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라는 눈을 부릅뜨고 강하리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그녀는 절대로 믿지 않았다. 강하리와 구승훈이 고작 거래 관계일 뿐이라는 것을.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구승훈은 점점 강하리를 신경 쓰고 있었고 이제는 그 정도가 심지어 자신에게 신경 쓰는 정도를 뛰어넘은 것 같았다.그런 게 아니라면 구승훈은 인터넷에 자기가 솔로라고 공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녀가 커피를 뒤집어썼는데도 강하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어떻게 고작 거래 관계란 말인가? 속을 만한 사람을 속여야지!게다가 강하리와 구승훈의 어릴 때 일만 해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하리는 똑똑히 알고 있을 것이다.구승훈은 그저 강하리와 거래 관계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강하리는 분명 구승훈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다!송유라는 화가 치밀어 아드득 이를 갈며 강하리를 째려봤다.“그딴 말 내가 믿을 것 같아? 강하리, 내가 충고하는데 헛된 꿈은 꾸지 않는 게 좋을 거야!”“송유라, 두 사람 곧 약혼할 거라며 굳이 나한테 이런 말 할 필요가 있어?”강하리는 픽 실소를 흘렸다.“축하해, 두 사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행복하길 바랄게. 이제 만족해?”말을 마친 강하리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밖에 나온 그녀는 그제야 불안감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진짜 아무렇지도 않다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그녀가 3년이나 따라온 남자인데, 몇 년이나 마음속에 품고 있던 남자인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내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그저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기 위한 방패막이일 뿐이다.그렇다고 구승훈이 약혼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그녀가 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물어볼 수 있는 신분조차 아닌데 말이다.깊은숨을 들이마신 강하리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뒤로하고 돌아서서 옆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그녀를 본 승재가 반갑게 손을 흔들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강 부장님,
“가고 싶지 않아요.”강하리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커피를 휘저었다. 그녀는 구승훈의 생일 축하연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가서 뭐 하는데? 구승훈과 송유라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지켜봐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두 사람이 사랑의 결실을 맺는 걸 축복해 줘야 한단 말인가.구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카페에 걸려있는 TV에서 연예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구씨 가문 수장이 다시 한번 첫사랑과 함께 행사에 참석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커플 옷을 입고 달콤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데요. 아마도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눈을 치켜뜬 강하리는 마침 TV에서 나오는 사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진 속, 송유라는 검정 피시 테일 드레스를 입고 검정 슈트를 차려입은 구승훈의 곁에 나란히 서있었다.한 사람은 고개를 쳐들고 한 사람은 시선을 아래로, 확실히 뉴스에서 말하는 것처럼 꿀이 떨어질 듯한 눈빛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강하리는 언뜻 보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 모습에 승재는 눈살을 찌푸렸다.“강 부장님, 형은 아니...”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강하리는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상관없어요, 승재 씨. 저에게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전 지금 오직 아이 일만 생각하고 있어요.”입만 달싹이던 구승재는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강하리는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승재 씨, 그일 꼭 좀 부탁드려요. 전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요.”승재가 작별 인사를 하기도 전에 강하리는 이미 자리를 떠났다.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이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회사로 돌아온 강하리는 사무실에서 한 무리의 어린 여자들이 한창 토론하는 소리를 들었다. 강하리는 단번에 구승훈의 약혼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쓴웃음을 삼킨 그녀는 그제야 모두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안예서가
노민우는 살짝 민망해졌다. 그가 강하리에게 물어보자마자 구승훈이 왔기 때문이다. 꼭 구승훈이 없는 빈틈을 파고들려다가 현장을 잡힌 기분이었다.하지만 노민우가 강하리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은 구승훈도 일찌감치 눈치챘을 것이다. 예전에는 계속 마음을 들춰내지 않았지만 이제 구승훈이 곧 약혼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노민우는 용기를 내서 고백했다.그러나 지금 구승훈의 태도를 보니 약혼한다고 하더라도 강하리를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노민우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구승훈과 대적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승훈아, 왔어? 그럼 난 먼저 갈게.”말을 마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구승훈의 시선이 그를 지나쳐서 강하리에게로 향했다.“노 대표가 가는데, 강 부장은 아무 말 안 해?”입을 꾹 다물고 있던 강하리는 잠시 후에야 고개를 돌려 노민우에게 인사했다.“안녕히 가세요, 노 대표님.”고개를 끄덕인 노민우는 구승훈을 보며 말했다.“다음에 봐, 승훈아.”구승훈이 아무 대답이 없자 노민우는 멋쩍은 듯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눈을 치켜뜬 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노민우 씨와는 정말 우연히 만났을 뿐이에요.”구승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그래? 정말 이런 빌어먹을 우연이 다 있네!”미소를 지은 강하리는 눈을 치켜떴다. 눈동자에는 불필요한 감정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그러게요. 정말 기막힌 우연이죠. 저와 대표님도 이렇게 우연히 만났잖아요?”구승훈은 어두운 눈길로 눈앞에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어색해 보이는 강하리의 태도에 구승훈은 도저히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사실 오늘뿐만 아니라 그때 두 사람이 유산한 일로 다툰 이후로 그녀는 쭉 이런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더욱 선명했다.“강하리, 그딴 작은 일로 자꾸 불쾌하게 트집 잡지 마!”강하리는 씁쓸한 웃음을 토해냈다.작은 일이라고?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의 눈에는 그저 사소하고 하찮은 일로만 보일 것이다.
강하리는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명절이라 그런지 길이 다소 막혔다. 길가에는 손잡고 다니는 커플들이 즐비했다. 이때 갑자기 구승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역시나 송유라를 위해 특별히 설정한 벨소리였다.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전화를 받았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다 오빠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안 갈 거야.”대답하자마자 구승훈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강하리는 입꼬리가 살짝 떨려왔다.“죄송해요, 제가 대표님 데이트를 방해했네요.”구승훈은 그녀를 보며 냉소를 흘렸다.“뭐 피차일반 아닌가. 나도 강 부장 데이트를 방해했잖아?”그를 슬쩍 쳐다본 강하리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차가 아파트 아래에 멈춰 섰다. 강하리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 할 때 구승훈이 갑자기 잠금장치를 눌렀다. 그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말했다.“그렇게 서둘러 내릴 필요 없어.”그러더니 강하리를 안아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두 사람은 그날 이후로 한 적이 없었다.이 이틀 동안 구승훈은 계속 기분이 아주 나빴다. 그날 밤 강하리의 눈물과 낯선 모습이 비수가 되어 그의 마음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그는 항상 자신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두 번 끊임없이 이 여자로 인해 크나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지금은 아예 마음속에서 커다란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구승훈은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헤집으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곧이어 커다란 손이 그녀의 옷 아래를 비집고 들어왔다. 순간 강하리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됐다.“돌아가서 하면 안 돼요?”구승훈은 피식 웃었다.“안 돼.”컬리넌이 거의 한 시간 동안 흔들리더니 그제야 멈췄다. 지쳐버린 강하리는 팔을 들어 올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가는 내내 그녀의 휴대폰이 계속 시끄럽게 울려대자, 구승훈은 조금 짜증이 나는 듯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손연지가 문자를 여러 개 보냈다. 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너의 친구는 정말 한가한가 봐.”강하리는 입
구승훈은 어두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 깨끗하고 예쁜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예전에 구승훈은 강하리의 웃는 얼굴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미소가 너무 거슬렸다. 구승훈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날 떠나고 싶어?”강하리는 그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졌다.구승훈은 그녀의 턱을 그러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강하리, 내가 말했지. 내 동의 없이는 날 떠날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이 말 영원히 기억하고 있기를 바라.”말을 마친 그는 강하리의 턱을 놓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씻고 침대에 누웠다.다음 날.강하리가 기분이 안 좋을까 봐 걱정된 손연지는 일부러 휴가까지 내고 강하리를 찾아왔다.사실 강하리는 괜찮았지만, 굳이 손연지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침 일찍 쇼핑하러 나갔다.말이 쇼핑이지, 손연지는 돌아다니는 내내 계속 강하리의 안색만 살폈다. 강하리는 손연지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살짝 어이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나 괜찮아.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돼.”손연지는 그 말을 듣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구승훈 그 개... 바보 같은 자식 눈이 삔 게 틀림없어. 아니면 이렇게 착한 너를 옆에 두고 어떻게 송유라 그 여우 같은 년을 선택할 수 있지.”강하리는 피식 웃었다.“연지야, 우리 사이는... 처음부터 계약서에 똑똑히 적혀 있었어. 내가 원망할 것도 없어.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우리 관계만 잘 기억하고 있으면 괜찮아. 그 사람과 송유라가... 약혼하든, 결혼하든 난 신경 쓰지 않아.”예전에 강하리가 이렇게 말했으면 손연지는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하리가 오랜 시간 동안 구승훈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 그녀는 강하리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을까?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겠지.손연지는 마음이 찢어
미간을 잔뜩 찌푸린 강하리는 구승재가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지 알 것 같았다.“승재 씨, 전 가고 싶지 않아요.”그러자 구승재는 눈썹을 찡그렸다.“연회에 가려는 게 아니에요, 강 부장님. 그냥 킹스 클럽에 놀러 가는 거라고요. 진짜예요.”강하리는 구승재가 대체 무슨 의도로 찾아왔는지 몰랐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흥미도 없었고, 놀러 갈 기분도 아니었다. 강하리의 이런 모습을 본 구승재는 마음이 답답해졌다.“강 부장님, 내가 강 부장님을 해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날 한 번만 믿어봐요, 네?”강하리는 자신을 설득하는 구승재를 보고 결국 동의했다. 구승재야말로 지금까지 그녀를 제일 잘 챙겨준 사람이었다.강하리는 간단히 화장하고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저 심플한 옷차림이었지만, 구승재는 넋 놓고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강하리 같은 여자를 옆에 두고도 형은 어떻게 송유라를 바라볼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송유라보다 몇 배는 더 예뻤다.“가요.”깊은숨을 들이마신 강하리는 그를 따라갔다. 구승재는 정말로 그녀를 데리고 킹스 클럽으로 갔다.그러나 룸 문을 열던 강하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연회장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전부 이 룸 안에 있었다. 구승훈과 그의 어중이떠중이 친구들도 말이다.강하리를 본 구승훈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는데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강하리를 보았을 땐 순간 얼굴에 싸늘한 냉소가 번졌다.“강 부장이 여긴 왜 왔어?”남자는 무심한 태도로 물었다.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야유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안주인 같은 자태로 앉아있던 송유라도 강하리를 보자 안색이 싹 변했다.구승재는 강하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강 부장님, 미안해요. 나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요. 뭐가 문제인지 형이 어젯밤 갑자기 생일 축하연을 취소한다고 통보했거든요.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요. 그
구승훈의 목소리를 들은 강하리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걸어 나갔다.여기에 단 일 초라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 가는 것이 몹시 우스워 보일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오자마자 다시 가면 그녀는 진짜로 여기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안현우도 강하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지만, 강하리 또한 그를 좋게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굳이 여기에 남아서 불쾌감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그리고 구승훈은...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첫사랑을 옆에 두고 있으면서 강하리 더러 여기 남아서 첫사랑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이라도 하란 말인가?허리를 곧게 편 강하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계속 가려고 하는 그녀를 보자 구승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구승재는 그 상황을 보고 얼른 뛰어가서 강하리를 붙잡았다.“강 부장님, 여기까지 와서 왜 벌써 가려고 그래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승재 씨, 미안하지만 난 이곳이 정말 싫어요.”승재는 눈썹을 찌푸리고 구승훈을 흘끗 쳐다봤다. 구승훈이 그녀를 잡길 바랐지만, 구승훈은 그저 어두운 눈빛으로 강하리를 바라만 볼 뿐, 더는 말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이때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보고 있던 안현우가 불쑥 끼어들었다.“승재 씨, 가는 사람 붙잡지 말고 그냥 보내요. 애초에 저 여자가 낄 자리가 아니었어요. 기분 잡치게 하려고 데려온 거예요?”보다 못한 노민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안 대표, 그만해요. 강 부장님이 안 대표를 보러 온 것도 아니잖아요.”그러자 안현우는 쯧, 혀를 차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노민우를 힐끔 쳐다봤다.“노 대표, 언제부터 강 부장이랑 사이가 그렇게 좋았어요?”노민우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이왕 온 김에 좀 놀다 가요, 강 부장님. 오늘 승훈이 생일이잖아요
“차에서 기다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바로 차에 탔다. 구승훈은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송유라에게 건넸지만, 그녀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한숨을 토해 낸 구승훈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직접 송유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오늘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강하리는 고개를 떨구고 더는 차창 밖을 쳐다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구승훈은 드디어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그는 강하리를 흘끗 쳐다보더니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강 부장 진짜 점점 대단해져 가네.”강하리는 그가 자신이 그의 앞에서 노민우 쪽으로 걸어간 것을 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일에 대해 딱히 설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땐 확실히 구승훈 옆에 앉기 싫었을 뿐이다.시선을 아래로 한 강하리는 그 문제로 더 논쟁하지 않고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저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순간 구승훈의 눈살이 잔뜩 찌그러졌다.“왜? 억울해?”강하리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아니요.”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구승훈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아파트로 돌아온 구승훈은 케이크도 없는 텅 빈 식탁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강 부장, 올해는 밥 차릴 생각도 없나 봐?”강하리도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어차피 차려도 안 드실 거잖아요.”눈을 가늘게 뜬 구승훈은 한참 조용히 있다가 다시 말했다.“가서 국수 한 그릇 끓여줘.”말을 마친 그는 옷을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제 자리에 서서 한참 고민하던 강하리는 결국 주방으로 걸어갔다.국수를 다 삶자 구승훈도 욕실에서 나왔다. 식탁 위에 놓인 그릇을 보니 이번에도 강하리가 매해 그에게 해주었던 잔치국수였다.구승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안색이 드디어 밝아졌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식탁 앞에 앉아 잔치국수를 먹었다.한편 강하리는 돌아서서 욕실로 향했다. 다 씻고 나오자 구승훈은 이미 침실에 들어와 있었다.그는 창문 앞에 서서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강하리의
구승훈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밤에 보상해 줄래?]손연지가 왔다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답장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안예서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큰일 났어요.”강하리는 잠시 멈칫했다.“뭔데, 천천히 얘기해 봐.”“오늘 아침 일찍 우리 회사 홍보 사이트가 해킹됐는데 사이트에 온통 대표님이 스폰 받았다는 이상한 댓글이 가득해요.”안예서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고 강하리는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알겠어.”전화를 끊고 회사 사이트에 들어가니 그녀의 눈에 온통 적나라한 욕설들이 가득 들어왔다.스폰을 받았다는 사람도 있고 몸을 대주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구승훈과 송유라 관계를 그녀가 망쳤다는 사람도 있었다.송유라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녀의 팬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지금 JM의 사이트에도 그들이 가득했다.[내연녀는 내연녀지. 뭐라 해도 해명하지 못해.][그냥 내연녀도 아니고 몸 팔아서 JM 파트너 자리를 꿰찼는데 역겹지도 않아?][JM은 유엔 산하의 번역 회사인데 저런 사람이 대표야?][허, 어떻게 그 자리로 올라갔는지 누가 알겠어. 또 유엔에 어느 높으신 분을 모셨겠지.]강하리는 댓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버렸다.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가 손연지에게 설명한 뒤 회사로 차를 몰고 가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차 안에서 핸들을 잡은 강하리는 문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번에도 누가 자신을 노린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어제의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나머지는 진태형의 해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곧장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안예서가 반갑게 맞이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리는 차 안에서 잠든 손연지를 바라보다가 노민우의 전화를 받았고 노민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묻어났다.“강하리 씨, 손연지한테 연락이 왔어요?”“나랑 같이 있는데 무슨 일 있어요?”노민우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같이 있어 줘요.”강하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냈다.“노민우 씨, 연지는 잘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공항에 데리러 갔을 때 밤새 운 것 같았어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든 연지를 이렇게 울렸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거예요.”노민우가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연성으로 찾아갈 기세로 강하리는 유난히 단호하게 말했다.노민우는 다소 억울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답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손연지한테 다 설명할게요.”강하리는 손연지를 데리고 그녀와 구승훈의 저택으로 향했고 비몽사몽 눈을 뜬 손연지는 눈앞에 가득 찬 리시안셔스와 정원 뒤편에 있는 성처럼 생긴 저택 건물을 보았다.“세상에, 하리야. 여기가 너 사는 곳이야?”강하리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살짝 안도했다.“그런 셈이지.”손연지는 차 문을 열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위층과 아래층을 몇 번이나 돌아보더니 갑자기 나와서 강하리를 껴안았다.“자기, 날 먹여 살려줘. 마침 나도 일자리 잃었는데.”강하리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옅어졌다.“일자리를 잃었다니 무슨 말이야?”손연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들떴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도 없고 일자리도 잃었어. 부모님도 나 때문에 창피당했고.”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손연지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었다.“괜찮아, 내가 복수해 줄게.”손연지는 코끝이 시큰거렸다.“하리야, 역시 너밖에 없어. 개자식들은 하나같이 나쁜 놈들이야!”강하리는 손연지를 껴안고 위로하듯 속삭였다.더 이상 구체적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객실로 데려가 샤워할 수 있도록 욕조
구승훈은 잠든 강하리의 얼굴을 보며 참지 못하고 다가가 입술에 뽀뽀했다.“자기야, 미안해.”강하리의 속눈썹이 두 번 파르르 떨리더니 굳게 감고 있던 그녀의 눈가가 시큰거렸다.구승훈은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리를 껴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 줄이야.겨우 반쯤 잠이 들었을 때 문득 강하리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구승훈, 나도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구승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대로 꿈속으로 빠져들어 갔다.다음 날 아침, 강하리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였다.슬쩍 확인한 강하리가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 들자 저쪽에서 손연지의 코 막힌 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이틀만 거기로 놀러 가도 돼?”강하리는 당황했다.“당연하지. 언제 오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나 지금 B시에 있어.”강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구승훈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자기야, 방금 남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손으로 망칠 뻔한 거 알아?”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구승훈, 괜찮아?”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안 괜찮아. 강 대표님이 호 불어줘.”농담하는 걸 보니 괜찮나 보다.“그러게 누가 함부로 뻗으래.”구승훈은 웃으며 그녀의 귀로 다가갔다.“오늘 밤 다리로 해볼까?”강하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좀 진지하게 굴 수는 없어?”구승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망가졌는지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어?”강하리는 손연지 때문에 그와 더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향했다.“손연지, 너 지금 어디 있어?”“아침부터 내 앞에서 애정행각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니?”농담이었지만 손연지의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기에 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손연지가 강하리에게 위치를 보냈고 강하리는 서둘러 샤워를 마친 뒤 문을 나섰다.구승훈이 그녀와 동행하려는데 구승재가 갑자기 회사
구승훈의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꿈틀거리다가 겨우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강하리의 손가락을 잡은 채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온실 속 화초가 아니야.”소중한 보물이다.이미 자신 때문에 너무 많은 고생을 한 그녀였기에 더는 그녀가 걱정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도 더더욱 원치 않았다.그저 그녀가 밝게만 지내길 바랐다. 여초연도, 구동근도, 자신의 몸도 더는 그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자기야, 날 믿는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잠깐만 기다리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할게. 알았지?”조금만 더 시간을 줘서 정상으로 돌아가거나 완전히 포기하게 됐을 때 모든 걸 이 여자에게 말할 거라고 다짐했다.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알았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걸어갔고 구승훈은 다소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그는 강하리가 여전히 속상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구승훈은 안도하는 동시에 마음이 점점 더 씁쓸해졌다.여초연이 대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는지 모르겠다.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자신이 여초연의 인생을 망쳤으니 본인도 똑같게 망가뜨리겠다고 생각하는 걸지도.하지만 구승훈은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이대로 그녀의 손에 망가질 생각도 없었다.그녀가 그를 낳은 이상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다.시선을 내린 구승훈이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치료하는 데 협조할게.]노민준은 곧장 전화를 걸었고 구승훈이 발코니로 가서 전화를 받으니 그의 무기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잘 생각했어.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구승훈은 무심하게 대꾸했고 노민준은 약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웬일로 구승훈이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전화를 끊기 전 노민준이 갑자기 물었다.“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야?”구승훈은 방에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입꼬리가 무의식적으로 올라갔다.“힘들게 얻은 지금의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겠지.”전화를 끊고 구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남아 있어도 기꺼이 노력해 보고 싶었다.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강하리의 말에 심문석은 한심하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저도 모르게 얼굴엔 웃음이 번졌고 벌써 결혼식 장소까지 고심하고 있었다.“너희 둘이 또 아이를 낳으면 그땐 할아버지가 키우마.”강하리의 표정이 잠깐 굳어졌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대꾸하며 넘어갔다.식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구승훈을 보며 강하리가 물었다.“여기 안 있을 거야?”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 보내기 싫어?”입술을 달싹이며 빤히 상대를 바라보던 강하리는 그의 눈빛에서 그동안 줄곧 그가 회피하던 답을 찾으려는 듯했다.비록 구승훈은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빠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강하리는 이 남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바빠도 이렇게까지 욕구를 참는 사람이 아니었고 관계를 갖지 않아도 늘 그녀를 탐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요 며칠 그녀가 약에 취했을 때를 제외하고 말만 능글맞게 할 뿐이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구승훈을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나랑 연정이가 같이 가도 돼?”멈칫한 구승훈이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더 원하는 거야?”강하리가 웃었다.“응.”구승훈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고 그가 거절하기도 전에 강하리의 말이 다시 들렸다.“방금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좀 무서워. 구승훈, 여기 남던지 내가 따라갈게.”강하리가 말을 마치며 허리를 감싸자 구승훈의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이걸 어떻게 거절하나.구승훈은 결국 남기로 했고 그가 이곳에 머물자 백아영은 연정이를 자신의 방으로 곧장 데리고 갔다.구승훈이 나가서 노민준에게 연락하고 돌아왔을 때 강하리는 이미 샤워를 끝낸 뒤였다.얇은 잠옷만 입고 있는 몸에는 구승훈이 새긴 흔적이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구승훈은 문 앞에 서서 가슴에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몸이 견딜 수 있겠어?”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화장대 거울로 가서
구승훈은 걸음을 멈칫하며 뒤돌아 밖을 내다보았다.밖에서는 여전히 이정숙이 진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며 화가 잔뜩 난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구승훈은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그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가상의 번호로 전송된 사진은 다름 아닌 강하리와 주해찬이 방에서 포옹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사진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구승훈은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걸었다.“나문빈 씨, 가상 번호 위치 좀 확인해 줘요.”나문빈은 혀를 찼다.“둘이 날 노예처럼 부려 먹기로 작정한 겁니까?”얼마 전 임명우와의 계약 때문에 화가 난 강하리는 그를 남미로 발령 보내 시장 개척에 앞장서도록 했고 며칠 동안 그는 바빠서 피를 토할 지경인데 이젠 구승훈까지 못살게 굴고 있었다.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내 아내를 화나게 했습니까?”나문빈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임명우가 특별히 강하리와 만나야한다는 조건을 걸었으니 분명 딴마음이 있다는 건데 이걸 구승훈이 알게 되면 그에게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흠, 그 번호 보내요. 이런 작은 일은 구 대표님께서 직접 연락할 필요 없이 앞으로 비서 통해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그렇게 말한 뒤 나문빈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나문빈과의 통화를 마친 뒤 고개를 들어 진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마침 고개를 돌린 진시연의 두 눈엔 억울함이 가득 차 있었고 구승훈의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진시연이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얼굴에 남아있던 서글픈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누구나 소유욕이 있다.특히 구승훈 같은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껴안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지금은 드러내지 않더라도 이 일은 그의 마음속 가시로 박히게 될 것이고 진시연은 이 가시가 뿌리를 내리고 썩기만을 기다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씨 가문 생일 잔치에서 벌어진 소동은 B시 전역에 퍼졌다.심씨 가문 사람들도 자연
“여사님, 못 때린 걸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아니면 지금쯤 구급차 부르셔야 했을 거예요. 제 주먹 맛보고 싶지는 않으시겠죠?”이정숙은 너무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다.“구승훈, 언제부터 네가 우리 진씨 가문 일에 참견했어?”구승훈은 혀를 차며 강하리의 손을 잡아당겨 이정숙 앞에 내밀었다.“보셨죠? 결혼반지. 강하리는 이제부터 제 약혼녀입니다.”구승훈의 말에 이정숙이 당황했고 옆에 있던 진시연은 우는 것도 잊은 채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이정숙은 구승훈에게 말이 통하지 않자 다시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하리, 난 네 할머니야!”강하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나한테 약이나 먹이는 할머니 따위 둔 적 없어요.”이정숙은 깜짝 놀라며 진시연을 흘끗 쳐다보았고 진시연이 달려와서 이정숙의 앞을 막았다.“하리 씨, 어떻게 할머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강하리가 비웃었다.“진시연 씨 대신 죄도 뒤집어쓰는데 나는 말도 한 마디 못 하나요?”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리 씨, 지금 나 의심하는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피식 웃었다.“아빠도 날 의심하고 하리 씨도 날 의심하네요. 두 사람은 진짜 부녀 사이고 전 그저 사랑하고 돌봐줄 사람이 없는 고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나를 진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싶은 거죠? 내가 나갈게요.”이정숙은 그 말에 서둘러 진시연을 껴안았다.“시연아, 그런 말 하지 마.”강하리는 눈꼴신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 두 사람을 지나쳐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누구든 가만 안 둬요.”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시연을 돌아보았다.“그리고 진시연 씨, 앞으로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요. 매번 남의 약혼자한테 들러붙는데 내연녀라도 되고 싶은 거예요?”진시연의 얼굴이 창백했다.“하리 씨, 아니에요. 난 그저 F대륙에서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낸 사람이라 구승훈 씨한테 고마울 뿐이에요. 하리 씨는 이 정도 일도 이해 못 해주는 건가요?”강하리가 피식 웃었다.“미안한데 난
경찰서에서 나온 강하리는 구승훈이 차 옆에 서서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남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고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강하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원래는 구승훈이 통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가가려고 했는데 구승훈은 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듯 발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남자의 몸에서 느껴지던 차갑고 무거운 기운이 녹아내리는 듯했고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그는 상대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 전화를 끊은 뒤 이쪽으로 걸어왔다.“어떻게 됐어?”입술을 달싹이던 강하리는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남자의 질문에 입가에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별것 없었어. 일단 돌아가자.”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직도 마음이 불편해?”강하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처음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정말 괜찮았다.이젠 더 이상 주해찬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이 사건 이후로 그에게 빚진 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사실 이건 좋은 일이었다.적어도 더 이상 구승훈에게 미안할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구승훈이 손가락으로 살며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그럼 앞으로 다른 남자 생각 그만해. 네 남편 질투해.”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앞으로 다른 여자 좀 그만 끌어들일래?”구승훈은 살짝 멈칫하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질투해?”강하리는 손을 내밀어 문을 열고 차에 탔다.구승훈은 시선을 내린 채 웃다가 휴대폰의 통화 기록을 흘끗 훑어보고는 노민준의 이름을 삭제한 뒤 강하리를 따라 차에 탔다.그대로 차를 몰고 심씨 가문으로 돌아가는데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 앞이 가로막혔다.화려한 옷을 갈아입지 않은 이정숙이 굳어진 얼굴과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심씨 가문 입구에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진시연이 있었다.진시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이정숙은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두 사람을 본 구승훈의 표정도 굳어지며 위로하듯 강하리의 손을 꽉 잡
사실 그동안 주해찬이 달라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온화하고 따뜻했던 남자가 근래 왠지 모르게 강압적인 집착을 보였다.구승훈을 좋아하지 말라던 말도, 자기가 낫지 않으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냐고 물었던 것도...다만 강하리는 그를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리를 다쳐서 마음이 불안한 것이라고 여겼다.강하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무슨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닐까?”피식 웃은 구승훈이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나쁜 놈이란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그렇게 말한 후 그는 강하리를 밖으로 끌어당겼다.“어디 가?”“그 자식 만나러.”강하리가 걸음을 멈칫했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안고 차에 태웠다.“가서 네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봐.”강하리는 심호흡하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언젠간 주해찬을 만나러 가야 했으니까.가는 길에 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구승훈은 마음이 괴로웠다.고작 주해찬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할 가치가 있는 걸까.차가 경찰서 앞에 멈춰 선 뒤 구승훈이 갑자기 강하리를 끌어당기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왜 그래?”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따가 꼭 왼손 보여줘.”“...”주해찬은 강하리만 기다린 것처럼 보였고 강하리는 유치장 문 앞에 서서 낮게 불렀다.“선배.”주해찬은 강하리를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하리야, 그래도 날 보러 와줘서 기쁘네.”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주해찬을 바라보았고 가뜩이나 조용했던 공간에 적막이 감돌았다.문득 주해찬의 시선이 강하리의 손으로 향했다.구승훈의 말처럼 한심하게 일부러 왼손을 보여주려던 건 아니지만 손가락에 낀 반지는 여전히 주해찬의 눈에 들어왔다.그가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랑 결혼해?”강하리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되물었다.“왜 그랬어요?”주해찬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면서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때 주해찬이 쓴웃음을 지으며 갑자기 입을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