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팀장은 백아영을 보자마자 적의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서류를 빼앗아 가다시피 하고는 쫓아내기 바빴다.“이제 그만 가도 돼요.”그냥 가버리면 헛걸음친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서류 꼼꼼히 확인해보시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한 번에 대답하고 나서 갈게요.”말을 마친 백아영은 아무렇지 않게 탕비실로 가서 커피 한 잔을 내렸다.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백아영의 모습에 재무팀장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고작 외부인 주제에 대체 무슨 자격으로 서류 내용에 답변한다는 거죠?”백아영은 여유롭게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오늘부터 부대표님의 비서로 정식 입사했거든요.”비록 실체가 없는 명목상의 직책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재무팀장은 말문이 턱 막혔다.결국 가슴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억누른 채 서류를 넘겼는데, 종이의 펄럭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아마 서류를 확인하고 나면 그녀를 쫓아내려고 할 것이다.비록 백아영은 겉으로 여유가 넘쳤지만, 사실은 잽싸게 커피를 내리고는 책상을 빙 돌아서 재무팀장의 곁으로 걸어갔다.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재무팀장은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바짝 긴장했다.이내 왼쪽에 잠겨 있는 캐비닛을 의도적으로 가로막았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다가오지 마세요.”백아영은 무심한 시선으로 캐비닛을 훑어보더니 태연하게 커피를 건넸다.“왜 그렇게 긴장하죠? 설마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나요?”재무팀장은 무의식적으로 사무실 의자를 끌어당겨 캐비닛을 뒤로 숨겼다.목적을 달성한 백아영은 커피를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그녀의 예상이 맞는다면 제일 중요한 진짜 보고서는 캐비닛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달빛이 먹구름에 가려진 야심한 밤, 한원그룹 사무실을 밝히던 마지막 불이 꺼지면서 건물 전체가 어둠에 잠겼다.아무도 없는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이때, 부대표 사무실의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백아영이 안에서 살금살금 걸어 나왔고 이성준이 휠체어 바퀴를 밀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
이 타이밍에서 재무팀장에게 들킨다면 도둑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도둑으로 몰리는 꼴이 된다.한태윤도 어렵게 얻은 부대표 자리를 한순간에 잃고, 어쩌면 더 끔찍한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따라서 재무팀장의 눈을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하지만 사람은 숨는다고 해도 한태윤의 휠체어까지 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백아영은 바짝 긴장한 채 점점 커지는 문틈을 바라보며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가 입을 쩍 벌리고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절망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머릿속으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며 대체 어떻게 빠져나갈지 머리를 굴렸다.쿵!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마찰음이 별안간 울려 퍼지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를 능가했다.소리가 나는 방향을 따라 재빨리 고개를 돌린 순간 창가에 서서 무언가를 던지고 손을 내려놓는 한태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백아영은 넋을 잃고 말았다. 멀쩡하게 서 있는 남자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왜...?”“읍!”이성준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더니 문 뒤로 끌고 가서 숨었다.그와 동시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재무팀장은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입구에 서서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어두컴컴한 사무실을 바라보았다.“누구야?!”백아영은 온몸이 바짝 긴장되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곧이어 귓가에 남자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요.”그녀는 안심하기는커녕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문 뒤의 비좁은 공간에서 거의 밀착하다시피 딱 붙어 있었다.피부의 열기와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질 지경이었고, 한약과 상쾌한 향이 어우러진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위험천만한 어둠 속에서 모든 감각 기관이 예민해진 탓에 그녀는 심장의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재무팀장은 물어보고 나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빠르게 사무실 안을 훑어보았다. 별다른 인기척이 없자 한걸음 들어서 시선이 닿지
그녀의 착각인가?반면, 이성준은 백아영을 끌고 재무팀을 빠져나와 단숨에 1층까지 내려간 다음 한원그룹을 떠났다.한원그룹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두 사람은 멈춰 섰다.백아영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경호원을 미리 대기시킨 거예요?”욕설을 퍼붓던 경호원은 누가 봐도 한태윤이 부른 사람이었다.이성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롭게 말했다.“유비무환이라고 하죠.”재무팀장이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걱정하지 말라고 태연하게 말했던 이유도 단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대책이 있었기 때문이다.“감탄밖에 나오지 않네요.”백아영은 연신 혀를 내둘렀다.이성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저한테 반한 건 아니죠?”반하다니?착각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던 찰나, 백아영은 문득 아직도 그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단단하고 커다란 손바닥에서 온기가 느껴졌는데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몽글몽글하던 분위기가 별안간 무겁게 가라앉았다.백아영은 허둥지둥 손을 빼내며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택시 부를게요.”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한태윤의 차는 집에 세워두었고, 선우철도 한씨 일가로 돌아갔기에 둘은 택시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텅 빈 손바닥과 피하기 급급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성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곧이어 곁으로 다가가 불쑥 말했다.“배고파요.”“집에 가서 죽 끓여줄게요.”“죽 이제 질렸어요. 우리 고기 먹으러 가요.”이성준은 손을 들어 길 건너편에 있는 고깃집을 가리켰고, 마침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벌써 새벽이 되었으니 백아영도 배가 고팠고, 코를 찌르는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배가 꼬르륵거렸다.고깃집.이성준은 정말 배가 고픈 듯 알아서 주문했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자 전부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심지어 부잣집 식탁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돼지 내장도 있었다.그녀는 의아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
한태성의 사무실.그는 앞에 서 있는 재무팀장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물었다.“요즘 백아영 씨가 당신 사무실에 자주 들락거린다면서?”“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부대표님이 백아영을 통해 서류를 전해줬을 뿐입니다. 요즘 따라 절 곤란하게 하는 횟수가 점점 증가하는데... 물론 저도 비협조적으로 대했어요.”그래서 최근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추진이 어려웠고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한태성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음흉한 눈빛으로 말했다.“백아영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선물을 줘야겠군.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어.”어제저녁에 보고서를 찾는 데 실패했으니 백아영은 계속해서 재무팀을 드나들며 수소문할 수밖에 없었다.백아영은 여느 때처럼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았고, 재무팀장은 질색하며 그녀를 쫓아내기 급급한 대신 데이터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보였다.마치 할 말은 없지만 일부러 말 걸기 위한 아주 간단한 질문이었다.백아영은 잔뜩 경계했다.“팀장님, 괜히 빙빙 돌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시죠?”어차피 관계가 틀어진 이상 두 사람 사이에는 가식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재무팀장은 미리 준비한 손님용 물컵을 들어 눈웃음을 지은 채 백아영에게 건넸다.“동료끼리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요. 그동안 매일 우리 사무실까지 찾아오느라 고생이 많은데 물 좀 드세요.”백아영은 곧바로 뒤로 물러섰다.재무팀장이 독을 건네면 몰라도 물을 주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잔뜩 경계하며 거리를 두는 백아영을 보자 재무팀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활짝 웃었다. 그러나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꿍꿍이로 가득한 미소였다.“경계해도 소용없어요. 당신 끝장내버릴 테니까 도망칠 생각하지 마요.”말을 마친 그녀는 물컵을 옆으로 기울였고, 컴퓨터 본체 위로 물이 쪼르륵 흘러내렸다.이내 파바박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순간 ‘펑’하고 본체에서 폭발음이 들려오더니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한편, 사무실 밖에서 직원이 깜짝 놀라 외쳤다.“
“당신! 고소당할 줄 알아요!”이내 기술자가 도착하여 본체를 부둥켜안고 꼬박 두 시간 동안 낑낑거렸지만, 결국은 허탈하게 포기했다.“완전히 망가져서 수리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데이터 복구도 불가능하고요.”재무팀장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백아영 씨,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나요?”“잿더미가 되지 않는 한 어떻게든 수리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가 직접 사람 불러서 수리할게요.”그동안 백아영은 난다긴다하는 엔지니어와 해커들에게 연락했고, 무조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재무팀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본체에 회사 내부 데이터가 들어 있기에 절대 외부인이 건드려서는 안 돼요. 만약 정보가 유출되면 회사가 손실 입는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할지 몰라요.”그녀의 말에 직원들이 잇달아 동의했다.재무팀장이 말을 이어갔다.“백아영 씨, 그만 포기하시죠? 어디까지나 마지막 발악에 불과해요. 본체를 망가뜨렸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않겠어요?”“여기요! 저 사람을 붙잡아 경찰서로 데려가세요.”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리한 상황에 백아영은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재무팀장은 그녀를 골탕 먹이려고 작정한 듯싶었다.백아영은 주먹을 꽉 쥐고 점점 가까워지는 경비원들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머릿속으로 재빨리 해결책을 생각했다.하지만 점점 더 불리하게 흘러가는 상황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수가 없었다.이때,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한겨울에 부는 찬바람처럼 사무실 온도가 족히 10도는 뚝 떨어진 것 같았다.“제가 고치겠습니다.”이성준이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백아영의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커다란 몸집은 우뚝 솟은 산처럼 든든하게 느껴졌고, 안식처를 찾은 듯 마음이 놓였다.만약 회사 부대표인 그가 수리한다면 정보 유출이 걱정된다는 논리가 적용 불가능했다.재무팀장은 화가 나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부대표님, 장난하지 마세요. 본체 수리할 줄도 모르시면서 오로지 백아영 씨를 감싸주려고 그러는 건 너무하잖아요.”이성준이
백아영은 정곡이 찔린 듯 펄쩍 뛰면서 황급히 부정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그를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실연의 상처가 덜 회복된 건 둘째치고 약혼녀가 있는 남자를 좋아할 이유도 없으며, 뭇사람의 질타를 받는 제3자가 되기는 더더욱 싫었다.“무려 한 가문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도망가면 선우 일가의 명성에 먹칠할 게 뻔하지 않겠어요? 전 어차피 당당하니까 절대로 도망자 노릇은 안 할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일부러 한 마디 더 보탰다.“절대로 태윤 씨를 위해서가 아니에요.”선을 긋기 위해 급급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이성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제가 있는 한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내일까지 본체 수리할 수 있어요.”비록 의아하긴 했지만, 말투가 워낙 단호하고 여유가 넘쳐서 저도 모르게 믿음이 갔다.이성준은 고장 난 본체로 다가가서 능수능란하게 분리하더니 곧바로 수리 작업에 돌입했다.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가릴 것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뤘다.백아영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프로그램까지 다룰 줄 알아요?”소문에 의하면 한태윤은 기계치라고 했다. 하지만 능숙하게 조작하는 모습은 난다긴다하는 해커마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이성준의 손가락이 움찔하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 할 줄 아는 게 꽤 많아요. 오래 지내다 보면 알 거예요.”그 말인즉슨 겉으로는 어수룩한 척 실상은 아주 잘나간다는 건가? 오래 지내다 보면 알게 된다니?‘난... 그럴 생각 전혀 없는데?!’백아영은 혼란스러운 마음에 시선을 피하며 애써 그를 무시했다.한태성 사무실.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재무팀장을 바라보며 엄한 목소리로 호통쳤다.“태윤에게 본체를 수리하게 했다고? 이 멍청이야! 만약 정말 고쳐놓는다면 당신 때문에 내 계획이 무산된 줄 알아.”“그런 일은 절대 없어요.”재무팀장이 딱 잘라 말했다.“본체에 이미 손을 써서 프로그램에 문외한인 부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수심에 찬 얼굴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호를 마주쳤다.그녀를 발견한 정호는 잽싸게 다가갔다.“아영 씨, 할 말 있어요.”배가 고프다는 한태윤의 말이 떠올라 백아영은 한시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얘기해요.”말을 마친 그녀는 부리나케 재무팀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아영 씨!”점점 멀어져가는 백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끝내 말할 기회를 놓쳤다.프로그램은 쉬지 않고 돌려야 했기에 백아영은 죽을 떠서 한태윤에게 조금씩 먹여주었다. 따라서 먹는 속도가 현저히 느렸고 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 30분 넘게 소요했다.“아직 얼마나 더 걸려요?”백아영이 묻자 이성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다 됐어요.”한 시간 전에도 똑같은 대답이지 않은가?백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초췌한 남자의 얼굴을 보자 속으로 미안함과 걱정이 가득했다.정호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착잡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에게 가짜 한태윤을 조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진짜 도련님을 찾아달라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가짜 한태윤이 백아영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상황이었다.게다가 백아영도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과연 이 타이밍에서 진실을 밝혀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백아영이 모든 걸 알고 나서도 그를 도와 진짜 도련님을 찾아줄지는 미지수였다.식기를 정리하고 나서야 백아영은 정호를 찾으러 나왔지만 복도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이때, 경비원이 백아영에게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정호 씨가 남긴 연락처입니다. 시간 날 때 연락해달라고 하네요.”메모를 남길 정도면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닌 듯싶었다.백아영은 곧바로 연락하는 대신 메모지를 챙기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한태윤을 돌봐주었다.시간은 일분일초 흘러 어느덧 새벽 2시를 향해 달려갔다.밖을 지키던 경호원도 이미 교대했고,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밤을 꼬박 새운 백아영은 눈이 뻑뻑했지만,
다음 날.재무팀장은 일찌감치 직원들을 회사로 불러 모아 기세등등하게 사무실로 향했다.그녀는 한태윤이 본체를 수리하지 못했을 거로 확신했다.아니나 다를까 재무팀에 들어서는 순간 아직도 본체와 씨름하고 있는 한태윤을 발견했다.설령 붙잡고 있다고 한들 약속 시간이 다가왔기에 결국 부질없는 짓이었다.“어차피 수리하지도 못하는데 굳이 발버둥 칠 필요 있나요? 나중에 몸까지 망가지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지 않겠어요?”재무팀장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이제 출근 시간이 됐거든요? 부대표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시죠? 아영 씨는 알아서 제 발로 경찰서에 갈래요? 아니면 경찰서까지 끌고 가줘요?”꼬박 밤을 새운 백아영은 마음이 사뭇 무거웠다. 눈동자는 새빨갛게 충혈되었고, 머리가 띵 해냈다.하지만 재무팀장의 잘난 척하는 표정을 보자 저절로 치가 떨렸다.“다 됐어요.”이성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고, 손가락으로 엔터 키를 누르는 순간 본체에 전원이 들어왔다.재무팀장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새된 비명을 질렀다.“이럴 수가!”아무리 능력 있는 해커라도 해도 고작 하룻밤 사이에 본체를 수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한태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녀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제 자리에 넋을 잃고 말았다.이성준은 힘들게 노트북을 내려놓았다. 밤새 강도 높은 작업 때문에 일어서면서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태윤 씨!”백아영은 서둘러 그를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괜찮아요?”말을 마치고 나서 컨디션을 확인하기 위해 맥박을 짚으려고 했지만 그에게 제지당했다.“아영 씨도 밤새 못 잤잖아요. 전 괜찮으니까 애먼 데 정력 소모하지 마요.”“하지만...”“그런데 졸리긴 하네요. 우리 집에 가서 잠이나 자요.”이성준은 그녀를 끌어안다시피 하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입구에 모여서 백아영을 붙잡기만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길을 비켜주었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재무팀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