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강서희의 목소리에 한지음이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강서희는 새로 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비웃음을 지었다.“대체 네가 무슨 수를 써서 우리 엄마까지 구워삶았는지 궁금해서 와봤어.”한지음에 대해 진영숙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것에 대해서 강서희는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한지음 네가 뭔데 엄마 사랑을 차지해? 세강의 모든 건 다 내 거야!’‘엄마랑 오빠 다 내 거라고!’처음에는 한지음이 일만 성사되면 돈 받고 조용히 떠날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았다.한지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난 아무것도 한 게 없어.”“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강서희의 두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강이한의 옆에 빌붙고자 하는 인간은 그게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그녀는 한지음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잘난 척하길래 다른 여자들과는 뭔가 다른 게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보면 어떻게든 강의한의 옆을 차지하려는 다른 여자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네 임무는 끝났어. 이제 돈 받고 해외로 나가. 그쪽에 도착하면 약속했던 대로 돈은 바로 입금해 줄 테니까.”이제 한지음을 보낼 때였다.계속 여기 남아 있으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안했다.강서희는 어떻게든 이 여자를 멀리 보내버려야 안심할 것 같았다.한지음이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 사이의 거래는 끝났지만 약속했던 것 중에 네가 날 해외로 보낸다는 조항은 없었던 것 같은데?”“그럼 지금 추가하면 되지.”강서희가 오만하게 말했다.한지음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난 이제 필요 없는걸?”두 여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강서희는 한지음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여자는 그녀가 상대한 모든 여자들보다 더 악랄하고 교활한 것 같았다.“그럼 모든 사실을 오빠한테 알리는 수밖에!”강서희가 협박하듯 말했다.그녀와 한지음의 거래에서 한지음이 어떤 역할을 담당했고 유영에게 무슨
“이래도 날 해외로 보낼 거야?”한지음이 웃으며 물었다.앞은 보이지 않지만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서희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강서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지음을 바라보고 있었다.세강의 오너 일가가 그 동안 유영에게 한 갑질은 한지음이 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강서희는 진짜 무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게 되었다.“너 단단히 미쳤구나!”그 말을 남기고 강서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을 나가버렸다.도망치듯 재빨리 사라지는 발걸음 소리로 한지음은 그녀의 분노와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가자 한지음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지어졌다.흉측한 상처까지 더해져서 그녀의 얼굴은 섬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강서희는 무슨 정신으로 한지음의 병실에서 도망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한지음의 상처를 더듬었던 손이었다.“욱!”아까 보았던 한지음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는 심한 구역질을 하며 베란다로 달려갔다.‘쟤 정말 미쳤어!’유영에게는 볼 수 없었던 잔인함이 한지음에게는 있었다. 이런 여자라면 강이한의 옆에서 떼어내기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게다가 지금은 진영숙도 한지음을 애지중지 딸처럼 아끼고 있었다.강서희의 두 눈이 불안감에 요동쳤다.이어지는 며칠 간, 사람들은 각자 바쁜 일상을 보냈다.강이한은 동교 개발지 옆 상권 개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게다가 준비 시간도 길지 않아서 더욱 문제였다.유영도 마찬가지였다. 강이한이 나타나서 방해하지 않으니 준비 공작은 차근차근 실현되었다.3일째 되는 날 아침.그녀는 차를 끌고 현장으로 갔다. 지난 번 사고 이후로 그녀는 차를 벤츠로 바꾸었다. 포르쉐는 정비소에 수리를 맡겼으니 수리가 다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터였다.다행히 조민정이 빠른 시간에 차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차에서 내린 유영은 마침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강이한과 마주쳤다.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새로 산 벤츠에 닿았다.순
유영은 이제 그와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차라리 그럴 바에야 디자인 도면 하나 더 그리는 게 나았다.예전에 강이한만 쫓아다니던 그녀와는 완전히 상반된 태조였다.이번 입찰 경쟁은 지난번과 조금 달랐다.지난번에는 단순히 디자인 도면만 보고 심사위원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면 이번에는 입찰에 참여한 회사 대표가 나와 앞으로의 사업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프리젠테이션을 해야했다.대기실.유영은 서재욱과 마주 앉았다. 서재욱이 따뜻한 커피를 그녀에게 건넸다.“추운데 몸이라도 좀 녹여요.”“감사합니다.”강이한은 옆 대기실에 자리했다.그는 지나가면서 여자와 서재욱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이를 갈았다.서재욱이 어떤 사람인가?겉으로는 부정적인 스캔들이 한 번도 난 적 없지만 사실 그는 이 업계에서 바람둥이로 유명했다.유영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인간과 저렇게 가깝게 지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지금의 강이한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경지에 이르렀다.그녀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모습만 봐도 둘이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대표님? 대표님!”조형욱이 뒤에서 조심스럽게 강이한을 불렀다.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 보니 유영과 서재욱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아까 저기 있던 인간들 어디 갔어?”“이미 들어가셨습니다.”조형욱이 말했다.유영이 서재욱에게 어떤 방안을 제시했는지 궁금했다.강이한은 짜증스럽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갔다.안에서 뭘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지 프리젠테이션을 한 시간이나 진행하다니!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 모습이 강이한의 신경을 건드렸다.“대표님.”“가자!”강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조형욱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유영을 지나치는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곁눈질로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유영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평한 표정으로 갈 길을 갔다.반면 그녀의 옆에서 걷고 있던 서재욱이 웃음을 터뜨
서재욱의 말처럼 박연준은 철저한 효율주의자였다. 그는 절대 친한 지인이나 협력사 사장을 위해 누군가를 추천해 주지 않았다. 그들 사이의 의뢰나 계약이 끝나면 그걸로 끝이었다.게다가 더 놀라운 건 오로라 스튜디오 같은 시설 디자인 작업실에서 올라온 작업물을 박연준이 직접 심사하고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서 절친인 서재욱까지 연결해 주었다는 점이었다.이번 입찰 경쟁은 소리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었다.강이한에게는 이번 프로젝트가 매우 중요했다. 세강 전체가 신경을 도사리고 입찰 결과를 지켜보았다.유영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고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이번 의뢰 때문에 3일간 밤을 새워 일해서 그런지 화장으로 가린다고 했지만 안색은 창백했다.하지만 결과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서원이 이번 입찰 경쟁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그 순간 현장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강이한이 부들부들 떨며 지켜보는 가운데, 서재욱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유영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수고했어요.”“대표님도 수고 많으셨어요.”유영도 작은 손을 내밀어 예의 바르게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가 다가와서 그녀의 팔목을 가로챘다.갑작스러운 공격에 유영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강이한이었다.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분노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유영은 그에게서 위험한 기운을 느끼고 다급히 말했다.“강이한, 이거 놔.”하지만 이성을 잃은 강이한에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유영을 질질 끌고 주차장으로 가서 억지로 차에 밀어넣었다.차에 오르자마자 유영이 반대쪽 문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운전기사가 빠르게 문을 잠갔다.그들이 나올 때부터 운전기사도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씩씩거리며 차에 오르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아 뒷좌석에 고정했다.남자의 실성한 모습에 유영이 당황했다.“왜 이러는 거야?”유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유영은 남자의 매서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다.“또 나를 병원에 끌고 가려고?”“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강이한이 음산한 얼굴로 말했다.유영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강이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기사에게 말했다.“병원으로 바로 가.”“강이한!”겁에 질린 유영이 소리쳤다.진심이야?진짜 나를 병원에 끌고 가려고?이번 생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지난 생에도 싫다는 그녀를 구슬려서 억지로 수술대에 올린 사람이었다.지난 생에 겪었던 화면들이 유영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내 몸에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우리 이제 남남이잖아. 못할 건 또 뭐 있어?”유영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한지음을 위해 굳이 이렇게까지 한다고?그는 거침없이 우리는 남남이라고 말하고 있었다.유영은 지난 생의 강이한이 눈앞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때의 그 역시 이렇듯 잔인한 사람이었다.유일하게 지난 생과 달라진 점이라면 둘이 이혼했다는 사실이었다. 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강이한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리고 곧장 병원 의료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기증자 찾았으니 지금 당장 수술 준비하세요. 지금 가고 있어요.”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말투에 유영의 마음도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비록 지난 생에 한번 경험한 일이지만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시계를 보며 말을 이었다.“20분 뒤면 도착하겠네요. 일단 환자 상태 체크하고 도착하면 바로 수술 들어갈 수 있게 조치하세요.”유영은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귀에는 더 이상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 않았다.남자의 두 눈에는 잔인함이 가득했다.전화를 끊은 강이한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유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에 동요나 다른 감정은 없었다.유영은 온몸에 오한이 돌았다.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수술한다고?”“이유영 네가 지음이한테 빚진 거야.”남
병원!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배준석은 신속히 한지음에게 일련의 검사를 진행했다.소식을 접한 한지음은 가장 먼저 조형욱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조형욱으로부터 강이한이 유영을 끌고 병원으로 오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한지음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났다.유영, 이제 이 어둠은 네 거야!유영의 처참한 미래를 상상하니 벌써부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당연하게도 유영이 원해서 왔을 리는 없었다. 하고 싶은 게 많고 자존감 높은 그녀가 스스로 이런 선택을 했을 리 없었다.하지만 이건 한지음이 원하던 결과였다.사랑하는 남자의 강요로 다른 여자에게 시망막을 빼앗기는 기분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한지음은 지금 당장 울부짖는 유영의 비명소리를 듣고 싶었다.병원 입구.유영은 남자에 의해 강제로 끌려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강이한, 꼭 이렇게 해야겠어?”결국 여기까지 온 건가?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강이한이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마음속 한구석에서 제발 이러지 말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하지만 결국 한지음의 처참한 흉터를 떠올리고 생각을 바꾸었다.그 잔인한 모습들이 결국은 그의 이성을 집어삼켰다.“걱정 마. 나중에 내가 꼭 당신에게 맞는 시망막을 찾아줄게.”“수술 끝나면 내가 항상 옆에 있을 거야. 내가 직접 당신을 간호할게. 아프지 않을 거야.”남자의 목소리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싸늘하기만 했다.유영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죽어버려!”그녀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주먹을 휘둘렀다.하지만 남자는 가볍게 그 손목을 가로채고 잡아당겨 품에 안은 뒤, 그대로 그녀를 질질 끌고 병원 안으로 향했다.유영이 발버둥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다급한 마음에 입구에 있는 쓰레기통을 집어 강이한의 머리에 엎었다.안에서 쓰레기가 쏟아지며 남자의 온몸에 오물이 묻었다.분위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었고 뭇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그녀가 눈물을 훔쳤다.그 모습은 완벽한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소녀가 재벌가에 시집 가서 갖은 고생을 하고 결국 재벌 남편에게 버려진 모습 그 자체였다.누군가가 벌써 핸드폰을 꺼냈다.강이한은 모이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그는 당장 이 자리에서 이 여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유영은 다가오는 사람들을 힐끗 보고는 울며 말했다.“강이한, 우리 이혼했잖아. 세강의 안주인 자리도 그 여자한테 양보했어. 그런데 또 뭐가 부족하대?”“내 말을 안 믿어도 돼. 하지만 그 여자가 시력을 잃은 시점이 언제인지, 조금만 신경 써서 알아보면 알게 될 거야. 아직 검진도 안 했지?”강이한이 입을 열었다.“닥쳐, 이유영!”“대표님!”멀지 않은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조형욱이 다가와서 강이한을 말렸다.유영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강이한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이게 날 건드린 대가야, 강이한!’그녀는 이번 기회에 남자에게 제대로 된 교훈을 주고 싶었다.강이한은 분노를 꾹 참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지만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그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는 가운데, 유영은 도망치듯 병원 반대방향으로 뛰었다.원래 저런 여자였나?오스카 연기상을 줘도 될 만큼, 완벽한 연기였다.유영이 입구에서 오열하는 모습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졌다. ‘한지음의 욕심은 어디까지인가? 강이한은 어찌하여 현모양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가?’ 등 온갖 타이틀이 인터넷 기사를 타고 돌아다녔다.“하하! 너무 고소해!”그 시각, 유영의 사무실에서 기사를 확인한 소은지는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게다가 달랑 기사만 올라온 게 아니라 동영상까지 첨부되어 있었다.영상 속 유영의 모습은 누가 봐도 버림받고 힘들어하는 피해자의 모습이었다.유영이 친구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만 웃어. 그거 보고 웃은지 벌써 10분 됐어.”“부족해. 강이한 그 표정 봤어? 너무 웃기잖아!”강이한이 누군가!청하시에서 이 정도
“강이한은 지금 혈압 올라 죽으려 하겠지?”“아마도?”아까 병원에서 봤던 울긋불긋한 얼굴만 생각해도 그가 얼마나 화가 많이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우선 해야 할 것은 한지음을 실드 치는 일이겠지.”지난번에 앞장서서 유영을 비난했던 언론사 기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아마 한지음 쪽에서 뒤를 밟힐까 봐 처리한 것 같았다.하지만 그들 중에는 한지음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굳이 유영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나서서 불을 지필 사람들은 많고도 많았다.그들은 강이한을 공격하진 못해도 한지음은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었다.게다가 한지음이 전에 했던 일들이 유영에 의해 전부 가짜라는 게 까발려지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한지음 쪽 입장을 믿지 않게 되었다.“너는 괜찮아?”소은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영에게 물었다.강이한이 한지음을 감싸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이었다.한지음이 나타난 뒤로 강이한은 한 번도 유영의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해 준 적 없었다.유영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아마 한동안은 조용할 거야. 내가 바라던 바고.”오늘 있었던 일로 하여 강이한도 유영이 만만히 당하기만 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상황에서 당한 거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강이한도 참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유영의 예상은 맞았다.기사를 접한 강이한은 치미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배준석도 같이 있었다.배준석은 무시무시한 기에 눌려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조 비서!”지옥사자를 연상케 하는 싸늘한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이번 유영의 행보는 완전히 그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조형욱이 다가와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예, 대표님.”“이유영에게 의뢰를 맡긴 회사들에 전달해. 당장 계약을 중지하지 않으면 우리 세강을 적으로 돌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고!”강성건설과 서원그룹이 널 먹여살릴 수
의사가 이유영의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그 결과, 백산 별장과 반산월은 조명에 한층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임소미와 정국진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조명을 다시 교체했다.밤이 되면 이유영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낮에도 햇빛이 강하면 외출을 엄격히 제한했다.임소미가 이유영의 눈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으니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눈에 자극을 주지 않도록 모든 것이 신중히 조율되었다.백산 별장에 밤이 찾아왔다.사람들은 모두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느꼈고 시야가 흐릿한 이유영조차도 조명이 이전보다 더 어두워졌음을 느꼈다.“엄마, 이 정도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저는 이미 제대로 볼 수 없는걸요.”이유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유영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지금의 이 조명은 이유영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하지만 임소미는 딸의 말을 단호히 받아쳤다.“나도 알아. 이 조명이 사람들한테 너무 어둡게 느껴질 거라는 거. 그래도 강한 빛이 네 눈에 더 큰 손상을 줄 수도 있잖아.”임소미는 단호히 말했다.“...”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조명은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자극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됐어. 엄마 말대로 해. 네 수술이 성공하기 전까진 이 조명 상태 그대로 유지할 거야.”임소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이유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알겠어요.”이유영은 엄마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임소미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이유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이유영이 반산월로 돌아왔다.우지와 우현이 이유영에게 말했다.“조명을 모두 교체했습니다. 이제 아가씨의 눈에는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안경은 꼭 착용하셔야 합니다.”“안경이요?”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알겠어요.”예전엔 눈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면 안경을 굳이 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졌다.
임소미의 가슴은 비수로 찔린 듯 아팠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끝에 다시 찾은 딸이니,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뿐이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조금 전, 의사가 임소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몰랐다.“이유영 씨가 시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의사의 한마디는 그녀가 실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정말 강이한을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임소미는 울먹이며 감정을 터뜨렸다.강이한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이 눈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모두 강이한이 한지음 때문에 이유영을 감옥에 넣었기 때문이다.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이유영도 그 끔찍한 화재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임소미는 지금껏 이유영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딸의 흐릿해진 눈은 매 순간 그녀에게 그날의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이유영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던 걸까?“그만하세요, 엄마.”강이한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유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강이한에 대한 이유영의 감정은 이제 미움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어머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는 몰랐다.이유영 역시 한 아이의 엄마였다. 자식이 상처받을 때 부모가 느끼는 그 분노와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렇다.바로 그때도 이런 감정이었다.강이한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이유영은 그의 목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더군다나 임소미는...어릴 적부터 이유영과 함께하지 못했기에 딸이 이런 상처를 입은 걸 본 순간 느꼈을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수술하면 안 되겠니?”임소미의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다.그래, 수술.이 눈은 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했다.그 끔찍한 화재로 인해 이유영의 두 눈은 너무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기본 재활치료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오직 수술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엄마, 수술은 저한테도 위험
박연준은 전기봉 하나로도 이미 머리가 아팠다.그런데 이유영까지 그에게 지나치게 냉혹하게 굴었다.이유영의 눈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강이한에게 비친 이유영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같았다.이온유가 집으로 돌아왔다.아이에게 놀고 싶다는 욕구는 본능이었다. 퇴원 후 며칠간 쉬고 나니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아빠.”온유는 어느새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온유가 방으로 들어온 것을 본 강이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끄며 물었다.“어디 갔다 왔어?”“놀이공원이요!”놀이공원 이야기가 나오자, 온유의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그곳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아마도... 어릴 적에 가고 싶을 때 가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야 놀이공원을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이번 달은 놀이공원은 쉬자, 알겠지?”“네.”온유는 작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아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아이였다.놀기 좋아하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강이한은 온유를 안으며 속상한 듯 말했다.“몸이 이제 막 나았으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해.”“정 아저씨가 한적한 곳만 골라 데려갔어요.”온유는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강이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공공장소는 어디든 위험이 도사릴 수 있었다.한 차례 병을 겪고 난 뒤, 강이한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았다. 그래서 온유가 그런 곳에 가는 것이 늘 불안했다.“온유야.”“네, 아빠.”“아빠가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해.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아빠는 온유를 안 데려가요?”아빠가 출장을 간다는 말에 작은 아이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그도 그럴 것이.이온유에게 있어서 강이한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그런 아빠가 집을 떠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서운함이 얼굴에 드러난 것이었다.강이한은 말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 네 몸은 이제 막 나아졌잖아, 응?”“네.”작은 아이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꿈도 꾸지 마!”강이한은 신지수에게 냉정히 잘라 말했다.신지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말 차갑기 짝이 없네. 그 연회에서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했을 땐, 최소한 미소 하나쯤은 보여줄 수 있었잖아.”첫눈에 반했다고? 신지수가? 신씨 가문의 사람이 무슨 낭만적인 감정 따위를 가질 여유가 있겠는가?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불꽃을 피웠고 강이한은 담배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신지수는 담배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신지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연서가 당신들 사이의 깊은 골이라는 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연서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연서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늘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다.신지수의 말이 끝나자, 강이한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신지수는 계속 말을 이었다.“두 사람 사이엔 이제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아 보여.”“신지수!”강이한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무거워졌다.강이한의 표정에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신지수가 말했다.“네가 이유영의 딸을 이용해 한지음의 딸을 구하려 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신지수가 이 사실을 처음 듣게 되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오랜 세월 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강이한은 이유영을 꽤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런데 굳이 왜 한지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행동을 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닥쳐!”그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강이한의 몸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러나왔다.신지수는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강이한, 사실 이유영도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존재는 아니지, 그렇지?”“언제부터 이유영과 친한 사이였어?”신지수가 이유영의 이름을 너무나 친근하게 부
“그때, 너는 왜 한 번도 멈출 생각 하지 않았는데?”과거에도, 이번 생에서도, 홍문동 사건에서도 강이한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이번 생에서 이유영을 감옥에 보낸 일도 마찬가지였다.심지어 월이를 이온유를 구하는 도구로 이용하려 할 때조차 그는 멈출 줄 몰랐다.그런데 그런 강이한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유영에게 멈추라 말할 수 있는가?“만약 그 여자였대도 넌 똑같이 행동했을까?”그 여자는 연서였다.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이한의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거칠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왜 말이 없어?”강이한의 불규칙한 호흡을 들으며 이유영의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전화기 너머, 강이한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갔다.만약 이유영이 연서였다면, 한지음과 이온유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까?“안 그랬을 거야, 맞지?”강이한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유영은 차가운 조소를 담아 말을 이었다.강이한의 마음은 폭풍 속 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대치하며 날 선 긴장감을 이어갔다.이유영이 말했다.“강이한, 너 정말 잔인하다.”“유영아...”막상 강이한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진짜 잔인한 건가?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잔인함 이상의 존재였다.이유영이 차갑게 말했다.“다시는 전화하지 마.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이제는 들을 마음이 없으니까.”이 말을 끝으로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세상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이유영의 온몸은 긴장으로 굳어졌고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방금 전 통화에서 이유영이 던진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만약 연서였다면, 그 일들이 벌어졌을까?’이유영은 강이한의 주저함과 침묵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연서라는 여자가 강이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의 강이한.강이한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이유영은...
온화하고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온몸에 모래투성이네. 어디서 놀다 온 거야?”“모래 놀이터요! 엄마도 갈래요?”아이는 보물을 자랑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이유영에게 말했다. 이곳은 아이들에게 그야말로 작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임소미는 이 아이를 정말 애지중지했다.아이가 파리로 돌아온 이후, 백산 별장의 뒷마당은 서서히 아이만의 놀이터로 탈바꿈했다.바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놀이기구들이 이미 뒷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애정을 쏟는 곳은 모래 놀이터였다.“엄마는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시간 나면 꼭 같이 놀아 줄게, 알겠지?”이유영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작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디론가 달려갔다.멀어지는 아이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유영의 가슴속엔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스며들었다.과거에,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강이한에 대한 증오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그 시절, 둘은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각자의 분노를 표현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강이한이 월이에게까지 손을 뻗어 그녀를 이온유 구출에 이용하려 했을 때, 이유영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했고 이유영의 인내심은 그 끝에 다다랐다.더는 견딜 수 없었다.휴대전화가 진동하자 이유영은 화면을 천천히 확인했다.강이한이었다.이유영은 서늘한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신씨 가문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유영은 장혜주에게 전기봉의 행방을 추적하게 했다.이유영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한 한마디를 내뱉었다.“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자초한 일?맞다.이유영에게 있어 강이한이 지금 겪는 모든 일은 자업자득이었다.“그만해. 서주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곳이 아니야.”“..
엔데스 명우는 떠났다.소은지는 주위 공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끼며 자신을 감싸안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소은지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소은지의 말투엔 불만이 희미하게 묻어나왔다.소은지는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기 일에만 충실하며 조용히 살아가길 바랐다.심지어 이유영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며 결혼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그런 소은지가 아무런 잘못 없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쥐며 조용히 말했다.“당분간 그 사람은 만나지 마요. 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해요.”현우의 말투에는 묵직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엔터스 가문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엔데스 명우의 주변에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특히 그것이 소은지와 연관된 문제라면, 그 관심은 배가 되었다.설유나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소은지 역시 알고 있었다. 설유나가 엔데스 명우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그렇기에 현우의 경고가 더 깊게 와닿았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명우가 강압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현우의 말에 담긴 경고를 느낀 소은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현우는 바빴다.엔데스 명우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우도 반산월을 떠나야 했다. 현우는 소은지 곁에 한 사람을 남겨두고 갔다.“추민기!”현우는 늘 곁을 지키던 추민기를 소은지의 보호자로 남겨두었다.그것은 명우로부터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현우의 세심한 배려였다.떠나기 전, 현우는 추민기에게 분명히 당부했다. 소은지가 어디를 가든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따라가라고....벽산 별장.이유영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복잡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장혜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제서야
그때 엔데스 명우는 그렇게 말했다.하지만 그가 말했던 ‘결혼’이란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소은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소은지!”엔데스 명우의 눈빛에는 위험한 기운이 번뜩였다.소은지는 담담히 말했다.“윤아를 구하는 건 내겐 어렵지 않은 일이야.”“조건은?”소은지가 입을 떼려는 순간, 명우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소은지는 그 짧은 눈빛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설유나의 상황은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절박해졌다.소은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부탁해 봐.”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어버린 듯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소은지의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배천명은 소은지를 바라보며 더욱 위험한 기운을 드러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은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아니고서야, 파리의 엔데스 가문 여섯째 도련님에게 이런 무모한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이건 너무도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 순간, 엔데스 여섯째 도련님의 눈빛에는 위험을 넘어선 야수 같은 날카로움이 담겼다.당장이라도 소은지를 산산이 조각낼 기세였다.하지만 소은지에게선 위협의 기색조차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명우를 직시하며 여유롭게 비웃었다.긴 시간이 흘렀다.모두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무렵, 드디어 명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정말 뻔뻔하군.”“뻔뻔한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지. 여섯째 도련님,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여섯째 도련님의 ‘무릎’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우가 과거에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떠올리면 무릎을 꿇는다고 해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물론 소은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소은지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설유나가 그의 마음속에서 아무리 소중한 존재라 해도 무릎을 꿇는 일만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이곳 파리에서 엔데스 명우가 그런 굴욕을 당한다는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마당에 강이한은 이유영이 전기봉을 찾아낸 후 자신이나 박연준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지금의 이유영은 자신과 박연준에게 끝없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나가봐!”강이한의 눈빛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 문제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이유영은 ‘연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 박연준과 자신의 사이에 어떻든 간에, 이제 이유영은 더 이상 둘 중 누구도 믿지 않았다.신시욱이 나갔다.서재에 홀로 남겨진 강이한은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 갑 넘게 태웠지만 마음속 불안과 짜증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이유영...”강이한은 이유영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가 묻어 있었다.이유영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가슴속 공허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이유영이 남긴 모든 말은 이미 충분히 명확했다.이유영은 말했다.지난 생 마지막 순간 무슨 일이 있었든, 설령 한지음이 모든 대가를 치렀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라고.한지음이 이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해도 이유영에게는 여전히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이유영은 전혀 주저 없이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과거에 자신이 이유영에게 준 상처만큼 지금의 이유영은 잔인했다. 이 또한 당연했다.잔인함...사실 따지고 보면 이유영을 탓할 자격도 없었다. 강이현 역시 과거 이유영에게 품었던 증오 이상을 느꼈으니까.하지만 적어도 이유영의 눈엔 잔인함으로 비췄다.그러나 이유영이 본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 이유영은 무슨 말을 들어도 더는 믿지 않을 것이었다.이유영은 이제 강이현을 자신의 세계에서 철저히 끊어내 버렸다.그야말로 냉정하고 단호하게.어두운 서재에서 강이한의 눈에는 깊은 상처가 가득했다....파리의 상황 역시 심상치 않았다.이유영은 뒤에 정씨 가문이 있었기에, 이유영은 돌아온 후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반면 소은지 쪽은... 엔데스 명우가 다시 반산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