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유영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한지음이 당신 밀어내려고 꼼수 부린 거 다 알았어. 하지만 여기서 끝내자. 이런 일 때문에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는 없어.”강이한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유영은 지금 이 상황이 황당하기만 했다.저게 지금 사과를 하는 태도인 걸까?너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그 사건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끝내라 마라야? 그리고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는 충분해.”참 말을 쉽게 한다 싶었다.아이의 목숨과 그녀의 목숨, 이 모든 걸 다 합치면 저들을 찢어 죽여도 모자란데 가해자 주제에 여기서 끝내자니?그는 아직도 주도권을 잡고 싶은 걸까?그녀는 길게 심호흡한 뒤, 분노를 삭히고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강이한은 그런 유영을 바라보며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사실 난….”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리며 대화가 중단되었다.조형욱의 전화였다.강이한이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어왔다.그는 유영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이야!”“대표님, 한지음 씨, 눈 주변 상처 감염이 너무 심한데 당사자가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있습니다!”“그 여자 상태가 어떤지 조 비서가 몰라?”강이한이 버럭 화를 내며 포효했다.한지음의 상태에 대해 그의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조형욱이 잠깐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강이한이 전화를 끊으려던 때, 조형욱이 다시 말했다.“대표님, 저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그래서?”강이한의 시선이 유영을 향하고 있었다. 유영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스파크가 튀었다.또 한지음!그들 사이에 이제 남은 게 뭐가 있을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한지음은 유령처럼 그들 사이에 끼어 있을 것이다.유영은 원한이 사무쳤다. 지난 생에서 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마지막 죽는 순간에야 깨달았을까?강이한은 유영을 매섭게 노려보며 한결 누그러진
유영의 입가에 비웃음이 진해졌다. 그 모습은 강이한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쾅!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얼마나 세게 쳤는지 테이블이 흔들거렸다.“그래, 내가 시켰어.”“당신에게 먼저 보여주고 기자에게 흘린 거야. 알잖아?”“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는 걸까?그녀는 단지 반격을 했을 뿐이었다.개한테 물렸는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라는 소리로 들렸다.유영은 길게 심호흡하고 가슴에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당장 여기서 나가.”“이유영, 한지음한테 무슨 일 생기면 절대 용서 안 할 거야.”남자는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고는 뒤돌아서 나가버렸다.유영은 분노에 온몸이 떨려왔다.그녀는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마음대로 해!”저렇게 말하면 누가 두려워할 줄 알고?쾅!사무실 문이 거칠게 닫혔다. 여기 찾아와서 그녀와 관계를 회복하자고 했던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유영은 부들부들 떨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강이한이 나가자마자 조민정이 안으로 들어왔다.“어떻게 된 거예요?”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사를 바라보며 조민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영은 떨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켰다.조민정은 강이한이 문을 쾅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민정도 조용히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한참이 지난 뒤, 드디어 분노를 진정시킨 유영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한지음이 스스로 자해를 한 것 같아요. 진짜 실명된 거 같다고요!”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조민정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게 무슨 말씀인지….”한지음의 실명이 진짜였다니?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유영이 조민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어떻게 그런 짓을 했을까요?”유영을 날려버리기 위해 한지음은 스스로 자기 눈을 자해했다.
강이한은 쉽게 한지음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그만큼 그에게 한지음이라는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유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설 탐정 한 명 알아봐 줘요.”“사설 탐정은 왜…”“외삼촌은 너무 멀리 있어요. 한지음이 왜 날 그토록 미워하는지 최대한 빨리 알아야겠어요.”한지음의 의도는 강이한을 차지하려는 것뿐이 아니었다.만약 단순히 남자를 차지하려고 했다면 강서희처럼 둘이 이혼한 뒤에는 완전히 손 털고 모른 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지음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랄하게 유영을 괴롭혔다.스스로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독해져야 했을 이유가 유영은 궁금했다.외삼촌은 먼 파리에 있어서 도움을 받으려고 해도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다.“알겠습니다.”조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정국진도 최근에는 한지음의 배후를 파는 것보다는 유영에게 회사를 물려줄 승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정국진에게는 승계 작업이 가장 우선이었다.한지음은 유영이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했기에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전면에 나섰다면 어쩌면 벌써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그건 조민정도 알고 있었다.병원.강이한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조형욱과 의료진이 한지음의 두 눈을 가렸던 흰 천을 벗겨내고 있었다.상처를 확인한 강이한은 흠칫하며 표정이 굳었다.조형욱은 옆에서 한지음을 계속 설득하고 있었다.“한지음 씨, 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거예요? 계속 이대로 내버려두면 평생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어요.”“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아요. 인간의 추악함을 너무 봐서 구역질이 나니까요.”한지음은 의료진과 조형욱의 만류에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조형욱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강이한은 그 모습을 보고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갔다.“대… 대표님?”한 간호사가 그를 알아보고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강이한의 싸늘한 표정에 모두가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한지음은 강이한이 왔다는 소리에 속으로
한편, 유영은 간만에 장을 봐서 소은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풍성한 요리를 하고 맥주도 땄다.한숨에 맥주 반 병을 먼저 비워버린 유영을 보고 소은지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야, 취할 정도로 마시지 마! 나만 힘들다고.”유영은 주사가 심한 편이었다.소은지는 고기 한점을 집어 유영의 입에 넣어주었다.유영은 고기를 잘근잘근 씹으며 미소를 지었다.소은지도 닭다리를 집어 맛보았다. 둘은 살이 잘 찌는 체질이 아니었기에 매번 만날 때마다 배 터지게 먹었다.“너 오늘 무슨 일 있었지?”소은지가 반찬을 먹으며 유영에게 말했다.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로서 유영이 뭔가 고민이 있을 때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유영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술잔을 들었다.소은지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술잔을 비운 유영이 말했다.“한지음 걔 진짜 실명했어.”만두를 먹고 있던 소은지가 화들짝 놀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청하시 언론들이 한지음을 피해자 코스프레한다고 맹비난을 퍼붓고 있는 상황이라 더 충격이었다.“그게 무슨 소리야?”사고가 민첩한 소은지마저도 유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인터넷에 버젓이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영상이 올라갔는데 진짜 실명이라니!그럼 한지음이 의사를 매수하고 사람들이 없을 때 멀쩡히 돌아다닌 영상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강이한은 지금 병원에 있을 거야. 아마 상황이 많이 심각한 것 같아.”“처음에는 실명 그거 거짓이라고 다 밝혀졌잖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소은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유영은 이미 강이한과 이혼도 했으니 한지음은 조용히 지내야 하는 게 맞았다.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유영도 그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그녀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알코올이 들어가야 이 기분이 좀 내려갈 것 같았다.“대체 내가 얼마나 미웠으면 자해를 해가면서까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을까?”예전에 한지음이 의사를 매수하고 장님 행세를 한 건 사실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진짜 장님이 되어
그 여자들은 처음부터 목적이 강이한이었기에 유영이 강이한과 이혼하면서 더 이상 유영을 공격하지 않았다.“한지음은 언제 청하시에 온 거지?”“6개월 전이야.”6개월 전!그렇다면 그 여자는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청하시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강이한과 각종 스캔들을 만들어 내고 유영을 흔들려고 작정했던 것이다.“걔 오빠가 강이한의 목숨을 구해줬었대. 그래서 오빠의 죽음 때문에 강이한을 미워하는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아.”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한지음에게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는 듯했다.소은지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걔와 강이한 사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네.”“맞아.”복잡한 정도가 아니었다.한지음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강이한은 무조건 한지음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10년을 함께한 아내의 말도 믿지 않았다.오늘 밤이 지나면 또 어떤 국면이 펼쳐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언제부터 이 도시가 이렇게 숨 막히는 곳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그럼 차라리 해외로 출국해. 너 더 이상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소은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여자는 유영을 망가뜨리기 위해 스스로 장님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이대로 가다가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없었다.유영이 파리에 있는 외삼촌의 옆으로 돌아가면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유영은 소은지를 빤히 보며 대꾸했다.“그게 그렇게 쉬워?”“하긴. 이제 너도 어엿한 스튜디오 대표인데 해외로 간다고 해도 의뢰는 마무리하고 가야겠네.”“맞아.”가능하다면 유영도 지금 당장 파리로 떠나고 싶었다.국내에 있자니 공기마저 숨 막히는 기분이었다.하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신용이었다.그녀의 사업은 이제 시작이었으니 시작한 일은 마무리하고 가야 했다.소은지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 말했다.“너 이러는 거 보
이런 상황에서 성질 급한 소은지를 내보내서 그와 독대하게 할 수는 없었다.소은지와 강이한은 예전에 큰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한지음이 나타난 뒤로 무슨 일만 생기면 소은지를 찾아와서 괴롭혔다.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치밀었다.“넌 일단 방으로 들어가.”유영은 단호한 표정으로 친구에게 말했다. 소은지가 나서주는 건 고맙지만 더 이상 그녀와 강이한의 마찰을 두고볼 수 없었다.소리를 들어보니 어디 사람이라도 칠 것 같은 기세였다.그가 화가 나면 어떻게 되는지 유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럼 너는?”소은지는 화도 나고 친구가 걱정스러웠다.“내가 해결할 수 있어.”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그녀도 쌓인 화가 많았다. 그는 여기까지 찾아와서 화를 낼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는 방으로 들어갔다.쾅쾅!유영이 현관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바깥에서는 요란하게 문을 걷어차고 있었다.문을 열고 나왔던 이웃들도 그의 기세에 밀려 다시 집으로 도망가 버렸다.유영이 문을 열었다.남자가 싸늘한 얼굴을 하고 복도에 서 있었다.시선이 마주친 찰나, 남자는 유영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이게 무슨 짓이야?”“이유영!”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강이한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그에 상반되게 유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마치 이번 일은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했다.강이한은 그녀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지음을 몰아세우는지 믿기지 않고 그만큼 분노가 치밀었다.갑자기 손목에서 통증이 전해지고 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를 질질 끌고 밖으로 향했다.유영은 바닥에 무릎이 꿇린 상태로 질질 끌려갔다. 살결이 바닥과 마찰하면서 쓰라린 고통이 찾아왔지만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유영의 두 눈에도 진한 분노가 서렸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서야 유영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으스러지게 그녀의 팔목을 꽉 잡고 있었다.“강이한, 이거 놔!”분노한 유영이 소리쳤다.신경 써서 드라이한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강이한에 대한 사랑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유영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아무리 깊게 사랑한 사이더라도 한번 마음이 돌아서면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 법이다.두 사람이 병원에 나타나자 무수히 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하지만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대는 남자를 보고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유영은 핸드폰을 꺼내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오늘밤 기자들 동향 잘 살피고 있어요. 그 어떤 소문도 흘러나가서는 안 돼요.”“누가 또 이상한 기사를 올리면 내일 당장 그 회사를 사냥할 거예요. 입을 잘못 놀리는 인간들은 모두 청하시에서 내쫓으세요.”유영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차가웠다.강이한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 눈빛은 차가웠다.저런 대담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만큼 힘이 생긴 걸까?작은 체구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차가운 포스가 풍기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왕좌에 오른 여왕처럼 위풍당당했다. 키는 그가 더 컸지만 왠지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알겠습니다.”수화기 너머로 조민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실 퇴근하기 전에 모든 준비는 이미 끝났다.한지음이 자해까지 해가며 유영을 가해자로 몰아가려 했기에 기자들의 여론공세가 곧 시작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그리고 유영은 이런 치졸한 수법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강이한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참 여러모로 대단해.”마치 강이한이 아랫사람을 굴릴 때 자주 쓰던 말투와 매우 흡사했다. 과거의 온순하고 이해심 많던 세강의 안주인은 지독하게 차갑고 거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유영이 냉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난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당신들 세강은 요즘 이미지가 많이 추락했더라?”세강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눈빛에 살기가 스쳤다.동교 사업을 그녀가 모두 앗아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때부터 세강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가둬놓고 키우던 새장 속 새가 이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가졌을 줄은 몰랐다.
“내가 왜?”유영이 싸늘하게 물었다.이 여자는 그녀가 무릎을 꿇을 가치가 없는 여자였다.그녀는 가슴에 사무치는 실망감을 안고 남자를 바라봤다.예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한지음도 여자의 싸늘한 기운을 느끼고 어깨를 움찔 떨었다.하지만 속으로는 유영에 대한 분노가 부글부글 꿇고 있었다.넌 뭐가 그렇게 잘났지?너도 기댈 곳 하나 없는 고아잖아!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지?유영과 강이한은 팽팽하게 대치했다.병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저기압이 되었다.“이한 오빠.”한지음이 강이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그런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더욱 동정심을 유발하게 만들었다.유영은 싸늘한 눈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강이한은 여자가 옷깃을 단단히 잡고 있는데도 뿌리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유영과 결혼한 뒤로 강이한은 다른 여자들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다.그런 의미에서 한지음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볼 수 있었다.유영은 입가에 진한 비웃음을 머금었다.“꿇으라고 했어!”강이한은 피식거리고 있는 유영을 매섭게 노려보며 다시 소리쳤다.“그만해요.”한지음은 더 힘을 주어 강이한을 잡아당겼다.하지만 강이한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부러 강이한의 몸을 더듬으며 유영을 도발하고 있었다.‘저건 고의야!’한지음은 유영이 강이한 앞에서 이성을 잃고 추악한 모습을 보이기를 바랐다.하지만 유영은 그녀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유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 모든 동작들을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그 표정이 강이한의 분노를 자극했다.“너 감방 가고 싶어?”남자가 끝내 숨겨둔 패를 드러냈다.그의 손에는 나서원이 가져다 준 증거가 있었다.예전에는 그녀가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괴롭고 긴장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지금은 당장 유영을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유영이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한지음에게 사과하기를 바랐다.하지만 유영은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그는 눈앞에 있는 전처가 얼마나 자존심 강
결국 송연미는 사람들에 의해 떠나야 했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송연미의 눈빛은 무거움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소은지의 마음도 잠시 흔들리고 말았다.그 순간 소은지는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송연미가 차갑고 냉정한 가면 뒤에 감춰 두었던 것이 무엇인지를.억지로 맺어진 인연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것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닿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바뀔 수 없는 진실이었다.여자의 운명은 때로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특히 자신의 미래조차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현우는 묵묵히 소은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소은지를 놓아주던 현우의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현우가 서류를 찢으려는 찰나, 소은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잠깐만요.”“...”현우는 동작을 멈추고 소은지를 바라보았다. 소은지는 조용히 다가가 서류를 천천히 빼앗으며 말했다.“어차피 서명해야 할 서류잖아요.”“소은지 씨!”“엔데스 가문의 상황이 어떨지는 제가 잘 모르지만, 회장님의 죽음조차 이 싸움의 끝을 맺지 못했다는 걸 보면 일이 간단치 않다는 건 분명해요.”소은지는 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소은지의 가슴은 짓눌린 듯 아려왔다.현우는 소은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당신...”“엔데스 명우가 지금 당신과 맞서고 있는 거잖아요, 맞죠?”그 말이 떨어지자, 현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소은지는 그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송연미가 소은지에게 했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엔데스 가문의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야 했다.그리고 소은지는 그로 인해 자유를 완전히 되찾을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엔데스 회장은 끝내 어떤 결론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그렇게 가문은 단번에 분열되었고 문서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버렸다. 전기봉은 행방불명 상태였고 나머지 서류의 절반은 강이한의 손에 있
송연미에게는 더 이상 고귀함도 우아함도 냉정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인내심은 그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지금의 송연미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현우가 돌아왔을 때, 그의 몸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만이 흘렀다. 오늘 장례식에서 벌어진 일이 그 원인이었음은 분명했다.송씨 가문 또한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기에 송연미가 이곳에 나타난 순간 현우의 눈빛은 한층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두 여자의 생각을 단숨에 현실로 끌어냈다.송연미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보았다.현우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오더니 탁자 위에 놓인 이혼 합의서를 보자 눈빛이 한층 더 서늘해졌다.송연미의 가슴은 긴장으로 꽉 조여졌고 소은지의 얼굴도 금세 창백해졌다.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송연미를 향해 입을 열었다.“내가 경고했지. 반산월에 오지 말라고.”현우의 말투는 냉혹하기 그지없었다.송연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핏기 없던 송연미의 얼굴은 그의 말에 더욱 하얗게 질려 갔다. 마치 얼어붙은 듯 멍하니 현우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현우는 소은지를 보호하려는 걸까? 오늘 장례식에서 무슨 일이 터질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걸까?엔데스 가문의 모든 이가 참석했음에도 현우는 소은지를 가지 못하게 했다. 소은지를 보호하기 위해 송연미조차 반산월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것인가? 모든 것이 변했다.현우는 이제 소은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은지는 현우에게 이토록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송연미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품에 안긴 소은지를 보며 송연미의 눈에는 깊은 고통과 실망이 서려 있었다.“이봐.”“일곱째 도련님, 무슨 일입니까?”“넷째 사모님을 집으로 바래다줘.”현우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소은지를 더욱 단단히 품에 안았다.그 무심한 행동이 송연미의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는 비수처럼 느껴졌다.숨이 멎을 듯 아팠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버렸
엔데스 명우가 어떤 사람인지 파리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소은지는 명우에게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현우와의 관계도 본래부터 경쟁적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소은지의 일이 여섯째 도련님과 엮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둘 사이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가능성이 컸다.“소은지, 넌 무슨 자격으로 현우에게 보호받고 있는 거야?”송연미는 이성을 잃은 듯 소은지를 향해 소리쳤다.현우는 소은지를 보호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상호 관계가 현우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여섯째 도련님은 원한을 쉽게 잊는 사람이 아니었다.이런 상황 속에서 일은 점점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다.“...”보호한다고? 소은지를? 현우는 대체 왜 소은지를 보호하고 있는지, 소은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송연미는 몰랐다. 그러나 송연미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두면 안 됐다.“소은지, 제발 부탁이야. 한 번만이라도 내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될까? 나는 이미 그들에게 한 번 해를 입었어. 더 이상 현우까지 그들에게 해를 입게 할 순 없어...”송연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온몸이 떨렸다.송연미가 엔데스 운빈과의 결혼에서 받았던 심리적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다.“...”갑자기, 이 여자가 보여주는 히스테리가 그렇게 미워 보이지만은 않았다.송연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너와 여섯째 도련님 사이의 일은 나는 다 알고 있어. 소은지, 여섯째 도련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파리에서 멀리 떠나줘, 안 될까?”송연미의 관점에서는 소은지가 현우의 곁에 있으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송은지가 현우의 곁에 있는 한, 그건 현우에게도 큰 상처가 될 터였다.“내가 떠난다고 해서, 그들 사이의 원한이 사라질 것 같아?”“하지만 네가 현우 곁에 있으면, 여섯째 도련님은 모든 책임을 현우에게 돌릴 거야. 이걸 정말 모른단 말이야? 그들은 이미 중요한 순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소은지는 그저 얼어붙은 듯한 눈빛으로 송연미를 바라보고 있었다.송연미는 그런 눈빛에도 전혀 압박을 느끼지 않는 듯, 담담히 말했다.“네가 진심으로 현우를 사랑한다면, 지금 무엇이 그를 위하는 것인지 알아야 할 텐데.”“처음 너를 봤을 때, 꽤 침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소은지가 갑자기 말했다.“...”침착?그때는 위화영이 무슨 말을 해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었다.하지만 지금 보니, 사실 그때는 반박할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았다. 막상 반박할 기회를 잡기만 한다면, 송연미의 말은 그 누구보다도 날카로울 것이었다.송연미는 그저 차갑게 소은지를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널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날 너무 몰아붙이지 마, 알겠어?”몰아붙인다니!소은지는 차가운 시선으로 송연미를 바라보았다.송연미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넌 파리의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이 파리의 이면에 어떤 흐름이 있는지도 전혀 모르잖아.”“...”“여기서 헛되이 상처받을 필요 없잖아.”강경하게 나왔더니 소용이 없다고 여겨 이제는 부드럽게 나오는 건가?하지만 아마도 송연미는 소은지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설령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가 그런 관계라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도발당하면 마음속에 약간의 불쾌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너 착각하지 마.”결국 소은지는 송연미에게 그렇게 답했다.어떤 것들은 변한다. 특히 사람의 마음은 더 쉽게 변한다.하지만 송연미는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고 오히려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고 있었다.“서명하지 않겠다는 거야?”송연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왜? 더 강한 수를 쓸 생각이야?”소은지는 태연히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런 소은지의 태연함은 분명 송연미를 더욱 격분하게 했다.“소은지, 난 네가 파리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렇게 곱게 설득하려는 거야. 그런데 너는 정말로 고마운 줄
이유영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그 이름이 나오자 현우의 눈빛에는 더욱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소은지는 그런 현우를 묵묵히 바라보았다.“...”그렇다면 송연미는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현우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소은지에게 말했다.“이유영 씨는 어떤 충격도 견딜 수 없어요. 지금 박연준과 강이한이 이유영 씨의 곁을 지키고 있는 걸 보면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유영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아마도 유영 씨의 두 눈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 같아요.”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유영이 정말로 암흑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소은지의 가슴을 짓눌렀다.2년 동안, 엔데스 명우의 학대로 인해 소은지는 일주일 동안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소은지는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생생히 떠올렸다.그 일주일 동안 소은지가 겪었던 무력감과 절망은 평생 따라다닐 상처가 되었다. 소은지는 자신의 삶에서 빛을 볼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그때부터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증오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둠은 공포스럽고 숨 막혔다.“그럴 리가요.”이유영의 두 눈이 시력을 잃어간다는 말을 들은 소은지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박연준과 강이한 사이도 이번 한판이 마지막이겠지.”현우의 말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소은지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만약 이유영의 두 눈이 정말로 회복되지 못한다면,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소은지는 암흑 속에서의 무력함이 얼마나 참혹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해친 원수조차 볼 수 없다는 그 사실은 숨 막히는 고통이었다....엔데스 가문은 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장례식 당일, 엔데스 가문의 모든 사람이 참석했지만, 오직 소은지만은 그 자리에 없었다.반산월에 머물던 소은지는
현우는 망설이다가 말했다.“엔데스 가문은 심연과 같아요. 그 심연의 문턱에 서서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는 게 좋아요.”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심연... 자신의 가문을 심연이라 부르다니. 현우가 생각하는 엔데스 가문은 도대체 얼마나 깊고 어두운 곳일까?소은지는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어두운 방 안에서 현우의 손에 들린 담배의 불꽃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불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그것은 현우의 고독을 의미하고 있었다. 많은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우가 느낀 것은 오직 고독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현우는 과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엔데스 가문을 떠나 황가 국제 그룹에서 단순한 보좌관으로 숨어들었겠는가?그 당시, 현우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아들이 평범한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현우는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숨기며 세상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태생은 결국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심연이라니...”소은지는 그 단어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며 중얼거렸다.현우야말로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두려운 존재처럼 보였다.소은지는 한때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가족도 없고 엔데스 명우가 소은지의 모든 것을 망쳐버렸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 현우를 보며 소은지는 깨달았다. 가짐으로 인해 더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현우에게는 거대한 가문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배경 속에서 더 큰 고통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심지어 엔데스 노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현우의 얼굴에는 단 한 점의 슬픔도 찾아볼 수 없었다.“앞으로는 대저택의 사람들과의 만남은 피하세요.”현우가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말했다.“최근 자주 찾아오더라고요.”소은지가 언급한 사람은 바로 송연미였다.현우가 엔데스 가문으로 돌아온 이후, 송연미는 더 이상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송연미를 이야기할 때, 현우의 눈빛
소은지와 엔데스 현우의 관계는 철저히 계약으로 엮여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자리에서도 소은지가 굳이 현우와 동행할 이유는 없었다.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선을 그어 외부의 불필요한 관심을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엔데스 현우는 소은지를 미묘하게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현우는 소은지가 예상외로 순순히 나오는 모습에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왜 그래요?”“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이 모든 일이 언제 끝나는지 알고 싶어요.”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내부 사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엔데스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금, 곧 새로운 후계자가 결정될 것이라 생각했다. 소은지는 그 결과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만약 엔데스 명우가 이긴다면요?”현우는 소은지의 손을 잡았다.현우는 소은지의 손바닥에 맺힌 차가운 땀을 확연히 느꼈다.소은지가 엔데스 명우의 승리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졌다.소은지와 현우의 관계는 사실상 소은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대결로 비쳤다. 현우의 말을 듣고 소은지는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출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이렇게까지 와서도 어쩔 수 없는 건가요?”소은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물었다.소은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무거움이 담겨 있었다. 소은지는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현우는 미소를 지었다.특히 소은지의 눈빛에 담긴 불만을 보며 현우는 소은지가 엔데스 명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다.“그게 그렇게 쉽겠어요?”현우는 활짝 웃으며 소은지를 안고 안쪽으로 데려갔다.소은지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엔데스 명우를 파리에서 떠나게 만드는 건 쉽지 않지만, 이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예요!”“그래서 지금 대체 어떤 상황인가요?”소은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눈앞의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소은지는 엔데스 회장이 떠난 뒤 모든 것이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재 남겨진 것은 문서라는 단어뿐이었다
이유영은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보기에 너희 둘은 똑같은 부류야. 다 좋은 사람이 아니야.”이유영의 비웃음은 강이한의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이유영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연서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이유영은 두 사람 중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강이한의 가슴은 미어지듯 아팠다.이유영이 무슨 말을 해도 그 말 하나하나가 강이한의 가슴에 상처를 새겼다.“전기봉의 소식이라니, 하하!”그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지, 이유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유영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번에는 강이한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사실, 이유영은 이미 강이한의 선택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이 과거 이온유 사건 때처럼 반복될지 확인하고 싶었다.그의 행동이 과거 이온유 때와 같을지 알고 싶었다.이온유가 위급했던 그때, 강이한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이유영을 떠났다.“서주의 모든 것은 네가 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아, 유영아. 나를 성급히 판단하지 마.”이유영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강이한은 신중히 말을 꺼냈다.이유영이 서주의 복잡한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특히 지금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욱 알 길이 없었다.강이한은 자신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이유영이 극단적인 결론을 내릴까 봐 걱정했다.예전 이온유의 사건처럼.“흥!”이유영이 코웃음 쳤다.강이한의 말을 듣기 전에, 이유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기봉의 소식을 듣고 나서 강이한이 어떻게 행동할지.이유영은 전기봉이 강이한의 손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강이한의 진심을 확인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이유영은 차갑게 대답했다.사실, 강이한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선택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유영의 차가운 말투는 강이한을 더욱 아프게 했다.너무 쓰리고 아렸다.병원에서 돌아온 후에
처음엔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데려갔다니, 그는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그 아이가 그의 딸이 아니더라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 아이는 이유영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생명이었다. 강이한에겐 그 아이에게 손댈 자격조차 없었다.그 며칠은 아이와 이유영 모두에게 끔찍한 악몽이었다.이유영은 지금도 병원을 헤매며 미친 듯 아이를 찾았던 날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밤낮없이 걱정하며 엄마로서 견딜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이유영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결국, 당신은 아이가 당신 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온유를 살리기 위해 그 아이를 이용하려고 했어.”어떤 이유를 들어도 강이한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었다.결국, 마지막 순간에야 강이한은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것과 모든 진실을.하지만 그런데도 강이한은 끔찍한 선택을 했다. 그래서 이유영은 강이한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그때, 그 아이가 울면서 밥도 먹지 않고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었을 때... 강이한, 정말 그 순간조차도 넌 아무런 동정심도 못 느꼈어?”“...”그 말은 강이한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왔다.숨이 턱 막히며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동정심이 없었을까?사실 그도 동정심을 느꼈다.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강이한이 느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그 아이가 소중했고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미어졌다. 그러나 이온유의 위급한 상태는 강이한을 잔인한 선택의 기로로 몰아넣었다.“이유영, 나는...”강이한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이유영의 앞에서는 어떤 말도 무의미했다.그 사건은 지금도 강이한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유영뿐만 아니라 강이한 역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이유영은 갑자기 화제를 돌려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