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리, 마님을 탐하지 마십시오: Chapter 11 - Chapter 20

70 Chapters

제11화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런데도 차분하고 너그러운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마치 어젯밤처럼.임우진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속셈 또한 뻔했으며 제후 저택의 권세를 빌리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자 못마땅한 느낌이 들었다.“아까도 말했지만 부인의 말이 곧 내 지시이니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임우진의 소맷자락이 펄럭였고, 곧이어 싸늘한 목소리가 양진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두 번째네.”두 번째라니?하지만 그는 해명할 생각이 없는 듯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양진아는 마당을 가득 채운 혼수를 바라보며 아리송한 말은 일단 제쳐두고 임태원에게 명령했다.“사람을 불러 물건들을 지키게 하여라. 아버님 어머님께 아뢰고 할아버지까지 뵙고 나서 규정을 만들어 어떻게 할지 정하도록 하겠다.”“알겠습니다!”임태원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우르르 마당에 몰려들었다.무시무시한 기세에 양진아는 넋을 잃었고, 안정미와 안순자도 절망에 빠졌다.양진아를 바라보는 두 여자는 분노와 울분이 차올랐지만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그리고 여동생과 할멈이 돌아가서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동행할 자가 필요할 것 같구나. 오늘에 있었던 일에 대해 확실히 설명하고 제후 저택이 누명을 뒤집어쓰는 일이 없게 하여라.”임태원이 서둘러 대답했다.“작은 마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직접 두 분을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그렇다면 다행이구나.”양진아는 입꼬리를 올리고 씩씩거리며 떠나가는 안정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역시 운명은 돌고 도는 법이다.이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드디어 전생의 팔자를 고쳤고, 힘들었던 나날을 더는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했고 남은 인생은 아직 길었다.경혜는 눈물을 흘리는 양진아를 보자 걱정스럽게 물었다.“아씨, 혹시 첫째 마님께서 원망하실까 봐 그러는 겁니까?”양진아는 어리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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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이내 본채로 돌아와 보니 이선화만 홀로 있었다.“어머님, 며느리 왔습니다.”양진아는 조신하게 걸어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물론 속으로는 조마조마했다.마당에서 안정미와 실랑이를 벌인 것도 모자라 제후 저택까지 끌어들였으니 무슨 벌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밑반찬이 맛있더구나.”하지만 예상외로 이선화는 마당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감사합니다. 만약 입맛에 맞으시면 나중에 다시 만들어드리겠습니다.”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자 양진아는 서둘러 계집종의 손에서 찻주전자를 받아 들고 차를 따라주었다. 그러고 나서 깨끗한 손수건도 건네주었다.이선화의 눈썹이 까딱했다. 이내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돌려준 다음 느긋하게 말했다.“우리는 그렇게 꽉 막힌 집안이 아니란다. 우진의 부인으로서 부군을 잘 모시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겠느냐? 제후 저택의 며느리는 요리나 바느질에 소질이 없을지언정 현명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그리고 곁눈질로 생각에 잠긴 양진아를 힐긋 쳐다보더니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하오나 이미 시집온 이상 제후 저택의 일원으로서 얼굴에 먹칠하는 짓은 하지 말거라. 물론 우리도 너를 망신시키는 일은 안 할 것이다.”이선화는 결코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외모는 고상하고 기품이 흘러넘쳤고, 비록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오히려 더 위엄이 있어 보였다.양진아를 훈계하는 동안 방안의 계집종들은 감히 찍소리도 못 냈다.그러나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았다. 상대방이 진심으로 충고하는 건지 아니면 트집을 잡은 건지 어찌 모르겠는가?“말씀 감사합니다. 반드시 명심하여 제후 저택에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이선화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양진아가 이렇게 고분고분할 줄은 몰랐고, 쓴소리를 더 하려고 했으나 순순히 꼬리를 내린 모습을 보니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결국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됐다. 내 시중은 들 필요 없으니 방으로 돌아가거라. 우진이가 집에 있는 이상 부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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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마당으로 돌아온 양진아는 임우진이 서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민 끝에 직접 차를 끓여 서실로 향했다.임우진의 호위무사 남혁수가 문밖을 지키다가 양진아를 보자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마님, 오셨습니까? 나리께서 독서 중이십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말을 마치고 나서 고분고분 문을 열어주고 안으로 모셨다.양진아는 눈을 깜빡였다. 서실처럼 중요한 장소에 보고도 없이 함부로 드나들어도 되는 건가?하지만 남혁수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바라보자 물어보기도 애매해서 경혜의 손에 든 다과를 받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옆에 서 있는 경혜는 바보처럼 헤실거리는 호위무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아씨는 나리께 다과를 드리러 가는 건데 왜 본인이 더 신났죠?”“당연하지. 나리께서 나보다 더 기뻐하실지도 몰라.”남혁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경혜는 당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네?”“그러니까...”말을 이어가다가 뒤늦게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정색했다.“어차피 말해줘도 넌 몰라. 나리와 마님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서 그랬어.”“그쪽만 좋으면 됐지요, 뭐.”경혜는 몰래 눈을 흘겼다. 단지 나리를 지키는 호위무사가 이렇게 듬직하지 못해서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변덕이 이리 심해서야, 원.남혁수는 묵묵부답하는 경혜를 힐긋 쳐다보더니 어깨를 콕콕 찔렀다.“네가 모시는 분이 이미 시집을 갔으니 마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단다. 계속해서 아씨라 불렀다가 나중에 할멈의 귀에 흘러 들어가면 혼날지도 몰라.”그러고 나서 의혹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에 목소리를 낮추었다.“제후 부인의 시중을 들어주는 할멈은 규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야.”“충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꼭 명심하겠습니다.”경혜가 활짝 웃자 남혁수는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양진아는 다과를 들고 서실에 들어섰다.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을 지나자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긴 다리를 착생 위에 걸치고 앉은 임우진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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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마님, 혹시 나리와 싸우셨습니까?”경혜는 양진아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양진아가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 임우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젯밤 안정미로 착각하고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상대방이 마음에 없는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를 대하는 태도도 피차일반이라 아마도 양씨 가문의 적녀와 혼인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전생에 임우진은 신혼 둘째 날에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북강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선화는 근심과 걱정에 시달려 집안일까지 미처 돌보지 못했다. 결국 안정미가 제후 저택의 대소사를 맡게 되면서 나중에는 제후 부부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지경에 이르렀다.이번 생에는 부인이 바뀐 탓인지 아직 전장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북강이 분쟁 지역인 만큼 언제든지 출정할 가능성이 있다.현재로서 그가 집을 떠나기 전에 합방하여 아이라도 가지면 더할 나위 없었다.그래야만 제후 저택에서 굳건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양진아는 불쾌한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경혜에게 말했다.“부엌 식모들에게 저녁으로 보양식을 준비하라 하여라. 그리고 남혁수를 찾아가 함께 식사하도록 나리를 모셔 오라고 전하거라.”서실.남혁수는 다시 돌아온 경혜가 전해준 말을 듣고 나서 즉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주인에게 보고하러 갔다.“제 말 맞지요? 마님은 역시 나리 생각뿐이었습니다.”그제야 임우진의 안색이 한결 누그러졌다. 잠시 후 본채로 돌아가 식사하면서 양진아에게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양진아는 연빨강 비단 내의를 입고 겉에 허리를 강조하는 빨간색 평상복을 걸친 다음 화장까지 연하게 했다.마치 갓 피어난 연꽃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웠으며 풋풋하고 요염한 매력을 겸비했다.“마님, 너무 예쁘십니다.”두 계집종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양진아를 모셔 오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진작에 꾸미고 다니지 그러셨어요.”시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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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임우진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컴컴해졌다.머나먼 하늘을 물든 노을이 어느새 구름에 가려졌고 밤이 찾아오면서 마당에 등불이 하나둘씩 커졌다.창문에는 여전히 장식품으로 가득했고, 고개를 숙여 몸에 걸친 빨간색 의복을 내려다보자 문득 꿈처럼 느껴졌다.정말 양진아와 결혼한 게 맞나?방에 들어서서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여자를 마주하는 순간 그제야 비현실적인 느낌이 서서히 사라졌다.불빛을 받아 한층 요염해진 모습이 기억 속 밝고 당당했던 형상과 겹치면서 임우진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큼!”이내 목을 가다듬고 발걸음을 옮겼다.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인기척을 따라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양진아의 시선을 느낀 임우진은 긴장한 나머지 다리가 휘청거렸다.이를 본 몇몇 계집종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추월은 걱정을 제외하고도 한심한 기색이 역력했다.밥상 앞으로 다가간 임우진은 왠지 모를 침체된 분위기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마침 물어보려고 입을 떼려던 찰나 양진아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다들 이만 물러가거라.”계집종들이 줄지어 자리를 떠났다.“서방님, 부엌에 요리를 준비해서 가져오라고 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임우진이 먹을 음식인 만큼 부엌에서도 신경을 쓰기 마련이기에 당연히 그의 입맛을 고려해서 만들었을 것이다.살뜰하게 챙겨주는 그녀를 보자 임우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상을 차리는 양진아를 제지하며 국물을 한 그릇 떠서 건네주었다.“가만히 있...”고개를 돌리는 순간 밥상 위에 차려진 나머지 요리를 확인하자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전복죽과 민어전, 부추무침까지 차례로 훑어보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양진아도 당황스러웠으나 어차피 다시 태어난 김에 아이를 갖기 위해서라도 뻔뻔스럽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결국 못마땅한 표정을 애써 외면했다. 남자는 체면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절대로 본인의 약점을 인정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녀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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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그 시각 임우진이 분노에 찬 얼굴로 서실로 들어오더니 남혁수를 불렀다.“아버지는 돌아오셨어?”“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본채에서 마님과 함께 식사하고 계십니다.”“그래? 오늘 저녁 반찬을 어머니께도 보내도록 해.”“알겠습니다.”임우진은 지시를 끝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 화를 냈다.“물 좀 준비해. 목욕해야겠어.”남혁수가 눈을 깜박였다.“여기서 말씀입니까? 방에 안 가시고요?”“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냥 시키는 대로 해.”남혁수는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가서 물을 준비시켰다.그 시각 본채.이선화는 눈앞에 놓인 반찬을 보면서 탁자를 탁 내리쳤다.“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임재성이 고개를 내밀더니 피식 웃었다.“부인이 보낸 것이오?”“흥, 보냈다면 왜요?”이선화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임재성은 서둘러 돼지 신장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버리지 마오. 난 돼지 신장을 제일 좋아하오.”이선화는 그를 흘겨보고는 반찬을 가져온 하인에게 물었다.“너희 나리와 작은 마님은 잠자리에 들었느냐?”“나리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이선화가 미간을 찌푸렸다.“이 녀석이 또 화를 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대론 안 되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봐야겠어요.”“부인, 밤이 늦었소. 지금 가면 새아가가 우리가 따지러 왔다고 생각할 것이오.”임재성은 서둘러 부인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걱정되면 아랫것을 보내면 되오.”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선화가 하인을 찾던 그때 옆에 있던 계집종 춘애가 서둘러 말했다.“마님, 쇤네가 작은 마님께 다녀오겠습니다.”“그래. 만약 그 녀석이 화를 내면 네가 혼내주렴.”“알겠습니다.”춘애는 대답을 마치고 본채를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가려다가 옆방으로 가더니 이선화를 위해 준비한 다과 한 접시를 들고 나갔다.옆방에 남아있던 두 계집종은 그녀가 다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마님께서 지금 식사하고 계시는데 왜 다과를 드시려고 하시지?”“마님께서 드시려는 게 아니라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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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똑똑똑.목욕을 마치고 나온 임우진이 양진아가 보낸 음식을 먹고 있던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임우진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들어와.”‘쟤가 언제부터 문을 두드렸다고.’“내가 분명... 네가 여긴 어인 일로 왔느냐?”임우진은 고개를 들었다가 춘애인 걸 보고는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누가 들어오라고 했느냐? 당장 나가거라.”춘애는 서둘러 들고 있던 찬합을 내밀었다.“나리, 쇤네는 마님의 명을 받들어 나리께 다과를 가져다드리러 왔습니다.”어머니가 보낸 거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임우진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거기 놔두고 돌아가서 어머니께 전하거라. 부인이 준비한 음식이 입에 맞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춘애는 다과를 내려놓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리, 작은 마님을 두둔하지 마십시오. 마님께서는 작은 마님이 나리를 내쫓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쇤네더러 다과를 가져다드리라고 하신 겁니다.”“내가 쫓겨났다고? 언제?”춘애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임우진이 다급하게 뒤로 물러섰다.“멀리 떨어져서 말하거라. 내가 쫓겨났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냐?”춘애가 눈을 깜박였다.“그게 아니라면 어찌 서실에 계십니까?”임우진이 버럭 화를 냈다.“내가 어디서 자든 무슨 상관이냐? 당장 꺼지지 못할까.”임우진이 화를 내던 그 시각 옆방 본채, 경혜가 양진아를 침대 위에 눕혔다.“마님, 내일 친정에 가면 힘든 전쟁이 있을 테니 푹 쉬셔야 합니다.”경혜가 친정에 인사하러 가는 것을 힘든 전쟁이라고 비유하자 양진아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그래. 너도 얼른 가서 자거라.”그때 시온이 급하게 들어왔다.“마님, 쇤네가 아까 어떤 계집종이 서실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나리께서 아직 안에 계신단 말입니다.”경혜는 양진아의 얼굴을 살피더니 서둘러 말했다.“마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온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서실은 중요한 곳이라 혁수 오라버니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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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다음 날 진시, 시온과 경혜가 사람들을 깨우려던 그때 본채의 문이 열렸다.임우진이 방에서 나오더니 아무 말 없이 옆 서재로 향했다. 계집종들도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양진아가 모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임우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임우진이 나오긴 할 건지 양진아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남혁수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들려왔다.“마님, 이만 출발할까요?”“그래. 가자.”양진아는 시온과 추월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임우진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임우진은 붉은 옷 대신 검은색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깃과 소매 끝이 금실로 장식되어 있어 신수가 더욱 훤해 보였다.양진아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서방님.”“가자.”임우진의 시선이 양진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연분홍색 은실이 박힌 긴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예쁜 무늬가 수놓여 있었다. 걸을 때마다 나풀거리는 나비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특히 공들여 치장까지 해서 가뜩이나 아름답던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임우진은 그녀를 꽁꽁 숨겨두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그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흥분하면 안 된다. 흥분하면 안 돼.’임우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었던 양진아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 마차에 올랐다.양씨 저택은 제후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아 약 한식경 후 마차가 멈춰 섰다.남혁수가 발을 걷어 올리자 임우진이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린 후 몸을 돌려 양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그 모습에 양진아는 잠시 멈칫했다. 임우진에게 이렇게 자상한 면모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체면을 세워줬으니 그녀도 그의 체면을 세워줘야 했다.양진아는 임우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누님.”양진아가 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옆에서 한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호석아.”아직 앳된 남동생의 얼굴을 본 순간 양진아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재빨리 달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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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가겠다.”양진아는 양호석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할아버지를 만나러 본채로 향했다.“알겠습니다. 그럼 쇤네가 대감마님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진영수는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뛸 듯이 기뻐하면서 서둘러 뒤쪽 별채로 하인을 보내 고하게 했다.안순자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큰 아씨,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연히...”“할멈, 어머니는 아랫사람이다. 난 오늘 친정에 인사드리러 온 것인데 당연히 먼저 어른을 뵈어야 하지 않겠느냐?”양진아는 안순자의 말을 가로채고 양호석과 임우진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영수를 따라 본채로 향했다.양씨 저택의 대감 양준섭은 황제의 스승이었는데 지금의 황제가 즉위한 후 태부로 책봉되어 그 지위가 아주 높았다.양 태부에게는 아들 둘과 딸이 하나 있었다.장남이 바로 양진아의 아버지 양창걸이다. 그는 부인 안혜선과 딸 양진아, 아들 양호석만 남겨두고 황제를 지키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차남 양동철은 대리경을 맡고 있었는데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했다. 그의 부인 한수경은 양씨 가문의 옛 벗의 딸이고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장남 양언규는 15살, 차남 양성규는 12살, 그리고 딸의 이름은 양소정이었다.양창걸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안혜선은 과부가 되었고 아이들도 아버지를 잃었다. 하여 집안 사람들은 장남네 가족을 많이 챙겨줬다. 일찍 분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양진아의 할머니 최영옥은 안혜선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저 아들이 남기고 간 아이들을 잘 키우기를 바랐다.그런데 뜻밖에도 안혜선은 아이들과 그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다.양 태부는 장남이 일찍 세상을 떠난 바람에 과부가 된 안혜선이 안쓰러워 그녀가 양씨 가문에 머물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한 아이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아도 간섭하지 않았다.이번에 양진아가 친정에 인사하러 왔을 때 안혜선에게 먼저 인사한 다음 그들에게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양진아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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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할아버지, 할머니, 불효막심한 손녀가 두 분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양진아는 양 태부와 최영옥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땐 얼굴이 이미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누이 옆에 서 있던 양호석은 누이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양호석은 누이 옆에 있는 빈 방석을 보더니 곧바로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할아버지, 할머니, 누님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다 제 잘못입니다.”양호석은 말하면서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양 태부와 최영옥, 양동철과 한수경, 그리고 임우진까지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올해 10살이 된 양소정은 무척이나 활발했다. 평소 어른스러운 동생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걸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 호석아, 거긴 형부 자리야.”임우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양호석을 일으켜 세운 다음 무릎을 꿇었다.“임우진이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립니다. 제가 꼭 진아를 잘 보살피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지켜줄 테니까 부디 안심하십시오.”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양 태부는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 부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서둘러 말했다.“오늘은 좋은 날이니 빨리 일어나거라.”그는 임우진이 일어나면서 옆에 있는 손녀를 부축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을 놓았다.전에 손녀가 제후 저택과 혼인을 무르겠다고 했을 때 양 태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고정수와 혼인하겠다고 했을 때도 극구 말렸었다.하지만 큰며느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두 아이도 어머니와 한마음인지라 아무리 걱정돼도 강요할 수 없었다.그런데 어쩌다 보니 양진아는 결국 제후 저택으로 시집을 갔다. 임우진이 양진아를 다정하게 챙겨주는 걸 보고 나서야 양 태부도 마음을 놓았다.양진아와 임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양동철과 한수경에게도 인사했다. 임우진이 웃으면서 말했다.“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그 순간 양동철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감돌았고 한수경조차 안색이 눈에 띄게 누그러들었다. 팔이 항상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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