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님, 혹시 나리와 싸우셨습니까?”경혜는 양진아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양진아가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 임우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젯밤 안정미로 착각하고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상대방이 마음에 없는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를 대하는 태도도 피차일반이라 아마도 양씨 가문의 적녀와 혼인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전생에 임우진은 신혼 둘째 날에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북강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선화는 근심과 걱정에 시달려 집안일까지 미처 돌보지 못했다. 결국 안정미가 제후 저택의 대소사를 맡게 되면서 나중에는 제후 부부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지경에 이르렀다.이번 생에는 부인이 바뀐 탓인지 아직 전장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북강이 분쟁 지역인 만큼 언제든지 출정할 가능성이 있다.현재로서 그가 집을 떠나기 전에 합방하여 아이라도 가지면 더할 나위 없었다.그래야만 제후 저택에서 굳건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양진아는 불쾌한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경혜에게 말했다.“부엌 식모들에게 저녁으로 보양식을 준비하라 하여라. 그리고 남혁수를 찾아가 함께 식사하도록 나리를 모셔 오라고 전하거라.”서실.남혁수는 다시 돌아온 경혜가 전해준 말을 듣고 나서 즉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주인에게 보고하러 갔다.“제 말 맞지요? 마님은 역시 나리 생각뿐이었습니다.”그제야 임우진의 안색이 한결 누그러졌다. 잠시 후 본채로 돌아가 식사하면서 양진아에게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양진아는 연빨강 비단 내의를 입고 겉에 허리를 강조하는 빨간색 평상복을 걸친 다음 화장까지 연하게 했다.마치 갓 피어난 연꽃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웠으며 풋풋하고 요염한 매력을 겸비했다.“마님, 너무 예쁘십니다.”두 계집종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양진아를 모셔 오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진작에 꾸미고 다니지 그러셨어요.”시온은
임우진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컴컴해졌다.머나먼 하늘을 물든 노을이 어느새 구름에 가려졌고 밤이 찾아오면서 마당에 등불이 하나둘씩 커졌다.창문에는 여전히 장식품으로 가득했고, 고개를 숙여 몸에 걸친 빨간색 의복을 내려다보자 문득 꿈처럼 느껴졌다.정말 양진아와 결혼한 게 맞나?방에 들어서서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여자를 마주하는 순간 그제야 비현실적인 느낌이 서서히 사라졌다.불빛을 받아 한층 요염해진 모습이 기억 속 밝고 당당했던 형상과 겹치면서 임우진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큼!”이내 목을 가다듬고 발걸음을 옮겼다.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인기척을 따라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양진아의 시선을 느낀 임우진은 긴장한 나머지 다리가 휘청거렸다.이를 본 몇몇 계집종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추월은 걱정을 제외하고도 한심한 기색이 역력했다.밥상 앞으로 다가간 임우진은 왠지 모를 침체된 분위기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마침 물어보려고 입을 떼려던 찰나 양진아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다들 이만 물러가거라.”계집종들이 줄지어 자리를 떠났다.“서방님, 부엌에 요리를 준비해서 가져오라고 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임우진이 먹을 음식인 만큼 부엌에서도 신경을 쓰기 마련이기에 당연히 그의 입맛을 고려해서 만들었을 것이다.살뜰하게 챙겨주는 그녀를 보자 임우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상을 차리는 양진아를 제지하며 국물을 한 그릇 떠서 건네주었다.“가만히 있...”고개를 돌리는 순간 밥상 위에 차려진 나머지 요리를 확인하자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전복죽과 민어전, 부추무침까지 차례로 훑어보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양진아도 당황스러웠으나 어차피 다시 태어난 김에 아이를 갖기 위해서라도 뻔뻔스럽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결국 못마땅한 표정을 애써 외면했다. 남자는 체면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절대로 본인의 약점을 인정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녀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그 시각 임우진이 분노에 찬 얼굴로 서실로 들어오더니 남혁수를 불렀다.“아버지는 돌아오셨어?”“돌아오셨습니다. 지금 본채에서 마님과 함께 식사하고 계십니다.”“그래? 오늘 저녁 반찬을 어머니께도 보내도록 해.”“알겠습니다.”임우진은 지시를 끝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 화를 냈다.“물 좀 준비해. 목욕해야겠어.”남혁수가 눈을 깜박였다.“여기서 말씀입니까? 방에 안 가시고요?”“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냥 시키는 대로 해.”남혁수는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가서 물을 준비시켰다.그 시각 본채.이선화는 눈앞에 놓인 반찬을 보면서 탁자를 탁 내리쳤다.“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임재성이 고개를 내밀더니 피식 웃었다.“부인이 보낸 것이오?”“흥, 보냈다면 왜요?”이선화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임재성은 서둘러 돼지 신장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버리지 마오. 난 돼지 신장을 제일 좋아하오.”이선화는 그를 흘겨보고는 반찬을 가져온 하인에게 물었다.“너희 나리와 작은 마님은 잠자리에 들었느냐?”“나리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이선화가 미간을 찌푸렸다.“이 녀석이 또 화를 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대론 안 되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봐야겠어요.”“부인, 밤이 늦었소. 지금 가면 새아가가 우리가 따지러 왔다고 생각할 것이오.”임재성은 서둘러 부인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걱정되면 아랫것을 보내면 되오.”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선화가 하인을 찾던 그때 옆에 있던 계집종 춘애가 서둘러 말했다.“마님, 쇤네가 작은 마님께 다녀오겠습니다.”“그래. 만약 그 녀석이 화를 내면 네가 혼내주렴.”“알겠습니다.”춘애는 대답을 마치고 본채를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가려다가 옆방으로 가더니 이선화를 위해 준비한 다과 한 접시를 들고 나갔다.옆방에 남아있던 두 계집종은 그녀가 다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마님께서 지금 식사하고 계시는데 왜 다과를 드시려고 하시지?”“마님께서 드시려는 게 아니라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똑똑똑.목욕을 마치고 나온 임우진이 양진아가 보낸 음식을 먹고 있던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임우진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들어와.”‘쟤가 언제부터 문을 두드렸다고.’“내가 분명... 네가 여긴 어인 일로 왔느냐?”임우진은 고개를 들었다가 춘애인 걸 보고는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누가 들어오라고 했느냐? 당장 나가거라.”춘애는 서둘러 들고 있던 찬합을 내밀었다.“나리, 쇤네는 마님의 명을 받들어 나리께 다과를 가져다드리러 왔습니다.”어머니가 보낸 거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임우진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거기 놔두고 돌아가서 어머니께 전하거라. 부인이 준비한 음식이 입에 맞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춘애는 다과를 내려놓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나리, 작은 마님을 두둔하지 마십시오. 마님께서는 작은 마님이 나리를 내쫓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쇤네더러 다과를 가져다드리라고 하신 겁니다.”“내가 쫓겨났다고? 언제?”춘애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임우진이 다급하게 뒤로 물러섰다.“멀리 떨어져서 말하거라. 내가 쫓겨났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냐?”춘애가 눈을 깜박였다.“그게 아니라면 어찌 서실에 계십니까?”임우진이 버럭 화를 냈다.“내가 어디서 자든 무슨 상관이냐? 당장 꺼지지 못할까.”임우진이 화를 내던 그 시각 옆방 본채, 경혜가 양진아를 침대 위에 눕혔다.“마님, 내일 친정에 가면 힘든 전쟁이 있을 테니 푹 쉬셔야 합니다.”경혜가 친정에 인사하러 가는 것을 힘든 전쟁이라고 비유하자 양진아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그래. 너도 얼른 가서 자거라.”그때 시온이 급하게 들어왔다.“마님, 쇤네가 아까 어떤 계집종이 서실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나리께서 아직 안에 계신단 말입니다.”경혜는 양진아의 얼굴을 살피더니 서둘러 말했다.“마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온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서실은 중요한 곳이라 혁수 오라버니가 계속
다음 날 진시, 시온과 경혜가 사람들을 깨우려던 그때 본채의 문이 열렸다.임우진이 방에서 나오더니 아무 말 없이 옆 서재로 향했다. 계집종들도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양진아가 모든 준비를 마칠 때까지 임우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임우진이 나오긴 할 건지 양진아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남혁수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들려왔다.“마님, 이만 출발할까요?”“그래. 가자.”양진아는 시온과 추월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임우진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임우진은 붉은 옷 대신 검은색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깃과 소매 끝이 금실로 장식되어 있어 신수가 더욱 훤해 보였다.양진아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서방님.”“가자.”임우진의 시선이 양진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연분홍색 은실이 박힌 긴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예쁜 무늬가 수놓여 있었다. 걸을 때마다 나풀거리는 나비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특히 공들여 치장까지 해서 가뜩이나 아름답던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임우진은 그녀를 꽁꽁 숨겨두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그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흥분하면 안 된다. 흥분하면 안 돼.’임우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었던 양진아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 마차에 올랐다.양씨 저택은 제후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아 약 한식경 후 마차가 멈춰 섰다.남혁수가 발을 걷어 올리자 임우진이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린 후 몸을 돌려 양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그 모습에 양진아는 잠시 멈칫했다. 임우진에게 이렇게 자상한 면모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체면을 세워줬으니 그녀도 그의 체면을 세워줘야 했다.양진아는 임우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누님.”양진아가 바닥에 발을 내딛자마자 옆에서 한 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호석아.”아직 앳된 남동생의 얼굴을 본 순간 양진아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재빨리 달려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가겠다.”양진아는 양호석의 손을 잡고 망설임 없이 할아버지를 만나러 본채로 향했다.“알겠습니다. 그럼 쇤네가 대감마님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진영수는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뛸 듯이 기뻐하면서 서둘러 뒤쪽 별채로 하인을 보내 고하게 했다.안순자의 안색이 눈에 띄게 변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큰 아씨,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연히...”“할멈, 어머니는 아랫사람이다. 난 오늘 친정에 인사드리러 온 것인데 당연히 먼저 어른을 뵈어야 하지 않겠느냐?”양진아는 안순자의 말을 가로채고 양호석과 임우진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영수를 따라 본채로 향했다.양씨 저택의 대감 양준섭은 황제의 스승이었는데 지금의 황제가 즉위한 후 태부로 책봉되어 그 지위가 아주 높았다.양 태부에게는 아들 둘과 딸이 하나 있었다.장남이 바로 양진아의 아버지 양창걸이다. 그는 부인 안혜선과 딸 양진아, 아들 양호석만 남겨두고 황제를 지키다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차남 양동철은 대리경을 맡고 있었는데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했다. 그의 부인 한수경은 양씨 가문의 옛 벗의 딸이고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장남 양언규는 15살, 차남 양성규는 12살, 그리고 딸의 이름은 양소정이었다.양창걸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안혜선은 과부가 되었고 아이들도 아버지를 잃었다. 하여 집안 사람들은 장남네 가족을 많이 챙겨줬다. 일찍 분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양진아의 할머니 최영옥은 안혜선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저 아들이 남기고 간 아이들을 잘 키우기를 바랐다.그런데 뜻밖에도 안혜선은 아이들과 그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다.양 태부는 장남이 일찍 세상을 떠난 바람에 과부가 된 안혜선이 안쓰러워 그녀가 양씨 가문에 머물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한 아이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아도 간섭하지 않았다.이번에 양진아가 친정에 인사하러 왔을 때 안혜선에게 먼저 인사한 다음 그들에게 오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양진아가 그
“할아버지, 할머니, 불효막심한 손녀가 두 분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양진아는 양 태부와 최영옥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땐 얼굴이 이미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누이 옆에 서 있던 양호석은 누이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양호석은 누이 옆에 있는 빈 방석을 보더니 곧바로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할아버지, 할머니, 누님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다 제 잘못입니다.”양호석은 말하면서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양 태부와 최영옥, 양동철과 한수경, 그리고 임우진까지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올해 10살이 된 양소정은 무척이나 활발했다. 평소 어른스러운 동생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걸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 호석아, 거긴 형부 자리야.”임우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양호석을 일으켜 세운 다음 무릎을 꿇었다.“임우진이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드립니다. 제가 꼭 진아를 잘 보살피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지켜줄 테니까 부디 안심하십시오.”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양 태부는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 부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서둘러 말했다.“오늘은 좋은 날이니 빨리 일어나거라.”그는 임우진이 일어나면서 옆에 있는 손녀를 부축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을 놓았다.전에 손녀가 제후 저택과 혼인을 무르겠다고 했을 때 양 태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나중에 고정수와 혼인하겠다고 했을 때도 극구 말렸었다.하지만 큰며느리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두 아이도 어머니와 한마음인지라 아무리 걱정돼도 강요할 수 없었다.그런데 어쩌다 보니 양진아는 결국 제후 저택으로 시집을 갔다. 임우진이 양진아를 다정하게 챙겨주는 걸 보고 나서야 양 태부도 마음을 놓았다.양진아와 임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양동철과 한수경에게도 인사했다. 임우진이 웃으면서 말했다.“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그 순간 양동철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감돌았고 한수경조차 안색이 눈에 띄게 누그러들었다. 팔이 항상 밖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일제히 향했는데 안혜선이 기세등등하게 들어오고 있었다.금실 모란꽃이 수놓여 있는 빨간 비단옷은 그녀의 몸매를 더욱 요염하게 했다. 이미 아이 둘을 둔 어머니였지만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딸 옆에 서 있으니 자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양진아, 어머니가 화나서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게냐?”안혜선은 분노한 얼굴로 뜰을 지났다. 모습이 보이기도 전에 꾸짖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한수경은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자신의 얼굴을 만지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저 사람은 걱정이 없어서 그런지 늙지도 않네.”그러자 양동철이 부인을 흘겨보았다.‘지금이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런 걸 신경 쓰다니.’양동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려던 그때 양진아가 먼저 일어섰다.“어머니, 이 자리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계시는데 어찌 이리 예의 없게 구신단 말입니까?”그 소리에 양동철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조카딸이 정말로 달라졌나?’“어머니한테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본가에 도움을 청하려고 온 거겠지요. 흥, 말은 그럴듯하게 해도 그 많은 걸 절대 내놓지 못합니다.”한수경이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제발 그 입 좀 다무오.”양동철은 부인 때문에 조마조마한 나머지 손에 땀을 쥐었다.그는 큰집이 분가하지 않는 게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양진아가 말한 것처럼 양씨 가문의 큰집이 이 모양이라 양 태부가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그리고 안혜선의 성격에 계속 바깥으로 다닌다면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니 최영옥이 단속하는 게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양진아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안혜선을 쳐다보았다.지난 생에 그녀가 친정으로 인사하러 왔을 때 먼저 본채로 가지 않고 서쪽 별채로 갔었다.어머니는 고정수가 그녀와 합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녀가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꾸짖었고 할아버지가 고정수에게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람들은 모두 여느 때보다 정색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지금 그들 앞에 서 있는 양진아는 애초에 호락호락하던 아씨가 아니었다.시집을 가서 진국후 저택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차지하게 되었으니까.한편 안정미는 여전히 내키지 않아 불만을 토로했다.“지금 우릴 협박해? 우린 다 한 가족이야. 고모도 우리한테 엄청 잘해주시고. 대체 언니는 왜 그렇게 못하는 거야?”양진아가 실소를 터트렸다.“네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닌 양씨 일가에 있어야겠네?”“너...”“됐다!”박정숙은 안정미를 째려보고 다시 양진아에게 시선을 옮겼다.“진아 말이 맞아. 하지만 이제 성균이가 잡혔으니 우리 모두 단합해서 어떻게든 구해내야지. 진아 너도 이번 일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양진아는 시선을 올리고 할머니께 답했다.“저는 단지 새색시일 뿐이니 책임지고 싶어도 그럴만한 능력이 못 돼요. 추월이가 돌아오거든 상세한 정황을 묻는 게 더 나을 겁니다.”다들 마땅한 방법이 없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추월을 기다려야만 했다.안혜선은 자꾸 양진아만 흘겨봤다. 하루빨리 임우진의 마음을 사로잡고 제후 저택을 손에 넣으라고 쉴 새 없이 딸을 설득하려는 어머니였다.양진아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녀는 심지어 딸에게 손까지 댈 기세였다. 다만 이때 청연, 청하가 바로 가로막았다.안혜선이 분노가 폭발하려 할 때 양진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어머니, 이 두 아이 모두 제후 저택 사람입니다. 제가 저택에서 쫓겨나길 원치 않으신다면 얼른 그 입 좀 다물어요.”안혜선은 놀란 기색이 역력하더니 끝내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단지 딸아이가 친정에 보탬이 되길 바랄 뿐 제후 저택에서 쫓겨나는 건 원치 않았다.다만 그녀는 왜 양씨 일가의 상황이 특별하다는 걸 생각지 못했을까? 만약 양씨 일가에서 안혜선이 이렇게 못 미더운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양 태부와 최영옥 모두 애초에 그녀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두 아이가 어머니를 여의게
박정숙은 슬픈 척하면서 눈가에 음모와 계략이 잔뜩 드러났다. 이 모습을 본 양진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전에 대체 얼마나 멍청했으면 외할머니가 날 엄청 아껴주신다고 여긴 걸까?’다만 그녀는 전혀 티내지 않고 재빨리 다가가서 박정숙을 부축했다.“할머니, 괜찮으세요? 외숙모는 왜 울고 계세요? 어머니는 어디 가셨죠?”“진아야, 얼른 나 좀 구해줘.”이때 하진경이 불쑥 양진아에게 덮쳐들었다.“네 서방한테 말해서 외삼촌 좀 구해달란 말이다.”“...”양진아는 아무 말도 안 했다.“그 입 다물지 못할까! 관아가 무슨 진국후 저택에서 여는 줄 알아? 구하고 싶다면 구하게?”박정숙이 냉큼 쏘아붙였다.물론 그녀도 하진경과 똑같은 생각이지만 곧이곧대로 입밖에 내뱉을 순 없었다.“진아야, 방금 한 무리 위병들이 와서 네 삼촌을 잡아갔어. 우진이가 능력이 좋잖아. 어서 우진이더러 네 삼촌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보게 해줄래? 그래야 우리도 대안을 세우지!”양진아는 곧장 대답했다.“예, 할머니, 걱정 마세요. 지금 바로 사람 보낼게요.”“추월아, 혁수 찾아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해.”“예, 마님!”추월이 나간 후 양진아는 박정숙을 부축해서 일으켰다.“남혁수는 서방님을 모시는 가장 든든한 사람이에요. 분명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낼 거니까 숙모도 그만 울어요. 이번 일은 제가 꼭 책임지고 알아봐 줄게요.”양진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박정숙은 문득 그런 그녀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양진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안 변했지만 예전처럼 그리 쉽게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가 실눈을 뜨고 사색에 잠겨있을 때 하인이 달려와서 안정미가 왔다고 전해드렸다.안정미는 아직 아버지가 잡혀간 줄 모른 채 침울한 집안 분위기에 흐느끼는 어머니까지 살펴보더니 다짜고짜 양진아를 질책했다.“언니는 꼭 어머니 생신날까지 이렇게 괴롭혀야겠어? 사람들이 언니를 불효녀라고 삿대질할까 봐 두렵지도 않은가 봐?”“아니면 진국후
안순자는 허겁지겁 본채로 달려갔다.그 시각 안씨 일가 어르신 박정숙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짙은 보라색 비단의 옷을 입고 같은 색상의 장식용 머리띠를 두른 채 근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로 위엄이 넘치는 분위기였다.안순자가 홀로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자 박정숙이 물었다.“왜 혼자 오는 것이야? 진아는?”“그게... 큰 아씨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박정숙이 탁자를 내리쳤다.“누가 돌려보낸 거야?”“다름이 아니라 아씨께서 정문이 닫혀있다고 그냥 가버리셨습니다. 게다가 함께 온 계집종이 돌아가서 제후 부인께 알리겠다고 했어요. 안씨 일가에서 큰 아씨를 능멸한다고요...”“뭐?”이때 안성균의 부인 하진경이 버럭 화를 냈다.“그냥 돌려보내면 어떡하란 말이냐? 걔가 가면 내 생일은 어쩌라는 거야?”박정숙이 옆에 앉은 안혜선을 보더니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너는 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 모양 이 꼴이니? 이제 하다 하다 내 앞에서까지 으름장을 놓으려고 해?”“정미 혼수를 거둬간 걸 네가 다시 돌려받았다니 뭐라 더 따지지 않았는데 오늘 또 보거라. 외숙모 생신연에 참석하라는 것도 이렇게 연신 거절하고 있잖느냐.”“네 눈엔 이 어미가 있긴 해? 우리 안씨 일가가 있긴 하냔 말이다!”안혜선이 황급히 대답했다.“어머니, 지금 당장 가서 이년을 따끔하게 혼내고 이리로 데려와서 사과하게 하겠습니다!”그제야 박정숙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계집종 두 명을 진아한테 보내거라. 그리고 양씨 일가에서 따라온 그 계집종들은 싹 다 돌려보내.”“오늘 그 계집종들이 이간질해서 이 사달이 난 거잖아. 어이가 없어서 원!”“예, 어머니.”다만 안혜선이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문 지킴이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큰일 났어요! 관아에서 나리를 잡아갔습니다!”“뭐라고?”안혜선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누굴 잡아가?”“나리요! 나리께서 금방 잡혀갔습니다.”문 지킴이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위병들이 다짜고짜 대문을 부수고
임우진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대체 이건 무슨 말이야? 누가 진아 앞에서 뭐라고 말한 게야?”요 이틀 관아에 일이 바빠서 거의 매일 심야에 돌아오는 임우진은 양진아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줄곧 서실에서 지냈다.그러나 지난번 호되게 겁을 준 이후로 아무도 감히 그에게 가까이하지 못한다.설마 누가 또 그가 서실에서 쉬는 걸 보고 양진아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꼼수를 부린 걸까?임우진이 오해하자 남혁수는 재빨리 해명했다.“아니요, 다름이 아니라 마님께서...”그는 양진아가 어떻게 안성균을 처리할지에 대해 낱낱이 전해드렸다.“마님의 이 방법은 저로서도 생각해낼 만한데 나중에 안성균이 알게 된다면...”“그야말로 야비한... 아니, 현명한 수단입니다!”임우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남혁수는 얼른 태세를 바꿨다.임우진은 그를 힐긋 째려봤다.“얼른 가서 임 청지기더러 진아한테 무녀를 두 명 붙여두라고 하거라.”남혁수는 실로 어이없을 따름이었다.‘나리, 마님께서 언젠가 똑같은 수법을 나리께 쓸 거란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무예를 습득한 노비는 다소 구하기 어려웠다. 제후 저택이라 할지언정 무녀를 구하느라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임태원은 3일도 채 안 돼서 양진아에게 무녀를 보내드렸다.양진아는 마침 안씨 일가로 가려던 참인데 청지기가 보내온 두 명의 무녀를 보더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맙구나.”안 그래도 어멈을 몇 명 데리고 갈까 고민하던 참인데 마침 무녀를 보내왔으니 너무 다행이었다. 양진아의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외할머니까지 다들 막무가내인 사람들이고 큰외숙모는 덩치 큰 체구에 인성이 나쁘기로 소문났다.전에 계집종을 데리고 갔을 때 감히 찍소리도 못 냈는데 이번엔 무녀라서 한시름을 놓았다.임태원이 그녀에게 답했다.“나리께서 친히 분부하신 일입니다. 마님이 걱정되어 무녀를 보내드린 겁니다. 마음에 안 든다면 제가 또 가서 물색해볼게요.”‘임우진이었어?’‘요즘 쭉 바쁜 것 같던데 보양식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임우진은 다음날 바로 남혁수를 양진아에게 보냈다.양진아는 앞쪽 별채에서 남혁수를 만난 후 바로 그에게 안씨 일가를 조사하라고 분부했다.“우리 외삼촌 안성균은 공부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다. 너는 가서 그자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법도를 어긴 일이 있는지 조사해 보거라. 하나도 빠짐없이 인증, 좌증 전부 조사해내야 할 것이야.”남혁수는 충격에 휩싸인 채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때 양진아가 눈썹을 치켰다.“무슨 문제라도 있느냐?”“아닙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그는 놀란 마음을 달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반드시 이른 시일 내로 조사를 마치겠습니다.”양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보냈다.남혁수는 임우진의 지시를 받은 터라 아주 열심히 나섰다. 양진아가 임우진의 마음속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3일도 채 안 될 사이에 그는 안씨 일가에 관한 모든 일을 낱낱이 조사하여 양진아에게 보고했다.양진아가 문서를 꼼꼼하게 훑어보았고 남혁수가 옆에서 설명을 이어갔다.“마님, 안성균의 만행은 전부 여기에 적혀있습니다. 대부분 나쁜 성분의 물건을 좋은 물건으로 눈속임해서 거래했고 본인이 직접 도맡은 처사를 두 번씩이나 사고를 냈습니다. 상관은 그자가 양씨 일가에서 추천한 사람이라고 최대한 체면을 봐준 것 같습니다.”“그자의 동료들도 찾아가 보았는데 다들 그자와 함께 일하길 꺼렸지만 안씨 일가의 체면을 보고 참아온 것 같더라고요.”그는 말하다가 불현듯 양진아가 안씨 일가를 언급할 때 표정이 떠올라 한마디 덧붙였다.“사실 이것들은 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단속만 잘한다면 큰 사고는 면할 테지요.”이에 양진아가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안성균의 성격에 큰 사고를 빚을 일이 없다는 말이냐?”남혁수는 목을 움츠리고 감히 말을 내뱉지 못했다.“사람 한 명 보내서 안성균의 만행을 적발하고 체포한 뒤 내 소식을 기다리거라. 잘 들어! 이번 일은 제후 저택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임우진이 처가에 손을 댄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
“들라 하라!”임우진은 곧장 한마디 더 보탰다.“앞으론 마님의 부탁이라면 제때 나에게 알려야 한다.”“예, 나리!”하선은 밖에서 반나절이나 기다렸다. 임우진이 양진아 때문에 화나서 일부러 그녀를 밖에 세워둔 줄 알았는데 모사 두 분이 서실에서 걸어 나왔다.‘내가 괜한 오해를 했네!’서실 안에서 임우진은 하선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더냐?”하선은 분명 마님께 남혁수를 빌려오라는 분부를 받았지만 이토록 중요한 일은 반드시 나리께서 직접 마님을 찾아가 상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마님께서 찾으십니다, 나리.”“무슨 일로?”임우진이 눈썹을 치켰다.“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알겠다. 지금 바로 간다고 전하거라.”하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물러났다.한편 임우진은 마음이 살짝 복잡해졌다.‘설마 내가 화난 걸 알고 달래주려는 거야?’‘이번엔 절대 쉽게 용서치 않아!’그는 양진아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정성껏 일정을 짜놓았지만 결국 고정수의 소식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마음이 한없이 식어갈 따름이었다.임우진은 격하게 갈등하다가 마침내 뒤쪽 별채로 갔다.그 시각 양진아는 하선의 말을 듣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 임우진이 설마 남혁수를 빌려주기 싫어서 이러는 걸까?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임우진은 이렇게까지 속 좁은 남자가 아니니까. 고정수를 조사해보라고 해도 거절, 남혁수를 빌려서 안씨 일가를 조사해보려고 해도 거절하는 게 과연 무슨 경우란 말인가?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문 앞에 있던 계집종이 청아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올렸다. 양진아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임우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걸상에 앉았다.“그래, 무슨 일로 부른 것이냐?”양진아는 잠시 침묵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남혁수를 빌려주기 싫어서인지 몰라서 마지못해 질문을 건넸다.“서방님, 남 호위를 잠시 제게 빌려줄 수 있나요?”임우진의 안
양진아는 고씨 일가에서 발생한 일을 전혀 모른 채 안씨 일가에서 보낸 청첩장을 받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이때 경혜가 옆에서 살갑게 말했다.“이건 청지기가 보내온 거라 큰 마님은 몰라요.”“모르시길 다행이지.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잖아!”양진아는 화나서 청첩장을 내팽개쳤다.“제 주제를 알아야지, 어딜 감히 나더러 같잖은 관원 부인의 생신연에 참석하라고 하는 것이야? 뻔뻔스러운 것!”청찹장에는 양진아더러 외숙모의 생신연에 참석하라고 초대하는 내용이었다.청지기가 중도에 가로채길 다행이지 본채까지 넘어갔더라면 그녀는 시어머니께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 이제 슬슬 주제 넘치게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른다고 여길 수도 있다.“노여움 푸세요, 마님. 그럼 이 초대에는 응하시겠습니까?”“가야지! 아주 푸짐한 선물도 해드릴 거야!”양진아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그녀가 안씨 일가를 한방에 기선제압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아마 안혜선을 쥐락펴락하듯 그녀도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거로 여길지 모른다.문제를 해결하려면 한방에 급소를 찔러야 한다. 안씨 일가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자가 바로 3대 독자 안현조이지만 실세는 양진아의 큰외삼촌 안성균이다.안성균은 현재 공부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어서 벌어들인 은냥으론 겨우 생계유지를 하는 처지였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그래서 안씨 일가는 양씨 일가의 피를 쪽쪽 빨아먹고 있다.하지만 욕망이란 골짜기는 메우기가 어려운 법이고 안성균 그 인간은 술과 여자, 도박 어느 하나 손을 대지 않은 게 없다. 양진아가 전생에 들었다시피 안성균이 벌어들인 돈은 죄다 더러운 돈이라고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하선을 불러왔다.“서방님이 돌아왔는지 가보거라. 만약 돌아왔으면 내가 혁수를 잠시 빌리고 싶다고 전하거라.”하선이 분부대로 나가서 알아보았더니 제후 나리가 이미 돌아온 상태였다.나리께서 서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마당으로 향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서방님을 난처하게 했군요.”양진아가 먼저 사과했다.그녀가 조바심 때문에, 전생의 일들이 떠올라서 추태를 부리고 말았다.이번 생은 임우진과 혼인했으니 전생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양씨 일가와 안씨 일가를 완전히 떼어놓을 거야!’안정미와 고정수가 아무리 그녀를 해치고 그녀의 집안까지 해치려 해도 전생처럼 쉽게 해낼 수는 없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저택까지 돌아갔다. 저택에 도착한 후 임우진은 곧게 서원으로 향했다.양진아는 그제야 알아챘다. 이 남자가 삐졌다는 것을 말이다.‘내가 뭘 잘못했지? 고정수 한번 조사해달라고 한 게 전부인데? 나도 다 저택과 친정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 대체 내가 무슨 사심을 부렸다고 이러는 거야?’양진아는 어리둥절한 채 하선에게 질문을 건넸다.“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게야?”하선과 추월은 양진아의 시중을 드는 요 며칠 동안 애초의 조심스러웠던 태도서부터 이제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님의 성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마님은 제후 나리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깊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서방님보다 시어머니를 더 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마님은 제후 나리와 서로 공경하는 부부로 지내고 싶어 하지만 제후 나리가 얼마나 거만한 사람인가?수많은 부잣집 따님들의 연모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마님과의 혼약을 지키고 단 한 번도 파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그런 제후 나리의 마음도 몰라주고 마님께서 무심한 태도로 임하고 심지어 하루가 멀다 하게 고 귀공을 언급하고 있으니 기분이 언짢아질 수밖에 없었다.다만 이런 것들은 계집종인 그녀가 말할 자격이 없다.하선은 고개를 푹 떨구고 공손하게 말했다.“소인은 모르겠습니다. 본채로 가시겠습니까, 마님?”양진아는 머리를 끄덕이고 이 일을 뒤로 한 채 본채로 향했다.그 시각 안정미는 백미가 문 앞에서 계집종과 함께 겨우 마차를 한 대 불러왔다.그녀는 고씨 저택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양씨 일가로 향했다.서쪽
“왜 그렇게 웃는 것이야?”양진아는 고개를 내젓고 임우진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한편 두 여자를 따라 나온 안정미는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정나현은 마차를 타고 떠나갔고 양진아도 딱히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안정미는 결국 백미가 문 앞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안달이 났던지 그녀가 대뜸 양진아를 향해 소리 질렀다.“언니, 잠깐만! 나 좀 실어줘!”다만 양진아는 뒤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안정미는 원망 어린 눈빛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언니...”“안 낭자가 기억력이 안 좋다면 내가 대신 안씨 저택에서 했던 말을 되새겨줄 수도 있소.”임우진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나는 여자를 안 때린다고 한 적이 없거늘.”순간 안정미는 사색이 되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진국후 저택의 마차가 멀어져가는 걸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다.마차 안에서 임우진은 기분이 언짢은 양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혹 저자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냐?”이에 양진아가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요. 저는 단지 나현 군주가 왜 정미랑 가깝게 지내는지가 의문입니다.”정빈 대군은 황제와 이복형제 사이이고 둘은 어려서부터 태후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라온지라 유독 돈독한 정을 쌓고 있다.정빈 대군은 황제의 왕위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당연히 황제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고 초월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하지만 안씨 일가와 정빈 대군 저택의 문벌은 천지 차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양진아가 몹시 의아한 것이다.전생에도 안정미와 나현 군주가 이토록 가깝게 지냈을까?아쉽게도 전생에 양진아는 고씨 일가에 갇혀서 외부 소식을 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리하여 환생했지만 딱히 유용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여태껏 몰랐느냐? 고정수는 정빈 대군의 길을 걷고 있어. 지금 호부 금부사에서 사관 직을 맡고 있지.”임우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고정수는 나름 유능한 인재이고 정빈 대군 또한 예의 바르고 고결한 성품을 지녀서 고정수를 중히 여기고 있단다. 그러니 나현 군주가 안정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