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스 가문의 일은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이유영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찡했다.“역시 엄마는 대단한 사람이야.”“당연하지.”임소미는 혀를 차며 핀잔을 주면서도 눈길만큼은 한없이 따뜻했다.하지만 연애 문제만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둘은 서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렇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향해 품고 있는 증오를 떠올리면, 서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유영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임소미는 생각했다.그렇기에 임소미는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월이한테 가볼게.”이유영이 말하자, 임소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유영이 위층으로 올라가고 임소미는 혼자 남아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휴...”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에 대해 도저히 어떻게 설명해야 몰라 답답한 심정만 내비쳤다.지금 이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이유영이 방으로 들어오자 월이는 젖병을 문 채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졸린 눈을 깜빡이는 모습은 무척 사랑스러웠고 이유영은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곁에 있는 월이의 모습을 보니 더없이 마음이 말랑해졌다.“졸려?”“응, 엄마랑 같이 잘래.”“그래, 옷 갈아입고 올게.”이유영은 옷장으로 가서 잠옷을 꺼내 입었다.방에서 나오니 월이는 이미 스르르 잠들어 있었다. 늘 그렇듯, 이유영이 곁에 있으면 유난히 잠드는 속도가 빨랐다.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눈빛이 부드러워진 이유영은 조심스레 침대에 올라가 월이를 품에 안았다.그 순간,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내 사랑...”속삭이듯 말하며 품 안의 작은 체온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월이는 이유영의 품에 파묻힌 채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그의 고른 숨소리를 듣던 이유영은 문득 깨달았다.월이의 작은 코가 유난히 그 사람을 닮았다.이제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그 사
이유영은 늘 어둠 속에서 멍하니 살아왔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묻지 않았다.그때 이유영이 무슨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절이었다.여진우의 물음은 곧 이유영이 이제 완전히 회복했다는 뜻이었다.“회사에 나가서 일해야지. 근데 난 더 이상 경영은 하고 싶지 않아.”그 말에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과거, 여진우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로열 글로벌의 모든 무게가 이유영의 어깨를 짓눌렀다.특히 그때는, 정유라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 더더욱 머리가 아팠다.결국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그녀에겐 오빠가 있고 그 덕에 선택지도 훨씬 많아졌기에 더 이상 예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뭔가 하긴 해야지.”여진우가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이유영은 곧장 물었다.“그럼 뭐 하면 좋을 것 같아?”“네가 하고 싶은 건?”“네 비서!”그 말에, 여진우는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그건 아무리 봐도 재능 낭비였고 아버지가 이유영을 키우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비서를 하겠다고?여진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야망이 없네.”생각해 보면 처음으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자신이 원하는 걸 할 자유도 없는 건가?사실 이유영은 높은 자리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런 위치에 있으면 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무언가를 감당해야 한다면 그럴 가치가 있을 때 해야 하는 법이다.“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몇 개 있다던데, 내가 디자인해 볼까?”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예전, 청하시에서 로열 글로벌로 정식 복귀하기 전, 오로라 스튜디오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그래서 디자인 분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여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사람은 무언가 할 일이 있어야
이유영은 앞에 놓인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후에 시간 있어?”“왜?”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흰색 실내복을 입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엄격함은 타고난 것이었다.이유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하려고.”차갑고 냉담한 음성이 떨어지자, 맞은편의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순간적으로 흔들린 눈빛이 그의 동요를 말해주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이내 평온을 되찾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유영의 그릇에 정성스럽게 익힌 소고기를 집어주며 말했다.“장난치지 마, 응?”마치 말썽꾸러기 아이를 다독이듯 다정한 목소리였다.그러나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걸. 마치 그때의 강이한처럼.이유영은 강이한의 세계에서 한지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을 때, 미친 듯이 이혼을 요구했었다.그때는 가진 것도 없었지만 단호하게 행동했다.하지만 지금은? 지금, 그녀의 뒤에는 정씨 가문이 있다.이유영의 결심은 박연준에게 거대한 거리감을 안겨주었다. 몸이 멀어지는 건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마음이 멀어지면 어쩔 수 없었다.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내가 너랑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박연준은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 난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거.”이제는 화를 내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둘 사이에는 감정의 균열이 깊어져 있었다.박연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나랑 이혼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과거, 강이한과 이혼하려 했을 때, 강이한은 이유영의 목을 조르며 물었다.“날 떠나면 어떤 결과가 올 것 같아?”전생이든 현생이든, 그 질문은 반복되었다.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이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은 그의 곁에 남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리고 지금, 박연준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마치 이유영이 하는 모든 선택이 신중해야
정국진은 오랫동안 엔데스 가문을 피해 왔다. 하지만 피하는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엔데스 가문이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 든다면 상상도 못 할 갈등이 벌어질 것이다.어떻게 분석해 봐도 지금은 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단호한 모습이었다.정씨 가문은 엔데스 가문과 엮이길 원치 않고 이유영과 박연준 역시 마찬가지다.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분위기에서 이유영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박연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적어도 이 시기가 지나서 이혼하자, 응?”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이유영은 박연준이 말하는 '이 시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의미였다.하지만 지금, 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사라졌고 전기봉도 행방불명인 상태에서 일이 마무리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그 도장이 누구에게 발견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엔데스 가문의 당주 자리는 단순히 도장이나 문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명문가들의 지지도 필요했다.즉, 지금 이 상황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다.이유영은 박연준을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정씨 가문이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해?”“그럼 너는?”견뎌낼 수 있을까?이유영은 정씨 가문을 그 소용돌이에 끌어들이려 하는 걸까?칼과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그녀의 감정이 어떠한지 알 수 있게 되자 박연준은 웃었다.그 눈빛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담겨 있었다.그는 이미 이유영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선택의 이유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이유영은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입을 열었다.“너랑 그 사람, 대체 무슨 거래를 한 거야?”“누구?”뜻밖의 질문에 박연준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하다 곧 깨달았다.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너는 무슨 거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박연준은 되묻으며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이유영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알겠어.”이유영
그가 보고 싶었던 상황이었다.강이한과 이유영이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고 어쩌면 계획했던 일인지도 몰랐다.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자 숨이 막혔다.어쩌면 연서에 대한 일을 몰랐다면 좀 더 담담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스스로에게 강이한이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라고 수없이 되뇌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모든 것이 달랐다.“걱정하지 마. 강이한은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색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이유영이 낮게 되물었다.“응,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확신을 담은 목소리가 무겁게 내뱉어졌다.그들은 오랫동안 싸워왔지만 동시에 너무 오랫동안 얽혀 있었기에 서로의 속마음을 너무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강이한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절대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이유영에게 보일 리 없다는 것을.절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이유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박연준의 눈에 스치는 슬픔을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다.이유영의 차갑고 어두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그렇게 숨 막히는 식사가 계속되었다.식사 후.이유영이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박연준이 입을 열었다.“사흘.”“뭐라고?”“내가 있는 사흘 동안, 너는 풍산 그룹에 머물러야 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이미 불쾌했던 눈빛이 그 말과 함께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너무 지나치게 굴지 마.”“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아주 민감해. 착한 사람 하나 없어. 그들이 기회를 잡지 못하게 하려면 사흘 정도는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니잖아. 아니야?”“나한테는 너랑 같이 있는 일분일초도 숨 막혀.”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고 답답했던 박연준의 가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깊이 내려앉았다.‘숨 막힌다고?’박연준은 그제가 알았다. 강이한이 말했던 '막막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어둠 속에서 힘겹게 버
얼마나 오래됐을까?이 이름을 마주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강이한과 결혼한 지난 3년 동안, 이 이름은 이유영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며 무엇을 하든 만족하지 못했고 이유영을 끝없이 깎아내렸던 이름이었다.감옥 화재 이후로 이유영은 진영숙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던 것만 같았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유영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었으니까.강이한과의 관계가 끝나면서 그 사람들은 모두 과거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진영숙이 나타난 것이다.대체 왜?“왜 온 거예요?”이유영은 눈앞이 캄캄해졌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도 진영숙과 관련된 이야기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선생님이 실종되었대요.”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 그 소식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진영숙이 모를 리 없었다.그리고 결국, 진영숙은 미쳐버릴 듯 강이한을 찾아 헤매다 여기까지 온 것이다.이유영은 평생 진영숙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진영숙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약 강이한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진영숙은 영원히 이유영을 찾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알았어요.”짧은 대답을 남기고 이유영은 전화를 끊었다.원래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이유영은 뒤돌아 계단 입구를 바라보았다. 박연준은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있었고 혼자 남아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이유영은 결국 발길을 돌려 다시 반산월로 향했다....한편, 정씨 가문에서.진영숙은 차가운 눈빛으로 임소미를 바라보았다.“돌아가세요. 그녀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겁니다.”“사모님, 당신도 한 아이의 어머니니까 지금 제 마음을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진영숙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진영숙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유영의 정체를 알았고 강이한과의 관계에서도 조용히 물러났다.그렇게 조용히 여생을 보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아들이 서주에서 실종
진영숙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유영을 만나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이유영을 만나겠다고?이유영을 만나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울 줄은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누구 탓일까?결국, 이 지경이 된 건 다 진영숙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유영이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꺼져!”임소미는 단호하게 내뱉었다.임소미는 알고 있었다. 진영숙이 이유영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지금 이유영에게 그 모든 일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를.이제 와서 다시 그 악몽 같은 시간을 들추게 할 순 없었다.진영숙과 그 무리는 이유영에게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존재였다.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기에 어떤 이유로든, 이유영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그때, 진영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사모님!”“당신은 늘 밑을 짓밟고 위로 올라가려 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유영이를 찾겠다는 거지?”진영숙은 할 말을 잃었다. 과거를 과거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얼마나 무시하고 업신여겼던가.임소미는 그 심정을 깨닫게 해 줘야 했다. 이제 진영숙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진영숙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임소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할 말이 없었다.진영숙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지만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결국, 그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제발, 단 한 번만 만나게 해 주세요!”목소리는 애써 억누른 듯했지만 간절함이 묻어났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다시 말을 이었다.“저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알고 계시잖아요!”그래, 아무것도 없었다.아들은 사라졌고 강서희는 감옥에 갇혔다.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강서희를 꺼낼 방법이 없었다.임소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그 모든 걸 잃은 게 내 탓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동정심을 가질 이유도 없지, 안 그래?”“왜
진영숙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결국 이런 소식이라니.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이유영은 끝없이 진영숙을 몰아세웠다.이유영은 강이한을 증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지난 몇 년간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복수하려면 저한테 하라고 해요. 제가 유영이를 무시하며 두 사람 갈라놓으려고 했어요.”진영숙의 감정은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였다.그렇다. 두 사람 사이를 원수로 만든 장본인은 진영숙이었다. 하지만 사랑했던 두 사람이 철천지원수가 됐을 때,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임소미는 진영숙을 묵묵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런 결말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영을 봐서 적어도 이유영의 인생에서는 이 모든 것이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아니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 저한테 복수하지 않았잖아요.”진영숙은 울먹이며 말했다.이제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오직 강이한만 무사하다면 어떤 결과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임소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복수라니?“이제 보니 우리와 생각이 너무 다르네요.”복수라니,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이유영이 강이한에게 한 건 결코 복수가 아니었다.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내 아들은 잘못한 게 없어요...”진영숙은 임소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고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이유영에 관한 일에서 강이한은 잘못이 없었다. 단 하나, 그가 저지른 실수가 있다면 과거에 이유영과 함께하려 했던 것뿐이다.누가 뭐라든 듣지 않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과 함께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게 바로 진영숙을 가장 괴롭게 했던 일이었다.그때의 진영숙은 이유영을 철저히 무시하며 그녀의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왜소한 몸을 보며 아이를 제대로 낳을 수나 있을까 의심스러웠고 이런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
이유영은 몽롱한 상태로 박연준에게 이끌려 파리 타워를 나섰다.차에 오르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과 날 선 분위기가 온몸을 감쌌고 운전석에는 문기원이 앉아 있었다.만약 박연준이 직접 운전했다면 차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속도로 내달렸을 것이다.문기원조차도 그의 음산한 기류를 감지한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왜 하필 그 사람과 함께 있었어?”한참을 침묵하던 박연준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고 이유영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대꾸했다.“왜, 안 돼?”“이유영!”그의 목소리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음산한 기운이 차 안을 더욱 짙게 뒤덮었고 문기원의 손이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며 핸들이 살짝 틀어져 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이유영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비웃듯 물었다.“설마 우리 진짜 결혼한 사이로 생각했던 거야?”박연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이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어두웠던 눈빛이 한층 더 깊은 먹구름으로 가려졌다.“어이가 없군.”이유영은 냉소를 띠며 웃었다. 그녀에게 이 결혼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었다.이유영의 태도에 좁은 차 안의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성냥이 켜졌다.“치익.”박연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거칠게 몇 모금 빨아들였다. 차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담배 연기로 짙어졌고 살짝 내려진 창문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들어와 연기를 천천히 흩어놓았다.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로에게 너무 무거운 주제이기도 했고 이 이야기만 나오면 박연준은 언제나 격렬하게 반응했다.서재욱이 파자마 차림으로 문을 열었을 때, 박연준의 마음속에 어떤 격렬한 충격이 휘몰아쳤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그의 모든 이성이 무너져 내렸었다.차가 풍산 그룹에 거의 다다를 즈음, 박연준이 끝내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다.“이유영,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야?”목소리에는 한계에 다다른 감정이 묻어 있었다.“왜?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 못 참겠어?”그렇다면 그
“재욱 씨가 보기엔 아직 가능성이 있을 것 같나요?”서재욱은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반문했다.아직 가능성이 있을까?분명 없었다.청하시에서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강이한이 그녀에게 얼마나 냉혹한지 직접 목격했다.강이한의 매서운 눈빛을 보며 서재욱은 그가 평생 후회할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만약 후회한다면, 그것은 곧 그의 파멸을 의미할 것이었다.그리고 지금, 강이한은 결국 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유영은 강이한에게 일말의 희망도 남겨놓지 않았다.“그럼 박연준은 어떻습니까?”최근 김연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서재욱은 이유영과 박연준의 관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그래서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이유영은 박연준의 이름이 나오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딩동딩동!”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 초인종 소리가 급하게 울렸다.이유영과 서재욱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다른 손님이 또 있나요?”“아니요.”그는 오직 이유영을 만나기 위해 파리에 왔기에 다른 사람과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그렇다면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이유영은 서재욱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가서 확인해 보죠.”“네.”서재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함에 지친 파자마 차림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긴장감이 감돌았다.그는 문 앞에 서서 먼저 문 너머를 살피고는 이내 뒤돌아보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에요?”왜 문을 열지 않는 거지?“박연준이에요.”‘박연준? 여길 왜 온 거지?’서재욱을 찾아온 걸까?박연준은 어떤 소식이든 빨리 접하다 보니 서재욱이 파리에 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서재욱이 문을 열자 박연준의 주먹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서재욱이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얼굴을 맞았을 것이다.이유영은 문 앞에서 벌어진 소란을 들으며 긴장하고 있었다.박연준이 온몸에 살기를 내뿜자 이유영의 마음도 덩달아 흔들
이유영은 서재욱이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자신을 찾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거절할 여지도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서재욱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분노하게 해야만 나타날 거야.”‘분노해야만 나타난다고? 얼마나 몰아세웠기에 분노해야만 모습을 드러낼 정도란 말인가?’이유영은 말문이 막혔다.자신과 강이한의 관계가 이미 충분히 복잡하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더 얽히고설킨 관계가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결국 그녀는 서재욱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웠다....한편, 풍산 그룹에서 박연준은 이유영에게 몇 차례나 전화를 걸었지만 끝내 응답은 없었다.결국 문기원이 그녀의 행방을 알아냈고 그 사실을 보고받은 박연준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그는 문기원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물었다.“지금 파리 타워에 있다고?”“네. 이미 방에 들어갔다고 합니다.”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연준의 주먹이 단단히 쥐어졌다.‘결혼 증명서를 발급할 때부터 시작된 반격이 계속되는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까지 나오다니.’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라도 하필 서재욱과 얽히는 것에 박연준은 내심 못마땅했다.‘나와 서재욱의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파리 타워 레스토랑에서 저녁 시사를 마치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습니다.”문기원의 목소리에도 무거운 긴장이 감돌았다.이유영이 서재욱과 그런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박연준을 겨냥한 의도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컸다.그 말에 박연준은 벌떡 일어났고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었다.문기원이 말릴 틈도 없이 그는 성난 황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차가운 분노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가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하려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문기원은 서둘러 그를 따라나섰다.차는 빠른 속도로 밤거리를 질주하며 파리 타워를 향해 달렸다.평소에도 거친 운전 실력으로 유명
뒤늦게 그런 장면들이 펼쳐졌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기회도 없었다.“그럼, 저를 찾아온 이유는 뭔가요?”이유영은 서재욱을 바라보며 눈가에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오랜 시간 함께 일을 진행하며 두 사람은 많은 고난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제 피할 수 있는 불행이라면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그녀와 강이한의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불행했고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다.굳이 고통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다면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서재욱은 이유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어야죠.”“네?”이유영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게 만든다는 말인가?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걸까?이유영은 서재욱의 말에 도무지 감지 잡히지 않았다.“떠난 지 한참 됐으니 지금쯤이면 배도 많이 불러 있겠죠. 그런데도 아무런 소식도 없으니...”“...”“계산해 보면 두 달 후에 출산 예정일이에요. 그 전에 제 곁으로 돌아오게 해야죠.”출산은 목숨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그래서 어떻게 하려고요?”이제 와서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그가 원하는 대로 될지 의문이었다.임신한 여성은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예민해진다. 서재욱의 행동이 어쩌면 7개월 된 임산부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도는 있는 것이다.이유영은 걱정이 앞섰다. 혹시라도 극단적인 방법으로 김연우를 몰아세우다간 정말 돌이킬 수 있게 될 수도 있었다.하지만 서재욱은 단호하게 말했다.“앞으로 제가 파리에 있는 한동안은 제가 어딜 가든 저와 함께 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네?”설마 이런 방식일 줄이야.“안 돼요. 그러다가 연우 씨가 충격받을 수도 있어요.”이유영도 엄마가 된 사람으로서 임신기간에 임산부들이 감정적으로 얼마나 나약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서재욱은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엄마는 강한 법이에요.”그의 말은 이유영의 가슴에 그대로 날아와 꽂혔다.‘그래. 엄마는 강
“끼익.”칼과 포크가 접시에서 미끄러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나며 순간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듯했다.이유영은 멍한 눈으로 서재욱을 바라보며 되물었다.“뭐라고요? 못 들었어요.”사실은 들렸지만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다시 물어본 것이다.공항에서 김연우가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할 때, 이유영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이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지금 서재욱의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서재욱은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아마, 그 이전이었을 겁니다.”“그 이전요?”이유영은 더욱 혼란스러웠다.설마 김연우가 임신한 걸 알게 된 시점이, 월이가 서재욱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기 전이라는 건가?망했다.그렇다면 그녀가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뻔했다.이유영은 다급하게 말했다.“그럼 제가 가서 설명해야겠어요!”이건 반드시 설명해야 했다. 그녀는 서재욱과 김연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임신한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이제 와서 모두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만약 그때 제대로 알았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하자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나 서재욱은 단호하게 말했다.“설명할 수 없어요.”“왜요?”“회사를 그만두고 사라졌어요.”“...”‘사라졌다고? 잠적했다고?’이건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이유영은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앞에 놓인 물을 몇 모금 마셨지만 가슴속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다시 물었다.“그때 김연우 씨가 임신한 걸 몰랐어요?”서재욱은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대답했다.“연우가 회사를 그만둔 지 일주일 뒤에 알았어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찾을 수가 없었어요.”이제 모든 게 이해되었다.김연우가 임신했을 때, 월이가 서재욱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리고 그 일은 순식간에 커졌다.김연우는 청하시로 돌아간 후, 바로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결국
“맞아요. 껍데기만 남기는 건 매우 위험하죠.”특히 서재욱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다.그와 얽힌 일들은 이미 너무 많았고 김연우는 그의 가장 가까운 특별 보좌관인 만큼 만약 그들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재욱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었다.그러니 상대가 스스로 떠나겠다고 결정한 것이라면 서로에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몰랐다.차에 오르려던 순간, 서재욱이 그녀가 운전석으로 가려는 걸 보고 조용히 말했다.“제가 운전할게요.”분명 그녀의 눈을 걱정하고 있는 눈치였다.사실 공항에서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무리 회복이 잘 되었다고 해도 장시간 운전하는 건 여전히 무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이유영은 그의 걱정을 읽기라도 한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었어요.”그녀는 자연스럽게 차에 올라탔고 서재욱은 그녀가 능숙하게 운전하는 모습을 보며 한 번 더 물었다.“정말 다 보이는 거 맞아요?”“당연하죠.”이유영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그녀의 반응을 본 서재욱은 그제야 살짝 안심한 듯했다.운전하면서 이유영이 서재욱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저녁은 뭐 먹고 싶어요?”“사주시려고요?”서재욱은 농담조로 되물었다.“이 시간에 만났는데, 당연히 같이 식사해야죠.”이유영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서재욱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파리 타워 레스토랑 음식이 괜찮다고 들었어요. 거기로 가죠.”“좋아요.”파리 타워 레스토랑이라면 그녀도 알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파리의 야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했고 분위기가 낭만적이어서 많은 인플루언서들이 SNS에 인증사진을 남기는 곳이기도 했다....한편, 박연준은 계속해서 이유영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진영숙은 어제부터 지금까지 감정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심지어 그녀 자신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서재욱의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유영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그러면 기다리세요!”서재욱은 짧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네.”전화를 끊고 이유영은 책상 위의 도면들을 차곡차곡 정리한 뒤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 키를 집어 들고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손목시계를 보니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공항까지 차로 40분은 걸릴 텐데 서재욱을 마중 나갔다가는 저녁 식사를 집에서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녀는 운전석에 앉기 전, 임소미에게 전화를 걸었다.“저녁은 기다리지 마세요.”“일이 너무 바쁜 거 아니야? 이제 겨우 회복했는데 눈을 너무 피곤하게 하면 안 돼.”이유영이 저녁을 먹으러 집에 오지 않겠다고 하자 임소미는 당연히 그녀가 야근하는 줄로만 알았다.본인 회사에서 왜 저렇게까지 바쁘게 일하는 걸까?이유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야근하는 게 아니에요. 친구가 청하시에 왔어요. 저녁에 같이 식사할 것 같아요.”“그래. 일찍 돌아오고 술은 마시지 마.”임소미는 당부하듯 덧붙였다.솔직히 임소미는 여전히 이유영이 걱정되었다. 아마도 예전에 너무 많은 일을 겪으며 불안감이 커진 탓에 이제는 거의 트라우마처럼 그녀를 걱정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알겠어요.”전화를 끊고 나서야 이유영은 운전에 집중했다.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40분 후, 공항에 도착했다.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서재욱은 회색 코트에 감청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고 차분하면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며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이미 이유영을 발견했는지 캐리어를 끌며 자연스럽게 다가왔다.이유영은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며 캐리어를 받으려 하자 서재욱은 부드러운 몸짓으로 자연스럽게 피하며 말했다.“어떻게 여성분께 그런 일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그는 언제 어디서든 여성에게 우선권을 주는 사람이었고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녀가 먼저 짐을 드는 일은 절대 없었다.이유영은 미소를
임소미는 이제 정말 그런 일들에 더 이상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그렇다고 해서 배은망덕한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런 일들을 직접 겪고 나서야 비로소 누군가의 고통과 절망을 온전히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용서’라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임소미는 조용히 생각했다.만약 이유영이 그 일을 알게 된다면 그녀에게는 단순한 충격이 아니라 더 깊은 고통이 될 것이고 용서니 화해니 하는 문제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이유영은 바보가 아니었다.그녀는 이미 뭔가를 감지하고 있었다.서주에서 벌어진 일이 얼마나 거대한 사건이었는데 그걸 전혀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의혹을 품고 의심해도 그녀의 생각이 그쪽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점심 식사 후, 이유영은 곧장 스튜디오로 향했다.로열 글로벌 산하의 회사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사업이 아버지와 오빠의 것이라 해도 그녀는 일에 대해선 누구보다 엄격하고 철저했다.스튜디오에는 여진우가 직접 선별한 직원들이 몇 명 있었는데 모두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이제 그녀의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작업 환경, 그리고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윙윙.”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문자 메시지 알림에 이유영이 화면을 확인하자 친구 추가 요청이었다.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다른 사람이 친구 추가를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대로 승인했다.승낙하는 순간, 상대방이 몇 장의 영수증을 보내왔다.영수증을 보고서야 예전에 부딪혔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차 수리가 끝난 모양이었다.“계좌 번호 알려주세요.”이유영은 간단하게 몇 글자를 입력해 보냈고 곧바로 답장이 왔다.“더블루 리버스로 보내주세요.”더블루 리버스?이유영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요즘 시대에 계좌 이체가 훨씬 편하지 않은가? 굳이 배송으로 돈을 보내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계좌 이체로 하는 게
이유영도 가볍게 웃었다.이런 분위기의 모임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해 주었다.그녀는 문득 이곳이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이 아니라 엄마들의 산후 우울증을 해소해 주는 공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가요?”“그렇다니까요. 첫째 하나 키울 때는 정말 수월했는데, 둘째를 낳고 같이 놀아보니까... 결국 아이가 나를 가지고 놀더라고요.”“하하하! 맞아요.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기들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돼요. 그 아이들은 어른들 자포자기할 때까지 괴롭힌다고요.”자포자기할 때까지? 둘째를 키우는 게 정말 그렇게까지 힘든 일일까?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많은 둘째 엄마들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니는 것을 알아차렸다.첫째만 키울 때도 이미 충분히 바빴을 텐데 둘째까지 생기면 더욱 정신없어지겠지.외출할 때도 분명 급하게 나서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을 것이다.“말씀 듣고 보니 저는 둘째는 절대 안 낳을 것 같아요.”이유영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몇몇 엄마들은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친근하게 대화를 이어갔다.겉으로는 웃고 떠들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어떤 무게가 자리 잡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이유영도 마찬가지였다.사실 그녀는 둘째를 낳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둘째를 낳을 기회조차 없었다.솔직히 예전에는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월이는 유치원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고 수업이 끝난 후, 차 안에서 아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내일은 일찍 데려다주세요. 오늘은 10분이나 늦었어요.”이유영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요즘 아이들은 시간 개념이 이렇게 빨리 발달하는 걸까?그녀는 월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그녀의 목소리에는 흐뭇함과 애정이 묻어 있었다.처음에는 혹시 아이가 유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아이들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만났을 때만 적극적으로 참여하