로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움직이던 인물인데 이번에 국내에 들어왔다는 건 좀 의외더라.”강하리는 놀란 눈으로 조시욱을 바라보았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진짜 직업 킬러였다니.“안현우가 고용한 건가요? 아니면... 임희주 쪽?”“아직 확실하진 않아. 근데 지금까지 조사로는 둘 다 그 여자랑 직접 연결된 흔적은 없어. 오히려 둘 다 접촉한 적이 없다는 쪽이 유력해.”조시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네 생각엔, 그 외에 또 누가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 같아?”‘죽이려 든다’는 말에 강하리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사실 그날 자신을 진짜로 죽이려 했다면 안현우에게 넘기기 전에 이미 끝냈을 터였다.그렇다면 그 여자의 목적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었다.강하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말했다.“전, 적이 꽤 많아요. 임희주, 안현우는 물론이고... 심씨 집안, 여씨 자매, 진시연... 어쩌면 문씨나 구씨 가문에서도 누군가는 원하고 있었겠죠.”조시욱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그래서 내가 네 주변에 사람 몇 명 붙여놨어. 걱정하지 마. 사생활 간섭 같은 건 없을 테니까. 혹시 불편하면 언제든 말해, 바로 다 뺄게.”“감사합니다.” 강하리는 짧게 대답했고 조시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근데 혹시 그거 알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랑 네 외할아버지, 전우였던 거?”강하리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자주 저희 집
노민준이 떠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꺼내 강하리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좀 나아졌어?]하지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엔 전송 실패 알림이 떴다.구승훈은 씁쓸하게 웃었고 가슴 속 깊은 통증이 일며 피를 토했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구승재가 황급히 달려왔다.“형!”구승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등으로 피를 닦고 말했다.“괜찮아. 별일 아냐. 그리고... 여초천 병세 위중하다는 소문 퍼뜨려.”“형, 제발 이러다 진짜 형수님도 못 돌려놓고 큰어머님까지 막을 수 없게 될 거야!”“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못 알아들어?”구승훈은 지친 얼굴로 키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섰고 구승재는 분노와 답답함이 뒤섞인 얼굴로 뒤를 쫓았다.“형!”하지만 그가 병원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구승훈의 차는 주차장을 벗어나고 있었다.노민준도 뒤늦게 병실에서 뛰쳐나왔고 멀어지는 차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내버려둬. 저렇게 살다가 죽겠다는데 어쩌겠냐. 그냥... 알아서 하라고 해.”구승재는 그 말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편, 강하리는 구승재의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분명히, 충분히 명확하게 말한 줄 알았다.“받아. 안 받으면 그 꼬맹이 울지도 몰라.”천아름은 옆에서 거울을 보며 입술을 정리하더니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강하리는 깊은숨을 내쉰 뒤, 전화를 받았고 구승재의 목소리는 확실히 맥이 빠져 있었다.“하리 누나.”이번엔 ‘형수님’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강하리는 마음이 이상하게 저릿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무슨 일 있으세요?”“형이... 또 병원 쪽으로 가면 한 번만 말 좀 해주면 안 될까요?”강하리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 이제 구승훈 씨랑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 사람이 올 일도 없고 와도... 저는 안 볼 거예요. 제게 부탁하지 마시고 차라리 임희주 씨에게 부탁하세요.”“형수님...”구승재는
사실 그 남자는 임희주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줄 생각이 없었다.입이 단단히 막힌 그녀의 눈엔 점점 절망이 차오르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눈물이 뚝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입가에서 다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배신할 때부터 알았어야지. 이런 꼴 당할 줄. 임희주, 감히 누굴 믿고 사모님을 배신했냐? 응?”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며 서늘하게 젖어 있었다.임희주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말하고 싶었다. 이제 안 그럴 거라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한 번만 기회만 더 달라고.하지만 남자는 그 비참한 눈빛조차 즐기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너 생각엔, 구승훈이 너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할 거 같냐?”그 말에 임희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순간의 정적. 이어지는 건, 저항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날카로운 바늘이 살을 찢고 서늘한 약물이 천천히 몸속에 스며들었다.몸부림치던 동작은 어느새 멈췄고 그의 눈빛을 따라 움직이던 임희주의 시선도 점점 흐려졌다.여초연 곁에서 오래 지낸 그녀는, 지금 이 약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완전히 무너지진 않지만 식물인간처럼 의식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 그 약은, 그렇게 사람을 파괴했다.바늘을 뽑아낸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딱 좋아. 테스트 겸 써보기엔 안성맞춤이지. 덕분에 새 약 연구도 진도 좀 나가겠네. 너한텐 마지막 명예다, 그렇게 알아.”병실 문이 다시 열렸고 하얀 가운에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그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꺼져 있던 복도 CCTV가 하나둘 다시 켜졌고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두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가볍게 경례하듯 인사를 건넸다.그 화면을 지켜보던 구승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이게, 대놓고 도발 아니고 뭐야.”구승훈도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승훈 씨, 어젯밤 그 시간대에 이상한 소리가 났고 창가 쪽으로 그림자가 스쳤습니다. 저희가 곧바로
“말하면 고통 없이 죽게 해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입 다물고 버틴다면 당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방법은 차고 넘치거든.”차갑게 말을 내뱉은 구승훈은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임희주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외쳤다.“구 대표님, 저... 저 당신 좋아했어요. 그거 알아요?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했어요...”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그저 허공을 맴돌 뿐, 아무도 듣지 않았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곧 전화를 끊었다.그런데 몇 초도 안 돼 다시 전화가 울렸고 계속해서 울려대는 진동에 결국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형수님.”구승재의 목소리에는 희미하게 반가움이 섞여 있었지만 강하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담담하고 차분했다.“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저 지금 좀 피곤하거든요. 쉬고 싶어요. 그러니까...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구승재는 멍하니 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한 줄의 메시지를 남겼다.[형수님, 생일 축하드립니다.]하지만 그 메시지조차, 아무런 응답 없이 그대로 묻혀버렸다.구승훈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담배 냄새에 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렸다.구승훈은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안 됐냐?”대답 대신, 구승재는 말없이 다가가 그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눌러 껐고 재떨이를 들고 방을 나섰다.잠시 후, 노민준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담배 끊든가 안정제 맞든가. 선택해.”구승훈은 그를 빤히 보더니 침대 위로 몸을 기댔고 노민준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너, 강하리가 유엔 인맥까지 써서 약리학자 세 명 데려온 거 알고는 있어?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 그 사람들 상담료가 어느 정도인 줄 알아? 분 단위도 아니고 초 단위로 계산된다. 다 너 살리려고 이 난리인데 넌 진심으로 그 노력을 다 무시하고 싶은 거냐?”그 말에 구승훈은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약리
요양원 아래 주차장.구승재는 허겁지겁 달려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차에 다다르기도 전에, 멀리서 한 대의 차량이 조용히 들어오는 게 보였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그는 서둘러 그 차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동시에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형, 또 담배 폈어?”구승훈은 차에서 내려 차 문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고 몸을 가누는 모습이 눈에 띄게 힘겨워 보였다.무슨 말을 하려던 구승재는 그보다 먼저 들려온 거친 기침 소리에 놀라 멈칫했다.거친 기침 소리 끝에 피비린내가 섞였고 구승훈은 겨우 참으며 목까지 차오른 피를 억지로 삼켰고 구승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담배 피지 말랬잖아. 막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했고! 형, 제발 말 좀 들어라.”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손끝을 닦고는, 조용히 밤하늘 아래 그걸 쓰레기통에 던졌다.“승재야.”“나 진짜 걱정돼서 그런 거야.”구승훈이 피식 웃었다.“죽진 않아.”그러고는 걸음을 옮기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임희주 그쪽은?”구승재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금 구승훈이 던진 손수건이 들어간 쓰레기통을 힐끔 보았다가, 이내 형의 뒤를 따라붙었다.“오늘 또 준봉이 신문했는데 여전히 같은 말만 해. 형 얼굴 한 번 보면 그때야 입 열겠다고.”구승훈은 고개만 끄덕이며 요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구승재는 그 뒤를 따르며 말했다.“근데 진짜로 누워서 쉬어야 해. 안 그러면 죽는다잖아.”구승훈은 짧게 웃었다.“폐색전증 온다고 했잖아! 이건 웃을 일이 아니라고!”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반응이었고 결국 구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비켜섰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밤의 요양원은 유독 조용했고 그만큼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병실 문이 열리는 순간, 임희주는 갑작스럽게 눈을 떴고 눈가엔 놀람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구승훈은 창가에 서 있었다.“하고 싶은 말 남았어요?”임희주는 눈가가 붉어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