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재무팀장은 일찌감치 직원들을 회사로 불러 모아 기세등등하게 사무실로 향했다.그녀는 한태윤이 본체를 수리하지 못했을 거로 확신했다.아니나 다를까 재무팀에 들어서는 순간 아직도 본체와 씨름하고 있는 한태윤을 발견했다.설령 붙잡고 있다고 한들 약속 시간이 다가왔기에 결국 부질없는 짓이었다.“어차피 수리하지도 못하는데 굳이 발버둥 칠 필요 있나요? 나중에 몸까지 망가지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지 않겠어요?”재무팀장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이제 출근 시간이 됐거든요? 부대표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시죠? 아영 씨는 알아서 제 발로 경찰서에 갈래요? 아니면 경찰서까지 끌고 가줘요?”꼬박 밤을 새운 백아영은 마음이 사뭇 무거웠다. 눈동자는 새빨갛게 충혈되었고, 머리가 띵 해냈다.하지만 재무팀장의 잘난 척하는 표정을 보자 저절로 치가 떨렸다.“다 됐어요.”이성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고, 손가락으로 엔터 키를 누르는 순간 본체에 전원이 들어왔다.재무팀장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새된 비명을 질렀다.“이럴 수가!”아무리 능력 있는 해커라도 해도 고작 하룻밤 사이에 본체를 수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한태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녀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제 자리에 넋을 잃고 말았다.이성준은 힘들게 노트북을 내려놓았다. 밤새 강도 높은 작업 때문에 일어서면서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태윤 씨!”백아영은 서둘러 그를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괜찮아요?”말을 마치고 나서 컨디션을 확인하기 위해 맥박을 짚으려고 했지만 그에게 제지당했다.“아영 씨도 밤새 못 잤잖아요. 전 괜찮으니까 애먼 데 정력 소모하지 마요.”“하지만...”“그런데 졸리긴 하네요. 우리 집에 가서 잠이나 자요.”이성준은 그녀를 끌어안다시피 하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입구에 모여서 백아영을 붙잡기만 기다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멍하니 길을 비켜주었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재무팀
겁에 질린 한태성은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이성준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백아영을 안은 채 그대로 스쳐 지나가 당당하게 별장으로 들어섰다.이성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한태성은 오싹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젠장, 저런 못난 놈한테 겁을 먹다니!”한태성은 화가 나서 발만 동동 굴렀다.그러나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씩 웃으며 음흉한 눈빛으로 이성준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백아영이 그렇게 좋다면 선물 하나 해줘야지.”이내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연락했다.“임소미가 아직도 집에 갇혀 있나? 이제 그만 풀어줘.”...한태성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태윤을 골탕 먹일 생각뿐인지라 누군가 재무팀장의 노트북을 몰래 가져가서 잠금 해제까지 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한원그룹의 탈세와 불법 거래에 대한 진짜 보고서는 이미 경찰의 손에 넘어갔다.이 사실을 알게 된 한건우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정신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태어나서 처음으로 궁지에 몰린 한태성은 칼을 들고 두말없이 한태윤의 별장으로 쳐들어가 죽여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외쳤다.이미 예상한 선우철은 손쉽게 그를 때려눕혔다.비록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지만, 한태성은 억울함과 분노가 차올라 목놓아 울부짖었다.“한태윤, 네가 한 짓이냐? 이 짐승보다 못한 놈아! 젠장! 어떻게 자기 집을 망하게 할 생각해? 한씨 일가가 무너지면 너도 빠져나가지 못할 줄 알아. 너 때문에 나도 망했어! 모든 걸 잃게 되었다고. 당장 기어 나오지 못해? 널 죽일 거야, 죽여 버릴 거야!”악을 쓰며 외친 나머지 한태성의 목이 서서히 쉬어갔고, 이성준은 그제야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이내 반짝이는 구두가 코앞에 나타났는데, 딱 떨어진 슈트 바지를 따라 고개를 들자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싸늘한 눈빛은 저승사자보다 더 섬뜩했다.이성준은 눈을 내리깔고 마치 벌레 보듯 쳐다보며 서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한씨 일가처럼 더러운 곳은 진작에
상남자 선우철마저 눈치챈 일을 백아영이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서로 사랑하는 소꿉친구 약혼녀가 있다고 했어요.”“만약 가짜면 어떡하려고요?”선우철은 본능적으로 말했다. 백아영을 향한 한태윤의 마음이 진심이란 생각이 들었고, 한태윤이라는 사람 자체가 겉과 속이 다른 듯싶었다.“그동안 한씨 일가에서 억압받으며 본모습을 숨기고 살아온 거 같은데, 무능하고 나약한 느낌과 180도 다르잖아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꼭꼭 숨겨놓을 정도면 약혼녀가 있다는 것도 지어냈을 가능성이 커요.”백아영은 흠칫 놀랐다. 그동안 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 말이지?하지만 곰곰이 돌이켜보니 갈수록 확신이 들었다. 한태윤의 감쪽같은 연기는 이미 목격한 적이 있지 않은가?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뭐든지 능청스럽게 연기할 것이다.물론 감정도 제외는 아니었다.애써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하더니 행여나 싶은 생각에 백아영은 머릿속이 뒤죽박죽 했다.한씨 일가가 무너지자 관련 범죄자들은 전부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썩어도 준치라고 한씨 일가가 있는 한 뒤처리는 한태윤이 직접 해결해야만 했다.온종일 바쁘게 보내고 돌아온 이성준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손에는 먹음직스러운 족발을 들고 있었는데 역시나 백아영이 제일 좋아하는 야식 중 하나였다.“어디서 샀어요? 남원에서 먹던 김가네 족발 맛이랑 똑같아요.”백아영은 족발을 뜯어 먹으며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제경과 남원은 입맛 자체가 달라서 백아영은 남원 음식이 감칠맛이 훨씬 더 깊었고, 맛도 있었다.이성준이 우아한 손짓으로 살코기를 바르면서 말했다.“김가네 족발의 주방장을 모셔 왔어요.”“네?”백아영은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손에 든 족발마저 툭 떨어뜨렸다. 주방장을 모셔 오다니?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닌가?이내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설마 날 위해 모셔 온 건 아니죠?”“아니면 제가 먹고 싶어서 모셔 왔겠어요?”이성준은 뼈와 분리한 살코기 한 점을
백아영은 오늘 저녁에 직접 만나서 한태윤의 약혼녀에 관해 묻고 싶었다.한태윤에 대한 호감이 저도 모르게 커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 모든 건 한태윤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소문이 가짜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일이다.저녁이 되자 백아영은 한씨 일가를 떠나 한원그룹으로 향했다.그리고 한태윤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레스토랑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한편, 이성준은 급한 일을 우선 미루고 뜬금없이 선포했다.“퇴근합시다!”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정호와 직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다들 충격받은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쿨하게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이성준을 바라보았다.찬바람을 쌩하니 일으키고 떠난 이성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백아영이 먼저 외식하자고 제안한 건 두 사람 사이에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의미했고, 그가 오매불망 바라왔던 일이기도 했다.오늘 밤 반드시 기회를 붙잡아 한층 더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리라 마음먹었다.이성준이 빠른 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와 백아영을 데리러 가기 위해 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안색이 창백한 여자가 불쑥 나타나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태윤 오빠!”이성준이 잽싸게 몸을 피하는 바람에 여자는 차에 철퍼덕 부딪혔다.이내 혐오감이 담긴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꺼져.”“태윤 오빠, 저 소미예요.”임소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성준을 바라보았고, 초췌한 얼굴에 속상함이 가득했다.“그동안 태윤 오빠 보러 안 왔다고 화난 거예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아빠가 저를 집에 가둬두는 바람에 밖에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오빠 만나러 보내주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도망도 쳐보고, 단식도 해보고, 자해도 했지만 결국 집을 벗어나는 데 실패했죠.”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손목에 선명한 칼자국이 보였고,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제발 화내지 마요, 네? 전 오빠를 잊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어요. 온종일
이성준의 차는 제경에서 꽤 멀리 떨어진 어느 한 주택 앞에 멈추어 섰다.“태윤 오빠, 여기에는 왜 왔어요?”임소미의 얼굴은 의혹으로 가득했고, 떨리는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작 한 달밖에 못 봤지만, 눈앞의 남자는 더는 그녀가 사랑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싸늘하며 위험천만하고 두려운 느낌은 오로지 공포와 낯섦으로 다가왔고, 다정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이성준은 그녀를 무시하고 혼자 차에서 내려 주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임소미는 낯선 집을 바라보며 두려움이 밀려왔고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하지만 한태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한 발자국도 꼼짝하지 못했다.설령 한태윤이 변했다고 해도 이대로 도망쳐서 관계를 끊고 싶지 않았다. 죽는다 한들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임소미는 이를 악물고 벌벌 떨며 뒤를 따랐다.남자를 따라 거실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있는 또 다른 한태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태윤 오빠?”깜짝 놀란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성준과 한태윤을 번갈아 보았다.“왜 똑같은 사람이 두 명이나 있죠?”이성준은 시계를 흘끔 보더니 싸늘한 말투로 한태윤에게 말했다.“자기 여자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않겠어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게 하지 마세요. 그리고 며칠 뒤면 돌아갈 예정이라 한씨 일가 뒤처리는 직접 돌아가서 하세요.”말을 마친 이성준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백아영과 저녁을 같이 먹기 위해 픽업하러 한씨 일가로 향했다.그러나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의 문자를 받았다.「저녁 안 먹어도 될 것 같아요.」...백아영은 정처 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마침 앞을 스쳐 지나가는 커플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먹먹했다.마치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한 느낌에 숨이 턱 막혔다.이성준과 헤어지고 나서 상처받은 적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한태윤에게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을 가졌다는 생각에 스스로 비웃고 원망했다.아직 상처를 덜 받고, 교훈을 덜 얻어서
slov, 이 가게를 보고 있노라니 백아영은 좋아졌던 기분마저 또 한 번 먹구름이 끼었다.“왜 그래? 여기 마음에 안들어?”성무열은 예리하게 백아영의 감정을 알아챘다.백아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가자.”부적절한 감정, 부적합한 사람이라면 응당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에 백아영은 영향받지 않으려고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이성준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지만 뜻밖에도 그곳엔 백아영이 없었다.그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백아영에게 전화를 걸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연결됐다.“태윤 씨, 무슨 일 있어요?”이성준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언제쯤 돌아와요?”백아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들이 찾아와서 당분간은 옆에서 돌봐야 해요. 앞으로 한씨 일가로 가는 건 불편할 것 같네요. 저희 오빠가 태윤 씨를 챙겨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게다가 병세가 많이 호전돼서 제가 없어도 별일 없을 거예요.”이성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이현무의 외출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그래도 이현무를 만나 기뻐하는 백아영의 모습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저도 현무 보고 싶은데 지금 어디 있어요? 제가 그쪽으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핸드폰 너머로 성무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아, 욕실에 물 받아놨어.”“태윤 씨,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요. 중요한 건 저희 오빠한테 잘 설명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백아영은 할 말만 하고 깔끔하게 전화를 끊었다.꺼진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보고 있던 이성준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방 안의 온도는 따뜻한 봄날에서 섣달 추운 겨울로 바뀌면서 오직 싸늘함만 맴돌았다.‘성무열? 그 자식이 왜 찾아온 거지? 욕실에 물을 받아놨다고?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강한 위기감이 몰려온 이성준은 잔뜩 어두운 얼굴로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더니 차에 타자마자 명령했다.“5분 내로 백아영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이성준은
이성준은 그제야 이현무가 벌거벗은 채로 거품이 가득한 욕조에 앉아 있는 걸 보았고 백아영의 손도 거품으로 가득했다.“...”세상이 갑자기 멈춘 듯한 정적이 찾아오자 백아영은 민망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발이라도... 일단 떼는 게...”“쿨럭.”이성준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선 발을 뗐다.그 시각 바닥에서 일어난 성무열은 입에 고인 피를 내뱉으며 화를 냈다.“백아영, 이 사람이 네가 말한 환자야? 허약해서 몸을 가눌 수조차 없다던 그 사람?”이 정도의 힘을 허약하다고 표현한다면 성무열은 반신불수나 다름없다.백아영도 자신이 생각했던 무기력과는 차원이 다른 그의 강력함을 발견했다.“마음이 급해서 너무 무리한 것 같네요.”말을 마친 이성준은 한순간에 힘을 너무 주어 몸의 정력을 다 쓴 사람처럼 갑자기 폐를 토해낼 정도로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곧이어 몸을 가눌 수 없다는 듯 휘청거리더니 벽을 짚어 간신히 중심을 유지했다.이를 본 백아영은 의심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제가 부축할 테니까 일단 소파에서 쉬고 있어요.”이성준은 여세를 몰아 백아영의 몸에 기대어 힘없이 거실로 걸어갔다.피를 닦고 있던 성무열은 할 말을 잃었다. 그 순간 입안은 또 피로 가득했다. 성무열은 분노가 치밀어올라 몸을 떨고 있었고 남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확신했다.이현무는 욕조에서 일어나더니 동정하듯 성무열의 팔을 토닥였다.“아저씨도 기침해요. 제가 부축할게요.”성무열은 험상궂게 이현무를 째려보고선 짜증 내며 그의 몸에 묻은 거품을 씻어내고 타월로 감싼 채 끌어안고 나갔다.거실로 나가니 백아영과 한태윤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있었고 백아영은 그의 등에 손을 얹은 채 천천히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물었다.“이제 좀 괜찮아요?”한태윤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목소리는 허약하기 그지없었다.“가슴 쪽이 아직도 아파요.”“기침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아플 수 있어요.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선우경진은 어물쩍거리며 전화를 받더니 허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아영아, 내가 작은 교통사고를 당해서 팔을 다쳤어. 후유증 안 남게 하려면 지금 바로 남원으로 돌아가서 치료받아야 할 것 같아. 태윤 씨 일은 나도 도와줄 수 없게 됐네.”전화를 끊은 백아영은 소파에 앉아있는 연약한 남자를 보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밀려왔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현무가 왔으니 한씨 일가에서 지내는 건 불편해요...”“아영 씨는 생명의 은인이니까 아영 씨의 아들은 제 아들이나 다름없어요.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까 한씨 일가에서 지내도 돼요.”이성준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온화한 분위기를 뿜어냈다.그러나 성무열은 그의 가식적인 웃음에 몸서리쳤고 한편으로는 소름이 돋았다.“의사와 환자의 관계일 뿐인데 가족까지 데려가서 한씨 일가에서 지내는 건 민폐잖아요. 더군다나 저랑 현무는 다른 사람 집에서 지내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 태윤 씨, 아무래도 혼자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진찰은 제가 매일 아영이랑 함께 갈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이성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성무열을 바라봤다.“엄마가 있는 곳에 아이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도대체 뭐가 익숙하지 않다는 거죠? 무열 씨야말로 스스로 남원에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외부인 주제에 아영 씨와 현무랑 같이 지내는 건 너무 이상하잖아요.”이성준이 야망을 드러내며 한발도 물러서지 않자 성무열은 현무를 꼭 껴안으며 티를 냈다.“현무는 제 양아들이에요. 저희는 가족이라고요. 지금으로선 태윤 씨가 외부인이라는 생각 안 들어요?”‘양아들?’이성준의 눈빛은 극도로 차가워지더니 이현무를 보며 호통쳤다.“양아버지? 누가 함부로 이렇게 행동하라고 했어?”한동안 내버려두었더니 어느새 성무열 같은 자식을 양아버지로 받아들였다. 이성준은 당장이라도 이현무를 혼쭐내고 싶었으나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한태윤의 사나운 모습에 놀란 이현무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고 예전에 아
분명 맛있는 음식인데도 백아영은 입맛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몇 입 먹고 난 뒤 배가 아플 정도였다. 그녀는 이성준의 품에 안겨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성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껴안고 자리에서 크게 화를 냈다. “윌리엄스, 혹시 음식에 독을 넣은거예요?!”윌리엄스는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져서 급히 변명했다.“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 백아영은 힘겹게 이성준의 손목을 잡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윌리엄스가 독을 넣지 않았어. 내가...”“너 왜 그래?” 이성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백아영을 안은 팔뚝을 가볍게 떨었다. 백아영은 몹시 아팠지만 눈길은 부드러웠고 약간 희색을 띠었다. “윌리엄스에게 실례지만, 국왕께 하룻밤 묵을 방을 빌려달라고 부탁해 줘.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불러줘.”이성준이 눈치를 채지 못하자 백아영은 창백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방금 맥을 짚었는데, 나 임신했어.” 이성준의 동공은 움츠러들었다가 한참 만에 겨우 회복되었다. 찰나의 놀라움 뒤에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임심했는데 통증이 이렇게 심해?”그는 조바심이 나서 윌리엄스에게 의사를 불러오도록 재촉했다. 백아영은 아파서 힘이 없었던 나머지 그의 품에 푹 기대어 있었다. 전에 백아영은 이런 비슷한 환경에서 한 아이가 강제로 유산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산에 가서 실랑이를 벌였고, 이로 인해 병세가 심했다. 이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고생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아영은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상적이야.”‘정상이라니?’ 이성준은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지만, 백아영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둘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8개월 후. 산부인과 수술실 문이 열리자 이성준이 급히 달려들였다. 점잖던 남자는 안달복달한 얼굴로 물었다.“제 마누라는 어때요? 무사한가요?”“모녀는 무사합니다.”
집사는 경악했다.“폐하, 그들은 굴러들어 온 복도 차버리니 분명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윌리엄스의 안색을 본 집사는 목이 메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윌리엄스는 조금 전까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성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간신히 이빨 사이로 글자를 밀어냈다.이, 이 대표?” 이성준은 경멸하듯 그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윌리엄 집안의 자식이 확실히 다 컸네.” 윌리엄스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렸다. 엄청난 두려움이 엄습했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 이성준을 처음 만났다. 그때 이성준은 아직 소년이었지만, 기세가 등등하고, 과감하며, 감히 국왕인 윌리엄스의 아버지와 거래를 논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조차도 이성준을 대단하게 여겼다. 심지어 윌리엄스에게 앞으로 절대 이성준의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나라의 세력이 처참하게 약해질 것이다. 윌리엄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준은 악마라고 마음에 새겨 두었다. 게다가 윌리엄스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이성준은 그의 나라에 협조하지 않는 대신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반년 동안 누워계셨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윌리엄스는 일찌감치 이번 생은 절대 H 국에 가지 않기로 했고, 절대로 이성준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거래 협력을 모두 점진적으로, 완곡하게 해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항상 악마를 멀리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다. 백아영은 뜻밖에도 이성준의 아내였다! 어떤 생명의 은인 규칙, 첫눈에 반한 사랑 따위는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어떤 계획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왜 행동을 하기 전에 백아영의 신원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후회되었다! 악마를 끌어들여 버렸다... “복을 차버린다나 뭐라나,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윌리엄스가 집사를 발로 매우 세게 찼
차에 타고 있던 남자들도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백아영과 이성준을 포위했다. 험상궂은 얼굴의 한 남자가 환영 반 협박 반인 어투로 말했다. “두 분, 차에서 내리십시오.”차 밖에서는 윌리엄스가 활짝 웃으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백아영이 차에서 내리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곁에 있던 집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폐하, 궁전의 수비를 모두 강화 완료했습니다. 궁전 주위에 800명의 호위 병사를 추가로 파견했어요. 이분들은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되셔서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혼 변호팀 사람들은 이미 도착하셨고 두 분이 차에서 내리시면 바로 처리할 수 있어요.”“폐하, 곧 미인을 품에 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윌리엄스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갔다. 산 위에서 백아영의 워낙 강인한 모습에 사람도모자라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지금은 백아영의 대단한 솜씨도, 그녀의 남편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단념할 수밖에 없다. 모두 생명의 은인으로 보고 첫눈에 반하게 만든 백아영 탓이었다. 그는 이 나라의 왕이다. 그가 마음에 드는 한 반드시 그의 것이다. 또한 결혼 후 백아영을 자신의 매력에 매료시켜 점차 이성준을 잊게 할 자신이 충만했다. 윌리엄이 생각을 하던 중, 차 문이 열리고 관광버스에서 백아영이 내렸다. 윌리엄스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그녀를 반겼다.“아가씨, 또 뵙네요.”윌리엄스가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고 백아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아영의 뒤로 큰 덩치의 이성준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성준은 차갑게 말했다.“내 아내를 뺏으려는 게 너야?” 이성준은 포위망 속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의 구역에서 그는 독 안에 든 쥐였지만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이성준의 기는 모두를 앞질러 버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는 왕인 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서늘한 몇 글자가 사람을 더욱 섬뜩하게 했다. 집사는 높은 인물들을 많이 보았었기에 즉시 이성준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이곳은 그들의 궁전이
윌리엄스는 어안이 벙벙했다.백아영의 솜씨는 정말 놀라웠다. 그녀의 기묘한 침을 꽂는 기술이 더욱 놀라웠다.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지는 백아영의 몸에는 빛이 보였다.그녀의 아름다움은 남달라서 비길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백아영은 여전히 은침을 손에 들고 윌리엄스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좀 건드리세요. 알아들으셨죠?”“저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윌리엄스의 의욕 넘치는 말은 눈앞으로 가까워져 오는 침에 놀라 목이 메었다. 순식간에 덮쳐 온 위험과 두려움이 그를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게 했다.백아영은 다시 경고했다.“잘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는 않을게요.”젊고 고집스러운 윌리엄스는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위협은 그를 이성적으로 뒤로 물러나 타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백아영은 바늘을 다시 집어넣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네 부하는 경련을 일으키다가 10여 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자 멀리 떨어진 곳에 백아영이 보였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폐하, 죄송합니다. 저희가 너무 부족했어요.”윌리엄스는 백아영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너희 탓이 아니야. 저 소녀가 너무 강할 뿐이야. 가자. 이제 내려가야지.”부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여왕님을... 그냥 이렇게 포기하시려고요?”윌리엄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그럼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말이 통하지도 않고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니 부하는 조용히 입을 꾹 닫았다.하지만 윌리엄스는 미소를 띠었다.“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이야.”이성준은 열매 한 봉지 가득 따왔다. 그는 열매를 깨끗이 씻은 뒤 쟁반에 담아 백아영 앞에 대령했다.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방금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누가 너를 귀찮게 했다면서?”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도리도리 저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일으켰어.”이성준은 자초지종을 듣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백아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었다. “아파서 머리까지 다쳤나. 걱정 마세요, 위험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돌아가시면 의사부터 보세요. 잘 케어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에요.”백아영은 진지하게 당부했지만 상대방은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백아영이 그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청년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 지금 진지해요.”“이것은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은 반드시 몸으로 갚아야 합니다.”윌리엄스 왕족?백아영은 입헌군주제인 국가에 왔다. 이곳은 현대사회와 어우러졌지만 여전히 왕권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의 왕은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듬직하고 성숙하며 상당한 재주를 가졌다고 전해졌다. 왕은 1년 넘게 국가 정무를 질서 있게 처리했다.다시 이 풋풋하고 고집 센 청년을 본 백아영은 목이 메었다. 왕은 소문과는 좀 다른듯했다.백아영은 청년한테 잡힌 손을 빼냈다.“그냥 눈에 보여서 구해준 거니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그리고 저는 결혼까지 한 여자에요.”“결혼하셨군요...”청년은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백아영이 일찍 결혼했으니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청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저는 재혼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남편분과 이혼해도 그대를 왕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저는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청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그제야 난처한지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아서는 백아영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슨 복잡한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백아영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청년이 이해가 되지 않아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곧이어 청년도 벌떡 일어났다. 너무 갑자기 몸을 일으킨 탓인지 몸을 휘청거리자 곁에 있던 남성이 얼른 그를 부축해 주었다.청년은 휘청거리는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막아섰다. 그의 맑은 눈은 어느새 포악해졌다.“아가씨, 억양을 들어보면 외국인인 것 같네요. 아직 우리 윌리엄스 왕족의 룰에 대해 잘 모
하지만 백아영은 현무가 힘들어할까 봐 차마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관광지 한 곳만 더 돌고 남원에 돌아갈 생각이었다.이성준은 진지하게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은 참 옳아.”백아영은 어리둥절했다.“자식이 많아야 집도 떠들썩하고, 현무도 동생이 생기지.”어린 노동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는 그의 뜻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이성준은 방긋 웃으며 백아영을 벽에 바짝 붙였다. “여보, 우리 현무에게 동생 만들어주자.”이날 현무와 백아영은 영상통화를 했다. “엄마, 안색이 안 좋아. 어디 아파?”화면 속에서 백아영의 안색은 살짝 하얗게 보였다.하지만 별다르게 불편한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낮에 산에 오르느라 피곤해서 그런가 봐. 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럼, 내일 일단 산을 내리지 말고 호텔에서 쉬는 거예요?”내일 하산할 예정이었지만 백아영은 단호하게 답했다.“맞아.”그제야 현무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통화를 끊고 백아영의 이마에 길쭉한 손이 닿았다. 이성준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실제로 봤을 때 백아영은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성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내가 의사인데 모르겠어?”“하룻밤을 묵어도 좋으니까, 난 네가 좋아하는 열매를 좀 따올게.”이 산의 열매는 특산물이었기에 백아영이 매우 좋아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한 후, 이성준은 혼자 산꼭대기에 가서 열매를 땄고, 백아영은 아름다운 산기슭에 앉아 차를 마시며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그녀는 조용히 열매를 기다리고 있었다.기다리는 동안 찻집 안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도와주세요! 여기 도와주세요!”“의사 없어요? 응급처치할 줄 아는 사람 혹시 있어요? 좀 살려주세요! 저의 도련님을 살려주세요...”식당에서 대략 이십 대 초반의 한 청년이 땅에 누워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
한 달 뒤.인천공항에서 현무는 양복을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서 웃음을 가득 머금고 백아영을 배웅했다.“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 와요. 여기 일은 저한테 맡겨요.” 현무는 이성준의 아들답게 한 달 만에 기본적인 경영 업무를 배웠고, 심지어 위정을 도울 수 있었다.또한 그는 이성준의 외아들인 만큼 이성그룹의 후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는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도 모든 주주와 직원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기에 일을 더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게다가 이성준의 한 달간 밑받침을 잘 깔아놓은 덕에 안심하고 현무와 위정에게 이성그룹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위정의 불평도 적어졌다. 그는 앞으로 일할 날에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내 아들 최고.”백아영은 현무를 꼭 끌어안고 그의 볼에 쪽 뽀뽀했다.“엄마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영상통화 해. 날마다 기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면, 엄마와 아빠가 바로 날아와서 때려 놓을 거야.”백아영의 품에서 현무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순간 엘리트에서 어린 아기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하지만 이성준의 말과 백아영의 행복을 생각하며 현무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엄마 걱정하지 마, 외삼촌과 위정 아저씨가 계셔서 아무도 날 못 괴롭혀. 내가 좀 더 크면 내가 엄마를 보호해야 해.”백아영은 감동되어서 감정이 벅차 놀랐다. 현무는 너무 든든한 아들이었다.선우경진은 팔짱을 낀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이씨 가문의 일은 해결됐지만 아직 선우 일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잊지 마.”“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새로운 아이템도 많이 생각해 둬.”한 달 동안 그들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급한 불은 거의 다 껐다. 하지만 의학은 끝이 없고 신약 연구는 더 중요했기에 선우경진은 수시로 백아영을 감시했다.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다른 곳에서 시야를 넓히고 영감을 얻으면 신약을 개발하는데 더 쉬웠다.이성준은 한쪽에
현무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지만, 다섯 살짜리 꼬마에게는 좀 시기상조였다. 하지만 이성준은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그러나 이성준의 엄숙한 표정을 보니 바로 계획을 하나 만들어 내야 할 것 같았다.현무는 골똘히 생각했다.“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매일 엄마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요.”“엄마를 기쁘게 해주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동시에 이룰 수 없어.”“왜요?”현무가 공부해서 잘하고 매일 학교 갔다 오면 자연스레 백아영을 볼 수 있고 그녀도 즐거워하는 게 일상이었다.“너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잊었어?”현무가 네 살 되기 전까지 백아영은 그의 곁에 있어줄수 없었다. 백아영이 돌아온 후, 비록 온 가족이 드디어 모였지만,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았고 때마다 백아영은 떠나야 했고, 항상 바쁜 일상에 기쁠 때도 있었지만 힘들 때가 더 많았다. 현무는 그런 백아영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엄마는 나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나쁜 거예요?”어린 현무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돌기도 전에 이성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너 때문이 아니야. 엄마가 놓인 상황 때문이지. 남원에서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과 언제든지 생기는 변화 때문이야.”“만약 누군가가 이 짐을 대신 나눠주고, 그런 일들을 완전히 해결해 주고, 엄마가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게 해준다면 매일 즐거워할 거야.”현무는 어리지만 총명해서 즉시 이성준의 뜻을 알아차렸다.“아빠, 제가 엄마의 일을 나누어서 해도 돼요?”이성준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너는 할 수 있어.”“그런데 힘들 거야. 엄청 힘들 수 있어. 대신에 엄마를 오랫동안 못 볼 텐데, 그래도 할래?”현무는 힘든 것은 두렵지 않지만, 오랫동안 백아영을 볼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현무는 머뭇거렸다. 그는 섭섭해서 고뇌했다.“나 그냥 엄마랑 여행 가면 안 돼?”이성준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네가 경영대를 일찍 졸업하면 돼.”현무는 지능이 높아서, 월반하는
이성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 은퇴할 생각이야.”‘역시!’백아영이 머릿속으로만 하던 황당한 추측을 이성준 입으로 직접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왜 이성준이 갑자기 도망 오려 했던 건지, 그리고 왜 그 큰 짐을 위정과 선우경진한테 내던졋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준은 그들을 훈련하고 있었다.수단이 좀 잔인했을 뿐이다.“왜 갑자기 은퇴하고 싶은 거야?”백아영은 아직 앞날이 밝은 이성준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성준은 백아영을 응시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쓱쓱 만졌다.“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이성준은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이성준의 괴로운 심정은 눈에 훤히 비쳤다. 그는 사실 오래전부터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영아, 앞으로 남은 생 동안 나는 네가 조용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은퇴하고 쇼핑센터를 떠나면 원한도 모두 훨훨 털어 버릴 수 있다. 두 사람은 세계 여행하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백아영의 머릿속은 멍해졌다.백아영은 이성준이 은퇴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자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성준이 계획한 미래에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의 미래는 온통 백아영 한사람이었다.백아영은 감동되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환상하던 미래는 정말 기대할 만한 것같았다.“하지만 지금은 내가 선우경진과 위정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아.”겨우 보름밖에 안 되었는데, 그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참지 못하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더 감당하기 어려워할 게 뻔했다.이성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사색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현무 이제 다섯 살이니까 남자 다 됐지.”백아영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현무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지?”이성준은 담담하게 되물었다.“안 될 게 뭐가 있어?”‘안 될 게 뭐가 있겠냐고? 현무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이성준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다섯 살 때,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