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있었냐는 이유영의 질문에 신지수가 짧게 대답했다.“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강이한 씨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후로, 박연준 씨에게 많은 것을 넘기기 시작했어요.”우천시에서 돌아온 뒤부터 박연준에게 넘기기 시작했다?그렇다면 그들의 거래는 대체 뭐였을까?이유영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저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끊겠습니다.”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이미 지나간 일인데,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유영에게 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다.자꾸 과거 일에 읽히는 이유가 너무 편하게 살아와서일까?“네.”신지수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고 통화가 끝났다.하지만 이유영의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전기봉의 정보 때문에 우천시를 떠난 것이 아니라면,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떠났을까?그리고 서주로 돌아와서는, 왜 또...신지수의 말을 곱씹으면서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뭔가 큰 음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정말로 음모일지도 모른다.어쨌든, 그 두 사람은 연서를 위해 오랫동안 계략을 꾸며왔다.이번에 이렇게 큰 움직임을 보인 것도 무슨 속셈이 있는 게 분명했다. “쾅!”“끼익!”갑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차가 급정거했다.다른 차를 들이받고 만 것이다. 문이 열리고, 벤츠 지바겐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차 문이 열리고 다시 닫기는 순간, 이유영은 잠깐 엔데스 가문의 셋째 아들, 엔데스 신우를 본 것 같았다.‘아니, 그럴 리가 없어.’엔데스 신우에게서 저렇게 차가운 기운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방금, 그 남자의 윤곽이 주는 냉랭한 분위기를 똑똑히 보았다.엔데스 가문의 셋째 아들은 바보라는 소문이 돌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분명 착각이겠지.’그저 우연히 한 번 본 얼굴이니 순간적인 오해였을 것이다.‘그래, 분명 착각일 거야.’바보라고 불리는 그가 그런 분위기를 풍길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면 설마 그 소문들이 모두 가짜란 말인가?.
엔데스 가문의 일은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이유영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찡했다.“역시 엄마는 대단한 사람이야.”“당연하지.”임소미는 혀를 차며 핀잔을 주면서도 눈길만큼은 한없이 따뜻했다.하지만 연애 문제만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둘은 서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렇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향해 품고 있는 증오를 떠올리면, 서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유영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임소미는 생각했다.그렇기에 임소미는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월이한테 가볼게.”이유영이 말하자, 임소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유영이 위층으로 올라가고 임소미는 혼자 남아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휴...”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에 대해 도저히 어떻게 설명해야 몰라 답답한 심정만 내비쳤다.지금 이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이유영이 방으로 들어오자 월이는 젖병을 문 채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졸린 눈을 깜빡이는 모습은 무척 사랑스러웠고 이유영은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곁에 있는 월이의 모습을 보니 더없이 마음이 말랑해졌다.“졸려?”“응, 엄마랑 같이 잘래.”“그래, 옷 갈아입고 올게.”이유영은 옷장으로 가서 잠옷을 꺼내 입었다.방에서 나오니 월이는 이미 스르르 잠들어 있었다. 늘 그렇듯, 이유영이 곁에 있으면 유난히 잠드는 속도가 빨랐다.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눈빛이 부드러워진 이유영은 조심스레 침대에 올라가 월이를 품에 안았다.그 순간,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내 사랑...”속삭이듯 말하며 품 안의 작은 체온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월이는 이유영의 품에 파묻힌 채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그의 고른 숨소리를 듣던 이유영은 문득 깨달았다.월이의 작은 코가 유난히 그 사람을 닮았다.이제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그 사
이유영은 늘 어둠 속에서 멍하니 살아왔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묻지 않았다.그때 이유영이 무슨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절이었다.여진우의 물음은 곧 이유영이 이제 완전히 회복했다는 뜻이었다.“회사에 나가서 일해야지. 근데 난 더 이상 경영은 하고 싶지 않아.”그 말에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과거, 여진우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로열 글로벌의 모든 무게가 이유영의 어깨를 짓눌렀다.특히 그때는, 정유라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 더더욱 머리가 아팠다.결국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그녀에겐 오빠가 있고 그 덕에 선택지도 훨씬 많아졌기에 더 이상 예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뭔가 하긴 해야지.”여진우가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이유영은 곧장 물었다.“그럼 뭐 하면 좋을 것 같아?”“네가 하고 싶은 건?”“네 비서!”그 말에, 여진우는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그건 아무리 봐도 재능 낭비였고 아버지가 이유영을 키우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비서를 하겠다고?여진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야망이 없네.”생각해 보면 처음으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자신이 원하는 걸 할 자유도 없는 건가?사실 이유영은 높은 자리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런 위치에 있으면 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무언가를 감당해야 한다면 그럴 가치가 있을 때 해야 하는 법이다.“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몇 개 있다던데, 내가 디자인해 볼까?”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예전, 청하시에서 로열 글로벌로 정식 복귀하기 전, 오로라 스튜디오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그래서 디자인 분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여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사람은 무언가 할 일이 있어야
이유영은 앞에 놓인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후에 시간 있어?”“왜?”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흰색 실내복을 입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엄격함은 타고난 것이었다.이유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하려고.”차갑고 냉담한 음성이 떨어지자, 맞은편의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순간적으로 흔들린 눈빛이 그의 동요를 말해주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이내 평온을 되찾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유영의 그릇에 정성스럽게 익힌 소고기를 집어주며 말했다.“장난치지 마, 응?”마치 말썽꾸러기 아이를 다독이듯 다정한 목소리였다.그러나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걸. 마치 그때의 강이한처럼.이유영은 강이한의 세계에서 한지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을 때, 미친 듯이 이혼을 요구했었다.그때는 가진 것도 없었지만 단호하게 행동했다.하지만 지금은? 지금, 그녀의 뒤에는 정씨 가문이 있다.이유영의 결심은 박연준에게 거대한 거리감을 안겨주었다. 몸이 멀어지는 건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마음이 멀어지면 어쩔 수 없었다.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내가 너랑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박연준은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 난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거.”이제는 화를 내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둘 사이에는 감정의 균열이 깊어져 있었다.박연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나랑 이혼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과거, 강이한과 이혼하려 했을 때, 강이한은 이유영의 목을 조르며 물었다.“날 떠나면 어떤 결과가 올 것 같아?”전생이든 현생이든, 그 질문은 반복되었다.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이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은 그의 곁에 남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리고 지금, 박연준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마치 이유영이 하는 모든 선택이 신중해야
정국진은 오랫동안 엔데스 가문을 피해 왔다. 하지만 피하는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엔데스 가문이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 든다면 상상도 못 할 갈등이 벌어질 것이다.어떻게 분석해 봐도 지금은 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단호한 모습이었다.정씨 가문은 엔데스 가문과 엮이길 원치 않고 이유영과 박연준 역시 마찬가지다.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분위기에서 이유영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박연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적어도 이 시기가 지나서 이혼하자, 응?”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이유영은 박연준이 말하는 '이 시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의미였다.하지만 지금, 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사라졌고 전기봉도 행방불명인 상태에서 일이 마무리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그 도장이 누구에게 발견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엔데스 가문의 당주 자리는 단순히 도장이나 문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명문가들의 지지도 필요했다.즉, 지금 이 상황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다.이유영은 박연준을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정씨 가문이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해?”“그럼 너는?”견뎌낼 수 있을까?이유영은 정씨 가문을 그 소용돌이에 끌어들이려 하는 걸까?칼과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그녀의 감정이 어떠한지 알 수 있게 되자 박연준은 웃었다.그 눈빛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담겨 있었다.그는 이미 이유영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선택의 이유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이유영은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입을 열었다.“너랑 그 사람, 대체 무슨 거래를 한 거야?”“누구?”뜻밖의 질문에 박연준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하다 곧 깨달았다.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너는 무슨 거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박연준은 되묻으며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이유영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알겠어.”이유영
그가 보고 싶었던 상황이었다.강이한과 이유영이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고 어쩌면 계획했던 일인지도 몰랐다.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자 숨이 막혔다.어쩌면 연서에 대한 일을 몰랐다면 좀 더 담담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스스로에게 강이한이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라고 수없이 되뇌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모든 것이 달랐다.“걱정하지 마. 강이한은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색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이유영이 낮게 되물었다.“응,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확신을 담은 목소리가 무겁게 내뱉어졌다.그들은 오랫동안 싸워왔지만 동시에 너무 오랫동안 얽혀 있었기에 서로의 속마음을 너무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강이한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절대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이유영에게 보일 리 없다는 것을.절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이유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박연준의 눈에 스치는 슬픔을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다.이유영의 차갑고 어두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그렇게 숨 막히는 식사가 계속되었다.식사 후.이유영이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박연준이 입을 열었다.“사흘.”“뭐라고?”“내가 있는 사흘 동안, 너는 풍산 그룹에 머물러야 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이미 불쾌했던 눈빛이 그 말과 함께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너무 지나치게 굴지 마.”“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아주 민감해. 착한 사람 하나 없어. 그들이 기회를 잡지 못하게 하려면 사흘 정도는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니잖아. 아니야?”“나한테는 너랑 같이 있는 일분일초도 숨 막혀.”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고 답답했던 박연준의 가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깊이 내려앉았다.‘숨 막힌다고?’박연준은 그제가 알았다. 강이한이 말했던 '막막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어둠 속에서 힘겹게 버
얼마나 오래됐을까?이 이름을 마주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강이한과 결혼한 지난 3년 동안, 이 이름은 이유영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며 무엇을 하든 만족하지 못했고 이유영을 끝없이 깎아내렸던 이름이었다.감옥 화재 이후로 이유영은 진영숙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것만 같았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유영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었으니까.강이한과의 관계가 끝나면서 그 사람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진영숙이 나타난 것이다.대체 왜?“왜 온 거예요?”이유영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도 진영숙과 관련된 이야기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선생님이 실종되었대요.”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 그 소식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진영숙이 모를 리 없었다.그리고 결국, 진영숙은 미쳐버릴 듯 강이한을 찾아 헤매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이유영은 평생 진영숙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진영숙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약 강이한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진영숙은 영원히 이유영을 찾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알았어요.”짧은 대답을 남기고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원래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이유영은 뒤돌아 계단 입구를 바라보았다. 박연준은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있었고 혼자 남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이유영은 결국 발길을 돌려 다시 반산월로 향했다....한편, 정씨 가문에서.진영숙은 차가운 눈빛으로 임소미를 바라보았다.“돌아가세요. 그녀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겁니다.”“사모님, 당신도 한 아이의 어머니니까 지금 제 마음을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진영숙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진영숙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유영의 정체를 알았고 강이한과의 관계에서도 조용히 물러났다.그렇게 조용히 여생을 보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들이 서주에서 실종
진영숙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을 만나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이유영을 만나겠다고?이유영을 만나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누구 탓일까?결국, 이 지경이 된 건 다 진영숙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유영이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꺼져!”임소미는 단호하게 내뱉었다.임소미는 알고 있었다. 진영숙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지금 이유영에게 그 모든 일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를.이제 와서 다시 그 악몽 같은 시간을 들추게 할 순 없었다.진영숙과 그 무리는 이유영에게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존재였다.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기에 어떤 이유로든, 이유영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그때, 진영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사모님!”“당신은 늘 밑을 짓밟고 위로 올라가려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유영이를 찾겠다는 거지?”진영숙은 할 말을 잃었다. 과거를 과거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얼마나 무시하고 업신여겼던가.임소미는 그 심정을 깨닫게 해 줘야 했다. 이제 진영숙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진영숙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임소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할 말이 없었다.진영숙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결국, 그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제발, 단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목소리는 애써 억누른 듯했지만 간절함이 묻어났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다시 말을 이었다.“저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알고 계시잖아요!”그래, 아무것도 없었다.아들은 사라졌고 강서희는 감옥에 갇혔다.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강서희를 꺼낼 방법이 없었다.임소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그 모든 걸 잃은 게 내 탓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동정심을 가질 이유도 없지, 안 그래?”“왜
“배준석을 데려와.”배준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안과 전문의였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오른 인물이자 강이한과는 말할 것도 없이 깊은 친분이 있었다.“알겠습니다.”“그리고 수술할 때, 강이한이 용성시에 있었는지도 확인해.”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진영숙의 마음은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알겠습니다.”남기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진영숙은 소파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강이한이 사라지기 전, 이유영과 함께 우천시에 가서 진료를 보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곳의 염 선생이 이유영의 눈을 치료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 누구도 지금 진영숙의 마음속 상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특히 지금 이유영의 눈이 치료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의심을 더욱 깊게 했다.어머니로서 그런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이유영이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든 진영숙은 강이한이 이유영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강이한이라면 이유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오늘, 이유영이 청하시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진영숙의 마음은 피가 더욱 아파졌다.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그 아이는 정말로 강이한을 똑 닮았다....한편 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엔데스 가문의 방문객들을 침착하게 맞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예기치 않게 여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로 분위기가 얼어붙은 듯 긴장감이 맴돌았다.특히 여진우에게서 풍기는 것은 단순한 차가움 이상의 것이었다.소은지는 말없이 찌푸린 눈으로 여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조용히 소은지를 응시했다.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무슨 일이에요?”“정씨 가문이 엔데스 가문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는 건 소은지 씨도 알고 있죠?”“알아요.”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세상 모든 이가 아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두 사람의 10년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걸까? 사랑이라고 불렀던 그 시간은 대체 어디 갔을까?’이유영은 풍산 그룹에서 나오기 전, 진영숙에게 아이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진영숙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시윤이 방으로 들어섰다.“사모님.”“왜... 도대체 왜...”진영숙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정은 이미 한계를 넘어 통제 불능 상태였다.시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에 대해 그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진영숙 곁에 있었던 이들은 예전에 진영숙과 이유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결국 인과응보라고 여겼다.“이유영에게 다 말했어. 하지만...”진영숙은 여기까지 말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강이한이 끝내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진영숙은 모두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하지만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이유영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강이한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사람 같았다.“사모님, 작은 사모님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어쨌든...”시윤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가 결국 말을 멈추고 진영숙을 바라보았다.과거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진영숙도 이유영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미 모든 대가를 치렀다.하지만 여전히 과거를 놓아주지 않는 이유영이 마냥 이해되지 않았다.‘아무리 미워도 지금 강이한이 사라진 마당에 그 분노를 조금은 억누를 수도 있지 않을까?’과거에 무슨 원한이 있었든 이렇게까지 무심할 일이란 말인가? 강이한은 서주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졌다.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도 여전히 냉정한 이유영의 태도에 진영숙은 마음이 아팠다.“대체 어떻게 해야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까?”‘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왜 박연준의 사람들조차
“강이한은 2년 동안 자신을 가둔 채 보냈어.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지금의 이유영은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이토록 담담한 걸까?심장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걸까?“네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이겨내기 시작했어.”그때를 떠올리자 진영숙은 한층 더 괴로워졌다.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잃은 것 같았다.강이한은 아직도 그 안에 있었고 이건 그가 내린 선택이었다.“강이한은 지금 혼자 그 벌을 받는 거야. 네가 겪었던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겪고 있어. 알기나 해?”이유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그저 자기만 강이한 곁에서 지독한 고통을 겪었다고만 생각했다.하지만 그렇게 뛰어난 강이한이 결국 이유영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끝을 맞았다. 그녀를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었다.이제 그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아무 미동도 없이 모든 것을 보고만 있었다.이 모든 사실을 이유영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진영숙은 생각했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진영숙이 이런 사실을 이유영에게 말한 이유는 그녀가 너무 차갑게만 강이한을 생각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강이한의 실종에 조금의 반응이라도 보여줬으면 했다.강이한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 주길 바랐다.진영숙의 삶은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그녀는 이유영만 편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친듯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것이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모든 걸 다 말했음에도 이유영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건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였어요.”“...”순간 머릿속이 무언가에 부딪친 듯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진영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정하고 차가운 말을 뱉는 사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지금 이 상황에서도 이렇게 냉정할 수
하지만 만약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한지음의 존재는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게 했고 연서라는 사람을 알게 된 이후, 이유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정말이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경고할게요. 제 딸에게 다시는 접근하지 마요. 그 아이는 강이한과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이유영!”진영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그녀의 눈빛 속엔 끓어오르는 분노가 맺혀 있었다.하지만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가 있어?”이유영이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진영숙은 그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무심할 수 있을까?’냉정하다는 말을 들은 이유영의 입가엔 오히려 더 짙은 미소가 걸렸다.‘냉정하다고?’“지금 강이한이 살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는 있어?”진영숙은 또렷하게 힘주어 말했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두 철수한 것에 대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단순한 실종이 아니라 사실상 생사불명이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조차 이유영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할 수 있다니 진영숙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차갑고 무정했다.아무리 돌이라도 오랜 시간 함께 있었다면 어느 정도는 온기가 스몄을 텐데 이유영은 아니었다.강이한이 생사불명인 상황에서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싸늘한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냉정하다고요?”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영숙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의 두 눈엔 오로지 분노만 가득했다.“그럼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생사불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조차 이유영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 시간 뒤, 이유영은 풍산 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진영숙과 마주한 순간, 그녀의 눈빛엔 깊고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뜻밖에도 박연준은 진영숙을 파리에 남겨두었는데 아마도 그녀 스스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진영숙은 싸늘한 눈빛으로 이유영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강이한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손에 들고 있던 컵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영숙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네가 강이한의 딸을 낳았다니 믿기지 않는구나.”“...”이유영은 진영숙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차디찼고 이어지는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왜요? 뱃속에서 죽이지 못해서 화가 났어요?”그 말에 진영숙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은 슬픔이었다.아주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듯 쓸쓸함이 스며들었고 이유영을 바라보는 눈빛엔 더 이상 분노가 없었다.남은 건 흩어진 슬픔뿐이었다.이유영의 싸늘한 태도 앞에서 진영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고개를 돌리며 낮게 말했다.“우리 애 어디 있는지만 말해줘.”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영숙은 여전히 강이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이유영뿐이라 믿고 있었다.박연준이 사람들을 풀어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진영숙도 기약 없는 기다림만 계속됐다.박연준은 그녀와 함께 서주로 가자고 했지만 진영숙은 끝내 따라나서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모른다고 했잖아요.”“정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진영숙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뭐라고요?”‘무엇을 의심하란 말이지?’“내가 들은 바로는 강이한이 너를 우천시로 데려갔던 건 염 선생을 찾기 위해서였대. 그땐 너도 몰랐겠지.”“...”“그런데 네 수술 시기에 맞춰 각막이 정확히 준비돼 있었어. 모든 게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이 상황을 정말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그 말에 이유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
여진우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냉정함이 담겨 있었다.이유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묻지 말라고?’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은지에 관한 것만큼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여진우는 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절대 단순하지 않아.”늘 그렇듯 그들은 단순한 적이 없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은지는 이제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야.”그 말에 이유영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소은지가 엔데스 가문의 사람이라고?’이미 어지러웠던 머릿속은 그 말 한마디에 더욱 복잡하게 뒤엉켰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오늘 송씨 가문 소식은 들었어?”“들었어.”이유영의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그 소식을 접한 뒤, 파리 전체가 마치 안개 속에 잠긴 듯 모든 게 흐릿하고 불길했다.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여진우의 품에 안긴 순간, 이유영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기운에 짓눌렸다. 그의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을 느낀 이유영은 무언가 정말로 큰일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긴 침묵이 흐른 후, 이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찾았어?”지금 그 도장과 문서는 엔데스 가문 사람들에게 극도로 민감한 존재였다.그 하나가 모든 걸 좌우할 수도 있었다.도장 이야기가 나오자 여진우는 그녀를 더 꼭 안아주며 낮게 말했다.“아무 일 없으면 곧 나올 거야.”그 말은 다짐처럼 들리면서도 동시에 위로 같았다. 그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 이유영도 잘 알고 있었다.잠시 뒤, 여진우는 자리를 떴고 정국진도 오늘 집에 없었다.백산 별장에는 임소미와 이유영, 그리고 조기 교육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월이만 남아 있었다.월이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방 안을 돌아다녔고 그 모습은 한없이 밝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예전엔 조기 교육 센터에 가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운 듯 아침마다 스
남기가 방 안으로 들어서서 조용히 소은지를 바라보았다.소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오늘은 몇 명이나 더 찾아올 것 같아요?”단순한 질문 같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탐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남기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지금으로서는 일곱째 도련님 쪽에서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말뜻은 분명했다. 소은지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하라는 경고였다.소은지의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가능하다면 이렇게 얽히고설킨 일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이 늪으로 끌어들인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엔데스 명우. 그 이름이 떠오르자 소은지의 머릿속에는 그의 그림자가 다시 어른거렸다.송연미가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소은지는 조용히 물었다.“남기 아저씨, 지금 제가 떠난다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요?”송씨 가문의 결정을 떠올리자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현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욱 뚜렷해졌다.남기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일곱째 도련님은 송연정 아가씨와 일절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요?”‘그렇다면 송연미가 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소은지가 생각에 잠기자 남기가 말을 이었다.“일곱째 도련님은 언제나 눈치가 빠르십니다. 송씨 가문과 선을 그은 걸 보면 뭔가 그 속셈을 알아보신 듯합니다.”“...”“그리고 지금 사모님을 떠나게 하지 않는 이유는 사모님이 이 자리를 지켜주셔야 다른 사람들이 넘보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물론입니다.”남기의 말에 소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우천시에 있었을 때,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며느리 자리를 노리는 가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송씨 가문이었다.예전엔 현우를 지지하는 송씨 가문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오늘 송연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자 송씨 가문 회장님의 인품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그 사실을 인식하자 오히려 마
사실 모든 기회는 그녀가 온갖 노력을 다해 엔데스 운빈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낸 그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씨 가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왜 송연정을 선택하면서도 자신은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걸까?’처음엔 그 이유가 운빈과의 관계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느닷없이 엔데스 신우와의 혼사를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송연미는 문득 깨달았다.그 모든 결정의 이면엔 현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결국 현우의 태도가 아버지의 선택을 바꿔 놓은 것이다.“현우를 만나야겠어.”송연미는 온몸을 떨며 소은지를 바라봤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왜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현우를 직접 만나서 물어야 했다.차가운 엔데스 가문의 셋째 사모님으로 불리던 그녀는 지금 반산월에서 감정 하나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몇 년 전, 현우가 파리를 떠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그 오랜 기다림 끝에 현우가 돌아왔고 그녀는 현우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단호히 끊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네 전화도 받지 않는데, 널 만나고 싶어 할까?”소은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 한마디가 송연미는 더 깊이 무너졌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마음은 그 순간 완전히 부서지는 듯했다.그녀의 눈빛엔 절망이 가득했다.“그래도 현우를 꼭 만나야 해.”송연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현우를 만나야 했다.엔데스 신우와의 결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가문의 결정 앞에서 그녀는 늘 무기력할 뿐이었다.그동안 엔데스 운빈 곁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밤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는지 모른다.그리고 현우가 돌아오자 그녀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정리했다.하지만 지금 현우는 그녀를 차갑게
소은지는 조용히 송연정을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내려놓았다.그녀의 눈빛엔 이미 무거운 결심이 내려앉아 있었다.송연정 역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 속에는 오래 참아온 비통함이 스며 있었고 그 아래엔 날 선 증오가 번득였다.“왜 엔데스 신우랑 결혼시키려는지 알아?”“왜?”‘엔데스 운빈과의 관계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또다시 다른 사람과의 혼사를 이야기한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닌가?’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한때 송연정을 ‘넷째 사모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지금은 어떤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왜냐하면 네가 아직 여기에 있기 때문이야.”소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원래 아버지는 송연정과 현우의 혼사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돌아오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거야.”“...”“넌 우리 아버지가 그냥 호의로 누굴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소은지, 대체 얼마나 더 망쳐야 속이 시원하겠어?”“...”“지금 엔데스 가문 상황이 현우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모르는 거야?”송연정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소은지 탓이라도 되는 듯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실제로 소은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송연정과 현우는 공식적인 자리에 나란히 서곤 했다.소은지는 배경도 권력도 없는 외국 여자일 뿐이었다.파리 사람들은 모두 송씨 가문과 현우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고 가문 안팎의 관심은 오롯이 현우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이혼을 택한 건 단지 운빈과의 관계가 아니라 엔데스 가문 자체와 더 깊은 얽힘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그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현우와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니까.소은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잊었어? 내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유, 바로 너 때문이야.”그 말에 송연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입술이 달싹였으나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나만 없으면 가문이 너를 선택했을 것 같아? 결국 가문이 택한 건 송연정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