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의 할아버지는 자기 직계가족 외에 그 어떤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강이한이 강서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장 경호원 불러!”그의 말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을 쫓아낼 기세였다. 큰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의 눈이 서로 맞닿았다.“너희들 그만해. 말 가려서 못 해? 가족끼리 이게 무슨 짓이야!!”큰 할아버지가 강성과 강산에게 눈치 주며 말했다.삼 년을 못 봤을 뿐인데, 강이한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소란을 피울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큰 할아버지가 말을 이었다.“이번 프로젝트는 물 건너갔으니, 가능한 한 빨리 새 프로젝트에 도입해야 해. 동교 옆에도 좋은 땅 있으니 새로운 프로젝트 시작할 수 있을 거야.”동교 신도시 옆에 있는 땅, 강이한도 그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노리는 건 그뿐이 아니었다. “이번엔 놓치면 안 돼. 회사가 얼마나 큰 손실을 볼지… 아무리 강씨 가문의 재산 규모라도 감당할 수 없을 거야!”“알았으니까, 가세요! 강서희, 손님 나가신다!”강이한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랐다.반면 지시를 강서희는 매우 난감했다.“큰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강서희가 매우 조심스레 말했다. 강이한이 자신들을 무시해 버리자, 큰 할아버지와, 둘째 할아버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들은 분풀이하듯 강서희에게 태클을 걸었다. “아주 잘 키웠어, 정말 친자식이랑 다를 바가 없네!”이 말은 진영숙을 비꼬는 말이기도 했다. 진영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만약 노부인이 그녀의 손목을 잡지 않았다면 집안의 어르신이고 뭐고 그대로 들이받을 뻔했다.‘늙은이들이 나이를 거꾸로 먹었나!’과거 그녀가 다쳐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이 얼마나 그녀를 비웃었던가! 어떤 이들은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욕까지 했었다!사실 진영숙은 강서
강이한의 서재.진영숙은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진한 담배 냄새를 맡았다.“그 여자랑은 어떻게 됐어?”진영숙의 말한 ‘여자’는 다름 아닌 이유영이었다.오늘 친척들이 들이닥치며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뒤, 그녀는 이유영이 더 괘씸하게 느껴졌다. 진작에 능력이 있었으면서 왜 강씨 집안에 있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지, 이건 고의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집안이 안 좋으면 재주라도 부려야 하는 거 아닌가?“그 여자? 무슨 소리예요?”진영숙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강이한이 되물었다.“그 여자 말이다, 그 여자! 이유영!”“저희 이혼했어요. 이제 만족하세요?”그의 답을 들은 진영숙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잘했어. 너랑 어울리지 않은 여자였어. 그 여자랑 결혼한 후로 되는 일이 없었잖아.”“….”“이혼하기 전에도 회사에 입힌 손해만 봐.”말하면 할수록 진영숙은 참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영은 절대로 며느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여자였다.강이한의 눈이 차가워졌다.그는 더 이상 이유영에 대해 진영숙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유경원 쪽에서도 저번 잔칫상 사건 뒤로 자꾸만 약혼을 미루고 있고! 흥, 누가 아쉬워한다고!”저번 생일 잔치 이후로 유경원 쪽과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진영숙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자기 아들, 강이한한테 어울리기엔 좀 부족한 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유영과 이혼까지 한 마당에 강이한은 더 이상 꿀릴 것이 없었다! 그녀의 아들은 최고의 신랑감이었으니까 얼마든지 더 좋은 신붓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참, 요즘 회사 일에 좀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아. 동교 신도시 부지 옆에 있는 땅, 이번이야말로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돼!”강이한이 본가로 돌아오기 전, 친척들에게 받은 수모를 떠올린 진영숙은 아주 진절머리가 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 또 실수하게 된다면 그들을 하이에나처럼 회사를 삼키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다음 날, 강이한은 본가에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뒤
김연우는 서재욱의 요구사항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유영에게 전달했다. 그녀는 이유영이 디자인을 이 기초를 바탕으로 진행하길 원했다. 반면 이유영은 이런 요구 사항들이 차라리 달가웠다. 고객이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으면 이유영이 작업 틀을 잡는 데 편했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저희 회사에도 실력 있는 디자인 팀이 있어요. 그럼에도 이 일을 이유영 씨에게 맡기는 이유, 그건 저희 대표님과 박연준 대표님의 인연 때문이라는 거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꽤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말투. 과거의 이유영이었다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조민정 씨, 배웅 부탁드릴게요.”“네!”조민정은 서둘러 김연우를 따라나섰다.김연우가 떠나고 사무실로 돌아온 이유영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회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인맥을 통해 일을 맡기는 것이리라. 박연준과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와의 인연도 삼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번엔 박연준의 도움으로 받은 의뢰였다. 이유영은 두 번 같은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다. 그 누구한테도 무시당하지 않고 인증받으려면 확실한 실력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우우웅-전화가 진동했다. 문 비서한테서 온 전화였다.“안녕하세요, 문 비서님.”“서원그룹 쪽 사람은 떠났어요?”“네, 좀 전에 갔어요. 박 대표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사실 이유영은 이런 식으로 일을 맡고 싶지 않았지만, 박연준의 소개였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거절할 수 없었다!“대표님이 함께 식사하고 싶으시다는데, 시간 괜찮으세요?”“어제도 함께 식사했는데, 무슨 일로….”사실 오늘 아침도 박연준의 차를 타고 출근한 거였다. 하지만 곧이어 서원그룹과 시작한 새 프로젝트를 떠올리며 다시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혹시 오늘 그 프로젝트 건으로….”“네, 서원그룹 프
”좀 전에 서원그룹 대표 보좌관 김여우와 미팅하셨답니다!”서원그룹에서 직접 이유영을 찾아온 것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동교 신도시 옆 부지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청하시의 부동산 개발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동교 옆 부지 개발이 어쩌면 그 마지막 주자가 될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땅을 원하고 있었다. 서원그룹이 강성그룹과 협력하고 있는 이유영을 찾아간 것도 이 프로젝트 입찰에 더 확실한 힘을 실어주기 위함일 것이다. 이번 동교 신도시 프로젝트로 인해 많은 기업이 이유영의 실력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조형욱도 이유영의 역량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점심에 사모님과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을까요?”조형욱이 망설이는 목소리로 물었다.강이한은 겉으론 무심한 듯 보였지만, 그 속까지 괜찮을 거라 보장할 수는 없었다.안 그래도 지난번 입찰에 이유영의 디자인 때문에 패배의 쓴맛을 맞보게 되었는데 지금은 이혼까지 한 상태였다.이유영은 분명 전보다 더 냉정히 그를 대할 것이다.“이유영과 식사를 하라고?”강이한이 비웃듯 말했다.조형욱이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유영이 얼마나 그를 증오하고 있을지 예상이 가는 강이한은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이유영이 그토록 그를 미워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다시 그녀를 만나 그 증오가 가득한 눈빛을 받을 상상 해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강이한은 눈을 감으며 깊이 생각에 빠졌다. 그의 얼굴은 차분해 보였으나, 그 속은 지금 수많은 고민들로 쑥대밭이었다. “사모님의 능력이 그 정도일 줄은 누가 예상을 했겠어요. 그 어렵다는 입찰 건을 단번에 통과시키다니.”경험이 많은 디자이너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때였으면 수많은 선별과 비교를 거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영의 디자인은 거의 당일 통과 결과가 나왔다.“나가.”강이한은 지금 이유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조형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
사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의사가 말했다.“한지음 씨는 요즘 계속 우울해하셨습니다. 아마 우울증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한 게 아닌가 싶어요. 보호자가 옆에 많이 있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우울증?한지음이?그 증거들을 확인한 후로 강이한은 한지음을 속이 시커먼 여자로 단정지었다.아무나 다 우울증에 걸릴 수 있지만 그런 이기적인 사람은 절대 우울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잠시 후, 한지음이 실려 나왔다. 간호사는 그녀를 끌고 병실로 돌아갔다. 강이한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병실.한지음의 두 눈은 여전히 흰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이한이 보기에 전혀 안쓰럽지 않고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졌다.“굳이 이렇게 해야 했어?”한참이 지난 뒤, 강이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병상에 앉은 한지음은 더듬거리며 그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기에 그녀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한지음이 길게 심호흡한 뒤에 말했다.“이렇게 하면 대표님이 저 보러 올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이렇게 했을 거예요.”그녀는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롭고 아팠다.강이한이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너 참 교활한 사람이었구나.”예전에는 절대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전에 유영에게 했던 모든 잔인한 말들을 한지음에게 돌려주고 싶었다.모든 걸 다 안다는 듯한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여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뭐?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 한지음,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내가 널 돌봐줬던 건 네가 지석이 여동생이었기 때문이었어.”“그런데 왜 굳이 이런 일을 벌여서 그 여자가 나랑 이혼하게 만들었니?”유영과 이혼할 때를 생각하면 강이한은 지금도 숨이 막히고 가슴이 아팠다.그녀와 함께한 세월이 있으니 유영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녀가 왜 해외에 가서 정국진을 만나고 국내로
점심식사가 끝난 뒤, 박연준은 유영을 사무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유영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조민정을 보았다. 조민정이 그녀의 사무실이 있는 방향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유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그 인간 또 왔어요?”조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동교 신도시 개발에서 패배의 쓴맛을 보았으니 그 주변 상권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경쟁 회사들의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오전에 서원그룹 김연우를 만났는데 점심 시간이 지나 바로 찾아왔다는 게 그 증거였다.유영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에 사무실로 들어갔다.매캐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강이한의 앞에 놓인 일회용 컵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마 그녀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찾아온 듯했다.소리를 들은 강이한은 고개를 들고 슬픔에 잠긴 표정으로 유영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슬픔을 확인한 순간 유영은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덤덤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말을 마친 그녀는 그를 지나쳐 자신의 의자로 가서 앉았다.강이한은 그녀가 입고 있는 정장 오피스룩을 빤히 바라봤다.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한정판 제품들이었다.그의 눈빛에 서렸던 아픔이 갑자기 이글거리는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찾아오기 전에 그녀에게 들었던 죄책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두 사람은 형형한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유영은 말없이 그를 보기만 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강이한의 눈빛에도 온도가 없었다.“당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네.”“왜? 난 꼭 집에서 밥이나 하고 시댁 어르신들 비위나 맞춰야 어울려?”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좋게 말해서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며느리이자 아내였지만 강이한의 가족들 눈에 유영은 실컷 부릴 수 있는 노예와도 같았다.오히려 본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그녀보다 더 존중을 받았다.“유영아.”강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깊은 아픔
하지만 이유영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한지음이 당신 밀어내려고 꼼수 부린 거 다 알았어. 하지만 여기서 끝내자. 이런 일 때문에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는 없어.”강이한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은 지금 이 상황이 황당하기만 했다.저게 지금 사과를 하는 태도인 걸까?너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그 사건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끝내라 마라야? 그리고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는 충분해.”참 말을 쉽게 한다 싶었다.아이의 목숨과 그녀의 목숨, 이 모든 걸 다 합치면 저들을 찢어 죽여도 모자란데 가해자 주제에 여기서 끝내자니?그는 아직도 주도권을 잡고 싶은 걸까?그녀는 길게 심호흡한 뒤, 분노를 삭히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강이한은 그런 유영을 바라보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사실 난….”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리며 대화가 중단되었다.조형욱의 전화였다.강이한이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그는 유영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이야!”“대표님, 한지음 씨, 눈 주변 상처 감염이 너무 심한데 당사자가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있습니다!”“그 여자 상태가 어떤지 조 비서가 몰라?”강이한이 버럭 화를 내며 포효했다.한지음의 상태에 대해 그의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조형욱이 잠깐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강이한이 전화를 끊으려던 때, 조형욱이 다시 말했다.“대표님, 저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그래서?”강이한의 시선이 유영을 향하고 있었다. 유영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스파크가 튀었다.또 한지음!그들 사이에 이제 남은 게 뭐가 있을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한지음은 유령처럼 그들 사이에 끼어 있을 것이다.유영은 원한이 사무쳤다. 지난 생에서 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마지막 죽는 순간에야 깨달았을까?강이한은 유영을 매섭게 노려보며 한결 누그러진
유영의 입가에 비웃음이 진해졌다. 그 모습은 강이한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쾅!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얼마나 세게 쳤는지 테이블이 흔들거렸다.“그래, 내가 시켰어.”“당신에게 먼저 보여주고 기자에게 흘린 거야. 알잖아?”“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 걸까?그녀는 단지 반격을 했을 뿐이었다.개한테 물렸는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라는 소리로 들렸다.유영은 길게 심호흡하고 가슴에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당장 여기서 나가.”“이유영, 한지음한테 무슨 일 생기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남자는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고는 뒤돌아서 나가버렸다.유영은 분노에 온몸이 떨려왔다.그녀는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마음대로 해!”저렇게 말하면 누가 두려워할 줄 알고?쾅!사무실 문이 거칠게 닫혔다. 여기 찾아와서 그녀와 관계를 회복하자고 했던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유영은 부들부들 떨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강이한이 나가자마자 조민정이 안으로 들어왔다.“어떻게 된 거예요?”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사를 바라보며 조민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영은 떨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켰다.조민정은 강이한이 문을 쾅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민정도 조용히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한참이 지난 뒤, 드디어 분노를 진정시킨 유영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한지음이 스스로 자해를 한 것 같아요. 진짜 실명된 거 같다고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조민정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게 무슨 말씀인지….”한지음의 실명이 진짜였다니?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유영이 조민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어떻게 그런 짓을 했을까요?”유영을 날려버리기 위해 한지음은 스스로 자기 눈을 자해했다.
엔데스 명우가 어떤 사람인지 파리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소은지는 명우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현우와의 관계도 본래부터 경쟁적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소은지의 일이 여섯째 도련님과 엮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둘 사이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가능성이 컸다.“소은지, 넌 무슨 자격으로 현우에게 보호받고 있는 거야?”송연미는 이성을 잃은 듯 소은지를 향해 소리쳤다.현우는 소은지를 보호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상호 관계가 현우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여섯째 도련님은 원한을 쉽게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이런 상황 속에서 일은 점점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보호한다고? 소은지를? 현우는 대체 왜 소은지를 보호하고 있는지,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송연미는 몰랐다. 그러나 송연미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두면 안 됐다.“소은지, 제발 부탁이야. 한 번만이라도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될까? 나는 이미 그들에게 한 번 해를 입었어. 더 이상 현우까지 그들에게 해를 입게 할 순 없어...”송연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온몸이 떨렸다.송연미가 엔데스 운빈과의 결혼에서 받았던 심리적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갑자기, 이 여자가 보여주는 히스테리가 그렇게 미워 보이지만은 않았다.송연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너와 여섯째 도련님 사이의 일은 나는 다 알고 있어. 소은지, 여섯째 도련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파리에서 멀리 떠나줘, 안 될까?”송연미의 관점에서는 소은지가 현우의 곁에 있으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송은지가 현우의 곁에 있는 한, 그건 현우에게도 큰 상처가 될 터였다.“내가 떠난다고 해서, 그들 사이의 원한이 사라질 것 같아?”“하지만 네가 현우 곁에 있으면, 여섯째 도련님은 모든 책임을 현우에게 돌릴 거야. 이걸 정말 모른단 말이야? 그들은 이미 중요한 순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소은지는 그저 얼어붙은 듯한 눈빛으로 송연미를 바라보고 있었다.송연미는 그런 눈빛에도 전혀 압박을 느끼지 않는 듯, 담담히 말했다.“네가 진심으로 현우를 사랑한다면, 지금 무엇이 그를 위하는 것인지 알아야 할 텐데.”“처음 너를 봤을 때, 꽤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소은지가 갑자기 말했다.“...”침착?그때는 위화영이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사실 그때는 반박할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았다. 막상 반박할 기회를 잡기만 한다면, 송연미의 말은 그 누구보다도 날카로울 것이었다.송연미는 그저 차갑게 소은지를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널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날 너무 몰아붙이지 마, 알겠어?”몰아붙인다니!소은지는 차가운 시선으로 송연미를 바라보았다.송연미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넌 파리의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이 파리의 이면에 어떤 흐름이 있는지도 전혀 모르잖아.”“...”“여기서 헛되이 상처받을 필요 없잖아.”강경하게 나왔더니 소용이 없다고 여겨 이제는 부드럽게 나오는 건가?하지만 아마도 송연미는 소은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설령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가 그런 관계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도발당하면 마음속에 약간의 불쾌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너 착각하지 마.”결국 소은지는 송연미에게 그렇게 답했다.어떤 것들은 변한다. 특히 사람의 마음은 더 쉽게 변한다.하지만 송연미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고 오히려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고 있었다.“서명하지 않겠다는 거야?”송연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왜? 더 강한 수를 쓸 생각이야?”소은지는 태연히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런 소은지의 태연함은 분명 송연미를 더욱 격분하게 했다.“소은지, 난 네가 파리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렇게 곱게 설득하려는 거야. 그런데 너는 정말로 고마운 줄
이유영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그 이름이 나오자 현우의 눈빛에는 더욱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소은지는 그런 현우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그렇다면 송연미는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현우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소은지에게 말했다.“이유영 씨는 어떤 충격도 견딜 수 없어요. 지금 박연준과 강이한이 이유영 씨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걸 보면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유영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아마도 유영 씨의 두 눈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유영이 정말로 암흑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소은지의 가슴을 짓눌렀다.2년 동안, 엔데스 명우의 학대로 인해 소은지는 일주일 동안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소은지는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그 일주일 동안 소은지가 겪었던 무력감과 절망은 평생 따라다닐 상처가 되었다. 소은지는 자신의 삶에서 빛을 볼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그때부터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증오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둠은 공포스럽고 숨 막혔다.“그럴 리가요.”이유영의 두 눈이 시력을 잃어간다는 말을 들은 소은지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박연준과 강이한 사이도 이번 한판이 마지막이겠지.”현우의 말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소은지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만약 이유영의 두 눈이 정말로 회복되지 못한다면,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소은지는 암흑 속에서의 무력함이 얼마나 참혹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해친 원수조차 볼 수 없다는 그 사실은 숨 막히는 고통이었다....엔데스 가문은 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장례식 당일, 엔데스 가문의 모든 사람이 참석했지만, 오직 소은지만은 그 자리에 없었다.반산월에 머물던 소은지는
현우는 망설이다가 말했다.“엔데스 가문은 심연과 같아요. 그 심연의 문턱에 서서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는 게 좋아요.”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심연... 자신의 가문을 심연이라 부르다니. 현우가 생각하는 엔데스 가문은 도대체 얼마나 깊고 어두운 곳일까?소은지는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어두운 방 안에서 현우의 손에 들린 담배의 불꽃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불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그것은 현우의 고독을 의미하고 있었다. 많은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우가 느낀 것은 오직 고독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현우는 과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엔데스 가문을 떠나 황가 국제 그룹에서 단순한 보좌관으로 숨어들었겠는가?그 당시, 현우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아들이 평범한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현우는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숨기며 세상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태생은 결국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심연이라니...”소은지는 그 단어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며 중얼거렸다.현우야말로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두려운 존재처럼 보였다.소은지는 한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가족도 없고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의 모든 것을 망쳐버렸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 현우를 보며 소은지는 깨달았다. 가짐으로 인해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현우에게는 거대한 가문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배경 속에서 더 큰 고통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심지어 엔데스 노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현우의 얼굴에는 단 한 점의 슬픔도 찾아볼 수 없었다.“앞으로는 대저택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피하세요.”현우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말했다.“최근 자주 찾아오더라고요.”소은지가 언급한 사람은 바로 송연미였다.현우가 엔데스 가문으로 돌아온 이후, 송연미는 더 이상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송연미를 이야기할 때, 현우의 눈빛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의 관계는 철저히 계약으로 엮여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자리에서도 소은지가 굳이 현우와 동행할 이유는 없었다.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선을 그어 외부의 불필요한 관심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엔데스 현우는 소은지를 미묘하게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현우는 소은지가 예상외로 순순히 나오는 모습에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왜 그래요?”“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이 모든 일이 언제 끝나는지 알고 싶어요.”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내부 사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금, 곧 새로운 후계자가 결정될 것이라 생각했다. 소은지는 그 결과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만약 엔데스 명우가 이긴다면요?”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잡았다.현우는 소은지의 손바닥에 맺힌 차가운 땀을 확연히 느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의 승리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졌다.소은지와 현우의 관계는 사실상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대결로 비쳤다. 현우의 말을 듣고 소은지는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출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이렇게까지 와서도 어쩔 수 없는 건가요?”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물었다.소은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소은지는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현우는 미소를 지었다.특히 소은지의 눈빛에 담긴 불만을 보며 현우는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그게 그렇게 쉽겠어요?”현우는 활짝 웃으며 소은지를 안고 안쪽으로 데려갔다.소은지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엔데스 명우를 파리에서 떠나게 만드는 건 쉽지 않지만, 이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그래서 지금 대체 어떤 상황인가요?”소은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눈앞의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소은지는 엔데스 회장이 떠난 뒤 모든 것이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재 남겨진 것은 문서라는 단어뿐이었다
이유영은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보기에 너희 둘은 똑같은 부류야. 다 좋은 사람이 아니야.”이유영의 비웃음은 강이한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이유영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연서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이유영은 두 사람 중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지듯 아팠다.이유영이 무슨 말을 해도 그 말 하나하나가 강이한의 가슴에 상처를 새겼다.“전기봉의 소식이라니, 하하!”그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지, 이유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번에는 강이한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사실, 이유영은 이미 강이한의 선택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이 과거 이온유 사건 때처럼 반복될지 확인하고 싶었다.그의 행동이 과거 이온유 때와 같을지 알고 싶었다.이온유가 위급했던 그때, 강이한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이유영을 떠났다.“서주의 모든 것은 네가 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아, 유영아. 나를 성급히 판단하지 마.”이유영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강이한은 신중히 말을 꺼냈다.이유영이 서주의 복잡한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특히 지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욱 알 길이 없었다.강이한은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이유영이 극단적인 결론을 내릴까 봐 걱정했다.예전 이온유의 사건처럼.“흥!”이유영이 코웃음 쳤다.강이한의 말을 듣기 전에, 이유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기봉의 소식을 듣고 나서 강이한이 어떻게 행동할지.이유영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강이한의 진심을 확인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사실, 강이한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선택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유영의 차가운 말투는 강이한을 더욱 아프게 했다.너무 쓰리고 아렸다.병원에서 돌아온 후에
처음엔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데려갔다니, 그는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 아이가 그의 딸이 아니더라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는 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생명이었다. 강이한에겐 그 아이에게 손댈 자격조차 없었다.그 며칠은 아이와 이유영 모두에게 끔찍한 악몽이었다.이유영은 지금도 병원을 헤매며 미친 듯 아이를 찾았던 날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밤낮없이 걱정하며 엄마로서 견딜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이유영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결국, 당신은 아이가 당신 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온유를 살리기 위해 그 아이를 이용하려고 했어.”어떤 이유를 들어도 강이한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다.결국, 마지막 순간에야 강이한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과 모든 진실을.하지만 그런데도 강이한은 끔찍한 선택을 했다. 그래서 이유영은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그때, 그 아이가 울면서 밥도 먹지 않고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었을 때... 강이한, 정말 그 순간조차도 넌 아무런 동정심도 못 느꼈어?”“...”그 말은 강이한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왔다.숨이 턱 막히며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동정심이 없었을까?사실 그도 동정심을 느꼈다.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강이한이 느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그 아이가 소중했고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졌다. 그러나 이온유의 위급한 상태는 강이한을 잔인한 선택의 기로로 몰아넣었다.“이유영, 나는...”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이유영의 앞에서는 어떤 말도 무의미했다.그 사건은 지금도 강이한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유영뿐만 아니라 강이한 역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갑자기 화제를 돌려 물었다.“
두 사람은 전통 사옥으로 돌아왔다.빗물이 지붕을 타고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이유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곳의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빗소리는 이유영에게 잔잔한 평온을 안겨주었다.“아가씨, 점심으로 탕을 끓였습니다.”우지가 말했다. 병원에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던 이유영에게 보양식은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건강도 되찾았으니 이제 든든하게 먹어야 했다.“네.”우지가 조용히 이유영에게 속삭였다.“아가씨, 아까 강 선생님께서 통화 중이셨는데, 전기봉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 같았습니다.”“...”이유영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있을 거라 오랫동안 확신해 왔다.“네, 알겠어요.”어두운 방. 이유영은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이유영은 전기봉 문제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강이한과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망가졌음에도 이유영은 여전히 강이한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유영을 외부와 철저히 차단했다.만약 이유영이 외부와 연결될 수 있었다면, 이미 세상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강이한은 이유영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조용히 문이 열리며 강이한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우지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이제 방 안에는 이유영과 강이한만 남았다.“우지가 네게 모든 걸 말했나 보군.”강이한의 목소리는 깊고 무거웠다.“...”우지를 우연히 본 걸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소식을 전한 걸까? 하지만 이유영이 표정은 평온했다. 이유영은 그의 질문에 흔들림 없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외부와 연락할 수 있다면, 그 소식을 당장 퍼뜨릴 거야.”“...”“네 약점을 당장 적들에게 넘겨버릴 거야!”이유영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는 그 말에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매우 아팠다.박연준의 말처럼 이유영은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이유영은 이제 대놓고 그를 배신하려 했다.그것도 강이한의
연서.그 이름은 강이한과 박연준에게 오랫동안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존재였다. 그 기억은 피처럼 생생하면서도 잔인했다.만약 이유영이 이번에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강이한과 박연준은 평생 서로를 외면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강이한은 박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박연준, 참 가엾네.”연서… 박연준은 연서에게 흔들린 적이 있었던가? 그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연서를 데려가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었다.“가엾든 말든 상관없어. 그렇게 할 거야, 말 거야?”그가 말하는 것은 서주였다. 강이한은 그의 말을 듣고 조소를 터뜨렸다.“평생 계획하던 일을 이제 와서 포기하겠다고?”과거 박연준의 계획 중심에는 항상 서주가 있었다.처음엔 연서가 그 중심이었고 이후엔 이유영이 그 중심이었다. 박연준의 복잡한 속내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강이한조차 박연준의 속내를 완벽히 알 수는 없었다. 그런 박연준이 이제 와서 포기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그 말 뒤에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박연준은 단호히 말했다.“나는 이유영만 있으면 돼.”다른 건 모두 필요 없었다.과거의 교훈은 피로 새겨진 기억처럼 그에게 깊게 남아 있었다. 이번만큼은 무의미하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이번에는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강이한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웃기지 마,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놓고 이렇게 대립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강이한의 눈에 비친 박연준은 감정을 논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이유영만 원한다고?“이유영은 사람이야. 살아있는 사람!”이유영은 물건이 아니었다.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다.사람의 감정은 상호 존중이 기본이다. 과거에는 몰랐던 이 사실을 강이한은 이제야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박연준은 냉소적으로 되받아쳤다.“이유영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나 보군.”박연준은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