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보고 싶었던 상황이었다.강이한과 이유영이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고 어쩌면 계획했던 일인지도 몰랐다.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자 숨이 막혔다.어쩌면 연서에 대한 일을 몰랐다면 좀 더 담담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스스로에게 강이한이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라고 수없이 되뇌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모든 것이 달랐다.“걱정하지 마. 강이한은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색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이유영이 낮게 되물었다.“응,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확신을 담은 목소리가 무겁게 내뱉어졌다.그들은 오랫동안 싸워왔지만 동시에 너무 오랫동안 얽혀 있었기에 서로의 속마음을 너무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강이한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절대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이유영에게 보일 리 없다는 것을.절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이유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박연준의 눈에 스치는 슬픔을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다.이유영의 차갑고 어두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그렇게 숨 막히는 식사가 계속되었다.식사 후.이유영이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박연준이 입을 열었다.“사흘.”“뭐라고?”“내가 있는 사흘 동안, 너는 풍산 그룹에 머물러야 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이미 불쾌했던 눈빛이 그 말과 함께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너무 지나치게 굴지 마.”“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아주 민감해. 착한 사람 하나 없어. 그들이 기회를 잡지 못하게 하려면 사흘 정도는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니잖아. 아니야?”“나한테는 너랑 같이 있는 일분일초도 숨 막혀.”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고 답답했던 박연준의 가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깊이 내려앉았다.‘숨 막힌다고?’박연준은 그제가 알았다. 강이한이 말했던 '막막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어둠 속에서 힘겹게 버
얼마나 오래됐을까?이 이름을 마주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강이한과 결혼한 지난 3년 동안, 이 이름은 이유영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며 무엇을 하든 만족하지 못했고 이유영을 끝없이 깎아내렸던 이름이었다.감옥 화재 이후로 이유영은 진영숙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것만 같았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유영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었으니까.강이한과의 관계가 끝나면서 그 사람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진영숙이 나타난 것이다.대체 왜?“왜 온 거예요?”이유영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도 진영숙과 관련된 이야기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선생님이 실종되었대요.”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 그 소식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진영숙이 모를 리 없었다.그리고 결국, 진영숙은 미쳐버릴 듯 강이한을 찾아 헤매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이유영은 평생 진영숙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진영숙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약 강이한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진영숙은 영원히 이유영을 찾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알았어요.”짧은 대답을 남기고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원래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이유영은 뒤돌아 계단 입구를 바라보았다. 박연준은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있었고 혼자 남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이유영은 결국 발길을 돌려 다시 반산월로 향했다....한편, 정씨 가문에서.진영숙은 차가운 눈빛으로 임소미를 바라보았다.“돌아가세요. 그녀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겁니다.”“사모님, 당신도 한 아이의 어머니니까 지금 제 마음을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진영숙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진영숙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유영의 정체를 알았고 강이한과의 관계에서도 조용히 물러났다.그렇게 조용히 여생을 보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들이 서주에서 실종
진영숙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을 만나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이유영을 만나겠다고?이유영을 만나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누구 탓일까?결국, 이 지경이 된 건 다 진영숙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유영이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꺼져!”임소미는 단호하게 내뱉었다.임소미는 알고 있었다. 진영숙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지금 이유영에게 그 모든 일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를.이제 와서 다시 그 악몽 같은 시간을 들추게 할 순 없었다.진영숙과 그 무리는 이유영에게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존재였다.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기에 어떤 이유로든, 이유영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그때, 진영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사모님!”“당신은 늘 밑을 짓밟고 위로 올라가려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유영이를 찾겠다는 거지?”진영숙은 할 말을 잃었다. 과거를 과거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얼마나 무시하고 업신여겼던가.임소미는 그 심정을 깨닫게 해 줘야 했다. 이제 진영숙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진영숙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임소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할 말이 없었다.진영숙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결국, 그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제발, 단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목소리는 애써 억누른 듯했지만 간절함이 묻어났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다시 말을 이었다.“저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알고 계시잖아요!”그래, 아무것도 없었다.아들은 사라졌고 강서희는 감옥에 갇혔다.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강서희를 꺼낼 방법이 없었다.임소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그 모든 걸 잃은 게 내 탓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동정심을 가질 이유도 없지, 안 그래?”“왜
진영숙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결국 이런 소식이라니.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이유영은 끝없이 진영숙을 몰아세웠다.이유영은 강이한을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지난 몇 년간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복수하려면 저한테 하라고 해요. 제가 유영이를 무시하며 두 사람 갈라놓으려고 했어요.”진영숙의 감정은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였다.그렇다. 두 사람 사이를 원수로 만든 장본인은 진영숙이었다. 하지만 사랑했던 두 사람이 철천지원수가 됐을 때,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임소미는 진영숙을 묵묵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런 결말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영을 봐서 적어도 이유영의 인생에서는 이 모든 것이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아니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 저한테 복수하지 않았잖아요.”진영숙은 울먹이며 말했다.이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오직 강이한만 무사하다면 어떤 결과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임소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복수라니?“이제 보니 우리와 생각이 너무 다르네요.”복수라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이유영이 강이한에게 한 건 결코 복수가 아니었다.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내 아들은 잘못한 게 없어요...”진영숙은 임소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고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이유영에 관한 일에서 강이한은 잘못이 없었다. 단 하나, 그가 저지른 실수가 있다면 과거에 이유영과 함께하려 했던 것뿐이다.누가 뭐라든 듣지 않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과 함께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게 바로 진영숙을 가장 괴롭게 했던 일이었다.그때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철저히 무시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왜소한 몸을 보며 아이를 제대로 낳을 수나 있을까 의심스러웠고 이런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
제대로 된 가치관조차 가지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자들을 임소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진영숙은 애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사모님, 제발 부탁드립니다.”그러나 임소미는 차갑게 쏘아붙였다.“저한테 부탁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그냥... 어떻게 지내는지만 알고 싶어요.”진영숙이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처량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과거에 이유영을 괴롭힐 때는 이유영의 부모가 파리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이유영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진영숙은 한동안 임소미를 마주할 수 없었는데 그녀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임소미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두 사람의 삶에서 조용히 발을 빼는 것뿐이었다.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어떤가?아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영숙은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그저 아들이 무사한지만 알고 싶어요.”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임소미 역시 엄마였다.과거, 이유영과 여진우를 위해 밤마다 하늘에 기도했던 사람인 만큼, 지금 눈앞의 진영숙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진영숙이 과거 이유영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시 떠오르자 마음속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강이한은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서주를 떠났다고 들었어요. 이제 보니 진영숙 씨는 그렇게 좋은 엄마는 아니었나 보네요.”임소미의 말에 진영숙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핏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은 충격받은 듯 굳어 있었다.아무리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고 해도 어떻게 엄마를 버릴 수 있는 걸까?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진영숙에게 어떤 의미인지, 강이한은 모를 것이다.비록 최근 들어 아들 일에 많이 간섭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늘 관심 가졌던 진영숙이었다.이유영 일로 강이한한테 많이 실망하긴 했어도 그래도 결국 친아들 아닌가?아무리 실망하고 원망스러워도 자신의 하나밖
강이한은 파리와 얽히며 복잡한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또한 깊은 사연을 품고 있었다.저녁 식사 시간, 이유영은 반산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의 조명은 대부분 새것으로 교체되었고 우지와 우현은 용성시의 모이산에서 돌아온 뒤 반산월을 돌보며 분주히 움직였다.그때 이유영이 환한 조명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조명이 밝아지니까 너무 좋아.”이유영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우지와 우현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도 좋아요.”이유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빛을 마주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어디를 다쳐도 눈만은 다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눈을 잃는다는 건, 곧 세상을 잃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웅웅.”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이유영이 화면을 확인하니 박연준이었다.“여보세요?”“어디야?”“반산월에 있어.”“문기원이 널 데리러 갈 거야.”“내가 말했잖아...”“유영아, 내 말대로 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일만 있어.”엔데스 가문의 모든 사람이 그들이 진짜 부부라고 믿게 만들려면 최소한 이 3일 동안은 완벽한 연극을 해야 했다.“…”이유영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너도 뭐가 더 중요한지 잘 알고 있잖아.”잘 알고 있을 거라고?몰랐다 해도 그의 잔소리 덕분에 뼛속까지 깨닫게 될 터였다.“오라고 해.”이유영은 짧게 말하고는 박연준이 더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박연준과 함께 지내는 건 고사하고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조차 불쾌했지만 쉽게 물러설 박연준이 아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기원이 차를 몰고 도착했다.이유영은 문기원을 마주하기가 어색했지만 결국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 이유영은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러던 중 문기원이 갑자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너무 미워하지 마세요.”이유영은 놀란 눈으로 문기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서려 있었는데 그 속엔 차가운 냉기마저
하지만 이유영이 다치는 건 원치 않았다.박연준은 변했다. 완전히 변해버렸다.더 이상 강이한을 계략하던 광기 넘치던 박연준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완전히 흔들려 버렸다.얼음처럼 굳어 있던 그의 심장을 이유영이 녹여버린 것이다.“흥!”문기원의 말에 이유영은 냉소를 터뜨렸다.의지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연서와 거의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문기원은 이유영의 반응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너무도 많은 일이 그녀의 세상을 뒤흔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유영 씨가 믿든 말든, 박 선생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영 씨에게 진심이었습니다. 한 번도 해치려 한 적이 없었단 말입니다.”만약 박연준이 아무 감정도 없었다면, 이유영이 연서와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그녀를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차갑고 온기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누구도 박연준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이유영만은 달랐다.박연준이 물불 안 가리고 이유영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문기원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박연준의 마음은 이미 부정할 수도, 참을 수도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는 사실을.하지만 강이한과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모든 것을 멈추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이유영은 자신을 단지 대역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처음엔 대역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박연준에게도, 강이한에게도 그녀는 더 이상 대역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문기원 씨,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이유영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높아졌다.이 일에 대해 더 이상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마당에 더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문기원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너무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이유영이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가 문기원이 보기엔 너무 잔인해 보였던 것이다.어쩌면 박연준뿐만 아니라 강
순간, 이유영은 홱 돌아서며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때 뒤에서 무릎이 대리석 바닥에 세게 부딪히는 묵직한 '쿵' 소리가 울려 퍼졌다.“유영아!”이유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온몸이 떨리고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주먹을 꽉 쥔 손등 위로 힘줄이 솟아올랐다.그 사람을 향한 혐오, 그보다 더 깊은 증오를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박연준과 강이한을 향한 증오일지도 모른다.다만 확실한 건, 그 감정이 이미 그녀의 핏속 깊숙이 스며들었고 영혼에까지 뿌리내렸다는 것이었다.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이유영은 간신히 가슴속의 분노를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위험할 만큼 차갑고도 날카로웠다.“네가 데려온 거야?”박연준의 옆엔 진영숙이 서 있었다.박연준은 그저 이유영의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야!”진영숙의 떨리는 목소리로 이유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과거 이유영이 어떻게 백산 별장을 떠났고 왜 진영숙에게 그렇게 분노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진영숙은 자신을 보자마자 돌아서던 이유영의 모습에서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자존심이 보았다.어쩌면 처음부터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그래서였을까? 강이한 곁에 머무는 몇 년 동안,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이유영은 단 한 번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사람들은 이유영을 순종적이고 시키는 일을 묵묵히 따르는 며느리로 알고 있었다.강씨 가문 저택에서 연회가 열릴 때마다 와서 도왔고 다른 재벌가 며느리들과 달리 까다롭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부엌일까지 손을 보탰다.그러나 진영숙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그렇게 했던 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오직 강이한의 체면을 위해서였다는 것을.처음부터 둘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유영은 그녀를 점점 무시하기 시작하더니 강이한이 없는 날이면 저택에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겉보기에는 조용하고 순응적인 듯했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자존심과 강
진영숙은 울먹이며 박연준을 바라보았다. 강이한의 숙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가 도와준다니 믿기지 않았다.“정말, 도와줄 거야?”정말 도와줄까?예전에 강이한과 가까웠던 사람들조차 그녀를 도와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박연준이 정말 도와줄 수 있을까?박연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죠.”“왜 날 도와주는 건데?”진영숙은 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보처럼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다.강이한이 서주에서 모든 것을 박연준에게 맡긴 이유는 무엇일까?도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서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강이한이 실종되기 전 서주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각 가문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도무지 상황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 혼란의 중심에는 강이한이 있었다.하지만 서주를 장악하려던 강이한이 갑자기 사라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대체 어디로 간 걸까?그리고 모든 것이 어떻게 박연준에게 넘어간 걸까?“그냥 기다리세요. 곧 소식이 올 겁니다.”박연준은 진영숙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남겼다.진영숙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 기다려본 사람만이 안다.기약 없이 떠나버린 사람을 찾고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소식을 기다리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일이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리며 보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그 기다림의 끝에 남은 것은 늘 절망뿐이었다.하지만 지금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며칠 동안 미친 듯이 강이한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끊임없이 실패했다.그렇다면 이제 박연준을 믿어야 할까?그를, 정말 믿을 수 있을까?청하시에 있을 때, 박연준은 이유영과 강이한 사이에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그런 사람이 정말 자신을 돕겠다고 하는데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이유영은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한 뒤, 바로 백산 별장으로
결국, 그들의 싸움에서 박연준이 이겼다.그렇게 해서 그는 이유영 곁에 남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박연준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과연 이기는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사랑에는 승패가 존재하지 않는다.“네 마음속에서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야?”“그래.”박연준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이유영은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만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특히 진영숙에 대한 그의 태도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박연준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박연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그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그런 그를 두고 이유영이 다시 돌아서려던 순간 박연준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유영아, 네가 오랫동안 쌓여온 게 많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함부로 대하면 안 돼.”그녀는 강이한의 어머니다. 그리고 강이한은 이유영을 위해 어떤 일까지 했던가?진영숙의 말처럼 지금 진영숙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흥!”이해할 수 없는 강이한의 말에 이유영은 실소를 터뜨렸고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박연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그럼, 그 사람들은 날 함부로 대해도 됐다는 거야?”“하지만 모든 걸 잃은 사람이야.”“그건 당연한 결과야.”“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박연준의 목소리가 더욱 강하게 울렸고 이유영은 그저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말, 오늘만 몇 번째인가? 하지만 박연준이 몇 번을 강조하던 이유영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이미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인 원한이었다. 결혼생활 3년 동안 진영숙 곁에서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삼켜야 했는지 일일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그러나 그 억울함 속에서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았다.이미 갈대로 간 지금 이 상황에서 다시 감정을 억누르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이유영이 과거에 참고 견딘 만큼 그녀는 지금 냉정하고 차갑기만 했다.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단
진영숙은 이렇게까지 일이 꼬일 줄은 몰랐다. 강이한이 실종되기 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다.강이한은 대체 무엇을 견뎌낸 걸까?이미 평생 겪을 고통은 다 겪었다고 생각한 진영숙은 자신의 아들도 그런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녀는 참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남편은 오래전에 그녀의 세상에서 사라졌고 이제 아들마저 실종되었다.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하지만 그들에서 그녀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왜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녀만 몰랐을까?아무도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면 그녀는 애초에 그들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였던 걸까?“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죠.”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공간을 가로질렀다.진영숙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유영은 이미 등을 돌리고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문 앞에 다다른 순간, 이유영의 마지막 한마디가 허공을 가르며 날카롭게 꽂혔다.“저도 어딨는지 몰라요.”그 말을 들은 진영숙은 모든 힘이 빠져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눈동자는 텅 빈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당연하다고?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당연하다’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그저 자신의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랐을 뿐인데, 왜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리고 이유영은 정말 강이한의 행방을 모르는 걸까?이유영조차 강이한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자 진영숙의 세상은 산산조각이 났다.진영숙은 온몸이 떨렸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절망이 그녀를 한없이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겼다.과거, 그녀가 이유영에게 얼마나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던가. 지금 그 절망이 똑같이 되돌아와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심지어 남편을 잃었을 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지금 눈앞의 이유영을 마주 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너무 아팠다.“왜... 왜?”진영숙은 힘없이 중얼거렸다.눈동자는 생기를 잃었
결혼 3년 차인데도 아이가 없다며 밖에서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대는 악담이나 독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다만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려고 의사와 짜고 이유영의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다.그 분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그동안 얼마나 간절히 아이를 원해왔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친할머니 손에 사라진 것을 알았을 때, 이유영은 진영숙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그때부터 이유영은 더 이상 진영숙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강이한을 위해 참아왔던 것들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강씨 가문 저택을 방문하는 이유는 오직 강이한의 체면 하나 때문이었고 그녀는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진영숙이 무릎 꿇고 한 사과는 누구를 위한 속죄였을까? 뱃속에서 세상을 떠난 이유영의 아이를 위한 속죄라면 백 번 꿇어 마땅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진영숙은 후회를 모르는 사람이다.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 분명했다.진영숙은 눈물을 쏟으며 땅에 엎드린 채 간절히 말했다.“유영아, 넌 우리 애가 어디 있는지 알잖아, 그렇지?”“...”“제발 알려줘. 어디 있는지만 알고 있을게.”그녀의 목소리는 절박하게 떨렸다.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끝내 강이한을 찾지 못하자 유일하게 그를 알고 있을 사람으로 이유영을 떠올렸다.오랜 세월 함께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자신만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을 함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하지만 결국 이런 파국을 맞이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지금 이 상황까지 온 마당에 내가 그 사람 행방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이유영이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 말에 진영숙의 온몸이 떨렸다.이유영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강이한이 어디서 뭐 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지금, 이유영도 강이한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뻔했다.진영숙의 가슴이 조여 오는 듯
순간, 이유영은 홱 돌아서며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때 뒤에서 무릎이 대리석 바닥에 세게 부딪히는 묵직한 '쿵' 소리가 울려 퍼졌다.“유영아!”이유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온몸이 떨리고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주먹을 꽉 쥔 손등 위로 힘줄이 솟아올랐다.그 사람을 향한 혐오, 그보다 더 깊은 증오를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박연준과 강이한을 향한 증오일지도 모른다.다만 확실한 건, 그 감정이 이미 그녀의 핏속 깊숙이 스며들었고 영혼에까지 뿌리내렸다는 것이었다.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이유영은 간신히 가슴속의 분노를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위험할 만큼 차갑고도 날카로웠다.“네가 데려온 거야?”박연준의 옆엔 진영숙이 서 있었다.박연준은 그저 이유영의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야!”진영숙의 떨리는 목소리로 이유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과거 이유영이 어떻게 백산 별장을 떠났고 왜 진영숙에게 그렇게 분노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진영숙은 자신을 보자마자 돌아서던 이유영의 모습에서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자존심이 보았다.어쩌면 처음부터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그래서였을까? 강이한 곁에 머무는 몇 년 동안,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이유영은 단 한 번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사람들은 이유영을 순종적이고 시키는 일을 묵묵히 따르는 며느리로 알고 있었다.강씨 가문 저택에서 연회가 열릴 때마다 와서 도왔고 다른 재벌가 며느리들과 달리 까다롭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부엌일까지 손을 보탰다.그러나 진영숙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그렇게 했던 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오직 강이한의 체면을 위해서였다는 것을.처음부터 둘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유영은 그녀를 점점 무시하기 시작하더니 강이한이 없는 날이면 저택에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겉보기에는 조용하고 순응적인 듯했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자존심과 강
하지만 이유영이 다치는 건 원치 않았다.박연준은 변했다. 완전히 변해버렸다.더 이상 강이한을 계략하던 광기 넘치던 박연준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완전히 흔들려 버렸다.얼음처럼 굳어 있던 그의 심장을 이유영이 녹여버린 것이다.“흥!”문기원의 말에 이유영은 냉소를 터뜨렸다.의지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연서와 거의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문기원은 이유영의 반응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너무도 많은 일이 그녀의 세상을 뒤흔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유영 씨가 믿든 말든, 박 선생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영 씨에게 진심이었습니다. 한 번도 해치려 한 적이 없었단 말입니다.”만약 박연준이 아무 감정도 없었다면, 이유영이 연서와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그녀를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차갑고 온기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누구도 박연준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이유영만은 달랐다.박연준이 물불 안 가리고 이유영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문기원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박연준의 마음은 이미 부정할 수도, 참을 수도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는 사실을.하지만 강이한과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모든 것을 멈추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이유영은 자신을 단지 대역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처음엔 대역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박연준에게도, 강이한에게도 그녀는 더 이상 대역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문기원 씨,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이유영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높아졌다.이 일에 대해 더 이상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마당에 더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문기원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너무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이유영이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가 문기원이 보기엔 너무 잔인해 보였던 것이다.어쩌면 박연준뿐만 아니라 강
강이한은 파리와 얽히며 복잡한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또한 깊은 사연을 품고 있었다.저녁 식사 시간, 이유영은 반산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의 조명은 대부분 새것으로 교체되었고 우지와 우현은 용성시의 모이산에서 돌아온 뒤 반산월을 돌보며 분주히 움직였다.그때 이유영이 환한 조명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조명이 밝아지니까 너무 좋아.”이유영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우지와 우현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도 좋아요.”이유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빛을 마주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어디를 다쳐도 눈만은 다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눈을 잃는다는 건, 곧 세상을 잃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웅웅.”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이유영이 화면을 확인하니 박연준이었다.“여보세요?”“어디야?”“반산월에 있어.”“문기원이 널 데리러 갈 거야.”“내가 말했잖아...”“유영아, 내 말대로 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일만 있어.”엔데스 가문의 모든 사람이 그들이 진짜 부부라고 믿게 만들려면 최소한 이 3일 동안은 완벽한 연극을 해야 했다.“…”이유영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너도 뭐가 더 중요한지 잘 알고 있잖아.”잘 알고 있을 거라고?몰랐다 해도 그의 잔소리 덕분에 뼛속까지 깨닫게 될 터였다.“오라고 해.”이유영은 짧게 말하고는 박연준이 더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박연준과 함께 지내는 건 고사하고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조차 불쾌했지만 쉽게 물러설 박연준이 아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기원이 차를 몰고 도착했다.이유영은 문기원을 마주하기가 어색했지만 결국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 이유영은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러던 중 문기원이 갑자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너무 미워하지 마세요.”이유영은 놀란 눈으로 문기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서려 있었는데 그 속엔 차가운 냉기마저
제대로 된 가치관조차 가지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자들을 임소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진영숙은 애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사모님, 제발 부탁드립니다.”그러나 임소미는 차갑게 쏘아붙였다.“저한테 부탁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그냥... 어떻게 지내는지만 알고 싶어요.”진영숙이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처량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과거에 이유영을 괴롭힐 때는 이유영의 부모가 파리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이유영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진영숙은 한동안 임소미를 마주할 수 없었는데 그녀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임소미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두 사람의 삶에서 조용히 발을 빼는 것뿐이었다.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어떤가?아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영숙은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그저 아들이 무사한지만 알고 싶어요.”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임소미 역시 엄마였다.과거, 이유영과 여진우를 위해 밤마다 하늘에 기도했던 사람인 만큼, 지금 눈앞의 진영숙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진영숙이 과거 이유영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시 떠오르자 마음속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강이한은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서주를 떠났다고 들었어요. 이제 보니 진영숙 씨는 그렇게 좋은 엄마는 아니었나 보네요.”임소미의 말에 진영숙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핏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은 충격받은 듯 굳어 있었다.아무리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고 해도 어떻게 엄마를 버릴 수 있는 걸까?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진영숙에게 어떤 의미인지, 강이한은 모를 것이다.비록 최근 들어 아들 일에 많이 간섭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늘 관심 가졌던 진영숙이었다.이유영 일로 강이한한테 많이 실망하긴 했어도 그래도 결국 친아들 아닌가?아무리 실망하고 원망스러워도 자신의 하나밖
진영숙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결국 이런 소식이라니.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이유영은 끝없이 진영숙을 몰아세웠다.이유영은 강이한을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지난 몇 년간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복수하려면 저한테 하라고 해요. 제가 유영이를 무시하며 두 사람 갈라놓으려고 했어요.”진영숙의 감정은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였다.그렇다. 두 사람 사이를 원수로 만든 장본인은 진영숙이었다. 하지만 사랑했던 두 사람이 철천지원수가 됐을 때,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임소미는 진영숙을 묵묵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런 결말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영을 봐서 적어도 이유영의 인생에서는 이 모든 것이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아니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 저한테 복수하지 않았잖아요.”진영숙은 울먹이며 말했다.이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오직 강이한만 무사하다면 어떤 결과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임소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복수라니?“이제 보니 우리와 생각이 너무 다르네요.”복수라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이유영이 강이한에게 한 건 결코 복수가 아니었다.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내 아들은 잘못한 게 없어요...”진영숙은 임소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고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이유영에 관한 일에서 강이한은 잘못이 없었다. 단 하나, 그가 저지른 실수가 있다면 과거에 이유영과 함께하려 했던 것뿐이다.누가 뭐라든 듣지 않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과 함께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게 바로 진영숙을 가장 괴롭게 했던 일이었다.그때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철저히 무시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왜소한 몸을 보며 아이를 제대로 낳을 수나 있을까 의심스러웠고 이런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