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강서희의 목소리에 한지음이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강서희는 새로 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비웃음을 지었다.“대체 네가 무슨 수를 써서 우리 엄마까지 구워삶았는지 궁금해서 와봤어.”한지음에 대해 진영숙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에 대해서 강서희는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한지음 네가 뭔데 엄마 사랑을 차지해? 세강의 모든 건 다 내 거야!’‘엄마랑 오빠 다 내 거라고!’처음에는 한지음이 일만 성사되면 돈 받고 조용히 떠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았다.한지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강서희의 두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강이한의 옆에 빌붙고자 하는 인간은 그게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지음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잘난 척하길래 다른 여자들과는 뭔가 다른 게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보면 어떻게든 강의한의 옆을 차지하려는 다른 여자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네 임무는 끝났어. 이제 돈 받고 해외로 나가. 그쪽에 도착하면 약속했던 대로 돈은 바로 입금해 줄 테니까.”이제 한지음을 보낼 때였다.계속 여기 남아 있으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안했다.강서희는 어떻게든 이 여자를 멀리 보내버려야 안심할 것 같았다.한지음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 사이의 거래는 끝났지만 약속했던 것 중에 네가 날 해외로 보낸다는 조항은 없었던 것 같은데?”“그럼 지금 추가하면 되지.”강서희가 오만하게 말했다.한지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난 이제 필요 없는걸?”두 여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강서희는 한지음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여자는 그녀가 상대한 모든 여자들보다 더 악랄하고 교활한 것 같았다.“그럼 모든 사실을 오빠한테 알리는 수밖에!”강서희가 협박하듯 말했다.그녀와 한지음의 거래에서 한지음이 어떤 역할을 담당했고 유영에게 무슨
“이래도 날 해외로 보낼 거야?”한지음이 웃으며 물었다.앞은 보이지 않지만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서희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강서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지음을 바라보고 있었다.세강의 오너 일가가 그 동안 유영에게 한 갑질은 한지음이 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강서희는 진짜 무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게 되었다.“너 단단히 미쳤구나!”그 말을 남기고 강서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가버렸다.도망치듯 재빨리 사라지는 발걸음 소리로 한지음은 그녀의 분노와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자 한지음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지어졌다.흉측한 상처까지 더해져서 그녀의 얼굴은 섬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강서희는 무슨 정신으로 한지음의 병실에서 도망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한지음의 상처를 더듬었던 손이었다.“욱!”아까 보았던 한지음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는 심한 구역질을 하며 베란다로 달려갔다.‘쟤 정말 미쳤어!’유영에게는 볼 수 없었던 잔인함이 한지음에게는 있었다. 이런 여자라면 강이한의 옆에서 떼어내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게다가 지금은 진영숙도 한지음을 애지중지 딸처럼 아끼고 있었다.강서희의 두 눈이 불안감에 요동쳤다.이어지는 며칠 간, 사람들은 각자 바쁜 일상을 보냈다.강이한은 동교 개발지 옆 상권 개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게다가 준비 시간도 길지 않아서 더욱 문제였다.유영도 마찬가지였다. 강이한이 나타나서 방해하지 않으니 준비 공작은 차근차근 실현되었다.3일째 되는 날 아침.그녀는 차를 끌고 현장으로 갔다. 지난 번 사고 이후로 그녀는 차를 벤츠로 바꾸었다. 포르쉐는 정비소에 수리를 맡겼으니 수리가 다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다행히 조민정이 빠른 시간에 차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차에서 내린 유영은 마침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강이한과 마주쳤다.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새로 산 벤츠에 닿았다.순
유영은 이제 그와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차라리 그럴 바에야 디자인 도면 하나 더 그리는 게 나았다.예전에 강이한만 쫓아다니던 그녀와는 완전히 상반된 태조였다.이번 입찰 경쟁은 지난번과 조금 달랐다.지난번에는 단순히 디자인 도면만 보고 심사위원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면 이번에는 입찰에 참여한 회사 대표가 나와 앞으로의 사업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프리젠테이션을 해야했다.대기실.유영은 서재욱과 마주 앉았다. 서재욱이 따뜻한 커피를 그녀에게 건넸다.“추운데 몸이라도 좀 녹여요.”“감사합니다.”강이한은 옆 대기실에 자리했다.그는 지나가면서 여자와 서재욱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이를 갈았다.서재욱이 어떤 사람인가?겉으로는 부정적인 스캔들이 한 번도 난 적 없지만 사실 그는 이 업계에서 바람둥이로 유명했다.유영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인간과 저렇게 가깝게 지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지금의 강이한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경지에 이르렀다.그녀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모습만 봐도 둘이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대표님? 대표님!”조형욱이 뒤에서 조심스럽게 강이한을 불렀다.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 보니 유영과 서재욱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아까 저기 있던 인간들 어디 갔어?”“이미 들어가셨습니다.”조형욱이 말했다.유영이 서재욱에게 어떤 방안을 제시했는지 궁금했다.강이한은 짜증스럽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갔다.안에서 뭘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프리젠테이션을 한 시간이나 진행하다니!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이 강이한의 신경을 건드렸다.“대표님.”“가자!”강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조형욱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유영을 지나치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곁눈질로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유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평한 표정으로 갈 길을 갔다.반면 그녀의 옆에서 걷고 있던 서재욱이 웃음을 터뜨
서재욱의 말처럼 박연준은 철저한 효율주의자였다. 그는 절대 친한 지인이나 협력사 사장을 위해 누군가를 추천해 주지 않았다. 그들 사이의 의뢰나 계약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었다.게다가 더 놀라운 건 오로라 스튜디오 같은 시설 디자인 작업실에서 올라온 작업물을 박연준이 직접 심사하고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서 절친인 서재욱까지 연결해 주었다는 점이었다.이번 입찰 경쟁은 소리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강이한에게는 이번 프로젝트가 매우 중요했다. 세강 전체가 신경을 도사리고 입찰 결과를 지켜보았다.유영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고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이번 의뢰 때문에 3일간 밤을 새워 일해서 그런지 화장으로 가린다고 했지만 안색은 창백했다.하지만 결과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서원이 이번 입찰 경쟁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그 순간 현장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강이한이 부들부들 떨며 지켜보는 가운데, 서재욱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영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수고했어요.”“대표님도 수고 많으셨어요.”유영도 작은 손을 내밀어 예의 바르게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가 다가와서 그녀의 팔목을 가로챘다.갑작스러운 공격에 유영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강이한이었다.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분노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유영은 그에게서 위험한 기운을 느끼고 다급히 말했다.“강이한, 이거 놔.”하지만 이성을 잃은 강이한에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유영을 질질 끌고 주차장으로 가서 억지로 차에 밀어넣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유영이 반대쪽 문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운전기사가 빠르게 문을 잠갔다.그들이 나올 때부터 운전기사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씩씩거리며 차에 오르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아 뒷좌석에 고정했다.남자의 실성한 모습에 유영이 당황했다.“왜 이러는 거야?”유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영은 남자의 매서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또 나를 병원에 끌고 가려고?”“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강이한이 음산한 얼굴로 말했다.유영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강이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기사에게 말했다.“병원으로 바로 가.”“강이한!”겁에 질린 유영이 소리쳤다.진심이야?진짜 나를 병원에 끌고 가려고?이번 생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지난 생에도 싫다는 그녀를 구슬려서 억지로 수술대에 올린 사람이었다.지난 생에 겪었던 화면들이 유영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내 몸에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우리 이제 남남이잖아. 못할 건 또 뭐 있어?”유영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한지음을 위해 굳이 이렇게까지 한다고?그는 거침없이 우리는 남남이라고 말하고 있었다.유영은 지난 생의 강이한이 눈앞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때의 그 역시 이렇듯 잔인한 사람이었다.유일하게 지난 생과 달라진 점이라면 둘이 이혼했다는 사실이었다. 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강이한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리고 곧장 병원 의료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기증자 찾았으니 지금 당장 수술 준비하세요. 지금 가고 있어요.”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말투에 유영의 마음도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비록 지난 생에 한번 경험한 일이지만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시계를 보며 말을 이었다.“20분 뒤면 도착하겠네요. 일단 환자 상태 체크하고 도착하면 바로 수술 들어갈 수 있게 조치하세요.”유영은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귀에는 더 이상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다.남자의 두 눈에는 잔인함이 가득했다.전화를 끊은 강이한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유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에 동요나 다른 감정은 없었다.유영은 온몸에 오한이 돌았다.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수술한다고?”“이유영 네가 지음이한테 빚진 거야.”남
병원!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배준석은 신속히 한지음에게 일련의 검사를 진행했다.소식을 접한 한지음은 가장 먼저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조형욱으로부터 강이한이 유영을 끌고 병원으로 오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한지음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났다.유영, 이제 이 어둠은 네 거야!유영의 처참한 미래를 상상하니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당연하게도 유영이 원해서 왔을 리는 없었다. 하고 싶은 게 많고 자존감 높은 그녀가 스스로 이런 선택을 했을 리 없었다.하지만 이건 한지음이 원하던 결과였다.사랑하는 남자의 강요로 다른 여자에게 시망막을 빼앗기는 기분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한지음은 지금 당장 울부짖는 유영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었다.병원 입구.유영은 남자에 의해 강제로 끌려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강이한, 꼭 이렇게 해야겠어?”결국 여기까지 온 건가?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강이한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마음속 한구석에서 제발 이러지 말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한지음의 처참한 흉터를 떠올리고 생각을 바꾸었다.그 잔인한 모습들이 결국은 그의 이성을 집어삼켰다.“걱정 마. 나중에 내가 꼭 당신에게 맞는 시망막을 찾아줄게.”“수술 끝나면 내가 항상 옆에 있을 거야. 내가 직접 당신을 간호할게. 아프지 않을 거야.”남자의 목소리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싸늘하기만 했다.유영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죽어버려!”그녀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주먹을 휘둘렀다.하지만 남자는 가볍게 그 손목을 가로채고 잡아당겨 품에 안은 뒤, 그대로 그녀를 질질 끌고 병원 안으로 향했다.유영이 발버둥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입구에 있는 쓰레기통을 집어 강이한의 머리에 엎었다.안에서 쓰레기가 쏟아지며 남자의 온몸에 오물이 묻었다.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고 뭇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그녀가 눈물을 훔쳤다.그 모습은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소녀가 재벌가에 시집 가서 갖은 고생을 하고 결국 재벌 남편에게 버려진 모습 그 자체였다.누군가가 벌써 핸드폰을 꺼냈다.강이한은 모이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당장 이 자리에서 이 여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유영은 다가오는 사람들을 힐끗 보고는 울며 말했다.“강이한, 우리 이혼했잖아. 세강의 안주인 자리도 그 여자한테 양보했어. 그런데 또 뭐가 부족하대?”“내 말을 안 믿어도 돼. 하지만 그 여자가 시력을 잃은 시점이 언제인지, 조금만 신경 써서 알아보면 알게 될 거야. 아직 검진도 안 했지?”강이한이 입을 열었다.“닥쳐, 이유영!”“대표님!”멀지 않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조형욱이 다가와서 강이한을 말렸다.유영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강이한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이게 날 건드린 대가야, 강이한!’그녀는 이번 기회에 남자에게 제대로 된 교훈을 주고 싶었다.강이한은 분노를 꾹 참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지만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그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는 가운데, 유영은 도망치듯 병원 반대방향으로 뛰었다.원래 저런 여자였나?오스카 연기상을 줘도 될 만큼, 완벽한 연기였다.유영이 입구에서 오열하는 모습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졌다. ‘한지음의 욕심은 어디까지인가? 강이한은 어찌하여 현모양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가?’ 등 온갖 타이틀이 인터넷 기사를 타고 돌아다녔다.“하하! 너무 고소해!”그 시각, 유영의 사무실에서 기사를 확인한 소은지는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게다가 달랑 기사만 올라온 게 아니라 동영상까지 첨부되어 있었다.영상 속 유영의 모습은 누가 봐도 버림받고 힘들어하는 피해자의 모습이었다.유영이 친구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만 웃어. 그거 보고 웃은지 벌써 10분 됐어.”“부족해. 강이한 그 표정 봤어? 너무 웃기잖아!”강이한이 누군가!청하시에서 이 정도
“강이한은 지금 혈압 올라 죽으려 하겠지?”“아마도?”아까 병원에서 봤던 울긋불긋한 얼굴만 생각해도 그가 얼마나 화가 많이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우선 해야 할 것은 한지음을 실드 치는 일이겠지.”지난번에 앞장서서 유영을 비난했던 언론사 기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아마 한지음 쪽에서 뒤를 밟힐까 봐 처리한 것 같았다.하지만 그들 중에는 한지음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굳이 유영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나서서 불을 지필 사람들은 많고도 많았다.그들은 강이한을 공격하진 못해도 한지음은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었다.게다가 한지음이 전에 했던 일들이 유영에 의해 전부 가짜라는 게 까발려지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한지음 쪽 입장을 믿지 않게 되었다.“너는 괜찮아?”소은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영에게 물었다.강이한이 한지음을 감싸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었다.한지음이 나타난 뒤로 강이한은 한 번도 유영의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해 준 적 없었다.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아마 한동안은 조용할 거야. 내가 바라던 바고.”오늘 있었던 일로 하여 강이한도 유영이 만만히 당하기만 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상황에서 당한 거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강이한도 참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유영의 예상은 맞았다.기사를 접한 강이한은 치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배준석도 같이 있었다.배준석은 무시무시한 기에 눌려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조 비서!”지옥사자를 연상케 하는 싸늘한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이번 유영의 행보는 완전히 그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조형욱이 다가와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예, 대표님.”“이유영에게 의뢰를 맡긴 회사들에 전달해. 당장 계약을 중지하지 않으면 우리 세강을 적으로 돌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고!”강성건설과 서원그룹이 널 먹여살릴 수
“배준석을 데려와.”배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안과 전문의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인물이자 강이한과는 말할 것도 없이 깊은 친분이 있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수술할 때, 강이한이 용성시에 있었는지도 확인해.”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진영숙의 마음은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알겠습니다.”남기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진영숙은 소파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이한이 사라지기 전, 이유영과 함께 우천시에 가서 진료를 보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곳의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 누구도 지금 진영숙의 마음속 상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특히 지금 이유영의 눈이 치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의심을 더욱 깊게 했다.어머니로서 그런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이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든 진영숙은 강이한이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라면 이유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오늘, 이유영이 청하시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진영숙의 마음은 피가 더욱 아파졌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그 아이는 정말로 강이한을 똑 닮았다....한편 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방문객들을 침착하게 맞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예기치 않게 여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긴장감이 맴돌았다.특히 여진우에게서 풍기는 것은 단순한 차가움 이상의 것이었다.소은지는 말없이 찌푸린 눈으로 여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조용히 소은지를 응시했다.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무슨 일이에요?”“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소은지 씨도 알고 있죠?”“알아요.”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세상 모든 이가 아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두 사람의 10년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걸까? 사랑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은 대체 어디 갔을까?’이유영은 풍산 그룹에서 나오기 전, 진영숙에게 아이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진영숙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시윤이 방으로 들어섰다.“사모님.”“왜... 도대체 왜...”진영숙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정은 이미 한계를 넘어 통제 불능 상태였다.시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에 대해 그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진영숙 곁에 있었던 이들은 예전에 진영숙과 이유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결국 인과응보라고 여겼다.“이유영에게 다 말했어. 하지만...”진영숙은 여기까지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강이한이 끝내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진영숙은 모두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하지만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이유영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강이한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사람 같았다.“사모님, 작은 사모님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어쨌든...”시윤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가 결국 말을 멈추고 진영숙을 바라보았다.과거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진영숙도 이유영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미 모든 대가를 치렀다.하지만 여전히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이유영이 마냥 이해되지 않았다.‘아무리 미워도 지금 강이한이 사라진 마당에 그 분노를 조금은 억누를 수도 있지 않을까?’과거에 무슨 원한이 있었든 이렇게까지 무심할 일이란 말인가? 강이한은 서주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졌다.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도 여전히 냉정한 이유영의 태도에 진영숙은 마음이 아팠다.“대체 어떻게 해야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왜 박연준의 사람들조차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사실 모든 기회는 그녀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엔데스 운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가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왜 송연정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걸까?’처음엔 그 이유가 운빈과의 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느닷없이 엔데스 신우와의 혼사를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송연미는 문득 깨달았다.그 모든 결정의 이면엔 현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결국 현우의 태도가 아버지의 선택을 바꿔 놓은 것이다.“현우를 만나야겠어.”송연미는 온몸을 떨며 소은지를 바라봤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를 직접 만나서 물어야 했다.차가운 엔데스 가문의 셋째 사모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지금 반산월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몇 년 전, 현우가 파리를 떠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 오랜 기다림 끝에 현우가 돌아왔고 그녀는 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단호히 끊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네 전화도 받지 않는데, 널 만나고 싶어 할까?”소은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 한마디가 송연미는 더 깊이 무너졌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부서지는 듯했다.그녀의 눈빛엔 절망이 가득했다.“그래도 현우를 꼭 만나야 해.”송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엔데스 신우와의 결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 그녀는 늘 무기력할 뿐이었다.그동안 엔데스 운빈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는지 모른다.그리고 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하지만 지금 현우는 그녀를 차갑게
소은지는 조용히 송연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빛엔 이미 무거운 결심이 내려앉아 있었다.송연정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 속에는 오래 참아온 비통함이 스며 있었고 그 아래엔 날 선 증오가 번득였다.“왜 엔데스 신우랑 결혼시키려는지 알아?”“왜?”‘엔데스 운빈과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사를 이야기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한때 송연정을 ‘넷째 사모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왜냐하면 네가 아직 여기에 있기 때문이야.”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 아버지는 송연정과 현우의 혼사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돌아오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거야.”“...”“넌 우리 아버지가 그냥 호의로 누굴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은지, 대체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지금 엔데스 가문 상황이 현우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는 거야?”송연정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소은지 탓이라도 되는 듯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실제로 소은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송연정과 현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서곤 했다.소은지는 배경도 권력도 없는 외국 여자일 뿐이었다.파리 사람들은 모두 송씨 가문과 현우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문 안팎의 관심은 오롯이 현우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이혼을 택한 건 단지 운빈과의 관계가 아니라 엔데스 가문 자체와 더 깊은 얽힘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현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니까.소은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잊었어? 내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유, 바로 너 때문이야.”그 말에 송연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입술이 달싹였으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나만 없으면 가문이 너를 선택했을 것 같아? 결국 가문이 택한 건 송연정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