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은 이를 악물고 다가가 싸늘하게 말했다.“지금 날 유혹하는 거야?”“뭐?”여름은 완전히 기가 막혔다. 완전히 의문표로 가득한 까만 눈이 지금 얼마나 사람을 매혹시키는지 여름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내가 뭘 해?”“다 알면서.”하준은 꼼짝도 않고 여름의 촉촉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속으로는 비웃었다.‘이거 봐. 지금 날 꼬드기고 있잖아?’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이제 다 해결 하셨나 봐?”하준이 다시 여름을 노려봤다. 무의식적으로 귀까지 빨개졌다.“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여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뭐래? 쓰레기 주제에 귀는 왜 빨개지는 건데? 뭘 순진한 척하고 앉아 있어?’“아니, 보니까 비뇨기과는 안 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하고 있었지. 아무래도 병원은 백지안 쪽이 가 봐야 하는 건가? 자기 남자를 이렇게 굶기면 안 되지. 이 지경인데.”“지안이가 당신인 줄 알아?”하준은 여름의 말에 함의를 눈치채고 대꾸했다.‘하지만 3년이나 기다리게 했으니 지안이도 이제 정말 외롭지는 않을까?’하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갑자기 확신할 수가 없었다.“나 같은지 아닌지는 당신이 잘 알겠지. 우리 사이에는 아이도 있었는데 말이야.”여름은 얼굴도 붉히지 않고 반격했다.“……”하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지금 자신을 잠자리로 유도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생각해 봤어?”여름이 갑자기 물었다.하준은 흠칫했다.“회사 말인가?”“돌려 줄 건지 말 건지 결정하셔. 내가 백지안에게 사과하는 일 같은 건 없을 거야.”여름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그렇게 인내심이 좋지 못해서 말이야. 내일까지는 기다려 줄게. 아니면 나도 내 손이 참지 못하고 당신들이 벌인 추악한 짓을 다 까발릴지도 몰라.”“지금 자기 처지를 제대로 파악도 못 한 것 같은데, 감히 날 위협해?”하준은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눈에서는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왜?
“……”그런 말을 들으니 여름은 속이 상했다.여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반찬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여름은 아주 가늘게 감자를 채치고 있었다.하준은 마른 세수를 했다.“싫으면 말아. 소송하면 되니까. 별거를 그렇게 오래 했으니 이혼 청구 가능해.”“그러면 그렇게 해. 우리 법정에서 봐. 어느 기자가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면 볼만 하겠다, 그렇지? 난 이제 당신의 백지안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겠네.”여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하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대체 어떻게 해야 이혼해 주겠다는 거야?”“… 생각 안 해봤는데.”여름은 하준을 밀치더니 감자채를 볶기 시작했다.마늘 기름이 달궈지자 씻어서 물기를 뺀 감자채를 넣고 볶기 시작했다. 곧 고소한 향이 올라오자 파를 살짝 뿌렸다. 선명한 색상이 더욱 식욕을 돋웠다.갑자기 하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여름이 휙 돌아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하준의 배를 흘끗 봤다. 하준은 살짝 난처해져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당신 잡으러 다니느라고 점심도 못 먹었다고.”“아, 그러셔?”여름은 감자채를 담아내더니 후라이팬을 씻어서 바로 새우를 볶았다.하준의 미각이 다시 심하게 자극되었다.“배고프니까 더 볶아.”“당신이 배고픈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법적인 남편이니까 당신이랑 상관있지.”이렇게 식욕이 돋는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할 수 없이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배고픈 남편을 먹이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지.”“무슨 법 몇 조에 그런 조항이 있나요, 변호사님?”여름이 참지 못하고 돌아섰다. 부드러운 작은 손으로 하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나른하게 반짝이는 눈빛이 너무나 고혹적이었다.하준의 동공이 확장됐다. 심장이 눈치 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변호사 님’이라고 불렀지만 여름처럼 이렇게 고혹적이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을 준 사람은 없었다. 기억 속에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적이 있는 것
‘뭐야?몇 년을 굶었나. 왜 밥을 국그릇에 퍼와?’여름은 마침내 여울이의 그 대식가 기질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있는 밥을 다 담아 온 거야?”뭔가를 깨닫고 여름은 깜짝 놀랐다. 여름이 한 밥과 반찬을 먹는 일이 하준에게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반찬 너무 적다고.”하준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앉아서 새우를 집어 먹었다. 이렇게 만족스러운 밥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다.평소에는 입맛이 전혀 없고 그렇게 까다로워서 아무리 유명한 쉐프가 한 음식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여름이 하는 집밥은 이상하게도 맛이 있었다.감자채도 고소하니 입맛을 돋웠다.게다가 쌀밥에 얹은 김치는 그야말로 밥도둑이었다. 쌀은 찰기까지도 완벽했다.‘대체 무슨 밥솥이길래 이렇게 밥이 잘 되는지 모르겠네.’잠시 후 하준은 국그릇을 완전히 비웠다.배불리 먹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찬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여름은 화가 났다.“내건 남겨야 할 거 아냐? 나도 아직 다 안 먹었는데.”“그래서 내가 더 하라고 했잖아? 왜 사람 말을 안 들어?”하준은 마지막 감자채를 입에 넣고는 우아하게 티슈로 입을 닦았다.“나 아직 배가 덜 찼는데.”“……”여름의 태양혈이 불뚝불뚝거렸다. 밥상을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하준은 낮게 신음하더니 여름을 쳐다봤다.“오늘 차려준 점심을 생각해서 내일 화신은 돌려줄게. 그거 하나는 확실히 하자고. 난 당신 협박에 넘어간 거 아니야.”“하!”여름이 웃었다.‘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라!’여름의 비웃음이 하준의 신경을 긁었다.“그리고 경고하는데, 회사에서는 지안이에게 정중하게 대해줘. 한 번만 더 지안이 괴롭히다가 걸리면 좋게 안 넘어 갈 줄 알아.”하준은 말을 마치더니 일어섰다.현관까지 간 하준이 고개를 돌렸다.“내가 손 떼고 나면 화신은 곧 곤두박질 칠 거야. 나에게 와서 빌 날을 기다리겠어.”“그럴 일은 없을 걸.”여름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다.하준의 눈에 잠시 비웃음이 스치더니
콰당하고 문이 열렸다. 일을 하던 최양하가 고개를 들어보니 하준이 사뭇 음험한 얼굴을 하고 들어오더니 곧 평정을 찾은 듯싶었다.“회장님, 무슨 일로….”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준의 주먹이 최양하의 얼굴로 향했다.미처 피하지 못한 최양하의 얼얼한 입가에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밖에서 상황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비서가 서둘러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FTT를 장악하고 있다고 내가 형을 두려워 할거라고 생각하지 마시죠. 나도 당당한 최씨 가문의 자식입니다.”최양하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내가 널 왜 친 것 같나?”하준이 옷깃을 정리했다.“3년 전에는 일을 아주 잘했더군. 강여름을 도와서 가짜 죽음을 꾸미고 날 아주 바보로 만들었어. 최양하, 그간 내가 널 아주 오냐오냐해줬지? 날 해치려고 작정했던 것도 내가 눈 감아 주고 했더니 이제는 내 머리꼭대기에 앉으려고 들어?”최양하의 입에서 냉랭한 미소가 흘러나왔다.“그런 말 할 자격 있습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형님은 3년 전에 사람 하나 잡을 뻔했다고요.”“난 강여름을 치료해 주려던 거야. 하지만 너랑 강여름이 가짜 장례식을 꾸며냈지. 왜 강여름을 도와줬어?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벌이려고? 강여름을 좋아하나?”어쩐지 씨가 다른 동생이 여름을 노린다고 생각하니 미친 듯한 불길이 속을 휘젓는 것 같았다.“아, 생각나네. 요 몇 년 툭하면 출국하더니 외국에 나가서 강여름을 몰래 만났나?”“치료했습니다.”최양하가 하준을 노려봤다.“정말 뻔뻔하게도 그딴 말씀을 하시는군요. 내가 강여름을 병원에서 빼냈을 때 상태가 대체 어땠는지나 아십니까? 완전히 정신이 몽롱해서 나도 못 알아볼 지경이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해외로 데리고 나가서 의사에게 보였더니 향정신성 의약물 과다 투여로 뇌가 망가졌다고 하더군요. 6개월이나 치료하고 나서야 증상이 호전됐습니다. 의사 말로는 애초에 정상인 사람에게 향정신성 의약물을 먹이면 되려 문제가 생긴답디다. 아시겠습니까? 조금만 더 늦었으면 멀쩡하던
“별일 아닙니다. 이제 더는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최양하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가서 일 보세요.”최란이 나가자 최양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손에 든 펜을 하마터면 부러뜨릴 뻔했다.사실 번번이 하준에게 압박을 당하는 기분은 정말 별로였다. 매번 뛰어들어 있는 대로 거들먹거리는 것이었다.퇴근 시간.추성호가 갑자기 최양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맞았다면서?”“… 누가 그래?”최양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추성호가 한숨을 쉬었다.“최하준이 사무실로 뛰어들어서 주먹을 날렸다는 건 지금 서울 사람들이 다 알아.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든 숨길 수가 없는 법이지.”최양하가 전화기를 꽉 쥐었다. 손등에 시퍼런 힘줄이 올라왔다.‘이제 완전 웃음거리가 되었군.’추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 너도 어엿한 최씨 집안의 아들인데 최하준은 뭣 때문에 그렇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고 그런대? 정말 너무 하잖아? 할 말이 있으면 문을 닫고 조용히 할 일이지. 손을 대는 정도까지 갔어야 하는 건지, 네 체면은 정말 생각도 않는 구먼.”“……”“정말 이대로 괜찮겠어? 사실… 최하준만 무너지면 네가 새로운 FTT의 주인이 되는 거 아니냐?”최양하가 싸늘하게 물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우리가 힘을 합칠 수도 있지. 따지고 보면 우린 형제 아니냐?”추성호가 말을 이었다.“너도 알겠지만 전에는 내가 너에게 기대기만 했지만 요 몇 년 동안 추신이 우리나라 제2의 그룹이 되었잖아? 내 볼륨도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다고. 너도 나처럼 되고 싶지 않아?”“그래. 전에는 나도 널 과소평가했었지.”최양하가 의미심장하게 비꼬았다.“그냥 까놓고 말해. 내가 뭘 해줬으면 하는 건데?”“아, 역시 최양하 똑똑하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FTT실험실의 새 반도체 데이터 손에 넣을 수 있어? 날 믿어. 이건 최하준을 끌어내릴 기회야. 너도 평생 최하준 발밑에 깔려서 살 생각은 아니겠지?”“날 너무 대단하게 보는 거 아니냐? 요 몇 년 형
‘지안이가 강여름에게 우울증이 있다고 내게 거짓말을 해서 정신 병원에 집어넣은 거잖아?3년 전에 여름이 죽지 않았더라면 나중에는 정말 정신병동에 강제 입원시켜 지금쯤 강여름은 진짜로 정신병자가 되어 있었겠지.’생각만으로도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왜 그래? 갑자기 날 그렇게 쳐다보고.”백지안은 하준이 불안했다.“… 지안아. 3년 전에 강여름은 정말 우울증이었어?”하준이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백지안은 속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날 못 믿어?”하준이 눈을 깔았다.“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지금 보니까 강여름이 너무 정상이라서, 병이 있었던 사람 같지 않더라고. 생각해 보니까 병원에 넣어 두고 병문안도 한 번 안 가봤네.”백지안이 일부러 입을 비죽거렸다.“그래, 사실 그때 내가 맥을 짚고 자세히 좀 보고 싶었는데 나한테 뜨거운 물을 뿌리고 막 그러는 바람에 내가 접근을 못했잖아. 100% 병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거라면 나도 확신은 없어. 하지만 확실히 환자 같은 증상은 있었지. 그때 병원에서 수용할 때 진단을 해보고 치료를 했겠지. 그게 내가 뭐라고 한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니잖아?”하준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백지안은 하준의 눈치를 쓱 보고 나서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하준이 그렇게 물어보니 백지안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정신 병력은 누구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 너도 전에….”“됐다, 밥 먹자.”하준이 말을 끊었다.“그래. 그만하자. 가서 스테이크 가져올게.”백지안이 곧 스테이크를 들고나왔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만들었는지 예쁘게 당근도 장식되어 있었다.그러나 하준은 한 입 넣었지만 삼키기가 힘들었다.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점심때 여름이 해주었던 집밥이 이상하게 더 당겼다.사실 전에는 양식을 좋아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별로 양식이 당기지가 않는 입맛이 되었다.“맛있어?”백지안이 기대하듯 물었다.“머리는 아직 아파?”하준은 말을 돌렸다.백지안
“그랬구나, 날 위해서 그렇게 해주는 거였어. 내가 잘 모르고, 미안해.”백지안의 얼굴에 감동과 괴로움이 동시에 보였다.사실 속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분노하고 있었다.3년 전 강여름을 압박해 하준과 이혼했다고 공표하라고 했던 일이 이렇게 되돌아와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러면… 앞으로 강여름이 계속 이 일로 널 협박하면 어떡해? 이혼을 해줄까?”백지안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우리가 알고 지낸지가 20년에 연애만 십수 년을 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우리 결혼할 수 있기는 한 걸까?”“하여간 내가 이혼할 방법을 생각해 낼거야.”하준이 얼른 티슈를 건넸다. 마음이 더욱 괴로워졌다.“내가 다 생각이 있어.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마.”“그래. 아 참, 오늘… 병원 다녀온 건 어떻게 됐어?”백지안이 갑자기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민정화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자리를 피했다.하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고개를 숙였다.“약 받아왔어.”“잘됐다.”백지안의 만면에 희색이 가득했다하준은 되는대로 몇 점 집어 먹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지안은 님겨진 스테이크를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다음 날.화신 그룹.여름은 심플한 정장을 입고 당당하게 회사 문을 밟았다. 인포메이션 데스크 앞에서 여름은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어제 그 직원이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강 대표님….”“내 얼굴 익혔나 보네요? 이제 예약 안 해도 되겠군요?”여름은 빙긋 웃더니 엘리베이터를 타러갔다.프런트 직원은 오늘 신임 이사장이 강여름으로 바뀔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다리에 힘이 다 풀렸다. 아침이 되면 바로 잘릴까 싶어 두려웠는데 다행히도 살아 남은 듯했다.회의실에 들어서니 이사가 모두 나와 있었다. 다들 아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백지안은 오른쪽 첫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사 여럿이 공손하게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다.“백 대표, 지난번에 내가 외국에 출장 가면서 신상 백이 눈에 들어오길래 백 대표 주려고 사왔지.”“백 대표, 이게 유명
여름은 말하는 사람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우스운 것은 그 사람이 왕 이사라는 점이었다.“성은 왕인데 태도는 비굴하기 그지 없네요?”여름이 비웃었다.왕 이사는 흠칫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부끄럽고 화도 났다.“무슨 뜻입니까? 내 말이 틀렸습니까? 다정하고 예쁜 사람 좋아하는 건 인지상정 아닙니까?”“3년 동안 나가 있었더니, 남 불행 기뻐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지금 이 이사회를 누가 소집했는지는 잊지 마시죠.”여름이 싸늘한 말투로 일깨웠다.이 이사회를 소집한 것은 하준이었다.다들 임을 꾹 다물었다.“백지안 씨, 지금 나가주시죠. 심하게 대하기 전에.”여름이 싸늘하게 경고했다.“그리고 하준 씨가 말 안 해줬나 본데, 나라도 지금 당신 처지가 어떤지 따로 말해줘야 하나요?”백지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백지안은 여름과 하준이 이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름이 본처 신분을 밝히고 나면 자신은 순식간에 불륜녀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만다.“아, 알았어요. 갈게요.”백지안이 일어서 불쌍한 척을 했다.여름은 이사의 적대적인 시선은 무시했다.“아, 이사장 명의로 알려두겠는데, 백지안 씨 해고입니다. 오봉규에게 업무 인수인계 끝나면 나가시면 됩니다.”“너무 하군요.”구 이사가 불만을 표했다.“우리도 백지안 해고안에 동의하지 않습니다.”“그래, 회장도 이사회에서 투표로 결정해야지.”이사들이 바로 호응했다“다들 최 회장이라는 뒷배에 기대고 싶으신가 보군요.”여름이 이사를 하나하나 돌아보았다.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뭐, 그렇다면 내가 당신들 뒷배와 통화를 좀 해야겠네요.”여름은 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안에서 하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십니까?”이사가 모두 쉿쉿 거리느라 바빴다.‘전 부인 번호도 저장이 안 되어 있다니 백지안을 대하는 태도와 너무나 다르잖아.’입구까지 갔던 백지안도 걸음을 멈추더니 한껏 득의양양한 표정이 되었다.그런데도 여름은 별로 화난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