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말의 기대조차 짓밟혔다. “이유영….”영원히 자신의 곁에 머물러 줄 것만 같았던 익숙한 사람이, 오늘따라 유난히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럴 수는 없어!’강이한은 처음 둘의 관계가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부터 그의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이혼은 그저 잠시 타오르던 불길을 끄기 위한 임시 방편이었을 뿐, 그의 진심이 아니었다. 강이한은 절대로 이대로 이유영을 놓아줄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이유영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모르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 둘의 인연은 이미 오래 전에 끝이 났다는 것이었다. 이유영이 회귀하는 순간 이미 둘은 같은 시간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이어지는 3일, 세강에 큰 변화가 있었다.그건 바로 한지음이 퇴원이었다. 그녀는 퇴원한 뒤로 곧바로 강이한의 본가로 들어왔다. “저희 둘 사이, 어머님께서 확실히 해두셨을 거라 믿어도 되죠?” 유경원이 아주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 때문에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한지음이 강씨 집안으로 들오다니, 자칫했다간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유경원은 강이한과의 사이를 이번이야말로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다. 반면 진영숙도 마음이 조급했다. 마냥 착하게만 봤던 한지음이었지만, 이번에 강서희가 하는 말을 듣고 나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 일이 점점 더 꼬일 것만 같았다. “그럼, 당연하지. 우리 조만간 약혼식 날짜 잡도록 하자!”진영숙도 얼른 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차라리 예전의 이유영이 더 상대하기 쉬웠다. 한지음의 오빠한테 진 빚도 그렇고 눈에 장애까지, 언론을 의식해서라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은혜는 은혜지만, 그렇다고 가문에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녀를 돌볼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진영숙도 참 난감했다. 이때 유경원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와 강
유경원이 떠났다.이때 강서희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유경원이 뭐라고 했어?”“한지음이 뭐하는지나 제대로 감시해!”진영숙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강이한과 유경원의 사이를 못 밖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씨 가문에서 이토록 강경하게 나올줄은 예상치 못했다. 한지음이 강씨 집안으로 들어오게 된 게 모든 것의 원이었다.“그건 내가 알아서 잘 할게. 그래서 유경원네 집에서는 뭐래?”“뭐라하기는, 당연히 쓴 소리 하지!”진영숙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진영숙은 속으로 다른 계획을 짜고 있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진영숙이 말을 더 이어가려던 찰나, 집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사모님이름으로 택배로 서류가 왔어요!”“택배?”“네!”“어디서 온 건데?”“파리에서 왔어요!”해외서 택배가 왔다니, 진영숙은 의아했다. 그녀는 단 한번도 해외에서 무언가를 주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영숙이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으로 서류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엔 두툼한 사진 뭉치가 들어있었다.“이, 이건?”진영숙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옆에 있던 강서희도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은 사진을 한 장, 또 한 장, 계속해서 넘겼다.결국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때, 진영숙이 참지 못하고 사진을 쾅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그녀는 두 눈을 의심했다. 내가 도대체 뭘 본 것인가? 어떻게 이렇게 더러울 수가?“이런 주제에 아까 나한테 그렇게 당당하게 굴어?”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녀는 좀 전에 가문의 이름으로 당당히 자신을 압박해오던 유경원을 떠올렸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당당할 수 없을 테니까!“진짜 유경원이네. 여자가 돼서 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몸을 굴릴 수가 있지?”강서희가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우며 말했다. 사진 속 유경원은 외국남자의 품에 안겨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보지 마!”진영숙이 강서희의 손에 있던 사진을 빼
이때, 진영숙의 뇌리에 이유영이 스쳤다.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엄마, 이제 어떡해?”“….”“지금 한지음 쪽도….”강서희의 입에서 한지음의 이름이 나오자 진영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한지음은 절대로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강씨 가문에 들어온 솜씨만 봐도 그랬다.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큰 사단이 날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지음이 그녀의 아들, 강이한과 얽히는 일을 막아야 했다! 앞도 안 보이는 주제에 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넘보다니, 말도 안 되지!“한지음, 잘 감시하고 있어. 혹시나 해서 생각해 뒀던 걸 계획에 옮겨야겠어.”진영숙은 굳이 계획을 강서희한테 설명하지 않았다. 아직 확실치 않은 일에 괜한 설레발을 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겠어, 엄마.”강서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엄마, 그래도 오빠를 좀 더 믿어봐. 꼭 정략결혼으로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강서희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진영숙은 듣기 싫다는 듯 짜증스레 손을 저을 뿐이었다.자꾸만 편법으로 일을 해결하려 드는 진영숙과 달리 강서희는 강이한을 믿었다. 그는 이번에도 강이한이 여느 때처럼 문제를 잘 해결할 거라 확신했다. 그녀가 아는 강이한은 항상 멋있고 강인했으며, 못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진영숙도 강이한이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몸에 벤 오래된 습성이 어디 쉽게 버려지나? 그녀는 자신이 가장 자신이 있고 확실한 방법으로 강씨 가문을 지키려 할 뿐이었다. 안그래도 최근 강이한이 연달아 큰 프로젝트 두개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친척들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 유씨 가문과의 정략결혼도 파토가 났으니, 진영숙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새로운 결혼 상대를 찾아 든든한 아군을 만들어야만 했다.진영숙이 자신의 계획을 위해 자리를 비우자 강서희만 집에 남았다. 바닥엔 아직 유경원의 사
여자라면 대체적으로 달콤한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은 살이 잘 찐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길 원하는 여자라면 마음 편히 이런 음식을 섭취하진 못할 것이다.왕숙이 흐뭇한 표정으로 맛있게 음식을 먹는 강서희를 바라봤다.“점심도 제가 직접 만들어드릴까요?”“좋지!”“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해산물 먹고 싶어!”“그럼 랍스타 어떠세요?”“아주 좋아!”강서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랍스타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그럼 타르트는 두개만 더 드세요. 더 먹으면 점심 못 먹어요.”“알겠어.”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는 것만큼 요리사에게 자부심을 가져다주는 것은 없었다. ….진영숙은 강씨 본가를 나오는 즉시 사람을 시켜 이유영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유영이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탈 가든이라면 그녀도 잘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브랜드였다. 진영숙은 이 사실에 매우 놀랐다.그녀는 이유영을 만나기 위해 크리스탈 가든으로 향했다.아주 고급스럽고도 진중한 분위기를 가진 응접실 안에 진영숙이 앉아 있었다. 이때 비서로 보이는 한 사람이 공손히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여기서 잠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대표님께서 지금 회의 중이시거든요.”“괜찮아요, 기다릴게요.”진영숙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유영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일 따위 예전이었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진영숙은 매우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약 두시간 후, 이유영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바로 그 뒤로 서류를 가지고 있는 여자가 뒤따르고 있었다.“전 대표님이랑 있었던 일은 잘못이 맞지만, 제 원고는 우수해요. 대표님, 제발 좀 봐주세요!”“….”“대표님, 제발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대표님….”여성이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옆에 있던 비서가 다가갔다.진영숙은 그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모두
자동문이 열리고, 이유영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키는 평균보다 작았지만, 그것이 전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비율이 좋았다. 거기에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풍기는 압도적인 분위기까지, 진영숙은 자신이 알던 이유영이 많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부딪혔다. 고부지간으로 있을 때도 살가운 대화라고는 나눠본 적 없는 두 사람이었다. 침묵 속에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이유영이 여유로운 자세로 맞은편 소파에 앉아 물었다. 진영숙은 너무나 달라진 이유영의 태도에 큰 혼란에 휩싸였다.“대표님, 여기 커피요.”이때 비서가 쟁반에서 커피잔을 이유영과 진영숙 앞으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마워요.”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이유영은 그제야 회의로 인해 쌓였던 피로가 조금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진영숙도 얼떨결에 함께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오늘 여기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이혼하더니 잘 사는가 보네.”“그럼 못 살길 바라셨어요?”이유영이 평온하지만 비꼼이 들어간 말투로 답했다. 진영숙은 그 말투에 잠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밖으로 표출하진 않았다.“아직도 날 원망해?”진영숙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제가 그 동안 감사했다고 인사라도 하길 바랐어요?”과거 이유영이 아직 세강의 며느리로 있을 때, 강이한이 집을 비우기만 하면 진영숙이 찾아왔다. 이유는 다양했느나, 목적은 하나였다. 진영숙은 사사건건 모든 것에 태클을 달아 이유영을 괴롭혔다. 그렇게 진영숙이 한번 찾아오면 이유영은 강이한이 퇴근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벗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그 세월을 버텼는지,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그때는 내가 좀 너무했지? 하지만 내 입장도 생각해봐. 그럴 수밖에 없었어.”진영숙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유영은 무려 그 크리스탈 가든의 대표였으니까!크리스탈 가든이 어디 평범한 회사인가? 처음
끝까지 겪어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깜빡 속을 정도로 아주 노련한 연기였다. 이유영도 회귀를 겪지 않았다면, 진영숙이 변한 것이라 생각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어차피 강이한과 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원망은 무슨, 가당치도 않았다. 지금 이유영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는 바로 무관심이었다. 그토록 무시하고 멸시하던 존재가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것만큼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테니까!이유영은 진영숙이 순간 말문이 막혀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매우 통쾌함을 느꼈다. 오랜 시간 억눌렸던 체기가 단번에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진영숙이 아무리 온화한척 굴어도, 속은 화를 참느라 아주 죽을 맛일 테니까. “유영아.”진영숙이 입에서 난생처음 들어보는 다정한 호칭이 나왔다. 이유영은 기가막혔지만, 진영숙이 도대체 어디까지 비굴해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굴더니 결국 더 강한 힘 앞에선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구나! 재벌들의 세상이란 정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너의 둘이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야.”“….”“둘이 아주 잘 어울렸는데, 내가 모든 걸 망쳐버렸어.”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진영숙은 매우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떻게든 이유영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하지만 이유영은 전혀 흔들림이 없이, 오히려 전보다 더 싸늘하고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진영숙을 바라보고 있었다.진영숙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넘어올 기색조차 없는 이유영의 태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내가 이러는 거 너의 삼촌 때문이 아니야.”“하! 아니라고요?”이유영이 코웃음 치며 진영숙을 몰아붙였다. 이유영은 강이한과 이혼한 것으로 더는 강씨 집안 사람들과 볼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강씨 집안 사람들과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굳이 거기까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싶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진영숙이 제 발로 찾아온 마당에 굳이 봐줄 이유는 없었다. 둘의 입장은 이제 완전히 뒤
이유영의 얘기만 하면, 강이한은 항상 저기압이었다. 진영숙은 그것 때문에 아들과 말다툼 했던 적이 몇 번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녀의 입장에선 강이한이 항상 이유영의 편을 들어줬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온 세상이 강이한과 한지음의 사이를 아는데, 포장한다 한들 의미 없어요!”“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진영숙이 얼른 받아쳤다. 그녀에게 한지음은 은인의 동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유경원하고도 아무 사이 아니야. 이한이가 걔를 어떻게 대했는지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잘 알잖아?”부모는 자기 자식을 객관화되게 볼 수 없다. 진영숙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입장에선 강이한은 항상 옳은 존재였고, 잘못한 것은 이유영이었다. 둘이 이렇게 이혼하게 된 것도 그녀의 입장에선 언제까지 이유영의 문제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유영만 생각을 바꾼다면 해결 될 문제라고 여겼다.“내 말이 틀렸니?”“….”“우리 아들은 그 둘한테 마음 주지 않았어! 너한테 일편단심이었다고!”전에 진영숙이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둘의 사이가 더 나빠지길 바라며 움직였으니까.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천하의 진영숙이 그토록 무시하던 이유영을 다시 며느리로 들이기 위해 이토록 비굴해질 수 있을 줄이야!“한지음은 그냥 은혜를 입은 사람의 동생이니까 챙겨주는 것뿐이야. 너도 내 성격 알잖아?”진영숙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한지음도, 유경원도, 모두 세강의 며느리가 될 수 없어! 내가 그렇게 못 둬!”역시나 이유영의 예상했던 대로였다. 진영숙이 조급해진 이유가 바로 이것이리라!“나도 이런 것까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이제 한지음이 마냥 착하지만 않다는 걸 알아. 그러니 너희 둘 재결합하는 거, 다시 한번 생각해봐.”당근과 채찍의 적절한 사용, 진영숙은 이 전략으로 이유영을 회유하려 들고 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진영숙이 할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세강은 체면과 명성에 매우 신경 쓰는 집안이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일에 휘말리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진영숙은 물론 그녀의 시어머니, 유혜정 또한 모두 굉장히 보수적인 노인이었다. 그런 그녀들에게 이 상황은 도무지 받아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게,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아무리 이유영과 강이한이 이혼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한때 부부였던 사이 아닌가? 그런데 둘이 갈라졌음에도 그 동생이 세강 본가에 머물고 있다? 이보다 황당한 얘기는 없을 것이다!“그것까지 설명할 정도로 한가진 않네요.”이때, 손목 시계를 잠시 쳐다보던 이유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이유영이 응접실을 나가려던 찰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영숙이 뒤에서 불렀다. 이유영이 살짝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또 무슨 일인데요?”“그럼 너는 걔를 어떻게 생각하는데?”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진영숙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너무 혼란스러웠던 탓에 자기도 모르게 한 질문이었다.“제가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이유영이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답했다. 한지음은 처음부터 이유영을 노리고 세강에 접근했다. 그러니 당연히 좋게 생각할 리 없었다.“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게. 우리 아들한테 다시 한번 기회 주면 안 될까?”이 순간에도 진영숙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진영숙은 이유영이 이 사실을 이 시점에 알려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지음과의 관계를 처리해 명확한 태도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기회가 있을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진영숙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이유영이 조롱 섞인 표정으로 진영숙을 바라보며 말했다.“기회요? 하!”이유영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대꾸할 가치조차 못 느꼈다. 기회는 아직 미련이 남은 사이나 할 수 있는 얘기였다. 이미 끝이 난 사이에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강씨 본가에서.강서희는 침대에 누워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
임소미는 이유영이 백산 별장을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심지어 반산월로 돌아가는 것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결국 이유영은 무력감 속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네 두 눈은 지금...”정국진의 목소리에는 멈춘 말 속에 깊은 안타까움이 묻어났고, 이유영은 그 감정을 생생히 느꼈다.“아빠...”“수술은 빨리 받는 게 좋겠다. 그래야 네 엄마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하지만 저는...”“걱정할 필요 없다. 네게 가장 뛰어난 의사를 붙여줄 테니.”정국진은 이유영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이유영을 달래며 말했다.사실 정국진과 임소미는 누구보다도 긴장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모든 준비를 더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아빠...”“응?”“아빠... 저, 너무 무서워요.”그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 이유영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이유영은 정말로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두 눈을 지켜 왔건만 결국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마음속에서 숨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전생에서 눈을 떴을 때, 이유영을 감싼 건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그 공포와 혼란은 그녀를 미치게 할 지경이었다.지난 생에서 이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어둠 속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한순간에 어둠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시야가 어두워져 가는 과정을 느껴야 했다.그 느린 과정이 그녀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웠다.“무서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 네 곁에서 함께할 거야.”“네...”이유영은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그래, 두려워하지 말자. 이번 생은 전생과는 다르니까. 비록 전생의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번에는 가족들이 곁에 있어.전생에는 어둠 속에서 이유영 곁에는 강이한
이유영은 이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시력이 급격히 나빠진 원인이 바로 알프산 방문 때문이라는 사실도.알프산을 다녀온 후 이유영의 시력은 점점 더 악화하였고 자극을 받은 듯한 이상 증상들이 서서히 나타났다.“강한 빛도 견디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런 곳에 갈 생각을 했니?”임소미는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이제 이유영이 어디를 가든 임소미는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장소가 이유영의 눈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더.“엄마, 정말 별일 아니에요...”이유영이 조용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임소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잠깐 잊고 있었어요.”이유영은 진심으로 말했다.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이전에도 의사가 주의를 당부한 적이 있었지만, 눈 덮인 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점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그러다 이번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일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줄은 이유영 자신도 몰랐다.“잊었다고? 그 잊음 때문에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니?”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넘어선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임소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유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엄마, 미안해요!”“미안하다는 말은 필요 없어. 나는 네가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 바랄 뿐이야, 알겠니?”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었다.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잘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이유영은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이유영은 손을 뻗어 임소미의 가냘픈 허리를 감쌌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임소미는 여전히 이렇게 날씬하고 아름다웠다.임소미는 평소에도 관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알겠어요, 엄마. 화 풀어요, 네? 저, 수술받을게요.”“유영아...”“엄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네?”임소미의 품에 안긴 이유영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임소미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안쓰러웠다.임소미는 이유영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우지는 빠르게 물을 닦아냈다.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물기는 이유영에게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다.언젠가 이유영의 두 눈은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그 공포는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서서히 퍼져 나왔다.아침에 물 한 잔을 쏟은 이후, 이유영은 하루 종일 우지와 우현의 손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이유영은 이제 옷장 속에서 강렬하고 선명한 색깔의 옷들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나머지 색깔들은 이미 모두 희미한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아침 식탁.우지는 조심스럽게 죽을 이유영 앞에 놓으며 말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 아직 조금 뜨거울 수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유영이 숟가락을 집으려고 할 때, 우지는 바로 숟가락을 건네주었다.“고마워요.”이유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거센 혼란이 몰아치고 있었다.가슴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았다.그때, 임소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영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엄마.”“왜 아침 같이 먹으러 오지 않았어?”“좀 늦게 일어났어요. 엄마 먼저 드세요.”“그럼 오전에는 꼭 돌아와서 월이랑 같이 놀아 줘. 네가 이곳에 안 온다고 하면 월이가 속상해할 거야.”“네, 알겠어요.”월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이유영은 가슴이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월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이유영의 마음속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전화를 끊고 난 후.이유영의 세계는 다시금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이유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여진우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만약 임소미와 정국진에게 이유영만 존재했다면... 그들은 얼마나 더 힘들어하셨을까?다행스러움과 무거움이 동시에 몰려왔다.아침 식사 후.이유영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백산 별장으로 돌아갔다.임소미는 이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날, 한지음이 떠난 후, 이유영은 손으로 배를 감싸안고 한동안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이유영의 머릿속에는 강이한을 떠난 뒤,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당시의 이유영에게는 눈을 뜨면 온통 어둠뿐인 날들이 이어졌고 어떤 처참한 미래가 닥치더라도 개의치 않을 것만 같았다.강이한을 떠나겠다는 결심은 확고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용기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이유영은 두려웠고 미칠 것 같았다.자기 삶이 아무리 비참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유영이 강이한의 결정을 기다리기도 전에, 이유영 스스로 선택을 내리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한 차례 대화재로 끝이 났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한지음을 용서하라고 했다.한지음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이유영을 위해 희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강이한은 결코 알지 못했다.그것이 오직 자신의 문제였다면, 어쩌면 모든 것을 잊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아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아이를 위해 온갖 고통을 겪었던 그 마지막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되었다.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든 한지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네, 좋아요! 사모님께 가서 바로 말씀드릴게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수술을 빨리 받겠다고 결정하신 걸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우지가 기쁜 얼굴로 방을 나가는 모습을 본 이유영은 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을 뿐이었다.그날 밤.이유영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유영에게조차 쉽지 않았다.오랜 세월 지켜온 신념들이 의사의 진단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어두운 방 안.어스름한 방안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유영을 응시하고 있었다.차가운 손가락 끝이 이유영의 목 아래 울퉁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