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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 지금 이 전화 몰래 드리는 겁니다. 백 대표님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랬거든요.”청아가 속삭이다시피 조용히 말했다.“내내 3년 전 일로 미안해하시더라고요. 강여름이란 사람 정말 대단하다면서.”“걔가 너무 착해서 그러지.”하준의 말투에서 마음 아픈 것이 느껴졌다. 3년 전 백지안이 자신에게 여름에게 우울증이 있다고 속인 것은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 갑자기 미안하게 느껴졌다.“하지만 대표님은 강여름 씨를 만나고 나서부터 좀 정신이 나간 것 같습니다. 강여름 씨가 자기가 돌아왔으니 이제 백지안 씨와 최하준 씨는 부부가 아니라며 백지안 씨에게 내연녀라고 큰소리치더라고요.”“그 일은 내가 나중에 지안이랑 얘기하지.”하준은 여름의 후안무치함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전화를 끊고 나서 청아가 백지안을 돌아보았다.“잘했어.”백지안이 청아의 손을 잡더니 씁슬하게 말을 이었다.“이렇게 도와줘서 고마워.”“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때 제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대표님께서 덮어주지 않았으면 전 진작에 쫓겨나서 오늘날 이런 자리에 있지 못했을걸요.”청아가 연신 감사해했다.“전 차윤 같은 바보가 아닙니다. 잠깐 강여름을 따라다녔다고 그런 사람을 동정하다니. 강여름은 불륜녀잖아요? 백지안 씨랑 회장님의 사랑에 그런 불순한 여자가 끼어들면 안 되죠. 그건 대표님께 너무 불공평해요.”“그런 소리 마. 다 내가… 그때 사고만 나지 않았어도….”백지안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강여름이 저렇게 준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난 평생 최하준과 결혼을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그런 말씀 마세요. 꼭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릴게요.”청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백지안이 끄덕였다. 이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 하준이 전 전화였다.백지안은 얼른 코를 문질렀다. 목소리에서 충분한 콧소리가 나게 한 다음에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준….”“목소리가 왜 그래?”하준은 즉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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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화

엄 실장이 돌아가자 여름은 곧 영상 통화를 켜서 귀여운 두 아이와 통화를 시작했다.“엄마, 보고 치퍼.”여울의 만두처럼 동그란 얼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입가에는 초콜릿이 묻어 있었다. 여름은 순간 울컥했다.“강여울, 또 윤서 이모 꼬셔서 초콜릿 사달라고 했어요?”여울은 눈을 깜짝였다.“아니요. 안 그랬는데요?”아무 말 없이 꼬맹이의 연극을 바라보다가 여름이 말을 이었다.“지금 강여울 입가에 초콜릿 다 보이거든.”여울은 깜짝 놀라더니 할짝할짝 알뜰하게 초콜릿을 싹 핥아 먹거니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내가 먹은 거 아니야. 이모가 초코 먹고 나한테 뽀뽀한 고예요.”“……”여름은 이마를 짚었다.‘어쩌다가 이렇게 거짓말이나 하는 먹깨비를 낳았어 그래.’“그런 어리석은 거짓말로 엄마를 속이면 엄마가 믿을 것 같아?”“흥! 엄마양 안 놀아!”여울은 흥 하더니 삐친 척하며 몸을 돌렸다.옆에서 하늘이 한숨을 쉬었다.“엄마, 우리나라 가니까 죠아요? 나쁜 사람이가 엄마 괴롭히지 않아쪄? 혼자서 다 잘할 수 이써요? 내가 가서 도와주까?”“……”여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들의 어른스러운 말투는 대체 누굴 닮은 건지 알 수 없었다.이때 밖에서 누군가 발로 문을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우리 둥이들, 엄마가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네 사랑해.”여름은 영상통화를 끊고 현관으로 나갔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준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얼굴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눈은 사뭇 흉악스러웠다.“강여름! 감히 지안이를 찾아가? 죽고 싶어?”하준의 손이 거침없이 여름의 양 팔을 와락 잡았다.그러나 이제 여름은 예전의 여름이 아니었다. 하준의 손이 닿기도 전에 유연하게 쓱 몸을 뺐다.하준이 여름의 동작을 보더니 비웃었다.“보아하니 민정화 말이 맞군. 그간 어디 나가서 호신술이라도 배운 모양이지? 하지만 그걸로 민정화는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는 별것도 아니야.”“그건 알아. 하지만 내가 내 몸을 지키겠다는데 문제없잖아?”여름이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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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화

말을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몇 년 동안 스스로를 잘 억제할 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순간만큼은 아무래도 마음대로 통제가 잘 안됐다.화가 치밀어서 찾아왔던 하준도 이때는 여름의 기세에 조금 밀리고 말았다.“그걸 당신 엄마가 남겨준 건지 내가 어떻게 알아?”여름은 웃었다.“그래, 당신은 모르겠지.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예전에는 분명 다 알던 것이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하준이었다.그러나 여름은 하준이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사람이 기억을 잃을 수는 있어도 여자 하나 때문에 남의 것을 진흙탕에 마구 집어 던지면 안 되지.’“그렇다고 지안이에게 함부로 손대면 안 되지.”하준이 불만스럽게 뱉었다.“누가 죽은 척하랬나? 그래도 지안이가 화신을 얼마나 열심히 관리했는데. 실적도 상당히 올려놨다고.”“그 큰 화신에 인재가 없었을까? 이전에도 오 사장이 관리 잘하고 있었거든. 백지안 같은 게 없어도 잘 굴러가던 회사였어. 백지안은 의학 전공이지 경영 전공도 아니잖아? 회사를 경영하고 싶었으면 영하나 경영할 것이지 왜 화신에 와서 난리야?”여름이 가식적인 웃음을 띠고 말했다.“그 인간은 그냥 내 것이 빼앗아 가고 싶었던 거야. 왜? 와서 우리 아버지도 빼앗아 가라고 그래. 벨레스도 빼앗아 가고!”“됐어. 지안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최하준이 이제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는 듯 말을 끊었다.“애초에 부동산 투자 쪽에 관심 있어 하는데 내가 가진 부동산 회사가 없어서 화신을 넘겨준 거야.”“아~ 그러면 이제 내가 당신들이 내 화신을 키워줘서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 건가?”여름이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뭐, 공로상이라도 드려야 하나?”“난 당신 그 비꼬는 말투가 제일 마음에 안 들어.”최하준이 굳이 혐오를 감출 생각도 없는 듯 말했다.“그래. 내 이런 꼴이 보기 싫으면 하루빨리 화신을 내게 돌려주면 되겠네. 당신 그 백지안 빨리 내보내고. 내일은 내가 화신으로 돌아가서 정리 좀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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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화

여름은 피하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자기 몸이 완전히 하준에게 파묻힌 상태로 이리저리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준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를 눈치챘을 때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되었다.“최하준, 이 짐승!”하준은 완전히 난처하기도 했지만 내심 엄청나게 놀라고 있었다.하준은 내내 자신은 남녀간에 벌어지는 일에 심리적인 저항이 있는 줄 알았다. 매번 지안을 접할 때도 무의식적인 거부감이 들 정도여서 자신은 애초에 이쪽일은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그런데 강여름과 잠깐 몸이 닿은 것만으로 이렇게 강렬한 욕구가 일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그 느낌 때문에 하준은 몇 배로 수치심을 느끼고…어쩐 일인지 자제심을 잃게 만들었다.여름을 상대로 자제심을 잃게 되자 하준은 짜증스럽게 말했다.“내가 무슨 짐승이라는 거야? 난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라고.”“정상적인 분이 오전에 비뇨기과는 왜 가셨을까?”여름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자 하준은 민망한 나머지 귀까지 빨개졌다.“말했잖아. 김 실장이랑 같이 가 준 거라고.”“누굴 바보로 아나? 자기 비서 비뇨기가 같이 가주는 상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여름이 하준을 밀치더니 헉헉거리며 밖을 가리켰다.“나가.”하준은 열기로 발그레해진 여름의 얼굴을 봤다. 이슬이 맺힌 채 활짝 핀 장미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참을 수 없게 되었다.“이 상태로 사람이 어떻게 나가?”“내가 알 게 뭐야?”여름은 더욱 눈을 매섭게 치떴다.“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알게 뭐냐니? 게다가 당신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혼인관계증명서 보라고. 당신 아직 내 아내야.”하준이 갑자기 흥! 하더니 여름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여름은 하준의 뻔뻔함에 경악하고 말았다.“최하준, 그렇게 입으로는 백지안을 사랑한다더니, 이게 당신이 백지안을 사랑하는 방식이야?”백지안이라는 석자가 하준의 머리에 찬물을 끼얹어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하준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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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화

하준은 이를 악물고 다가가 싸늘하게 말했다.“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뭐?”여름은 완전히 기가 막혔다. 완전히 의문표로 가득한 까만 눈이 지금 얼마나 사람을 매혹시키는지 여름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내가 뭘 해?”“다 알면서.”하준은 꼼짝도 않고 여름의 촉촉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속으로는 비웃었다.‘이거 봐. 지금 날 꼬드기고 있잖아?’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이제 다 해결 하셨나 봐?”하준이 다시 여름을 노려봤다. 무의식적으로 귀까지 빨개졌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여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뭐래? 쓰레기 주제에 귀는 왜 빨개지는 건데? 뭘 순진한 척하고 앉아 있어?’“아니, 보니까 비뇨기과는 안 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하고 있었지. 아무래도 병원은 백지안 쪽이 가 봐야 하는 건가? 자기 남자를 이렇게 굶기면 안 되지. 이 지경인데.”“지안이가 당신인 줄 알아?”하준은 여름의 말에 함의를 눈치채고 대꾸했다.‘하지만 3년이나 기다리게 했으니 지안이도 이제 정말 외롭지는 않을까?’하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갑자기 확신할 수가 없었다.“나 같은지 아닌지는 당신이 잘 알겠지. 우리 사이에는 아이도 있었는데 말이야.”여름은 얼굴도 붉히지 않고 반격했다.“……”하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지금 자신을 잠자리로 유도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생각해 봤어?”여름이 갑자기 물었다.하준은 흠칫했다.“회사 말인가?”“돌려 줄 건지 말 건지 결정하셔. 내가 백지안에게 사과하는 일 같은 건 없을 거야.”여름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그렇게 인내심이 좋지 못해서 말이야. 내일까지는 기다려 줄게. 아니면 나도 내 손이 참지 못하고 당신들이 벌인 추악한 짓을 다 까발릴지도 몰라.”“지금 자기 처지를 제대로 파악도 못 한 것 같은데, 감히 날 위협해?”하준은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눈에서는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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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화

“……”그런 말을 들으니 여름은 속이 상했다.여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반찬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여름은 아주 가늘게 감자를 채치고 있었다.하준은 마른 세수를 했다.“싫으면 말아. 소송하면 되니까. 별거를 그렇게 오래 했으니 이혼 청구 가능해.”“그러면 그렇게 해. 우리 법정에서 봐. 어느 기자가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면 볼만 하겠다, 그렇지? 난 이제 당신의 백지안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겠네.”여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하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대체 어떻게 해야 이혼해 주겠다는 거야?”“… 생각 안 해봤는데.”여름은 하준을 밀치더니 감자채를 볶기 시작했다.마늘 기름이 달궈지자 씻어서 물기를 뺀 감자채를 넣고 볶기 시작했다. 곧 고소한 향이 올라오자 파를 살짝 뿌렸다. 선명한 색상이 더욱 식욕을 돋웠다.갑자기 하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여름이 휙 돌아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하준의 배를 흘끗 봤다. 하준은 살짝 난처해져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당신 잡으러 다니느라고 점심도 못 먹었다고.”“아, 그러셔?”여름은 감자채를 담아내더니 후라이팬을 씻어서 바로 새우를 볶았다.하준의 미각이 다시 심하게 자극되었다.“배고프니까 더 볶아.”“당신이 배고픈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법적인 남편이니까 당신이랑 상관있지.”이렇게 식욕이 돋는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할 수 없이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배고픈 남편을 먹이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지.”“무슨 법 몇 조에 그런 조항이 있나요, 변호사님?”여름이 참지 못하고 돌아섰다. 부드러운 작은 손으로 하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나른하게 반짝이는 눈빛이 너무나 고혹적이었다.하준의 동공이 확장됐다. 심장이 눈치 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변호사 님’이라고 불렀지만 여름처럼 이렇게 고혹적이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을 준 사람은 없었다. 기억 속에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적이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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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화

‘뭐야?몇 년을 굶었나. 왜 밥을 국그릇에 퍼와?’여름은 마침내 여울이의 그 대식가 기질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있는 밥을 다 담아 온 거야?”뭔가를 깨닫고 여름은 깜짝 놀랐다. 여름이 한 밥과 반찬을 먹는 일이 하준에게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반찬 너무 적다고.”하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앉아서 새우를 집어 먹었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밥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다.평소에는 입맛이 전혀 없고 그렇게 까다로워서 아무리 유명한 쉐프가 한 음식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여름이 하는 집밥은 이상하게도 맛이 있었다.감자채도 고소하니 입맛을 돋웠다.게다가 쌀밥에 얹은 김치는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쌀은 찰기까지도 완벽했다.‘대체 무슨 밥솥이길래 이렇게 밥이 잘 되는지 모르겠네.’잠시 후 하준은 국그릇을 완전히 비웠다.배불리 먹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찬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여름은 화가 났다.“내건 남겨야 할 거 아냐? 나도 아직 다 안 먹었는데.”“그래서 내가 더 하라고 했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들어?”하준은 마지막 감자채를 입에 넣고는 우아하게 티슈로 입을 닦았다.“나 아직 배가 덜 찼는데.”“……”여름의 태양혈이 불뚝불뚝거렸다. 밥상을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준은 낮게 신음하더니 여름을 쳐다봤다.“오늘 차려준 점심을 생각해서 내일 화신은 돌려줄게. 그거 하나는 확실히 하자고. 난 당신 협박에 넘어간 거 아니야.”“하!”여름이 웃었다.‘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라!’여름의 비웃음이 하준의 신경을 긁었다.“그리고 경고하는데, 회사에서는 지안이에게 정중하게 대해줘. 한 번만 더 지안이 괴롭히다가 걸리면 좋게 안 넘어 갈 줄 알아.”하준은 말을 마치더니 일어섰다.현관까지 간 하준이 고개를 돌렸다.“내가 손 떼고 나면 화신은 곧 곤두박질 칠 거야. 나에게 와서 빌 날을 기다리겠어.”“그럴 일은 없을 걸.”여름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다.하준의 눈에 잠시 비웃음이 스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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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화

콰당하고 문이 열렸다. 일을 하던 최양하가 고개를 들어보니 하준이 사뭇 음험한 얼굴을 하고 들어오더니 곧 평정을 찾은 듯싶었다.“회장님, 무슨 일로….”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준의 주먹이 최양하의 얼굴로 향했다.미처 피하지 못한 최양하의 얼얼한 입가에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밖에서 상황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비서가 서둘러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FTT를 장악하고 있다고 내가 형을 두려워 할거라고 생각하지 마시죠. 나도 당당한 최씨 가문의 자식입니다.”최양하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내가 널 왜 친 것 같나?”하준이 옷깃을 정리했다.“3년 전에는 일을 아주 잘했더군. 강여름을 도와서 가짜 죽음을 꾸미고 날 아주 바보로 만들었어. 최양하, 그간 내가 널 아주 오냐오냐해줬지? 날 해치려고 작정했던 것도 내가 눈 감아 주고 했더니 이제는 내 머리꼭대기에 앉으려고 들어?”최양하의 입에서 냉랭한 미소가 흘러나왔다.“그런 말 할 자격 있습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형님은 3년 전에 사람 하나 잡을 뻔했다고요.”“난 강여름을 치료해 주려던 거야. 하지만 너랑 강여름이 가짜 장례식을 꾸며냈지. 왜 강여름을 도와줬어?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벌이려고? 강여름을 좋아하나?”어쩐지 씨가 다른 동생이 여름을 노린다고 생각하니 미친 듯한 불길이 속을 휘젓는 것 같았다.“아, 생각나네. 요 몇 년 툭하면 출국하더니 외국에 나가서 강여름을 몰래 만났나?”“치료했습니다.”최양하가 하준을 노려봤다.“정말 뻔뻔하게도 그딴 말씀을 하시는군요. 내가 강여름을 병원에서 빼냈을 때 상태가 대체 어땠는지나 아십니까? 완전히 정신이 몽롱해서 나도 못 알아볼 지경이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해외로 데리고 나가서 의사에게 보였더니 향정신성 의약물 과다 투여로 뇌가 망가졌다고 하더군요. 6개월이나 치료하고 나서야 증상이 호전됐습니다. 의사 말로는 애초에 정상인 사람에게 향정신성 의약물을 먹이면 되려 문제가 생긴답디다. 아시겠습니까? 조금만 더 늦었으면 멀쩡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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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화

“별일 아닙니다. 이제 더는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최양하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가서 일 보세요.”최란이 나가자 최양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손에 든 펜을 하마터면 부러뜨릴 뻔했다.사실 번번이 하준에게 압박을 당하는 기분은 정말 별로였다. 매번 뛰어들어 있는 대로 거들먹거리는 것이었다.퇴근 시간.추성호가 갑자기 최양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맞았다면서?”“… 누가 그래?”최양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추성호가 한숨을 쉬었다.“최하준이 사무실로 뛰어들어서 주먹을 날렸다는 건 지금 서울 사람들이 다 알아.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든 숨길 수가 없는 법이지.”최양하가 전화기를 꽉 쥐었다. 손등에 시퍼런 힘줄이 올라왔다.‘이제 완전 웃음거리가 되었군.’추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 너도 어엿한 최씨 집안의 아들인데 최하준은 뭣 때문에 그렇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고 그런대? 정말 너무 하잖아? 할 말이 있으면 문을 닫고 조용히 할 일이지. 손을 대는 정도까지 갔어야 하는 건지, 네 체면은 정말 생각도 않는 구먼.”“……”“정말 이대로 괜찮겠어? 사실… 최하준만 무너지면 네가 새로운 FTT의 주인이 되는 거 아니냐?”최양하가 싸늘하게 물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우리가 힘을 합칠 수도 있지. 따지고 보면 우린 형제 아니냐?”추성호가 말을 이었다.“너도 알겠지만 전에는 내가 너에게 기대기만 했지만 요 몇 년 동안 추신이 우리나라 제2의 그룹이 되었잖아? 내 볼륨도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다고. 너도 나처럼 되고 싶지 않아?”“그래. 전에는 나도 널 과소평가했었지.”최양하가 의미심장하게 비꼬았다.“그냥 까놓고 말해. 내가 뭘 해줬으면 하는 건데?”“아, 역시 최양하 똑똑하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FTT실험실의 새 반도체 데이터 손에 넣을 수 있어? 날 믿어. 이건 최하준을 끌어내릴 기회야. 너도 평생 최하준 발밑에 깔려서 살 생각은 아니겠지?”“날 너무 대단하게 보는 거 아니냐? 요 몇 년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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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화

‘지안이가 강여름에게 우울증이 있다고 내게 거짓말을 해서 정신 병원에 집어넣은 거잖아?3년 전에 여름이 죽지 않았더라면 나중에는 정말 정신병동에 강제 입원시켜 지금쯤 강여름은 진짜로 정신병자가 되어 있었겠지.’생각만으로도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왜 그래? 갑자기 날 그렇게 쳐다보고.”백지안은 하준이 불안했다.“… 지안아. 3년 전에 강여름은 정말 우울증이었어?”하준이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백지안은 속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날 못 믿어?”하준이 눈을 깔았다.“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지금 보니까 강여름이 너무 정상이라서, 병이 있었던 사람 같지 않더라고. 생각해 보니까 병원에 넣어 두고 병문안도 한 번 안 가봤네.”백지안이 일부러 입을 비죽거렸다.“그래, 사실 그때 내가 맥을 짚고 자세히 좀 보고 싶었는데 나한테 뜨거운 물을 뿌리고 막 그러는 바람에 내가 접근을 못했잖아. 100% 병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거라면 나도 확신은 없어. 하지만 확실히 환자 같은 증상은 있었지. 그때 병원에서 수용할 때 진단을 해보고 치료를 했겠지. 그게 내가 뭐라고 한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니잖아?”하준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백지안은 하준의 눈치를 쓱 보고 나서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하준이 그렇게 물어보니 백지안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정신 병력은 누구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 너도 전에….”“됐다, 밥 먹자.”하준이 말을 끊었다.“그래. 그만하자. 가서 스테이크 가져올게.”백지안이 곧 스테이크를 들고나왔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만들었는지 예쁘게 당근도 장식되어 있었다.그러나 하준은 한 입 넣었지만 삼키기가 힘들었다.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점심때 여름이 해주었던 집밥이 이상하게 더 당겼다.사실 전에는 양식을 좋아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별로 양식이 당기지가 않는 입맛이 되었다.“맛있어?”백지안이 기대하듯 물었다.“머리는 아직 아파?”하준은 말을 돌렸다.백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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