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숙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을 만나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이유영을 만나겠다고?이유영을 만나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누구 탓일까?결국, 이 지경이 된 건 다 진영숙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유영이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꺼져!”임소미는 단호하게 내뱉었다.임소미는 알고 있었다. 진영숙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지금 이유영에게 그 모든 일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를.이제 와서 다시 그 악몽 같은 시간을 들추게 할 순 없었다.진영숙과 그 무리는 이유영에게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존재였다.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기에 어떤 이유로든, 이유영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그때, 진영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사모님!”“당신은 늘 밑을 짓밟고 위로 올라가려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유영이를 찾겠다는 거지?”진영숙은 할 말을 잃었다. 과거를 과거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얼마나 무시하고 업신여겼던가.임소미는 그 심정을 깨닫게 해 줘야 했다. 이제 진영숙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진영숙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임소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할 말이 없었다.진영숙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결국, 그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제발, 단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목소리는 애써 억누른 듯했지만 간절함이 묻어났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다시 말을 이었다.“저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알고 계시잖아요!”그래, 아무것도 없었다.아들은 사라졌고 강서희는 감옥에 갇혔다.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강서희를 꺼낼 방법이 없었다.임소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그 모든 걸 잃은 게 내 탓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동정심을 가질 이유도 없지, 안 그래?”“왜
진영숙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결국 이런 소식이라니.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이유영은 끝없이 진영숙을 몰아세웠다.이유영은 강이한을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지난 몇 년간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복수하려면 저한테 하라고 해요. 제가 유영이를 무시하며 두 사람 갈라놓으려고 했어요.”진영숙의 감정은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였다.그렇다. 두 사람 사이를 원수로 만든 장본인은 진영숙이었다. 하지만 사랑했던 두 사람이 철천지원수가 됐을 때,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임소미는 진영숙을 묵묵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런 결말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영을 봐서 적어도 이유영의 인생에서는 이 모든 것이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아니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 저한테 복수하지 않았잖아요.”진영숙은 울먹이며 말했다.이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오직 강이한만 무사하다면 어떤 결과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임소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복수라니?“이제 보니 우리와 생각이 너무 다르네요.”복수라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이유영이 강이한에게 한 건 결코 복수가 아니었다.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내 아들은 잘못한 게 없어요...”진영숙은 임소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고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이유영에 관한 일에서 강이한은 잘못이 없었다. 단 하나, 그가 저지른 실수가 있다면 과거에 이유영과 함께하려 했던 것뿐이다.누가 뭐라든 듣지 않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과 함께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게 바로 진영숙을 가장 괴롭게 했던 일이었다.그때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철저히 무시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왜소한 몸을 보며 아이를 제대로 낳을 수나 있을까 의심스러웠고 이런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
제대로 된 가치관조차 가지지 못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여자들을 임소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진영숙은 애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사모님, 제발 부탁드립니다.”그러나 임소미는 차갑게 쏘아붙였다.“저한테 부탁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그냥... 어떻게 지내는지만 알고 싶어요.”진영숙이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처량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과거에 이유영을 괴롭힐 때는 이유영의 부모가 파리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이유영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진영숙은 한동안 임소미를 마주할 수 없었는데 그녀는 도저히 얼굴을 들고 임소미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두 사람의 삶에서 조용히 발을 빼는 것뿐이었다.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어떤가?아들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영숙은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그저 아들이 무사한지만 알고 싶어요.”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임소미 역시 엄마였다.과거, 이유영과 여진우를 위해 밤마다 하늘에 기도했던 사람인 만큼, 지금 눈앞의 진영숙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진영숙이 과거 이유영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시 떠오르자 마음속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강이한은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서주를 떠났다고 들었어요. 이제 보니 진영숙 씨는 그렇게 좋은 엄마는 아니었나 보네요.”임소미의 말에 진영숙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핏기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얼굴은 충격받은 듯 굳어 있었다.아무리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고 해도 어떻게 엄마를 버릴 수 있는 걸까?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진영숙에게 어떤 의미인지, 강이한은 모를 것이다.비록 최근 들어 아들 일에 많이 간섭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늘 관심 가졌던 진영숙이었다.이유영 일로 강이한한테 많이 실망하긴 했어도 그래도 결국 친아들 아닌가?아무리 실망하고 원망스러워도 자신의 하나밖
강이한은 파리와 얽히며 복잡한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또한 깊은 사연을 품고 있었다.저녁 식사 시간, 이유영은 반산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의 조명은 대부분 새것으로 교체되었고 우지와 우현은 용성시의 모이산에서 돌아온 뒤 반산월을 돌보며 분주히 움직였다.그때 이유영이 환한 조명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조명이 밝아지니까 너무 좋아.”이유영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우지와 우현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도 좋아요.”이유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빛을 마주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어디를 다쳐도 눈만은 다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눈을 잃는다는 건, 곧 세상을 잃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웅웅.”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이유영이 화면을 확인하니 박연준이었다.“여보세요?”“어디야?”“반산월에 있어.”“문기원이 널 데리러 갈 거야.”“내가 말했잖아...”“유영아, 내 말대로 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일만 있어.”엔데스 가문의 모든 사람이 그들이 진짜 부부라고 믿게 만들려면 최소한 이 3일 동안은 완벽한 연극을 해야 했다.“…”이유영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너도 뭐가 더 중요한지 잘 알고 있잖아.”잘 알고 있을 거라고?몰랐다 해도 그의 잔소리 덕분에 뼛속까지 깨닫게 될 터였다.“오라고 해.”이유영은 짧게 말하고는 박연준이 더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박연준과 함께 지내는 건 고사하고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조차 불쾌했지만 쉽게 물러설 박연준이 아니었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기원이 차를 몰고 도착했다.이유영은 문기원을 마주하기가 어색했지만 결국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서 이유영은 내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러던 중 문기원이 갑자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너무 미워하지 마세요.”이유영은 놀란 눈으로 문기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서려 있었는데 그 속엔 차가운 냉기마저
하지만 이유영이 다치는 건 원치 않았다.박연준은 변했다. 완전히 변해버렸다.더 이상 강이한을 계략하던 광기 넘치던 박연준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완전히 흔들려 버렸다.얼음처럼 굳어 있던 그의 심장을 이유영이 녹여버린 것이다.“흥!”문기원의 말에 이유영은 냉소를 터뜨렸다.의지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연서와 거의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문기원은 이유영의 반응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너무도 많은 일이 그녀의 세상을 뒤흔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유영 씨가 믿든 말든, 박 선생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영 씨에게 진심이었습니다. 한 번도 해치려 한 적이 없었단 말입니다.”만약 박연준이 아무 감정도 없었다면, 이유영이 연서와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그녀를 여러 차례 위기에서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차갑고 온기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누구도 박연준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지만 이유영만은 달랐다.박연준이 물불 안 가리고 이유영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문기원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박연준의 마음은 이미 부정할 수도, 참을 수도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는 사실을.하지만 강이한과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모든 것을 멈추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이유영은 자신을 단지 대역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처음엔 대역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박연준에게도, 강이한에게도 그녀는 더 이상 대역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문기원 씨,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이유영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높아졌다.이 일에 대해 더 이상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린 마당에 더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문기원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너무 잔인하게 굴지 마세요.”이유영이 박연준을 대하는 태도가 문기원이 보기엔 너무 잔인해 보였던 것이다.어쩌면 박연준뿐만 아니라 강
순간, 이유영은 홱 돌아서며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때 뒤에서 무릎이 대리석 바닥에 세게 부딪히는 묵직한 '쿵' 소리가 울려 퍼졌다.“유영아!”이유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온몸이 떨리고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주먹을 꽉 쥔 손등 위로 힘줄이 솟아올랐다.그 사람을 향한 혐오, 그보다 더 깊은 증오를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박연준과 강이한을 향한 증오일지도 모른다.다만 확실한 건, 그 감정이 이미 그녀의 핏속 깊숙이 스며들었고 영혼에까지 뿌리내렸다는 것이었다.한참을 그대로 서 있던 이유영은 간신히 가슴속의 분노를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위험할 만큼 차갑고도 날카로웠다.“네가 데려온 거야?”박연준의 옆엔 진영숙이 서 있었다.박연준은 그저 이유영의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야!”진영숙의 떨리는 목소리로 이유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과거 이유영이 어떻게 백산 별장을 떠났고 왜 진영숙에게 그렇게 분노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진영숙은 자신을 보자마자 돌아서던 이유영의 모습에서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자존심이 보았다.어쩌면 처음부터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그래서였을까? 강이한 곁에 머무는 몇 년 동안,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이유영은 단 한 번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사람들은 이유영을 순종적이고 시키는 일을 묵묵히 따르는 며느리로 알고 있었다.강씨 가문 저택에서 연회가 열릴 때마다 와서 도왔고 다른 재벌가 며느리들과 달리 까다롭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부엌일까지 손을 보탰다.그러나 진영숙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그렇게 했던 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오직 강이한의 체면을 위해서였다는 것을.처음부터 둘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유영은 그녀를 점점 무시하기 시작하더니 강이한이 없는 날이면 저택에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겉보기에는 조용하고 순응적인 듯했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자존심과 강
결혼 3년 차인데도 아이가 없다며 밖에서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대는 악담이나 독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다만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려고 의사와 짜고 이유영의 약을 바꿔치기한 사실은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다.그 분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유영이 그동안 얼마나 간절히 아이를 원해왔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친할머니 손에 사라진 것을 알았을 때, 이유영은 진영숙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그때부터 이유영은 더 이상 진영숙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강이한을 위해 참아왔던 것들이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강씨 가문 저택을 방문하는 이유는 오직 강이한의 체면 하나 때문이었고 그녀는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진영숙이 무릎 꿇고 한 사과는 누구를 위한 속죄였을까? 뱃속에서 세상을 떠난 이유영의 아이를 위한 속죄라면 백 번 꿇어 마땅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이유영도 알고 있었다.진영숙은 후회를 모르는 사람이다.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 분명했다.진영숙은 눈물을 쏟으며 땅에 엎드린 채 간절히 말했다.“유영아, 넌 우리 애가 어디 있는지 알잖아, 그렇지?”“...”“제발 알려줘. 어디 있는지만 알고 있을게.”그녀의 목소리는 절박하게 떨렸다.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끝내 강이한을 찾지 못하자 유일하게 그를 알고 있을 사람으로 이유영을 떠올렸다.오랜 세월 함께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자신만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을 함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하지만 결국 이런 파국을 맞이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지금 이 상황까지 온 마당에 내가 그 사람 행방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이유영이 차가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 말에 진영숙의 온몸이 떨렸다.이유영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강이한이 어디서 뭐 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지금, 이유영도 강이한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뻔했다.진영숙의 가슴이 조여 오는 듯
진영숙은 이렇게까지 일이 꼬일 줄은 몰랐다. 강이한이 실종되기 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다는 사실이 너무 두려웠다.강이한은 대체 무엇을 견뎌낸 걸까?이미 평생 겪을 고통은 다 겪었다고 생각한 진영숙은 자신의 아들도 그런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녀는 참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남편은 오래전에 그녀의 세상에서 사라졌고 이제 아들마저 실종되었다.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하지만 그들에서 그녀는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왜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녀만 몰랐을까?아무도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면 그녀는 애초에 그들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였던 걸까?“아무도 없는 게 당연하죠.”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공간을 가로질렀다.진영숙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유영은 이미 등을 돌리고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문 앞에 다다른 순간, 이유영의 마지막 한마디가 허공을 가르며 날카롭게 꽂혔다.“저도 어딨는지 몰라요.”그 말을 들은 진영숙은 모든 힘이 빠져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눈동자는 텅 빈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당연하다고?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당연하다’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그저 자신의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랐을 뿐인데, 왜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리고 이유영은 정말 강이한의 행방을 모르는 걸까?이유영조차 강이한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자 진영숙의 세상은 산산조각이 났다.진영숙은 온몸이 떨렸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절망이 그녀를 한없이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겼다.과거, 그녀가 이유영에게 얼마나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던가. 지금 그 절망이 똑같이 되돌아와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심지어 남편을 잃었을 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지금 눈앞의 이유영을 마주 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너무 아팠다.“왜... 왜?”진영숙은 힘없이 중얼거렸다.눈동자는 생기를 잃었
분위기는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우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그날부터 모든 건 이미 끝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제는 서로의 뺨까지 내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명우의 웃음이었다.냉담하고 음울한 웃음이었고 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잔혹함과 함께 묘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소은지, 잘하고 있어.”그가 비웃듯 말했다.“74호는 감히 하지 못했던 걸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며느리는 해내는구나.”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상반된 두 신분에 대해 조롱하고 있었다.명우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좋아. 아주 좋아.”그가 성큼 소은지 앞으로 다가갔고 흥미로 가득 찼던 눈빛은 이내 사나워졌다.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고 거칠게 턱선을 문지르며 위협의 기운을 내뿜었다.“지금 이 모습,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소은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분질러버릴 듯한 목소리였다.하지만 소은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흥! 그래?”“그럼.”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몇 년 동안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고통을 주며 괴롭혀왔다.그런 그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굴복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강했고 절대 쉽게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명우가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갈라졌다.소은지는 오늘 엔데스 명우가 끝까지 덮어두려 했던 금기를 건드리고 있었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그래, 넌 아직도...”명우의 입에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소은지가 먼저
이번엔 뭔가 달랐다. 소은지가 이렇게 길게 말을 이어간 건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엔데스 명우가 아무리 화를 내도 소은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그의 분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차분하게 명우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심장을 움켜쥐듯 강렬했다.소은지가 말했다.“그 여자는 쓰레기니까.”그 순간, 엔데스 명우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감돌더니 폭발이라도 한 듯한 소리가 공간을 갈랐다.곧이어 소은지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다.그 힘에는 폭발 직전까지 억눌려 있던 명우의 분노가 거칠고 강렬하게 실려 있었다.“퍽!”차가운 재떨이가 남자의 이마에 떨어졌고 분위기는 더 살벌하게 얼어붙었다.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 사이로 살기를 머금은 눈빛이 번뜩였다.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짐승의 눈빛이었다.공기가 멎은 듯 정적이 감돌았고 시간마저 멈춰버린 것 같았다.소은지는 조용히 그의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내려놓았다.소은지의 움직임은 침착하고 단단했다.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눈빛에서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죽는 게 무섭지 않아?”몇 년 동안 아무도 설선비라는 이름을 그의 앞에서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은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흥!”소은지의 웃음엔 비웃음과 연민이 섞여 있었고 그녀는 엔데스 명우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그 누구도 그런 눈빛으로 그를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소은지는 달랐다.과거에도 그녀는 그의 앞에서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변함없이 똑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죽음을 무서워했던 건 내가 아니라 설선비였지. 그렇게 죽는 게 무서웠던 사람이 왜...”“팍!”손바닥이 소은지의 뺨을 세차게 갈랐다.명우의 입술이 일그러지고 온몸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참으려 애써도 감정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그는 더 이상 소은지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눌러왔던 분노는 이제 금방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쏘아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그녀는 차디찬 말투로 엔데스 명우를 향해 내뱉었다.“당신 볼 때마다 떠올라. 그 여자와 설선비를 위해 이성 잃고 날뛰던 모습.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니까.”“소은지!”분노에 찬 엔데스 명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설선비라는 이름은 엔데스 명우에겐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금기였다.치유되지 않은 상처처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몰려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지금까지 그 누구도 명우의 앞에서 감히 설선비를 언급하지 못했다.소은지가 그의 곁에 머물던 시절에도 그는 늘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경고하곤 했다.마치 그녀의 입에서 설선비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 존재 자체가 더럽혀지기라도 하는 것처럼.하지만 소은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으며 눈빛엔 오히려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정말 불쌍해.”“닥쳐!”“당신은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닥치라고!”“쾅!”분노에 찬 엔데스 명우가 다과상을 걷어찼다.소은지는 부서진 잔해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화났어?”명우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난 몇 년간, 소은지가 설선비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명우는 항상 이런 반응을 보이며 그녀를 창문조차 없는 방에 가두었다.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그 어둠 속에서 그녀는 서서히 무너져갔다.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곳에 오래 있다 보면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소은지는 설선비라는 이름 때문에 몇 번이나 벌을 받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그녀는 그 이름만 꺼내도 한동안 엔데스 명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하지만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소은지는 조금씩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그 여자의 이름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던 소은지는 더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물론 엔데스 명우가 가끔 이성을 잃고 날뛰는 일도 있었지만 설선비의 이름을
소은지의 웃음은 날카롭고 싸늘했다.엔데스 명우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여섯째 도련님.”단순한 호칭이 아닌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였다. 엔데스 명우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고 소은지를 향한 날카로운 눈빛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을 듯했다.하지만 그런 눈빛 앞에서도 소은지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소은지, 네가 현우 곁에 왜 있게 됐는지 설마 잊은 거야? 아니면 두 사람 관계가 계속 이렇게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소은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현우 씨 곁에 있게 된 이유?’과거 청하시에 있으며 소은지는 절망의 끝에 몰리게 되었고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철저하게 무너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엔데스 명우는 그녀를 끝까지 몰아세웠고 그녀는 끝없는 절망 속에서 기회만 엿보았다.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를 잡아 주저 없이 현우의 곁으로 간 것이다.현우와 함께하게 된 이유, 소은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관계가 얼마나 오래갈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엔데스 명우는 거칠게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다.턱뼈가 부서질 듯한 고통이 전해졌지만 소은지의 눈빛은 그 순간조차 흔들리지 않았다.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그녀 곁에서 수없이 봐온 차가운 눈빛이었다.“그거 알아? 네가 이런 눈으로 날 볼 때마다 그 눈 다 뽑아버리고 싶다는 거.”소은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그 눈에는 언제나 차갑고 독특한 냉기가 깃들어 있었다.소은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엔데스 명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을 준 건 아니지만 명우는 그녀의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엔데스 명우도 처음부터 그녀의 이런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그녀의 고집과 강인함을 꺾으려 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흥!”결국 그는 차갑게 웃으며 소은지의 손을 뿌리쳤다. 차갑게 몸을 돌린 그의 기운은 얼음처럼 냉랭했다.소은지의
얼마나 오래됐을까?소은지는 생각했다.‘엔데스 명우와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한 게 대체 언제였지? 현우 씨 곁에 머물게 된 이후로는 없었던 것 같네.’현우와 함께하며 그녀는 자연스레 엔데스 명우와 멀어졌다.하지만 이렇게 마주한 순간이 극히 드물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증오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두 사람의 마음속엔 격렬한 파도가 일렁였고 서로의 눈빛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금유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엔데스 명우가 침묵을 깼다.그 말에 소은지는 차갑고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여섯째 도련님, 그게 무슨 말이세요?”그 말이 떨어지자 엔데스 명우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소은지는 ‘여섯째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또렷이 힘을 실어 말했다.소은지를 바라보는 엔데스 명우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고 마치 소은지의 속마음을 모두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사실 명우를 만나기 전 소은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그동안 줄곧 반산월에 머물며 가장 자주 마주친 인물이 송연미였다. 송연미를 통해 엔데스 가문의 인물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현우가 어디 있는지 아직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기에 그녀의 마음엔 불안으로 가득 찼다.혹여 자신이 실수라도 해서 현우에게 피해를 줄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막상 이 순간이 오자 오히려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다.“여섯째 도련님?”엔데스 명우가 아무 말 없이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소은지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남자의 깊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졌고 그 안엔 불투명한 그림자가 깔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이미 꿰뚫어 본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하지만 소은지는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평온한 듯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잠시 후, 엔데스 명우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걸 봐서 소은지는 고집이 셀 뿐만 아니라 정신력 또한 만만치 않
이유영은 아이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고 월이를 떠올리자 눈빛에 따스한 온기가 어려 들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이 어젯밤 반산월에서 소은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나 이유영과 소은지의 관계를 떠올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진우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어.”“응.”이유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어때? 괜찮은 것 같아?”“누구?”이유영은 되물었다.여진우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건지 이유영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여진우은 굳은 표정으로 이내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여진우의 이상한 모습을 바라보며 이유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내가 뭘 잘못했나? 왜 저러지?’‘설마 은지를 말하는 건가? 은지를 걱정하고 있다고?’‘에이, 설마. 두 사람은 전혀...’하지만 엔데스 명우와 소은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겉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다.그래서 여진우가 소은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며 이유영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한편, 이유영이 남기에게 했던 말대로라면, 현우의 일이 정말 소은지와 연관되어 있다면 오늘 아침 엔데스 가문은 분명 반산월을 시험해 올 것이다.그리고 그 예감처럼,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엔데스 란서였다.그녀는 과거 엔데스 가문에서 소은지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그저 평범한 이야기만 나누고는 돌아갔다.“아저씨.”“네.”“아홉째 아가씨가 왜 왔을까요?”그들은 오직 엔데스 가문에서만 마주쳐 왔기에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소은지는 지금 반산월에 나타나는 인물이라면 누구든 철저히 경계하고 분석해야 했다.남기는 조심스레 말했다.“아홉째 아가씨는 순수합니다. 만약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분명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을 겁니다.”소은지
소은지는 지금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은 현실이 되어 소은지를 괴롭혔다.이유영은 떠났고 소은지는 홀로 남겨진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아저씨.”“네, 사모님.”집사 남기가 조용히 소은지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현우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었다. 현우는 소은지에게 남기 집사라면 믿어도 된다고 말했었다.어제 일이 벌어졌을 때도 남기는 누구보다 먼저 소식을 막으라고 조언했다.그 빠르고 정확한 대처를 보면 아마도 오랜 시간 현우 곁을 지켜온 인물이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남기는 소은지의 곁에 남아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중요한 시기인 만큼 소은지 곁에 머무는 이상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사실을 남기도 모를 리 없었다.그런 남기를 통해 소은지는 각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었다.어제 분명히 무슨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엔데스 명우에게 잡혀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처음 겪은 일이었다.그것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일과도 완전히 결이 달랐다.복잡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자 처음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낯설었다.어찌할 바 모를 상황 속에서 다행히도 남기의 존재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아직도 소식이 없어요?”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어젯밤부터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그래도 계속 물어봐야만 했다.남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유영 앞에서 보였던 연약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지금 이 일은 절대 엔데스 가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원래 가문 간의 다툼이라는 것이 이리도 잔인했던가?’과거에 엔데스 가문의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었다.어찌 됐든 그들은 가족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이유영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이유영은 말없이 소은지를 꼭 껴안았다.소은지가 느끼는 감정의 무게를 알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소은지는 현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엔데스 가문 도련님인데도 불구하고 소은지 곁에서 함께 일하는 현우를 보며 이유영은 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소은지의 마음을 마주하고 나서 이유영은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이유영은 밤을 꼬박 새워 소은지 곁을 지켰다.두 사람 아무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반산월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아침 식탁 위에는 정적만 감돌았다.“오빠한테 전화해서 조용히 찾아보라고 했어.”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유영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필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현우가 사라졌다.‘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수없이 많은 생각이 소은지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휘몰아쳤다.“일단 밥은 먹어.”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 소은지를 보며 이유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영아, 나...”“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만약 이 일이 정말 엔데스 가문과 얽혀 있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리고 나는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이유영이 겁이 나서 떠나려는 게 아니었다.그 말은 소은지에게 이유영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이었다.소은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이유영이 곁에 오래 머물수록 주변의 의심은 커질 거라는 것을.그래서 이유영은 아침 식사 후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소은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유영이 곁에 있어 주길 바랐지만 동시에 오직 이 상황을 먼저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예전 청하시에서의 이유영 삶은 비록 힘들었지만 강씨 집안은 적어도 순수했다.그래서 힘들 땐 소은지를 찾아갈 수 있었고 가끔은 훌쩍 여행도 갈
“은지야...”이유영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어떤 위로의 말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그 자식은 자격이 없어, 유영아!”엔데스 명우를 말하는 것이었다.파리에서 너무 많은 것을 봐온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는 절대 자격이 없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이유영은 조용히 대답했다.“알아.”“하지만 현우 씨는...”소은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현우는 무고하다고,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과거 그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원한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명우와 현우는 겉보기엔 사이가 좋았다.그러나 그녀로 인해 현우가 일에 휘말리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엔 서늘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 막 시작된 일이야.”이유영이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현우는 오늘 하루 사라졌을 뿐이니 벌써 이렇게 초조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유영아, 넌 몰라.”이유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은지가 급히 받아쳤다.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영은 잘 모르기에 긴장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소은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소은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현우의 차가 금유산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소은지는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고 심지어 직접 금유산까지 달려갔다.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현우가 정말 무사하다면 그 전화를 받지 않을 리 없었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소은지는 금유산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들을수록 이유영의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종일 거라 생각했지만 점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현우의 실종은 단순한 사건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로 그 점이 가장 불안하게 했다.“현우 씨,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야. 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어.”어쨌든 그는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도련님이었고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절대 감춰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소은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