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쏘아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그녀는 차디찬 말투로 엔데스 명우를 향해 내뱉었다.“당신 볼 때마다 떠올라. 그 여자와 설선비를 위해 이성 잃고 날뛰던 모습.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니까.”“소은지!”분노에 찬 엔데스 명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설선비라는 이름은 엔데스 명우에겐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금기였다.치유되지 않은 상처처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몰려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지금까지 그 누구도 명우의 앞에서 감히 설선비를 언급하지 못했다.소은지가 그의 곁에 머물던 시절에도 그는 늘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경고하곤 했다.마치 그녀의 입에서 설선비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 존재 자체가 더럽혀지기라도 하는 것처럼.하지만 소은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으며 눈빛엔 오히려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정말 불쌍해.”“닥쳐!”“당신은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닥치라고!”“쾅!”분노에 찬 엔데스 명우가 다과상을 걷어찼다.소은지는 부서진 잔해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화났어?”명우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난 몇 년간, 소은지가 설선비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명우는 항상 이런 반응을 보이며 그녀를 창문조차 없는 방에 가두었다.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그 어둠 속에서 그녀는 서서히 무너져갔다.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곳에 오래 있다 보면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소은지는 설선비라는 이름 때문에 몇 번이나 벌을 받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그녀는 그 이름만 꺼내도 한동안 엔데스 명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하지만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소은지는 조금씩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그 여자의 이름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던 소은지는 더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물론 엔데스 명우가 가끔 이성을 잃고 날뛰는 일도 있었지만 설선비의 이름을
이번엔 뭔가 달랐다. 소은지가 이렇게 길게 말을 이어간 건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엔데스 명우가 아무리 화를 내도 소은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그의 분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차분하게 명우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심장을 움켜쥐듯 강렬했다.소은지가 말했다.“그 여자는 쓰레기니까.”그 순간, 엔데스 명우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감돌더니 폭발이라도 한 듯한 소리가 공간을 갈랐다.곧이어 소은지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다.그 힘에는 폭발 직전까지 억눌려 있던 명우의 분노가 거칠고 강렬하게 실려 있었다.“퍽!”차가운 재떨이가 남자의 이마에 떨어졌고 분위기는 더 살벌하게 얼어붙었다.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 사이로 살기를 머금은 눈빛이 번뜩였다.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짐승의 눈빛이었다.공기가 멎은 듯 정적이 감돌았고 시간마저 멈춰버린 것 같았다.소은지는 조용히 그의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내려놓았다.소은지의 움직임은 침착하고 단단했다.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눈빛에서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죽는 게 무섭지 않아?”몇 년 동안 아무도 설선비라는 이름을 그의 앞에서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은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흥!”소은지의 웃음엔 비웃음과 연민이 섞여 있었고 그녀는 엔데스 명우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그 누구도 그런 눈빛으로 그를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소은지는 달랐다.과거에도 그녀는 그의 앞에서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변함없이 똑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죽음을 무서워했던 건 내가 아니라 설선비였지. 그렇게 죽는 게 무서웠던 사람이 왜...”“팍!”손바닥이 소은지의 뺨을 세차게 갈랐다.명우의 입술이 일그러지고 온몸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참으려 애써도 감정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그는 더 이상 소은지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눌러왔던 분노는 이제 금방
분위기는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우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그날부터 모든 건 이미 끝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제는 서로의 뺨까지 내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명우의 웃음이었다.냉담하고 음울한 웃음이었고 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잔혹함과 함께 묘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소은지, 잘하고 있어.”그가 비웃듯 말했다.“74호는 감히 하지 못했던 걸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며느리는 해내는구나.”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상반된 두 신분에 대해 조롱하고 있었다.명우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좋아. 아주 좋아.”그가 성큼 소은지 앞으로 다가갔고 흥미로 가득 찼던 눈빛은 이내 사나워졌다.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고 거칠게 턱선을 문지르며 위협의 기운을 내뿜었다.“지금 이 모습,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소은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분질러버릴 듯한 목소리였다.하지만 소은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흥! 그래?”“그럼.”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몇 년 동안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고통을 주며 괴롭혀왔다.그런 그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굴복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강했고 절대 쉽게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명우가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갈라졌다.소은지는 오늘 엔데스 명우가 끝까지 덮어두려 했던 금기를 건드리고 있었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그래, 넌 아직도...”명우의 입에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소은지가 먼저
“우리 이혼해요.”격렬한 사랑이 끝난 뒤, 유영은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달뜬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상기된 볼을 살짝 가렸다. 그녀의 두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표정은 처량했다.남자가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렸다. 술을 잔뜩 마시고 돌아와서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지고 욕구를 방출시킨 남자, 그 어디에도 유영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10년을 사랑했지만 이제 더 이상의 미련은 남지 않았다.단추를 잠그던 강이한의 손이 움찔하더니 날카로운 시선으로 유영을 노려보았다.“갑자기?”“네.”유영의 말투는 단호했다.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기억을 더듬어 화장실로 향했다.강이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다가가서 그녀를 부축했다.“손 이리 줘봐.”탁!유영은 매몰차게 그 손길을 뿌리쳤다.하지만 힘 조절을 잘못해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저리 치워요. 당신 도움은 이제 필요 없어. 더러워.”이 남자와 같은 지붕 아래 숨 쉬고 있는 것 자체가 거북하고 불쾌했다.강이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허공에 손을 내민 채, 신경질적으로 유영을 노려보았다.지금 나한테 더럽다고 한 건가?유영은 바닥을 더듬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고 뜨거운 물로 몸에 남은 그의 흔적을 씻어냈다.할 수만 있다면 그의 손길이 닿았던 피부를 모두 도려내고 싶었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벽을 더듬으며 옷장으로 향했다. 시력을 잃게 된 시간이 길지 않아서 암흑 같은 이 세상이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다.유영은 손끝에 닿은 느낌을 따라 옷 한 벌을 꺼내 입고는 호적 등본을 챙기고 그에게 말했다.“지금 법원으로 가요.”“이유영.”강이한이 이를 갈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는 벌떡 일어나서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이런 모습으로 나랑 이혼하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그녀는 가진 게 없었다
또각또각.익숙한 하이힐 소리가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와 함께 가까워지고 있었다.한지음!강이한의 첫사랑이자 그녀의 망막을 가져간 여자.유영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고용인 부를 필요 없어. 내가 이미 불렀으니까.”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말투.“여긴 왜 왔어?”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이미 모든 걸 잃은 그녀에게 또 뭘 바라고 온 것일까?한지음은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벼운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전해줄 말이 있어서 왔어.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부터 들을래?”유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너 임신했더라.”유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한지음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물론 이한 씨는 이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 않을 거야. 나도 임신했거든.”쿵!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유영의 얼굴에 금이 갔다.‘강이한, 이런 거였어?’혈색을 잃은 그녀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렸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유영은 치미는 분노를 꾹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여자는 자랑하러 온 것이다. 이미 모든 걸 잃었는데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내고 싶었다.그녀는 길게 심호흡하고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래? 어제 그 사람한테 내가 이혼하자고 했는데 싫다고 하더라?”그 말을 들은 한지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유영도 그녀의 기분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내 망막까지 빼앗아 가고 임신까지 했는데 그래서 뭐? 그이는 네가 이 집의 안주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나 봐.”강이한을 좋아해서 한지음을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이 여자에게 더 이상 짓밟히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었다.강이한과는 이미 끝내기로 했지만 집까지 찾아와서 자신을 도발하는 여자에게 가만히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하, 그래서 이한 씨가 널 사랑한다고 말하고
“악!”유영은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피부에서 아직도 뜨거운 작열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남자의 거친 손이 다가와서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전해졌다.“꿈꿨어? 조금만 더 자자.”유영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고개를 돌려 보니 강이한의 준수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유영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앞이 보여? 이게 어떻게 된 거지?’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창문이 보였다.천장, 커튼, 그리고 익숙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설마?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찾았다. 날짜와 시간을 확인해 보니 화재가 일어나기 몇 개월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회귀… 한 건가?강이한은 뒤척이는 소리에 불만스럽게 눈을 떴다.“아침부터 왜 이래?”그러거나 말거나 유영은 핸드폰에 찍힌 날짜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납치하기 전 날로 돌아와 있었다.“당신 왜 그래?”그녀의 이상한 반응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유영은 남자를 내버려두고 욕실로 들어가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화상 자국이 있어야 할 팔뚝도 말끔했다.아직도 불길이 자신을 덮친 그날의 느낌이 생생한데 그녀는 그 사고가 있기 전으로 돌아와 있었다.유영은 바닥에 앉아 양팔로 자신을 껴안고 중얼거렸다.“유영아, 하늘이 널 불쌍히 여겨 기회를 준 거야.”욕실을 나선 유영은 침대로 다가가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우리 이혼해.”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싸늘한 목소리에 강이한이 벌떡 일어나며 그녀를 노려보았다.“지금 뭐라고 했어?”“은지한테 부탁해서 이혼 서류 준비시킬 거야. 못 믿겠으면 당신도 변호사 불러.”“대체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야?”강이한은 이 상황이
잠시 후, 소은지가 팩스로 이혼 서류를 보내왔다.이유영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사인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강이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은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간 뒤에 바로 외출했다고 답했다.이유영은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팩스로 그의 회사에 이혼 서류를 보냈다. 서류를 확인한 비서가 다급히 그녀에게 연락했다.“사… 사모님, 대표님은 아직 출근 전입니다만….”“그 사람 도착하면 바로 사인하고 법원에서 만나자고 전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강이한의 비서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유영은 전화를 끊은 뒤, 위층으로 올라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거울 속에 비춰진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마누라가 예쁘다고 남자가 한눈을 팔지 않는 건 아니었다.아무리 예쁜 외모라도 질릴 때가 있는 법, 그때가 되면 남자들은 바깥의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이유영은 바로 차를 타고 법원 앞으로 가서 기다렸지만 점심시간이 다 될 때까지도 강이한은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바로 강이한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영상 속 배경을 보니 회의 중인 듯했다.이유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 법원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어. 대체 협의서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안 나타나는 거야?”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강이한에게로 쏠렸다.대표님이 이혼? 게다가 재산분할?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지자,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잠깐의 통화만으로도 대표가 곧 이혼한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30분 쉬었다가 다시 진행하지.”남자는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가는 강이한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자, 현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사모님께서 지금 이혼을 제기하신 거 맞지?”“그렇게 온화한 분도 폭발할 때가 있구나.”“그럼 한 비서는 어떻
이유영은 홧김에 손을 번쩍 들고 남자의 귀뺨을 때렸다.남자가 우악스럽게 그녀의 목을 잡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오늘 아침부터 이상했어. 대체 무슨 일인지 이유는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강이한은 그제야 이유영이 단지 기분이 나쁜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줄곧 온화하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얌전한 현모양처였다. 정말 화가 나는 순간이 와도 그녀는 혼자 삭히고 오히려 먼저 그에게 다가와 줄 줄 아는 여자였다.이유영은 자신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곧 있으면 법원 직원들 점심 먹으러 갈 시간이야. 일단 서류부터 제출하고 다시 얘기하자.”“이유영!”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이유영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가슴을 밀쳤다. 하지만 남자는 태산처럼 요지부동이었다.강이한은 운전 기사에게 곧장 집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어차피 기분이 엉망이라 돌아가서 회의를 계속 진행하기도 무리였다.돌아가는 길, 운전기사의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집에 도착한 뒤, 이유영과 강이한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이제 얘기해 봐.”“더 얘기할 것도 없어. 말하긴 뭘 말해?”반년 사이 비서와 바람이 난 사실을 온 청하시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정작 그는 그녀에게 한 번도 제대로 된 해명조차 해주지 않았다.남자의 싸늘한 시선이 이유영을 잡아먹을 것처럼 훑어보았다.그녀는 고집스럽게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담담한 태도에 남자의 표정이 점점 더 험하게 일그러졌다.“이유영, 세강 일가에게 이혼이란 존재할 수 없어. 사별이면 몰라도.”이유영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그녀는 착잡한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그래서 지난 생에 나를 불에 태워 죽인 거니?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신이 첫 이혼이면 되겠네. 아니면 나가서 죽거나.”강이한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내려다보았다.왕의 기질을 타고난 이 남자는 화가 날 때면 항상 이
분위기는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우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그날부터 모든 건 이미 끝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제는 서로의 뺨까지 내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명우의 웃음이었다.냉담하고 음울한 웃음이었고 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잔혹함과 함께 묘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소은지, 잘하고 있어.”그가 비웃듯 말했다.“74호는 감히 하지 못했던 걸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며느리는 해내는구나.”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상반된 두 신분에 대해 조롱하고 있었다.명우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좋아. 아주 좋아.”그가 성큼 소은지 앞으로 다가갔고 흥미로 가득 찼던 눈빛은 이내 사나워졌다.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고 거칠게 턱선을 문지르며 위협의 기운을 내뿜었다.“지금 이 모습,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소은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분질러버릴 듯한 목소리였다.하지만 소은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흥! 그래?”“그럼.”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몇 년 동안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고통을 주며 괴롭혀왔다.그런 그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굴복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강했고 절대 쉽게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명우가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갈라졌다.소은지는 오늘 엔데스 명우가 끝까지 덮어두려 했던 금기를 건드리고 있었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그래, 넌 아직도...”명우의 입에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소은지가 먼저
이번엔 뭔가 달랐다. 소은지가 이렇게 길게 말을 이어간 건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엔데스 명우가 아무리 화를 내도 소은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그의 분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차분하게 명우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심장을 움켜쥐듯 강렬했다.소은지가 말했다.“그 여자는 쓰레기니까.”그 순간, 엔데스 명우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감돌더니 폭발이라도 한 듯한 소리가 공간을 갈랐다.곧이어 소은지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다.그 힘에는 폭발 직전까지 억눌려 있던 명우의 분노가 거칠고 강렬하게 실려 있었다.“퍽!”차가운 재떨이가 남자의 이마에 떨어졌고 분위기는 더 살벌하게 얼어붙었다.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 사이로 살기를 머금은 눈빛이 번뜩였다.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짐승의 눈빛이었다.공기가 멎은 듯 정적이 감돌았고 시간마저 멈춰버린 것 같았다.소은지는 조용히 그의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내려놓았다.소은지의 움직임은 침착하고 단단했다.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눈빛에서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죽는 게 무섭지 않아?”몇 년 동안 아무도 설선비라는 이름을 그의 앞에서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은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흥!”소은지의 웃음엔 비웃음과 연민이 섞여 있었고 그녀는 엔데스 명우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그 누구도 그런 눈빛으로 그를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소은지는 달랐다.과거에도 그녀는 그의 앞에서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변함없이 똑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죽음을 무서워했던 건 내가 아니라 설선비였지. 그렇게 죽는 게 무서웠던 사람이 왜...”“팍!”손바닥이 소은지의 뺨을 세차게 갈랐다.명우의 입술이 일그러지고 온몸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참으려 애써도 감정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그는 더 이상 소은지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눌러왔던 분노는 이제 금방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쏘아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그녀는 차디찬 말투로 엔데스 명우를 향해 내뱉었다.“당신 볼 때마다 떠올라. 그 여자와 설선비를 위해 이성 잃고 날뛰던 모습.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니까.”“소은지!”분노에 찬 엔데스 명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설선비라는 이름은 엔데스 명우에겐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금기였다.치유되지 않은 상처처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몰려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지금까지 그 누구도 명우의 앞에서 감히 설선비를 언급하지 못했다.소은지가 그의 곁에 머물던 시절에도 그는 늘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경고하곤 했다.마치 그녀의 입에서 설선비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 존재 자체가 더럽혀지기라도 하는 것처럼.하지만 소은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으며 눈빛엔 오히려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정말 불쌍해.”“닥쳐!”“당신은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닥치라고!”“쾅!”분노에 찬 엔데스 명우가 다과상을 걷어찼다.소은지는 부서진 잔해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화났어?”명우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난 몇 년간, 소은지가 설선비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명우는 항상 이런 반응을 보이며 그녀를 창문조차 없는 방에 가두었다.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그 어둠 속에서 그녀는 서서히 무너져갔다.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곳에 오래 있다 보면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소은지는 설선비라는 이름 때문에 몇 번이나 벌을 받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그녀는 그 이름만 꺼내도 한동안 엔데스 명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하지만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소은지는 조금씩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그 여자의 이름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던 소은지는 더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물론 엔데스 명우가 가끔 이성을 잃고 날뛰는 일도 있었지만 설선비의 이름을
소은지의 웃음은 날카롭고 싸늘했다.엔데스 명우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여섯째 도련님.”단순한 호칭이 아닌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였다. 엔데스 명우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고 소은지를 향한 날카로운 눈빛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을 듯했다.하지만 그런 눈빛 앞에서도 소은지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소은지, 네가 현우 곁에 왜 있게 됐는지 설마 잊은 거야? 아니면 두 사람 관계가 계속 이렇게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소은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현우 씨 곁에 있게 된 이유?’과거 청하시에 있으며 소은지는 절망의 끝에 몰리게 되었고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철저하게 무너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엔데스 명우는 그녀를 끝까지 몰아세웠고 그녀는 끝없는 절망 속에서 기회만 엿보았다.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를 잡아 주저 없이 현우의 곁으로 간 것이다.현우와 함께하게 된 이유, 소은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관계가 얼마나 오래갈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엔데스 명우는 거칠게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다.턱뼈가 부서질 듯한 고통이 전해졌지만 소은지의 눈빛은 그 순간조차 흔들리지 않았다.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그녀 곁에서 수없이 봐온 차가운 눈빛이었다.“그거 알아? 네가 이런 눈으로 날 볼 때마다 그 눈 다 뽑아버리고 싶다는 거.”소은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그 눈에는 언제나 차갑고 독특한 냉기가 깃들어 있었다.소은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엔데스 명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을 준 건 아니지만 명우는 그녀의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엔데스 명우도 처음부터 그녀의 이런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그녀의 고집과 강인함을 꺾으려 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흥!”결국 그는 차갑게 웃으며 소은지의 손을 뿌리쳤다. 차갑게 몸을 돌린 그의 기운은 얼음처럼 냉랭했다.소은지의
얼마나 오래됐을까?소은지는 생각했다.‘엔데스 명우와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한 게 대체 언제였지? 현우 씨 곁에 머물게 된 이후로는 없었던 것 같네.’현우와 함께하며 그녀는 자연스레 엔데스 명우와 멀어졌다.하지만 이렇게 마주한 순간이 극히 드물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증오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두 사람의 마음속엔 격렬한 파도가 일렁였고 서로의 눈빛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금유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엔데스 명우가 침묵을 깼다.그 말에 소은지는 차갑고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여섯째 도련님, 그게 무슨 말이세요?”그 말이 떨어지자 엔데스 명우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소은지는 ‘여섯째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또렷이 힘을 실어 말했다.소은지를 바라보는 엔데스 명우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고 마치 소은지의 속마음을 모두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사실 명우를 만나기 전 소은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그동안 줄곧 반산월에 머물며 가장 자주 마주친 인물이 송연미였다. 송연미를 통해 엔데스 가문의 인물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현우가 어디 있는지 아직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기에 그녀의 마음엔 불안으로 가득 찼다.혹여 자신이 실수라도 해서 현우에게 피해를 줄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막상 이 순간이 오자 오히려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다.“여섯째 도련님?”엔데스 명우가 아무 말 없이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소은지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남자의 깊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졌고 그 안엔 불투명한 그림자가 깔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이미 꿰뚫어 본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하지만 소은지는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평온한 듯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잠시 후, 엔데스 명우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걸 봐서 소은지는 고집이 셀 뿐만 아니라 정신력 또한 만만치 않
이유영은 아이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고 월이를 떠올리자 눈빛에 따스한 온기가 어려 들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이 어젯밤 반산월에서 소은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나 이유영과 소은지의 관계를 떠올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진우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어.”“응.”이유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어때? 괜찮은 것 같아?”“누구?”이유영은 되물었다.여진우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건지 이유영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여진우은 굳은 표정으로 이내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여진우의 이상한 모습을 바라보며 이유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내가 뭘 잘못했나? 왜 저러지?’‘설마 은지를 말하는 건가? 은지를 걱정하고 있다고?’‘에이, 설마. 두 사람은 전혀...’하지만 엔데스 명우와 소은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겉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다.그래서 여진우가 소은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며 이유영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한편, 이유영이 남기에게 했던 말대로라면, 현우의 일이 정말 소은지와 연관되어 있다면 오늘 아침 엔데스 가문은 분명 반산월을 시험해 올 것이다.그리고 그 예감처럼,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엔데스 란서였다.그녀는 과거 엔데스 가문에서 소은지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그저 평범한 이야기만 나누고는 돌아갔다.“아저씨.”“네.”“아홉째 아가씨가 왜 왔을까요?”그들은 오직 엔데스 가문에서만 마주쳐 왔기에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소은지는 지금 반산월에 나타나는 인물이라면 누구든 철저히 경계하고 분석해야 했다.남기는 조심스레 말했다.“아홉째 아가씨는 순수합니다. 만약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분명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을 겁니다.”소은지
소은지는 지금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은 현실이 되어 소은지를 괴롭혔다.이유영은 떠났고 소은지는 홀로 남겨진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아저씨.”“네, 사모님.”집사 남기가 조용히 소은지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현우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었다. 현우는 소은지에게 남기 집사라면 믿어도 된다고 말했었다.어제 일이 벌어졌을 때도 남기는 누구보다 먼저 소식을 막으라고 조언했다.그 빠르고 정확한 대처를 보면 아마도 오랜 시간 현우 곁을 지켜온 인물이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남기는 소은지의 곁에 남아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중요한 시기인 만큼 소은지 곁에 머무는 이상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사실을 남기도 모를 리 없었다.그런 남기를 통해 소은지는 각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었다.어제 분명히 무슨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엔데스 명우에게 잡혀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처음 겪은 일이었다.그것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일과도 완전히 결이 달랐다.복잡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자 처음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낯설었다.어찌할 바 모를 상황 속에서 다행히도 남기의 존재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아직도 소식이 없어요?”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어젯밤부터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그래도 계속 물어봐야만 했다.남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유영 앞에서 보였던 연약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지금 이 일은 절대 엔데스 가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원래 가문 간의 다툼이라는 것이 이리도 잔인했던가?’과거에 엔데스 가문의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었다.어찌 됐든 그들은 가족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이유영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이유영은 말없이 소은지를 꼭 껴안았다.소은지가 느끼는 감정의 무게를 알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소은지는 현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엔데스 가문 도련님인데도 불구하고 소은지 곁에서 함께 일하는 현우를 보며 이유영은 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소은지의 마음을 마주하고 나서 이유영은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이유영은 밤을 꼬박 새워 소은지 곁을 지켰다.두 사람 아무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반산월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아침 식탁 위에는 정적만 감돌았다.“오빠한테 전화해서 조용히 찾아보라고 했어.”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유영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필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현우가 사라졌다.‘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수없이 많은 생각이 소은지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휘몰아쳤다.“일단 밥은 먹어.”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 소은지를 보며 이유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영아, 나...”“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만약 이 일이 정말 엔데스 가문과 얽혀 있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리고 나는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이유영이 겁이 나서 떠나려는 게 아니었다.그 말은 소은지에게 이유영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이었다.소은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이유영이 곁에 오래 머물수록 주변의 의심은 커질 거라는 것을.그래서 이유영은 아침 식사 후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소은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유영이 곁에 있어 주길 바랐지만 동시에 오직 이 상황을 먼저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예전 청하시에서의 이유영 삶은 비록 힘들었지만 강씨 집안은 적어도 순수했다.그래서 힘들 땐 소은지를 찾아갈 수 있었고 가끔은 훌쩍 여행도 갈
“은지야...”이유영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어떤 위로의 말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그 자식은 자격이 없어, 유영아!”엔데스 명우를 말하는 것이었다.파리에서 너무 많은 것을 봐온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는 절대 자격이 없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이유영은 조용히 대답했다.“알아.”“하지만 현우 씨는...”소은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현우는 무고하다고,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과거 그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원한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명우와 현우는 겉보기엔 사이가 좋았다.그러나 그녀로 인해 현우가 일에 휘말리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엔 서늘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 막 시작된 일이야.”이유영이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현우는 오늘 하루 사라졌을 뿐이니 벌써 이렇게 초조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유영아, 넌 몰라.”이유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은지가 급히 받아쳤다.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영은 잘 모르기에 긴장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소은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소은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현우의 차가 금유산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소은지는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고 심지어 직접 금유산까지 달려갔다.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현우가 정말 무사하다면 그 전화를 받지 않을 리 없었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소은지는 금유산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들을수록 이유영의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종일 거라 생각했지만 점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현우의 실종은 단순한 사건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로 그 점이 가장 불안하게 했다.“현우 씨,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야. 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어.”어쨌든 그는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도련님이었고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절대 감춰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소은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