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집착하는 짐승을 길들이는 법: Chapter 571 - Chapter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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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1화

정호는 감히 찍소리도 못하고 씁쓸한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대충 얼버무렸다.“이수 촌에서 셋째 도련님을 해코지한 사람은 큰 도련님일 가능성이 크니까 조심하세요.”이는 백아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한태윤에게 다가가 휠체어를 밀고 떠났다.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초조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한씨 일가.이수 극장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 덕에 한태윤은 버림받은 자식에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한건우도 약속대로 그에게 부사장 자리를 내주었다.한태윤이 본채에 일 보러 갔을 때 백아영은 별장에 남아서 이곳저곳 둘러보았다.여태껏 주방과 한태윤의 방만 왔다 갔다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지라 이곳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갑자기 여유가 생기니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결국,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랫동안 비워둔 서재에서 책장에 진열된 사진을 발견했다.총 4장으로서 한 장은 가족사진, 다른 한 장은 한태윤과 이나연이 찍은 사진, 그리고 혼자 찍은 사진이 있었다. 한태윤은 한결같이 무표정이며, 기를 펴지 못하는 느낌이 사진을 뚫고 전해질 정도였다.한씨 일가에서 갖은 괴롭힘을 당한 한태윤이 매사에 신중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은 백아영도 알고 있다.하지만 네 번째는 한태윤과 젊은 여성이 나란히 찍은 사진인데, 여성은 한태윤의 어깨에 기대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한태윤의 입꼬리도 한껏 올라갔고, 반달처럼 휘어진 눈꼬리는 웃음기가 가득했다.이렇게 행복하고 기쁜 모습은 한씨 일가에서 절대로 볼 수 없었다.사진 속 여성은 그의 소꿉친구이자 약혼녀가 분명할 것이다.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백아영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이 먹먹했다. 행여나 싶었던 일이 눈앞에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이세운의 말이 사실이었다....한원그룹, 대표 사무실.이성준을 노려보는 한태성의 모습은 흡사 입을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한 마리의 독사를 연상케 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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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2화

이성준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비아냥거리는 느낌을 물씬 풍겼고,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한원그룹은 문제가 있었다.이제 진짜 재무제표만 손에 넣는다면 한씨 일가는 끝장날 것이다.“회사에 오기 전에 대충 알아봤는데 재무팀은 대부분 한태성이 꽂아 넣은 사람이라서 분명 말 못할 비밀이 숨어 있을 거예요. 진짜 재무제표를 받아내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백아영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재무팀에 심아린이라는 고참이 있는데 그동안 하도 오래 앉아서 일하다 보니까 허리 디스크와 목 디스크가 생겼죠. 병원도 여러 군데 다녔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해요. 그래서 말인데, 저한테 치료받으라고 유도하는 건 어때요?”나중에 침을 놓아준다는 핑계로 재무팀에 당당히 드나들 수 있을 테니까.이성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위험하니까 안 돼요.”“일반 사무원이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위험한 상황이 있다고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혼자서도 충분해요.”그녀가 직접 나서면 한태윤은 빠져있어도 되니까 그를 걱정하는 마음에 가슴 졸일 필요가 없었다.“안 돼요!”이성준의 태도는 단호하고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눈살을 찌푸리고 강압적으로 말하는 남자의 모습에 백아영은 깜짝 놀랐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와 비슷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하나같이 막무가내에 억지를 부리지 않는가?그러나 곧바로 엉뚱한 생각을 접고 진지하게 말했다.“제가 외부인이라서 태윤 씨 일에 간섭하면 안 되기 때문에 거절하는 건가요?”“아니요.”“그렇다면 허락해줘요.”백아영은 단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현재로서는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 굳이 힘든 길을 갈 필요 있나요?”하지만 말과 달리 백아영은 확신이 없었다.이성준과 말다툼할 때마다 그녀가 아무리 설득해도 이성준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한태윤과 그녀는 단지 의사와 환자에 불과했다.따라서 그의 의사 결정을 뒤엎을 자신이 별로 없었다.설령 결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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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3화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갑작스러운 변화에 백아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머릿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내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최대한 멀리 거리를 두었다.“장난이 심하시네요. 당연히 그럴 리가 없죠.”그녀는 말을 마치자 도망치듯 걸어 나갔다.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성준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느낌이 맞는다면 백아영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멀쩡하다가 왜 갑자기 그를 짐승 취급하면서 도망치기 급급하단 말이지?다음 날 오후 3시, 백아영은 약속 시간에 맞춰 재무팀으로 찾아갔다.재무팀은 보안이 철저한 부서라서 한 층을 통으로 사용했고, 사내 직원이라고 할지언정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결국, 심아린이 직접 백아영을 마중 나와 사무실로 안내했다.백아영은 뒤따라 걸으면서 몰래 사무실을 흘끔거렸고, 빠르게 주변 환경을 파악했다.사무실 공간은 넉넉한 편이고, 파티션도 꽤 많았다. 그중에 독립된 사무실은 하나밖에 없었다.“저긴 팀장님 사무실이에요.”심아린이 설명을 보탰고,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저희 팀 원톱인데, 능력도 뛰어나요.”이내 잠깐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큰 도련님과 사이가 돈독해서 신임을 두둑이 얻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최대한 마주치지 말아요.”마주치지 말라니? 그녀는 다름 아닌 재무팀장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어찌 가능하겠는가?“팀장인데 아직도 직접 회계 업무를 봐요?”백아영이 일부러 궁금한 척 물었다.심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책임감이 강해서 모든 보고서를 직접 정리하고 관리해요. 밤늦게까지 일할 때도 많은데 절대로 다른 사람이 손을 못 대게 하거든요.”다시 말해서 가짜 장부를 만드는 일은 재무팀장만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타깃이 정해지자 백아영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음 단계는 재무팀장과 접촉할 기회를 만들어 그녀의 사무실에 발을 들이는 것이다.“심아린, 이분이 네가 모셔 온 의사야?”블랙 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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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4화

재무팀장은 백아영을 보자마자 적의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서류를 빼앗아 가다시피 하고는 쫓아내기 바빴다.“이제 그만 가도 돼요.”그냥 가버리면 헛걸음친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서류 꼼꼼히 확인해보시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한 번에 대답하고 나서 갈게요.”말을 마친 백아영은 아무렇지 않게 탕비실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내렸다.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백아영의 모습에 재무팀장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고작 외부인 주제에 대체 무슨 자격으로 서류 내용에 답변한다는 거죠?”백아영은 여유롭게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오늘부터 부대표님의 비서로 정식 입사했거든요.”비록 실체가 없는 명목상의 직책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재무팀장은 말문이 턱 막혔다.결국 가슴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른 채 서류를 넘겼는데, 종이의 펄럭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아마 서류를 확인하고 나면 그녀를 쫓아내려고 할 것이다.비록 백아영은 겉으로 여유가 넘쳤지만, 사실은 잽싸게 커피를 내리고는 책상을 빙 돌아서 재무팀장의 곁으로 걸어갔다.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재무팀장은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바짝 긴장했다.이내 왼쪽에 잠겨 있는 캐비닛을 의도적으로 가로막았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다가오지 마세요.”백아영은 무심한 시선으로 캐비닛을 훑어보더니 태연하게 커피를 건넸다.“왜 그렇게 긴장하죠? 설마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나요?”재무팀장은 무의식적으로 사무실 의자를 끌어당겨 캐비닛을 뒤로 숨겼다.목적을 달성한 백아영은 커피를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그녀의 예상이 맞는다면 제일 중요한 진짜 보고서는 캐비닛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달빛이 먹구름에 가려진 야심한 밤, 한원그룹 사무실을 밝히던 마지막 불이 꺼지면서 건물 전체가 어둠에 잠겼다.아무도 없는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이때, 부대표 사무실의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백아영이 안에서 살금살금 걸어 나왔고 이성준이 휠체어 바퀴를 밀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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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5화

이 타이밍에서 재무팀장에게 들킨다면 도둑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도둑으로 몰리는 꼴이 된다.한태윤도 어렵게 얻은 부대표 자리를 한순간에 잃고, 어쩌면 더 끔찍한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따라서 재무팀장의 눈을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하지만 사람은 숨는다고 해도 한태윤의 휠체어까지 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백아영은 바짝 긴장한 채 점점 커지는 문틈을 바라보며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가 입을 쩍 벌리고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절망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머릿속으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며 대체 어떻게 빠져나갈지 머리를 굴렸다.쿵!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마찰음이 별안간 울려 퍼지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를 능가했다.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재빨리 고개를 돌린 순간 창가에 서서 무언가를 던지고 손을 내려놓는 한태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백아영은 넋을 잃고 말았다. 멀쩡하게 서 있는 남자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왜...?”“읍!”이성준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더니 문 뒤로 끌고 가서 숨었다.그와 동시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재무팀장은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입구에 서서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어두컴컴한 사무실을 바라보았다.“누구야?!”백아영은 온몸이 바짝 긴장되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곧이어 귓가에 남자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요.”그녀는 안심하기는커녕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문 뒤의 비좁은 공간에서 거의 밀착하다시피 딱 붙어 있었다.피부의 열기와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지경이었고, 한약과 상쾌한 향이 어우러진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위험천만한 어둠 속에서 모든 감각 기관이 예민해진 탓에 그녀는 심장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재무팀장은 물어보고 나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빠르게 사무실 안을 훑어보았다. 별다른 인기척이 없자 한걸음 들어서 시선이 닿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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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6화

그녀의 착각인가?반면, 이성준은 백아영을 끌고 재무팀을 빠져나와 단숨에 1층까지 내려간 다음 한원그룹을 떠났다.한원그룹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멈춰 섰다.백아영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경호원을 미리 대기시킨 거예요?”욕설을 퍼붓던 경호원은 누가 봐도 한태윤이 부른 사람이었다.이성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롭게 말했다.“유비무환이라고 하죠.”재무팀장이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걱정하지 말라고 태연하게 말했던 이유도 단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대책이 있었기 때문이다.“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백아영은 연신 혀를 내둘렀다.이성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저한테 반한 건 아니죠?”반하다니?착각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던 찰나, 백아영은 문득 아직도 그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단단하고 커다란 손바닥에서 온기가 느껴졌는데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몽글몽글하던 분위기가 별안간 무겁게 가라앉았다.백아영은 허둥지둥 손을 빼내며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택시 부를게요.”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한태윤의 차는 집에 세워두었고, 선우철도 한씨 일가로 돌아갔기에 둘은 택시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텅 빈 손바닥과 피하기 급급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성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곧이어 곁으로 다가가 불쑥 말했다.“배고파요.”“집에 가서 죽 끓여줄게요.”“죽 이제 질렸어요.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이성준은 손을 들어 길 건너편에 있는 고깃집을 가리켰고, 마침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벌써 새벽이 되었으니 백아영도 배가 고팠고, 코를 찌르는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배가 꼬르륵거렸다.고깃집.이성준은 정말 배가 고픈 듯 알아서 주문했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자 전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심지어 부잣집 식탁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돼지 내장도 있었다.그녀는 의아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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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7화

한태성의 사무실.그는 앞에 서 있는 재무팀장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물었다.“요즘 백아영 씨가 당신 사무실에 자주 들락거린다면서?”“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부대표님이 백아영을 통해 서류를 전해줬을 뿐입니다. 요즘 따라 절 곤란하게 하는 횟수가 점점 증가하는데... 물론 저도 비협조적으로 대했어요.”그래서 최근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추진이 어려웠고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한태성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음흉한 눈빛으로 말했다.“백아영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선물을 줘야겠군.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어제저녁에 보고서를 찾는 데 실패했으니 백아영은 계속해서 재무팀을 드나들며 수소문할 수밖에 없었다.백아영은 여느 때처럼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고, 재무팀장은 질색하며 그녀를 쫓아내기 급급한 대신 데이터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보였다.마치 할 말은 없지만 일부러 말 걸기 위한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다.백아영은 잔뜩 경계했다.“팀장님, 괜히 빙빙 돌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시죠?”어차피 관계가 틀어진 이상 두 사람 사이에는 가식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재무팀장은 미리 준비한 손님용 물컵을 들어 눈웃음을 지은 채 백아영에게 건넸다.“동료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그동안 매일 우리 사무실까지 찾아오느라 고생이 많은데 물 좀 드세요.”백아영은 곧바로 뒤로 물러섰다.재무팀장이 독을 건네면 몰라도 물을 주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잔뜩 경계하며 거리를 두는 백아영을 보자 재무팀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활짝 웃었다. 그러나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꿍꿍이로 가득한 미소였다.“경계해도 소용없어요. 당신 끝장내버릴 테니까 도망칠 생각하지 마요.”말을 마친 그녀는 물컵을 옆으로 기울였고, 컴퓨터 본체 위로 물이 쪼르륵 흘러내렸다.이내 파바박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순간 ‘펑’하고 본체에서 폭발음이 들려오더니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한편, 사무실 밖에서 직원이 깜짝 놀라 외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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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8화

“당신! 고소당할 줄 알아요!”이내 기술자가 도착하여 본체를 부둥켜안고 꼬박 두 시간 동안 낑낑거렸지만, 결국은 허탈하게 포기했다.“완전히 망가져서 수리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데이터 복구도 불가능하고요.”재무팀장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백아영 씨,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나요?”“잿더미가 되지 않는 한 어떻게든 수리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가 직접 사람 불러서 수리할게요.”그동안 백아영은 난다긴다하는 엔지니어와 해커들에게 연락했고, 무조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재무팀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본체에 회사 내부 데이터가 들어 있기에 절대 외부인이 건드려서는 안 돼요. 만약 정보가 유출되면 회사가 손실 입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할지 몰라요.”그녀의 말에 직원들이 잇달아 동의했다.재무팀장이 말을 이어갔다.“백아영 씨, 그만 포기하시죠? 어디까지나 마지막 발악에 불과해요. 본체를 망가뜨렸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않겠어요?”“여기요! 저 사람을 붙잡아 경찰서로 데려가세요.”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리한 상황에 백아영은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재무팀장은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듯싶었다.백아영은 주먹을 꽉 쥐고 점점 가까워지는 경비원들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머릿속으로 재빨리 해결책을 생각했다.하지만 점점 더 불리하게 흘러가는 상황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수가 없었다.이때,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한겨울에 부는 찬바람처럼 사무실 온도가 족히 10도는 뚝 떨어진 것 같았다.“제가 고치겠습니다.”이성준이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백아영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커다란 몸집은 우뚝 솟은 산처럼 든든하게 느껴졌고, 안식처를 찾은 듯 마음이 놓였다.만약 회사 부대표인 그가 수리한다면 정보 유출이 걱정된다는 논리가 적용 불가능했다.재무팀장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부대표님, 장난하지 마세요. 본체 수리할 줄도 모르시면서 오로지 백아영 씨를 감싸주려고 그러는 건 너무하잖아요.”이성준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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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9화

백아영은 정곡이 찔린 듯 펄쩍 뛰면서 황급히 부정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그를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실연의 상처가 덜 회복된 건 둘째치고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좋아할 이유도 없으며, 뭇사람의 질타를 받는 제3자가 되기는 더더욱 싫었다.“무려 한 가문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도망가면 선우 일가의 명성에 먹칠할 게 뻔하지 않겠어요? 전 어차피 당당하니까 절대로 도망자 노릇은 안 할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일부러 한 마디 더 보탰다.“절대로 태윤 씨를 위해서가 아니에요.”선을 긋기 위해 급급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성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제가 있는 한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내일까지 본체 수리할 수 있어요.”비록 의아하긴 했지만, 말투가 워낙 단호하고 여유가 넘쳐서 저도 모르게 믿음이 갔다.이성준은 고장 난 본체로 다가가서 능수능란하게 분리하더니 곧바로 수리 작업에 돌입했다.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가릴 것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뤘다.백아영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프로그램까지 다룰 줄 알아요?”소문에 의하면 한태윤은 기계치라고 했다. 하지만 능숙하게 조작하는 모습은 난다긴다하는 해커마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이성준의 손가락이 움찔하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할 줄 아는 게 꽤 많아요. 오래 지내다 보면 알 거예요.”그 말인즉슨 겉으로는 어수룩한 척 실상은 아주 잘나간다는 건가? 오래 지내다 보면 알게 된다니?‘난... 그럴 생각 전혀 없는데?!’백아영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시선을 피하며 애써 그를 무시했다.한태성 사무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재무팀장을 바라보며 엄한 목소리로 호통쳤다.“태윤에게 본체를 수리하게 했다고? 이 멍청이야! 만약 정말 고쳐놓는다면 당신 때문에 내 계획이 무산된 줄 알아.”“그런 일은 절대 없어요.”재무팀장이 딱 잘라 말했다.“본체에 이미 손을 써서 프로그램에 문외한인 부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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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0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수심에 찬 얼굴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호를 마주쳤다.그녀를 발견한 정호는 잽싸게 다가갔다.“아영 씨, 할 말 있어요.”배가 고프다는 한태윤의 말이 떠올라 백아영은 한시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얘기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부리나케 재무팀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아영 씨!”점점 멀어져가는 백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끝내 말할 기회를 놓쳤다.프로그램은 쉬지 않고 돌려야 했기에 백아영은 죽을 떠서 한태윤에게 조금씩 먹여주었다. 따라서 먹는 속도가 현저히 느렸고 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 30분 넘게 소요했다.“아직 얼마나 더 걸려요?”백아영이 묻자 이성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다 됐어요.”한 시간 전에도 똑같은 대답이지 않은가?백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초췌한 남자의 얼굴을 보자 속으로 미안함과 걱정이 가득했다.정호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착잡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에게 가짜 한태윤을 조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진짜 도련님을 찾아달라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가짜 한태윤이 백아영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상황이었다.게다가 백아영도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과연 이 타이밍에서 진실을 밝혀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백아영이 모든 걸 알고 나서도 그를 도와 진짜 도련님을 찾아줄지는 미지수였다.식기를 정리하고 나서야 백아영은 정호를 찾으러 나왔지만 복도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이때, 경비원이 백아영에게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정호 씨가 남긴 연락처입니다. 시간 날 때 연락해달라고 하네요.”메모를 남길 정도면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닌 듯싶었다.백아영은 곧바로 연락하는 대신 메모지를 챙기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한태윤을 돌봐주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 어느덧 새벽 2시를 향해 달려갔다.밖을 지키던 경호원도 이미 교대했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밤을 꼬박 새운 백아영은 눈이 뻑뻑했지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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