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당하고 문이 열렸다. 일을 하던 최양하가 고개를 들어보니 하준이 사뭇 음험한 얼굴을 하고 들어오더니 곧 평정을 찾은 듯싶었다.“회장님, 무슨 일로….”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준의 주먹이 최양하의 얼굴로 향했다.미처 피하지 못한 최양하의 얼얼한 입가에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밖에서 상황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비서가 서둘러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FTT를 장악하고 있다고 내가 형을 두려워 할거라고 생각하지 마시죠. 나도 당당한 최씨 가문의 자식입니다.”최양하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내가 널 왜 친 것 같나?”하준이 옷깃을 정리했다.“3년 전에는 일을 아주 잘했더군. 강여름을 도와서 가짜 죽음을 꾸미고 날 아주 바보로 만들었어. 최양하, 그간 내가 널 아주 오냐오냐해줬지? 날 해치려고 작정했던 것도 내가 눈 감아 주고 했더니 이제는 내 머리꼭대기에 앉으려고 들어?”최양하의 입에서 냉랭한 미소가 흘러나왔다.“그런 말 할 자격 있습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형님은 3년 전에 사람 하나 잡을 뻔했다고요.”“난 강여름을 치료해 주려던 거야. 하지만 너랑 강여름이 가짜 장례식을 꾸며냈지. 왜 강여름을 도와줬어?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벌이려고? 강여름을 좋아하나?”어쩐지 씨가 다른 동생이 여름을 노린다고 생각하니 미친 듯한 불길이 속을 휘젓는 것 같았다.“아, 생각나네. 요 몇 년 툭하면 출국하더니 외국에 나가서 강여름을 몰래 만났나?”“치료했습니다.”최양하가 하준을 노려봤다.“정말 뻔뻔하게도 그딴 말씀을 하시는군요. 내가 강여름을 병원에서 빼냈을 때 상태가 대체 어땠는지나 아십니까? 완전히 정신이 몽롱해서 나도 못 알아볼 지경이었습니다. 나중에 내가 해외로 데리고 나가서 의사에게 보였더니 향정신성 의약물 과다 투여로 뇌가 망가졌다고 하더군요. 6개월이나 치료하고 나서야 증상이 호전됐습니다. 의사 말로는 애초에 정상인 사람에게 향정신성 의약물을 먹이면 되려 문제가 생긴답디다. 아시겠습니까? 조금만 더 늦었으면 멀쩡하던
“별일 아닙니다. 이제 더는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최양하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가서 일 보세요.”최란이 나가자 최양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손에 든 펜을 하마터면 부러뜨릴 뻔했다.사실 번번이 하준에게 압박을 당하는 기분은 정말 별로였다. 매번 뛰어들어 있는 대로 거들먹거리는 것이었다.퇴근 시간.추성호가 갑자기 최양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맞았다면서?”“… 누가 그래?”최양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추성호가 한숨을 쉬었다.“최하준이 사무실로 뛰어들어서 주먹을 날렸다는 건 지금 서울 사람들이 다 알아.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든 숨길 수가 없는 법이지.”최양하가 전화기를 꽉 쥐었다. 손등에 시퍼런 힘줄이 올라왔다.‘이제 완전 웃음거리가 되었군.’추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 너도 어엿한 최씨 집안의 아들인데 최하준은 뭣 때문에 그렇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고 그런대? 정말 너무 하잖아? 할 말이 있으면 문을 닫고 조용히 할 일이지. 손을 대는 정도까지 갔어야 하는 건지, 네 체면은 정말 생각도 않는 구먼.”“……”“정말 이대로 괜찮겠어? 사실… 최하준만 무너지면 네가 새로운 FTT의 주인이 되는 거 아니냐?”최양하가 싸늘하게 물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우리가 힘을 합칠 수도 있지. 따지고 보면 우린 형제 아니냐?”추성호가 말을 이었다.“너도 알겠지만 전에는 내가 너에게 기대기만 했지만 요 몇 년 동안 추신이 우리나라 제2의 그룹이 되었잖아? 내 볼륨도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다고. 너도 나처럼 되고 싶지 않아?”“그래. 전에는 나도 널 과소평가했었지.”최양하가 의미심장하게 비꼬았다.“그냥 까놓고 말해. 내가 뭘 해줬으면 하는 건데?”“아, 역시 최양하 똑똑하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FTT실험실의 새 반도체 데이터 손에 넣을 수 있어? 날 믿어. 이건 최하준을 끌어내릴 기회야. 너도 평생 최하준 발밑에 깔려서 살 생각은 아니겠지?”“날 너무 대단하게 보는 거 아니냐? 요 몇 년 형
‘지안이가 강여름에게 우울증이 있다고 내게 거짓말을 해서 정신 병원에 집어넣은 거잖아?3년 전에 여름이 죽지 않았더라면 나중에는 정말 정신병동에 강제 입원시켜 지금쯤 강여름은 진짜로 정신병자가 되어 있었겠지.’생각만으로도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왜 그래? 갑자기 날 그렇게 쳐다보고.”백지안은 하준이 불안했다.“… 지안아. 3년 전에 강여름은 정말 우울증이었어?”하준이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백지안은 속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얼굴에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날 못 믿어?”하준이 눈을 깔았다.“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지금 보니까 강여름이 너무 정상이라서, 병이 있었던 사람 같지 않더라고. 생각해 보니까 병원에 넣어 두고 병문안도 한 번 안 가봤네.”백지안이 일부러 입을 비죽거렸다.“그래, 사실 그때 내가 맥을 짚고 자세히 좀 보고 싶었는데 나한테 뜨거운 물을 뿌리고 막 그러는 바람에 내가 접근을 못했잖아. 100% 병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거라면 나도 확신은 없어. 하지만 확실히 환자 같은 증상은 있었지. 그때 병원에서 수용할 때 진단을 해보고 치료를 했겠지. 그게 내가 뭐라고 한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니잖아?”하준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백지안은 하준의 눈치를 쓱 보고 나서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하준이 그렇게 물어보니 백지안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정신 병력은 누구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 너도 전에….”“됐다, 밥 먹자.”하준이 말을 끊었다.“그래. 그만하자. 가서 스테이크 가져올게.”백지안이 곧 스테이크를 들고나왔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만들었는지 예쁘게 당근도 장식되어 있었다.그러나 하준은 한 입 넣었지만 삼키기가 힘들었다.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점심때 여름이 해주었던 집밥이 이상하게 더 당겼다.사실 전에는 양식을 좋아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별로 양식이 당기지가 않는 입맛이 되었다.“맛있어?”백지안이 기대하듯 물었다.“머리는 아직 아파?”하준은 말을 돌렸다.백지안
“그랬구나, 날 위해서 그렇게 해주는 거였어. 내가 잘 모르고, 미안해.”백지안의 얼굴에 감동과 괴로움이 동시에 보였다.사실 속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분노하고 있었다.3년 전 강여름을 압박해 하준과 이혼했다고 공표하라고 했던 일이 이렇게 되돌아와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러면… 앞으로 강여름이 계속 이 일로 널 협박하면 어떡해? 이혼을 해줄까?”백지안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우리가 알고 지낸지가 20년에 연애만 십수 년을 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우리 결혼할 수 있기는 한 걸까?”“하여간 내가 이혼할 방법을 생각해 낼거야.”하준이 얼른 티슈를 건넸다. 마음이 더욱 괴로워졌다.“내가 다 생각이 있어. 쓸데 없는 생각하지 마.”“그래. 아 참, 오늘… 병원 다녀온 건 어떻게 됐어?”백지안이 갑자기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민정화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자리를 피했다.하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고개를 숙였다.“약 받아왔어.”“잘됐다.”백지안의 만면에 희색이 가득했다하준은 되는대로 몇 점 집어 먹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지안은 님겨진 스테이크를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다음 날.화신 그룹.여름은 심플한 정장을 입고 당당하게 회사 문을 밟았다. 인포메이션 데스크 앞에서 여름은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어제 그 직원이 쭈뼛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강 대표님….”“내 얼굴 익혔나 보네요? 이제 예약 안 해도 되겠군요?”여름은 빙긋 웃더니 엘리베이터를 타러갔다.프런트 직원은 오늘 신임 이사장이 강여름으로 바뀔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다리에 힘이 다 풀렸다. 아침이 되면 바로 잘릴까 싶어 두려웠는데 다행히도 살아 남은 듯했다.회의실에 들어서니 이사가 모두 나와 있었다. 다들 아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백지안은 오른쪽 첫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사 여럿이 공손하게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다.“백 대표, 지난번에 내가 외국에 출장 가면서 신상 백이 눈에 들어오길래 백 대표 주려고 사왔지.”“백 대표, 이게 유명
여름은 말하는 사람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우스운 것은 그 사람이 왕 이사라는 점이었다.“성은 왕인데 태도는 비굴하기 그지 없네요?”여름이 비웃었다.왕 이사는 흠칫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부끄럽고 화도 났다.“무슨 뜻입니까? 내 말이 틀렸습니까? 다정하고 예쁜 사람 좋아하는 건 인지상정 아닙니까?”“3년 동안 나가 있었더니, 남 불행 기뻐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지금 이 이사회를 누가 소집했는지는 잊지 마시죠.”여름이 싸늘한 말투로 일깨웠다.이 이사회를 소집한 것은 하준이었다.다들 임을 꾹 다물었다.“백지안 씨, 지금 나가주시죠. 심하게 대하기 전에.”여름이 싸늘하게 경고했다.“그리고 하준 씨가 말 안 해줬나 본데, 나라도 지금 당신 처지가 어떤지 따로 말해줘야 하나요?”백지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백지안은 여름과 하준이 이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름이 본처 신분을 밝히고 나면 자신은 순식간에 불륜녀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만다.“아, 알았어요. 갈게요.”백지안이 일어서 불쌍한 척을 했다.여름은 이사의 적대적인 시선은 무시했다.“아, 이사장 명의로 알려두겠는데, 백지안 씨 해고입니다. 오봉규에게 업무 인수인계 끝나면 나가시면 됩니다.”“너무 하군요.”구 이사가 불만을 표했다.“우리도 백지안 해고안에 동의하지 않습니다.”“그래, 회장도 이사회에서 투표로 결정해야지.”이사들이 바로 호응했다“다들 최 회장이라는 뒷배에 기대고 싶으신가 보군요.”여름이 이사를 하나하나 돌아보았다.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뭐, 그렇다면 내가 당신들 뒷배와 통화를 좀 해야겠네요.”여름은 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안에서 하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십니까?”이사가 모두 쉿쉿 거리느라 바빴다.‘전 부인 번호도 저장이 안 되어 있다니 백지안을 대하는 태도와 너무나 다르잖아.’입구까지 갔던 백지안도 걸음을 멈추더니 한껏 득의양양한 표정이 되었다.그런데도 여름은 별로 화난 기색도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준의 말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강여름을 비호하는 느낌이 강했다.게다가 강여름의 말투를 보니 아주 거침없는 것이 하준과 관계가 꽤나 편안해 보이지 않는가?순식간에 이사들의 마음이 요동쳤다. 방금 백지안을 심하게 편들었던 것이 후회되지 시작했다.‘젠장, 괜히 강여름 건드렸다가 최 회장에게 불려가면 낭패잖아.’구 이사가 쿨럭쿨럭 기침을 해댔다.“저기… 난 최 회장 말씀에 따르겠소.”“그렇지, 최 회장 말에 따라야지.”다른 이사도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강여름이 하중에게 당하는 꼴을 보려고 입구쯤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지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방금 전까지 이사들이 그렇게 자신을 싸고 돌더니 순식간에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아직 안 갔습니까?”갑자기 여름이 백지안을 쳐다보더니 핸드폰을 흔들었다.“방금 최 회장 얘기 못 들었나 봐? 괜히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서 인수인계나 하시죠? 다시는 내 회사에서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백지안은 화가 나서 속이 쓰렸다. 하지만 그저 눈물을 똑 떨어트리더니 후다닥 자리를 떴다.이사들은 안절부절했다.‘이게 다 최 회장 때문이잖아? 아니 한 자리에 전처랑 현 여친을 다 몰아놓고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야?’“자, 이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여름이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았다.“방금 ‘최 회장 말을 들어야지’라고 하시던데 말을 그렇게들 하시면 쓰나요? 우리 회사랑 최 회장이 무슨 상관이라고요? 그렇게 최 회장이 좋으며 다들 나가서 최 회장 밑으로 들어가시죠.”여름이 팡 하고 테이블을 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시선이 싸늘했다.“잘 알아 두십시오. 우리 회사의 창업주는 내 어머니 강신희 씨입니다. 그 정도도 기억이 안 나면 배당금이나 받아서 병원 가서 치료나 받으세요. 우리 회사에 괜히 자식, 친지 남겨두지 말고 나갈 때 같이 데려 나가시고.”----회의가 끝났다.엄 실장은 완전히 존경하는 눈빛으로 여름을 우러러 봤다.“대표님, 방금
여름은 그제야 퇴근할 준비를 했다.3년 간 자리를 비웠더니 종일 보고 나서야 겨우 회사가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집에 돌아와 막 열쇠를 꺼내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여름은 저도 모르게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큰 손이 여름을 덮쳐왔다. 하준의 얼굴에는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왜? 발로 차게?”여름은 눈을 깜빡이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준의 사타구니 사이에 놓인 자기 발을 보았다.“어떨 것 같은데?”“죽고 싶어 환장했어?”하준은 하마터면 이번 생에 대가 끊길 뻔 했던 것이다..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하준은 여름의 발을 잡아 뒤로 쭉 잡아당겼다.한 발로 서 있던 여름의 몸이 하준 쪽으로 기울었다. 막 균형을 잃을 참에 여름은 얼른 하준의 옷깃을 힘껏 잡았다.생각지 못한 움직임에 하준이 균형을 잃으며 여름이 입구 카펫 위로 넘어지고 하준이 그 위로 쓰러지면서 입술이 맞닿았다.여름의 입술은 젤리처럼 탱글한데다 무슨 글로즈를 발랐는지 상큼한 오렌지 향이 났다. 저도 모르게 깨물고 싶어지는 향기였다.마침 그 타이밍에 현관불이 자동으로 꺼졌다.하준이 침을 꿀꺽 삼키며 울대가 꿀렁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교차했다. 하준은 지금 입술에 닿아있는 그 입술을 맛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이때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안에서 모녀가 걸어나왔다.그 장면을 목격한 엄마는 깜짝 놀라서 얼른 아이의 눈을 가렸다.여름은 얼굴이 온통 빨개져서 얼른 하준을 밀어냈다.“아니….”“아이고, 미안해요. 하던 거 계속하세요.”엄마가 얼른 다시 문을 열더니 아이 등을 밀더니 탁하고 문이 닫혔다.“아, 왜 밀어요? 나도 다 봤는데. 지금 아저씨랑 언니랑 뽀뽀하려고 그랬잖아?”“쉿!”“근데 왜 집에서 안 하고 밖에서 저래?”“넌 몰라도 돼.”“나도 나 알아. 사랑하고 재채기는 감출 수가 없는 거래.”“……”하준의 얼굴이 파랗게 되었다.‘사랑은 감출 수가 없어?내가 강여름에게?뭐라는
“최하준, 뭐하는 거예요? 오밤중에. 백지안한테 안 가봐도 되나?”“나라고 안 가고 싶은 줄 알아? 오전에 당신이 걸었던 그 전화 때문이잖아? 강여름, 아주 교활해. 당신 때문에 지안이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어. 감히 지안이를 울리고 망신을 줘?”하준은 그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 내내 화가 났다. 특히나 나중에 그 자리에 있었던 이사에게서 백지안이 망신을 당하고 쫓겨나면서 울었다는 말을 듣자 여름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마음 아프신가 봐?”여름은 팔짱을 꼈다.“아니, 내가 당신한테 그렇게까지 말해달라고 했나, 뭐?”“뭐? 혼인관계증명서만 가지고 있으면 내가 아무 짓도 못할 줄 알아?”하준이 검은 눈을 가늘게 떴다.“내 사람을 건드리면 가루도 안 남게 될 줄 알아.”“누구? 소영이 얘긴가?”여름이 갑자기 말했다.하준의 동공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냉정을 찾았다.“그건 다 자업자득이지. 누가 강제 노역 중에 바다로 뛰어 들라고 했나?”“……”여름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하준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여름의 눈에 살기가 번뜩하고 빛났다.‘저 치들은 역시나 실오라기만큼의 죄책감도 없구나.최하준, 지금 네 말의 온도와 네가 받을 고통이 반비례하게 될 거야. 각오해라.’“내 말 듣고 있는 거야?”여름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하준이 짜증스럽게 여름을 잡아챘다.“내일 같이 가서 이혼하자고.”“안 해.”하준은 울컥해서 눈에 띄는 대로 휴지통에 발길질을 했다.“자꾸 내가 세게 나오게 만들지 말라고.”“할 테면 하시던지.”여름은 비웃었다.“……”하준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하루 종일 어지간히 힘들었던 지라 여름은 그저 씻고 둥이들과 영상통화할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저 남자가 버티고 앉아 있으니 골치가 아팠다.“좀 가줄래요? 씻게.”“이혼해주겠다고 할 때까지 안 가.”하준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황태자 같은 자태를 하고는 세상 찌질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돈이 필요한 거 아냐? 내가 충분히 마련해 줄게. 평생 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